朝鮮朝 四大士禍 : 갑자사화 [甲子士禍(연산군10년 : 1504년)]
주계군(朱溪君) 심원(深源) 아들 유녕(幼寧) 붙임
주계군 심원은 자는 백연(伯淵)이며, 호는 성광(醒狂) 또는 묵재(默齋) 또는 태평진일(太平眞逸)이라 한다. 요, 태종(太宗)의 현손이다. 갑자년에 화를 입었으나 중종때 흥록대부 정일품(興祿大夫正一品)으로 추봉(追封)되었다. 정문을 세워 표창하고 묘지기로 5호(戶)를 두었다.
○ 공은 성품이 방정하고 글 읽기를 좋아하였다. 문학으로 세상에 이름이 널리 알려졌으니 당시의 선비들이 다투어 그를 따랐다. 《미수기언》
○ 경서의 뜻에 밝고 행실이 발랐으며 의술에도 아울러 통하였다. 성품이 충직하고 효행이 있었으며, 무당과 불교는 좋아하지 아니하였다. 평상시에도 관띠[冠帶]를 하고 손에서는 책을 놓지 아니하였다. 전강(殿講)에서 사서(四書)와 오경(五經)을 통달하여 명선대부(明善大夫)로 승진되니 그때 나이 25세였다. 전후 다섯 번에 걸쳐 글을 올려 정치의 도를 논하였다.또 조정에서 고모부 임사홍(任士洪)이 부도(不道 임금께 충성하지 않는다는 뜻)하고 다른 마음을 가졌다고 논하다가 조부에게 잘못 보이어 장단(長湍)으로 귀양갔으며, 또 이천(伊川)으로 귀양갔다. 그때 글을 올려 병든 부모님을 뵙겠다고 청하였는데 말이 간절하고 정성스러워서 임금이 허락하였다.정미년에 종친과(宗親科) 시험에 경서와 사서를 강하여 1등으로 뽑히니 풍악과 술을 내려주고, 2품으로 승진되었으나 군(君)으로 책봉되지는 않았으니, 전에 조부의 뜻을 거스른 과실이 있었기 때문이다. 《사우명행록》
○ 공은 선견지명이 있었으므로 소를 올려 자기의 고모부인 임사홍(任士洪)의 간사함을 힘써 밝혀 내어 마침내 임사홍을 외방으로 귀양 보내게 하였다. 연산주 말년에 임사홍이 권세를 잡게 되자 공을 참소하여 죽였다. 중종(中宗)이 반정하자 공의 충성과 절의를 가상히 여겨 관작을 추증하고 정문을 세워 표창하였다.공의 생각은, “내가 종실의 지친이 되었으니 마땅히 나라와 더불어 편안함과 걱정을 같이 나눌 것이지, 어찌 한 집안의 고모부에게 사정을 둘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지금도 그의 소를 읽어 보면 늠름한 생기가 있다. 《패관잡기》
○ 공은 성리학에 해박할 뿐만 아니라, 시도 잘 지었다. ‘우후만망(雨後晩望)’ 이란 시에,
농사철 봄비에 살구꽃은 떨어졌는데 / 一犁春雨杏花殘
곳곳에 흩어진 사람들은 흰 물 사이에서 논을 가네 / 處處人耕白水間
나 홀로 아득한 강 위에 섰으니 / 獨立蒼茫江海上
서운한 기색으로 삼산을 바라 보노라 / 不勝怊悵望三山
하였다. 운계사(雲溪寺)란 시에,
나무 그늘은 길고 옅은데 돌은 울룩불룩 / 樹陰濃淡石盤陀
한 가닥 길은 빙빙 돌아 시내 언덕을 꿰뚫었네 / 一逕縈廻透澗阿
간간이 그윽한 향기가 코를 스치니 / 陳陳暗香通鼻觀
멀리서도 숲속에 남은 꽃이 있음을 알겠네 / 遙知林下有殘花
하였다. 《소문쇄록》
○ 공의 아들 유녕(幼寧)의 자는 영지(寧之)이며, 병진년에 문과에 올라 재주와 학식이 뛰어나 높은 벼슬에 임용되었다. 이조 정랑으로 있다가 화를 당하였는데 온 집안에 남은 사람이 없었으니, 아우 유반(幼槃)은 함께 죽었으며 작은 아우 유정(幼靖)과 유녕(幼寧)의 아들 돈복(敦復)은 어린 나이로 종이 되었다. 이행(李荇)의 시주(詩註)에는, “유녕은 4월에 화를 당하고, 주계군(朱溪君)은 이해 가을에 화를 당했다.” 하였다.
○ 중종 정축년 8월 주강(晝講)에 조광조가 아뢰기를, “주계부정(朱溪副正) 심원(深源)은 겨우 스물 남짓한 나이에 성종이 임사홍의 간사함에 빠져서 그를 살피지 못한 것을 보았습니다. 사홍이 고모부이기 때문에 한 집에 같이 거처하면서 그의 간사한 술책을 다 알았으므로 매우 통분하게 여기고, 성종이 편치 못하실 때 면대하기를 간절히 청하니 명을 전하기를,‘종사에 관계되는 일이 아니면 서둘러 면대할 필요가 없다.’ 한즉 또 아뢰기를, ‘이것은 종사에 매우 관계되는 일입니다.’ 하니, 즉시 면대를 허락하였습니다. 임사홍의 간사한 형상을 남김없이 진술하기를, ‘이 사람은 훗날에 나라와 집안을 망칠 사람이니 조정에 용납해 두어서는 안됩니다.’ 하고 눈물을 흘렸습니다. 나라 위하는 그의 마음은 한결같이 지극한 정성에서 나왔으므로 친척 관계를 헤아리지 않고 아뢴 것입니다.그런데도 그 후에 성종은 임사홍을 멀리 물리치지 못하고 혼인까지 하여 기미를 막지 못했으니, 만약 천명과 인심이 돌아올 때(중종 반정)가 없었다면 나라가 거의 멸망했을 것입니다. 20세에 식견이 높고 밝아 온 나라 사람이 임사홍의 간사함을 알지 못했는데도, 홀로 이를 알아서 일신의 사사로움을 돌아보지 않고 나라를 위해 분발하여 충성스러운 말을 임금 앞에서 당당히 아뢰었으니 이로써 그 사람의 절개와 의리를 단연코 알 수 있습니다.
보성군(寶城君)은 사위인 임사홍의 편이 되어 심원(深源)의 아버지(보성군의 아들)를 시켜 심원이 불효하다고 아뢰게 하였으나 성종은 그를 죄주지 아니하고, 그의 충효와 학술이 지극한 것을 사랑하여 장차 대사성에 임명하여 쓰려고 하였습니다. 지난번에 찬집청(撰集廳)에서 충신도(忠臣圖)에 그를 올리려고 그의 얼굴을 모형하고 글을 짓기까지 하였는데,낭관 김안로(金安老)가 이를 저지시켰으니 김안로는 곧 채수(蔡壽)의 사위입니다. 심원은 채수의 척질(戚姪)이었으나 채수가 경박한 사람이니 심원같이 기상이 활달한 사람이 어찌 채수와 사귀겠습니까. 채수는 이 때문에 감정을 가지고 말을 만들어, ‘심원이 그 어머니에게 조석으로 문안하지 않았으니 어찌 충신 효자가 되리오.’ 하였습니다.지금 입시한 여러 신하들도 누가 이 사람이 대인군자(大人君子)임을 알지 못하겠습니까.
그러함에도 한 낭관의 말 때문에, 충성스럽고 의로운 이름을 지워버려 세상에 전하지 못하게 하였으니 어찌 마음 아픈 일이 아니겠습니까.” 하였다. 영사(領事) 정광필(鄭光弼)도 아뢰기를, “심원의 일은 신처럼 자세히 아는 이가 없습니다. 성종실록(成宗實錄)을 편찬할 때에 신이 마침 심원의 사적을 맡아서 편찬했습니다.임사홍은 심원의 고모부인데도 심원은 분연히 자기의 몸을 돌보지 않고 임금에게 두 번이나 면대를 청하여 임사홍의 간사함을 힘써 진술하니, 성종께서 임사홍의 간사함을 확실히 알게 된 것은 심원을 통해서였습니다. 그의 말이 증험은 되었으나 이 때문에 자신도 살해당하였으니 이를 말하려니 목이 메입니다.” 하였다. 대사헌 최숙(崔淑)도 아뢰기를, “주계는 절의가 지극히 장합니다.국가에서 마땅히 강상(綱常)을 세우고 절의를 숭상해야 하니 그렇다면 이같이 식견이 밝고 투철하며 나라를 위하여 사정을 돌보지 않는 사람은 후세에 전해야 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은 “심원의 일은 무슨 까닭으로 기록되지 않았는지 알 수 없다. 표창하고 증직할 것을 대신들에게 의논하게 하라.” 하니 드디어 증직하고 정문을 세워 표창하였다. 《정암집(靜菴集)》
조지서(趙之瑞) 1454(단종 2)∼1504(연산군 10).
갑술년에 나다. 갑오년에 생원과에 장원하고, 진사과에 제2등으로 되다.
조지서는 자는 백부(伯符)이며, 호는 지족정(知足亭)이요, 본관은 임천(林川)이다. 가림백(嘉林伯) 천서(天瑞)의 후손이며, 성종 갑오년에 문과에 오르고 청백리에 들었다. 기해년에 중시(重試)에 장원하여 벼슬이 보덕에 이르고, 호당(湖堂)을 거쳐 응교가 되었다. 갑자년에 살해되어 시체가 강물에 던져지기까지 하였으나 중종 때에 도승지를 증직하였다.
○ 공의 집안은 대대로 진주(晋州)에 살았다. 진주에 삼장원봉(三壯元峯)이 있었는데, 공이 사마초시(司馬初試)와 생원과와 중시에 모두 장원을 하자, 사람들은 그것이 공에게서 증험되었다고 하였다.
○ 공은 연산주가 동궁에 있을 때부터 보덕이 된 일은 연산군의 고사에 상세히 있다. 경계하고 비판함이 간절하고 지극하며 그 결점을 깊이 찔러 말하니, 연산주가 매양 그를 꺼려하였다. 갑자년 여름에 정성근(鄭誠謹)과 함께 잡혀 오니, 공은 스스로 죽음을 면하기 어려울 줄 알았다. 그의 부인 정씨(鄭氏)는 충의백(忠義伯) 몽주(夢周)의 증손이었다. 대대로 산음(山陰)에 살았다. 공은 술잔을 들어 영결하면서, “내가 이번에 가면 반드시 돌아오지 못할 것이니, 조상의 신주를 어쩌면 좋소.” 하니, 정씨는 울면서, “마땅히 목숨을 바쳐 보전하겠습니다.” 하였다. 과연 공은 살해를 당하고 그 집은 적몰되니 정씨는 의탁할 데가 없었다. 이에 그 친정 아버지가 “시집이 이미 망했으니 친정으로 돌아와서 일의 종말을 보는 것이 어떠냐?” 하니,정씨는 의리를 내세워 거절하면서, “죽은 분이 나에게 조상의 신주를 부탁하였고 저는 목숨을 바쳐 보전하겠다고 승락했으니, 어찌 중간에 와서 변경하겠습니까. 또 죽은 분의 첩이 따로 집이 있으니 가서 의지할 것입니다.” 하고 신주를 안고 그 집에 가서 아침 저녁으로 곡하고 제사지냈다. 왕명을 전하는 중사(仲使)가 그 지방에 온다는 말을 들으면 곧 신주를 안고 집 뒤의 대숲 속에 엎드려 혹은 수일 동안이나 지내기도 하며 3년을 마치었다.중종이 반정하자 옛집을 도로 받아 제사를 받들었으니 온 고을 사람들이 그 여자를 칭찬하였다. 이우(李堣)가 진주 목사(晋州牧使)가 되어 고을 사람에게 그 사실을 물어 임금에게 아뢰었다. 《국조보감(國朝寶鑑)》에는, “감사 장순손(張順孫)이 알렸다.” 한다. 이에 중종 정묘년에 정문을 세워 표창하게 하였다. 《음애일기》
정성근(鄭誠謹) ?∼1504(연산군 10).
정성근은 자는 이신(而信)이며, 《잡록(雜錄)》에서는 겸부(兼夫)라 하였다. 본관은 진주(晋州)요, 판윤 척(陟)의 아들이다. 성종 갑오년에 문과에 올라 승지가 되었고 갑자년에 살해당하였다. 중종 때 이조 참판을 증직하고 정문을 세워 표창하였다.
○ 공은 타고난 성품이 효성이 지극하여 부모가 세상을 떠남에 매우 슬퍼하고 예절을 다하였으며, 성종이 세상을 떠났을 때에도 홀로 3년상을 행하니, 갑자년에 괴이한 행실이라 하여 그를 죽였다. 그의 아들 승문원 박사 주신(舟臣)이 슬퍼하여 음식을 먹지 않고 굶어 죽었다. 《소문쇄록》
○ 주신의 아우 매신(梅臣)과 매신의 아들 원린(元麟)ㆍ원기(元麒)와 원린의 아들 효성(孝成)은 모두 효행이 있어 정문을 세워 표창하였다.
○ 공은 타고난 성품이 효성이 지극하여 관직에 있을 때 비록 사무가 분주하더라도 매양 초하룻날과 보름날을 지키어 반드시 부모의 묘에 가서 친히 제수를 만들어 제사지내기를 여막에 있을 때처럼 하여 종신토록 게을리 하지 아니하였다.
○ 공은 천성이 굳세고 곧아서 흔들리거나 굴하지 아니하였다. 일찍이 대마도(對馬島)에 사신으로 갔었는데, 지나는 길에 매림사(梅林寺)라는 자못 깨끗한 절이 있었다. 여러 사람이 청하기를, “배 안에서 오랫동안 답답하게 지냈으니 외국의 절일지라도 한 번 가보지 않겠느냐?”고 하니, 공은 “너희들이 나 갈 것이지, 나는 필요가 없다.나는 이미 앉아서 다 상상하고 있다. 법당을 깨끗이 쓸고 부처를 놓고 향을 피우고 뜰에는 귤나무와 치자나무 따위의 과실 나무를 심은 것에 지나지 않을 것이니, 우리나라의 절과 무엇이 다르리오.” 하였다. 도주(島主)의 집에 이르니, 도주가 문밖으로 나와 조선의 왕명을 받아야 할 것인데 문 밖에 나오기를 꺼려하였다.이에 공은 밖에서 호상(胡床)에 걸터앉아 통역을 시켜 두 번 세 번 독촉하여 왕명을 의식대로 공경히 받게 하였다. 일을 마치고 나서는 연회를 베풀어 도주가 공경히 왕명을 받은 것을 위로하였다. 도주가 폐백으로 바친 물건은 그림부채ㆍ차는 칼ㆍ후추[胡椒]ㆍ판향(瓣香)에 지나지 않았으나, 공은 일행이 얻은 것을 모두 거두어 한 그릇에 넣어 봉하여 떠나올 때 접대하던 왜인에게 주어 도주에게 돌려보냈다.그 후에 도주는 특별히 사람을 보내어 그 물건을 조선에 가지고 와서 나누어 주기를 청하였다. 임금이 그 청을 승인하자, 공은 아뢰기를, “신이 그곳에 가서는 받지 않다가 여기서 받으면 앞뒤 마음이 다르게 되니 원치 않습니다.” 하였다. 임금도 강제로 하지 못하고 물건을 왜인에게 도로 주어서 보내었다. 《소문쇄록》
○ 공은 한평생 곧은 절개를 지켰다. 연산주 시대에 불우하게 지내면서 강개하여 속요를 지어 밤중에 슬피 불러서 나라 사랑하는 뜻을 표시하였다. 김안로가 일찍이 그 노래를 취하여 한시(漢詩)로 번역하였는데, 그 첫째는,
내가 님 생각하는 마음으로 보아 / 以我思子心
님은 내 마음 같지 않도다 / 子無我心似
님의 마음이 진실로 같을진대 / 子心苟可似
세상에 어찌 이럴 수 있으리오 / 天下寧有是
비록 생각은 아니하나 / 思之縱無能
미워하지 않으면 오히려 그만이다 / 無嫉猶可已
하였고, 그 둘째는,
복숭아와 오얏은 봄바람에 아첨하여 / 桃李媚恩光
아름다운 빛깔을 다투도다 / 競此色婉娩
늦은 국화도 마침내 꽃이야 피련만 / 老菊終亦花
외롭고 쓸쓸하니 누가 보아 주려나 / 寂歷誰省玩
서리 바람이 풀잎을 싹 쓸어 없애니 / 霜風掃卉空
외로운 향기만 가을 동산에 의탁하리 / 孤芳托秋苑
하였다. 《용천담적기》
심순문(沈順門) 1465(세조 11)∼1504(연산군 10).
심순문은 자는 경지(敬之)이며, 본관은 청송(靑松)이요, 영의정 회(澮)의 손자이다. 병오년에 진사과에 오르고 을묘년에 문과에 올라 벼슬이 직제학에 이르렀다. 갑자년에 화를 입었다.
○ 공은 강혼(姜渾)과 함께 사인(舍人)이 되었는데 그때 두 사람이 다 각기 사랑하는 기생이 있었다. 정붕(鄭鵬)이 경계하기를, “빨리 버리어 후회를 남기지 말라.” 하였는데, 강혼은 바로 버렸으나 공은 그 말을 따르지 아니하였다. 그 후에 두 기생이 궁중에 뽑혀 들어가서 연산의 사랑을 크게 받았으므로 공은 결국 비명에 죽고 말았다. 《병진정사록》
○ 공은 임금의 얼굴을 쳐다보았다는 이유로 죄를 입었다. 연산주의 위엄이 이토록 극도에 달하니 여러 신하들이 두려워하였다. 《정암연주(靜庵筵奏)》
○ 갑자년에 연산주가 죄도 없는 공을 죽이려고 여러 신하에게 물으니 삼정승 이하로 여러 신하들이 감히 다른 논의를 하지 못할 때 대사간 성세순(成世純)은 “직분이 간관에 있으면서 말없이 잠잠히 있으리오.” 하고, 헌납 김극성(金克成)은 “벼슬이 간관이란 명칭을 가진 자가 사람이 죄 없이 죽는 것을 보고 비록 제 몸을 아껴 말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나라의 은혜를 저버리게 됨은 어찌하랴.” 하니 정언 이세응(李世應)은 “그 말이 옳다.” 하였다.혹자는 말하기를, “만약 임금의 뜻을 따르지 않는다면 반드시 순문(順門)과 함께 죽을 것이니, 결국 이익이 없는 짓이라.” 하였다. 이에 성세순과 김극성은 평상시처럼 이야기하고 웃으면서, “죽고 사는 것은 큰 일이니, 각기 자기 마음대로 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오늘 먼저 죽을 사람은 반드시 우리 두 사람일 것이고,그 다음은 정언일 것이라.” 하고 마침내 공이 지은 죄가 없음을 아뢰었다. 연산주가 비록 듣지는 않았지만, 또한 그들에게까지 죄를 주지는 아니하였다. 《패관잡기》
○ 공의 조부 회(澮)는 연산의 어머니인 윤씨(尹氏)에게 사약을 내릴 때 영의정이었다는 이유로 후일에 연산주가 관을 쪼개고 송장의 목을 베었으며 공도 살해당하였다. 그 후 얼마 안 가서 그의 아우 순경(順徑) 청성군(靑城君) 은 훈련 첨정(訓鍊僉正)으로 있으면서 내승(內乘)을 겸직하게 되어 입직하고 있었다.폐주는 대궐문 처마밑에서 잔치를 베풀고 있다가 장차 탕춘대(蕩春臺)로 옮기고자 하여 마구간[內廐]의 말을 몰고 오라고 독촉하므로 순경이 급히 먼저 말을 이끌고 오니, 비단 자리가 땅에 편 채 있고 술과 고기도 치우지 않은 채 그대로 있었다. 그 위로 지나가면 반드시 큰 노여움을 살 것이므로 얼른 꿇어앉아서 그 자리의 이음매를 끊고 좌우로 잡아 제친 뒤에 말을 이끌고 나가니,폐주는 그가 창졸간에 잘 주선하는 것을 보고 매우 기뻐하여 특별히 절충 장군(折衝將軍)으로 승진시켰으니 생을 마칠 때까지 무사할 수 있었다.
정린인(鄭麟仁) ?∼1504(연산군 10).
정린인은 자는 덕수(德秀)이며, 본관은 광주(光州)이다. 무오년에 문과에 올라 벼슬이 부제학에 이르렀다.
보유: 1504년 갑자사화가 일어나면서 전일에 홍문관·사헌부에 재직하면서 왕의 실정을 비판한 것을 비롯하여 제주목사의 부임을 기피한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한 연산군의 혐오로 이에 연루되어 참수되었다.
○ 공은 얼굴이 흰 옥과 같았으며 의론이 뛰어났다. 사귈 만한 사람이 아니면 사귀지 않았으며, 근실하고 중후하며 명망이 있었다. 낭관으로 있다가 늦게야 과거에 올랐는데 벼슬이 통정대부에 이르렀고 그 후에 살해당하였다. 《사우언행록》
○ 공이 전한(典翰)으로 있으면서 단오날 문첩(門帖)으로 시를 써서 붙였는데, 그 시에, “궁인이 한가할 때 파리를 잡으니 옥 위에 어찌 파리똥 한 점의 티가 생기겠느냐.” 하였다. 연산주가 노하면서, “정린인이 내가 참소를 믿는다고 나무란 것이라.” 한즉 홍귀달(洪貴達)이 “신하가 임금에게 경계하는 말을 올리는 것이 예로부터 이러했던 것이니,감히 전하를 나무라는 것이 아닙니다.” 하니, 연산주는 거짓 놀라면서, “그렇다면 참으로 나를 사랑하는 자이다.” 하고 당상관으로 승진시키었다. 뒷날 문관과 무관의 활쏘기 시합에서 정린인이 첫째가 되니, 연산주는 “문과 무를 구비한 인재라.” 하면서 특별히 제주 목사(濟州牧使)로 임명하였다. 얼마 안 되어서 연산이 발이 희고 이마에 흰 점이 박힌 말을 구하라 하였는데, 이를 구하지 못하자 명을 거역했다고 베어죽였다. 《부계기문》
정붕(鄭鵬) 정해년에 나서 병오년에 진사과에 오르다.
정붕은 자는 운정(雲程)이며, 호는 신당(新堂)이요, 본관은 해주(海州)이다. 선산(善山)에 살았다. 성종 임자년에 문과에 올라 교리가 되었다. 갑자년에 곤장을 맞고 영덕(盈德)으로 귀양갔다. 중종이 반정하자 풀려 돌아왔으나 벼슬하지 아니하였다. 임신년에 죽으니 나이 46세였다.
○ 공은 풍채가 준수하고 견식과 도량이 원대하였다. 총각 때 숙부 석견(錫堅) 문과에 올라 이조 참판이 되었다. 이 그를 보고 중히 여겨, “이는 우리 집 옥수(玉樹)라.” 하였다. 〈행장〉
○ 공은 체격이 크고 키가 8척이나 되었다. 김굉필(金宏弼)에게 배워 성리학을 연구하고 마침내 정미한 지경까지 나아갔다. 일찍이 말하기를, “《논어(論語)》같은 글은 내가 오랑캐에게 가르쳐도 능히 대의(大義)를 알게 할 것이라.” 하였다. 연산주 초년에 벼슬하였는데, 어느 날 다른 사람에게 “내 꿈에 문묘의 위패가 절로 옮겨졌다.” 하였다.뒤에 연산주가 심히 음란하여 성균관을 노는 장소로 만들고 위패는 깊은 산중 절로 옮기었으며 또 태평관(太平館)으로 옮겼다가 장악원으로 옮기니, 위패를 순서 없이 놓아 두고 제사도 오랫동안 폐지되었다. 혹은 말하기를,“문묘가 훼철(毁撤)될 것을 안 것은 아마 공이 미리 짐작한 것이면서, 꿈을 핑계한 것이라.” 하였다. 심순문(沈順門)이 죽으니 사람들은 공이 그에게 기생을 버리지 아니하면 마침내 화를 당하리라 하였던 선견지명에 탄복하였다. 《병진정사록(丙辰丁巳錄)》
○ 공이 교리로 있을 때 연산주가 옥당에게 묻기를, “내가 정성근(鄭誠謹)을 죽이려고 하는데 어떠하냐?” 하였다. 여러 동료들이 모여서 공을 기다리는 차에 공이 와서, “죽여야 합니다.” 하니, 모든 사람은 깜짝 놀라면서, “운정(雲程)이 이런 말을 하느냐?”고 하였다. 이에 공은 “한 사람이 죽는 것과 우리들이 다 죽는 것 중에 어느 것이 나은가?” 하니, 정성근이 마침내 죽음을 당하였다. 《명신록》
어떤 사람이 송당(松堂) 박영(朴英)에게 묻기를, “정선생이 옥당에서 말한 의론은 일에 따라 잘 처리했다고 할 수 있으나, 선비의 출처(出處)로서 말한다면 부족한 점이 있는 것 같습니다.” 하니, 박영도 “그렇다.”고 하였다. 《명신록》
○ 공은 호방하고 기절(氣節)이 있었다. 갑자년에 교리로 있으면서 나라 일을 논의하다가 곤장을 맞고 귀양갔으나, 중종이 반정하자 불리어 돌아왔다.교리로 임명했으나 나가지 아니하므로 벗들이 나가기를 권하여 마지못해 나갔으나 얼마 안 가서 그만두고 돌아왔다. 다시 여러 번 임명됐으나 나가지 아니하므로 다른 사람이 그 연유를 물으니, “임금의 부르심이 간곡하기에 마지못하여 조정에 나갔더니 자못 마음을 놀라게 하는 일이 있으므로 고향에 물러가서 나의 마음을 안정시키는 것만 못했기 때문에 그만둔 것이다.” 하였다.“무엇이 마음을 놀라게 한 일이냐?” 하니, “임금에게 사은숙배 하려고 대궐에 나아가 승정원 문 앞에 이르니, 서각띠[犀角帶]를 띤 어떤 재상이 등을 돌리고 앞에 서 있었다. 나는 멈칫하고 두려워서 숨을 죽이면서 서 있었는데 조금 후에 돌아다 보는 그 얼굴을 보니 곧 홍경주(洪景舟)였다.
그 관직을 물어 보니 찬성이었다 나는 갑자기 마음이 섬뜩해서 몸을 빼쳐 물러나와 벼슬할 생각이 없어졌다.” 하였다. 좌의정 성희안(成希顔)이 임금께 아뢰어 특별히 교지를 내려 불렀는데, 그 교지에, “신야(莘野)의 밭 가는 첨지와 동해(東海)의 낚싯군도 도덕을 속에 간직하고 있으니 농사와 낚시질 속에 자취가 잠겼다.”는 말이 있었다. 이에 마지못하여 대궐에 나아갔으나 오래 머무를 뜻이 없어 청송(靑松) 고을이 한가하고 궁벽하므로 그 고을 부사로 임명되어 갔다. 성희안 이때 영의정 이 젊을 때부터 서로 친한 사이였으므로 편지로 백자(栢子 잣) 오렵해송(五鬣海松)을 세속에서 백자라 일컫는다. 와 벌꿀(백자와 꿀은 청송의 산물임)을 요구하니,그는 회답하기를, “잣은 높은 산꼭대기에 있고 꿀은 민간의 벌통에 있으니 부사(府使)된 사람이 어찌 이를 얻겠느냐.” 하니, 성희안이 부끄러워서 사과하였다. 뒤에 곧 그만두고 돌아가서 벼슬하지 않고 죽었다. 《명신록》에는 “임신년에 임소(任所)에서 죽었다.” 한다. 그 사는 동리 이름으로 말미암아 신당선생(新堂先生)이라고 일컬어졌다. 《사재척언》 《명신록》
○ 공이 일찍이 귀양가게 되니 유자광(柳子光)이 독약을 주머니 속에 넣어 보내면서, “공이 이번 걸음에 아마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니, 이것을 가지고 스스로 처신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하였다. 공은 그것을 받아 간수하였다가 풀려 돌아온 뒤에 유자광이 귀양을 가게 되자, 간수해 두었던 독약 주머니를 그에게 돌려주면서, “이 물건은 지난 번에 나에게 준 것인데, 귀양가는 데 필요할 것이므로 지금 돌려준다.” 하였다. 《병진정사록》
○ 공은 유자광과 표종(表從) 관계에 있는 까닭으로 문안하는 예절만은 폐하지 않았지마는, 종이 그 집에 갈 때에는 반드시 삼노끈으로 그 팔을 단단히 묶어서 표를 하여 보냈다가 돌아오면 풀어 주었으니, 그것은 계집종이 아픔을 느껴 그 집에 오래 머물러 있지 못하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일찍이 공이 대궐에 입직했을 때 온 집안에 양식이 떨어졌다.부인이 유자광 집에 꾸어 주기를 청하니, 유자광은 기꺼이 “친척간에는 서로 도와주는 것이 의리인데, 교리 정붕(鄭鵬) 가 너무 고집해서 그렇지, 내가 어찌 무심하리오,” 하고, 즉시 쌀푸대와 장 항아리를 노새에 실어서 보냈다. 공이 입직했다가 나와서 하얀 쌀밥을 보고 그 이유를 물어 알게 되자 밥상을 밀고 웃으며 일어나서,“내가 입직하던 아침에 비지를 사서 죽을 끓였는데도 조처하지 않은 것은 나의 실책이라.” 하고, 다른 친구에게 편지를 보내어 쌀을 꾸어다가 유자광의 쌀을 꼭 맞추어 돌려 보냈으니, 그가 곤궁한 상황에서도 지조를 변하지 않음이 이와 같았다. 《송와잡기》
○ 공은 일찍이 책상 위에 한 도안을 붙여놓고 보며 스스로 경계하니, 퇴계(退溪) 이황(李滉)이 “공의 학문이 정수한 지경에 도달한 것은 이 도안을 보면 알 것이라.” 하였다. 《명신록》
성중엄(成重淹) 1474(성종 5)∼1504(연산군 10).
성중엄은 자는 계문(季文)이며, 호는 청호(晴湖)요, 본관은 창녕(昌寧)이다. 성종 갑인년에 문과에 올라 호당(湖堂)을 거쳐 홍문관 박사가 되었다. 무오년에 사초의 일로 의주(義州)로 귀양갔다가 경신년에 하동(河東)으로 옮겨졌다. 갑자년 여름에 그전 죄로 곤장을 맞고 도로 하동으로 귀양갔다. 겨울에 귀양간 그 곳에서 화를 당하였다.
유헌(柳軒) 영의정 영경(永慶)의 증조
유헌은 자는 백여(伯輿)이며, 호는 낙봉(駱峯)이요,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성종 기유년에 문과에 올라 벼슬이 대사간에 이르렀으며 청백리에 뽑혔다.
○ 공은 성품이 엄하고 굳세며 도량과 기국이 있었다. 삼사(三司)에 두루 벼슬하면서 정직하여 굴하지 아니하였다. 연산주 초년에 만언소(萬言疏)를 올려 기휘(忌諱)에 크게 저촉되어 외직으로 나와 충청 수사(忠淸水使)가 되었으나 갑자년에 조정으로 들어와서 대사간이 되었다. 이때 신수영(愼守英)이 무함하여 사화를 만들자,공은 소를 올려 이를 논하고 이내 임사홍(任士洪)과 유자광(柳子光)의 간사하고 흉한 실상까지 아뢰었다. 또 이극균(李克均)이 죄도 없이 살해당한 원통함을 말하니, 연산주가 크게 노하여 즉시 제주(濟州)로 귀양보냈다. 사간 강숙돌(姜叔突)이 이를 간하다가 또한 귀양가게 되었다. 이로 인하여 이내 사간원을 폐지시켰다. 《죽간한화(竹澗閒話)》 ○ 사간원을 폐지한 일은 병인년에 있었다.
○ 공은 중종(中宗)이 반정한 뒤에 풀려 돌아오다가 길에서 왜인(倭人)을 만나 살해당하였다. 〈과보(科譜)〉
한훈(韓訓) 어릴 때의 이름은 학이(學而)이다. 병오년에 진사과에 올랐다.
한훈은 자는 사고(師古)이며, 본관은 청주(淸州)이다. 성종 갑인년에 문과에 올라 벼슬이 정언에 이르렀다.
○ 옆 사람에 아랑곳없이 큰 소리로 청담(淸談)을 하였다. 연산주의 조정에서 글하는 선비를 억울하게 많이 죽였는데 공은 도망해 숨었다가 자진하여 나타나 죽음을 면치 못하였으니, 식자(識者)들은 그를 나무랐다. 《사우언행록》
곽종번(郭宗藩)
곽종번은 자는 지한(之翰)이며, 본관은 현풍(玄風)이요, 사간 종원(宗元)의 아우이다. 성종 경술년에 문과에 올라 장령이 되었다. 갑자년에 화를 입었다.
변형량(卞亨良)
변형량은 자는 형지(亨之)이며, 본관은 초계(草溪)요, 점필재(佔畢齋)의 제자이다. 신유년에 문과에 올라 정자(正字)가 되었다. 갑자년에 화를 입었다.
성경온(成景溫)
성경온은 자는 사아(士雅)이며, 본관은 창녕(昌寧)이요, 영의정 준(俊)의 아들이다. 계해년에 문과에 올라 병조 정랑이 되었다. 갑자년에 곤장을 맞고 귀양갔다가 병인년에 약을 마시고 죽었다.
○ 공의 아버지 준(俊)이 화를 입었는데, 연산주는 성이 풀리지 아니하여 그 자손까지 남겨두지 않고자 하자, 공은 그 명을 듣고, “나의 생명을 어찌 남의 손에 욕되게 하리오.” 하고 즉시 독약을 마시고 죽었다.
신징(申澄)
신징은 자는 자성(子省)이며, 본관은 고령(高靈)이요, 장령 송주(松舟)의 아들이다. 성종 임자년에 문과에 올라 예문관에 들어갔다. 갑자년에 정언으로 있다가 매를 맞아 죽었다.
환관(宦官) 김처선(金處善)
김처선은 관직이 정2품이었다. 연산주가 어둡고 음란하였으므로 김처선이 매양 정성을 다하여 간하니, 연산주는 노여움을 속에 쌓아 둔 채 겉으로 나타내지 아니하였다. 일찍이 궁중에서 임금이 처용(處容) 놀이를 하며 음란함이 도를 지나쳤다. 김처선은 집안 사람에게, “오늘 나는 반드시 죽을 것이다.” 하고 들어가서 거리낌없이 말하기를,“늙은 놈이 네 분 임금을 섬겼고, 경서와 사서를 대강 통하지마는 고금에 전하처럼 행동하는 이는 없었습니다.” 하였다. 이에 연산주가 성을 참지 못하여 활을 당겨 쏘아서 갈빗대에 맞히자, 김처선은 “조정의 대신들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데 늙은 내시가 어찌 감히 죽음을 아끼겠습니까. 다만 전하께서 오래도록 보위에 계시지 못할 것이 한스러울 뿐입니다.” 하였다.연산주는 화살 하나를 더 쏘아 맞쳐서 공을 땅에 넘어뜨리고, 그 다리를 끊고서 일어나 다니라고 하였다. 이에 처선은 임금을 쳐다보면서, “전하께서는 다리가 부러져도 다닐 수 있습니까.” 하자, 또 그 혀를 자르고 몸소 그 배를 갈라 창자를 끄집어 내었는데, 죽을 때까지 말을 그치지 아니하였다. 마침내 그 시체를 범에게 주고 조정과 민간에 ‘처(處)’ 자를 말하지 못하게 하였다. 《소문쇄록》
○ 권발(權橃)이 갑자년 시험에 합격했는데, 책문(策問) 시험에 합격되어 이름을 떼어 본 뒤에 시관이 시권 안에 처(處)자가 있는 것을 깨닫고 낙방시키기를 청하였으니, 이는 앞서 연산주가 노하여 조정과 민간에 처선(處善)이란 두 글자를 쓰지 못하게 한 까닭이었다. 권발은 뒤에 정묘년에 과거에 합격되었다. 〈행장〉
김동(金同)
김동은 강녕부정(江寧副正) 기(祺)의 종이다. 연산주의 사랑하는 기생이 기의 집을 빼앗고서는, “기가 종을 시켜 저를 욕한다.”고 호소하였다. 이에 연산주는 노하여 기와 김동을 가두고 단근질로 신문하니, 김동이 “죄는 저에게 있고 주인은 이 일을 모릅니다.” 하였으므로 기는 죽음을 면하고 김동은 드디어 사형을 당하였다. 중종 3년에 정문을 세워 표창하였다.
이자화(李自華)
이자화는 은산 훈도(殷山訓導)였다. 타고난 효성이 지극하여 성종(成宗)을 위하여 3년상을 입었다. 연산주는 처음에는 상으로 관직을 주고 정문까지 세웠으나 갑자년에 와서는 괴이한 행실이라 하여 잡아다 국문하였다.이때 자화는 공술하기를, “임금을 위하여 3년상을 입은 것은 명예를 구한 것이 아니고 망녕된 소견에 임금과 아버지는 같다고 생각한 까닭입니다.” 《국조보감(國朝寶鑑)》에는, “이자화가 형벌에 다달아 다른 사람에게 말하였다.” 하였다. 하고 조용히 죽으니 사람들이 슬퍼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삼강행실(三綱行實)》
박인(朴氤) 붙임
박인은 본관은 진주(晋州)이다. 이때 상주 노릇하는 기간을 법으로 짧게 줄이고 매우 엄격하게 시행했으나, 박인은 그 아버지가 죽었을 때 상복을 입고 여막에 거처하며 3년상을 마치었다. 중종(中宗)이 반정하자 정문을 세워 표창하였다. 《해동잡록》
장순손(張順孫) 중종(中宗)의 상신(相臣)이다.
장순손은 젊었을 때 얼굴이 돼지 대가리처럼 생겼으므로 친구들이 그를 ‘돼지 대가리’라고 조롱하였다. 연산주가 성주(星州) 기생을 사랑하였는데 어느 날 종묘의 제사를 지낸 뒤에 제사에 쓰고 난 고기를 궁중에 드렸더니 기생이 보고 웃었다. 연산주가 까닭을 물으니 기생이 “성주사람 장순손의 얼굴이 돼지 대가리와 같으므로 사람들은 장을 가리켜 ‘돼지 대가리’라고 합니다.그래서 웃었습니다.” 하자 연산주는 크게 노하면서, “장순손은 반드시 너의 애부(愛夫)로구나. 빨리 돼지 대가리를 베어 바치라.” 하였다. 공은 이때 벼슬에서 물러나와 있었는데 잡아 오라는 명을 받고 길을 떠났다. 오다가 함창(咸昌) 공갈못[公儉池] 아래 갈림길에 이르니 고양이가 길을 넘어갔다. 이를 보자 공은 도사(都事)에게 청하기를, “내 평생에 과거보러 갈 적에도 고양이가 길을 넘는 것을 보면 반드시 합격했습니다. 오늘 우연히 이 고양이를 갈림길에서 보았고, 이 길로 가면 매우 빠르니 저 길을 따라 가기를 원합니다.” 하였더니 도사가 이를 허락하였다. 현(縣)에 이르러 선전관이 ‘돼지 대가리’를 빨리 베어 오라는 명령을 받들고 상주(尙州)까지 내려왔다는 말을 들었다.은밀히 중종반정(中宗反正)할 기미를 알았으므로 천천히 가서 조령(鳥嶺)에 이르렀더니 선전관도 되돌아와 조령에 이르렀는데, 벌써 반정이 성공하였으므로 공은 마침내 죽음을 면하게 되었다. 〈축수편〉
이행(李荇)
보유:1478(성종 9)∼1534(중종 29).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덕수(德水). 자는 택지(擇之), 호는 용재(容齋)·창택어수(滄澤漁水)·청학도인(靑鶴道人). 지돈녕부사 명신(明晨)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지온양군사 추(抽)이고, 아버지는 홍주부사 의무(宜茂)이며, 어머니는 창녕 성씨(昌寧成氏)로 교리(敎理) 희(熺)의 딸이다.
1495년(연산군 1) 증광 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권지승문원부정자로 관직 생활을 시작해 예문관 검열·봉교, 성균관전적을 역임하고, ≪성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1500년 하성절질정관(賀聖節質正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온 뒤 홍문관수찬를 거쳐 홍문관교리까지 올랐다.
1504년 갑자사화 때 사간원헌납을 거쳐 홍문관응교로 있으면서 연산군의 생모인 폐비 윤씨의 복위를 반대하다가 충주에 유배되고, 이어 함안으로 옮겨졌다가 1506년 초거제도에 위리안치되었다.
이 해 9월에 중종반정으로 풀려나와 다시 홍문관교리로 등용되고, 이어 부응교로 승진되어 사가독서(賜暇讀書 : 문흥을 위해 재능있는 젊은 관료들에게 독서에만 전념하도록 휴가를 주던 제도)하였다.
1513년(중종 8) 다시 성균관사예가 되었다가 이듬 해 사성으로 승진하였다. 사섬시정(司贍寺正)을 거쳐 1515년 사간원사간이 되고, 이어 대사간으로 승진하였다.
이 때 신진 사류인 담양부사 박상(朴祥)과 순창군수 김정(金淨) 등이 폐비 신씨(愼氏)의 복위를 상소하자 이에 강력히 반대하였다. 이어 첨지중추부사·홍문관부제학·성균관대사성·좌승지·도승지를 거쳐 1517년에 대사헌이 되었다.
그러나 왕의 신임을 얻고 있는 조광조(趙光祖) 등 신진 사류로부터 배척을 받아 첨지중추부사로 좌천되자 사직하고 충청도 면천에 내려갔다. 이듬해 병조참의·호조참의로 임명되었으나 모두 부임하지 않았다.
1519년 기묘사화로 조광조 일파가 실각하자 홍문관부제학이 되고, 이듬해 공조참판에 임명됨과 동시에 대사헌과 예문관대제학을 겸하였다. 그리고 동지의금부사와 세자좌부빈객(世子左副賓客)도 겸임하였다.
1521년 공조판서가 된 이후 우참찬·좌참찬·우찬성으로 승진하고, 1524년 이조판서가 되었다. 다시 좌찬성을 거쳐 1527년 우의정에 올라 홍문관대제학 등을 겸임하였다. 1530년≪동국여지승람≫의 신증(新增)을 책임맡아 끝내고 좌의정이 되었다.
이듬해 권신 김안로(金安老)의 전횡을 논박하다가 오히려 그 일파의 반격으로 판중추부사로 좌천되고, 이어 1532년평안도 함종에 유배되어 그곳에서 죽었다.
1537년김안로 일파가 축출되면서 복관되었다. 문장이 뛰어났으며, 글씨와 그림에도 능하였다. 중종 묘정에 배향되었다. 저서로는 ≪용재집≫이 있다. 시호는 문정(文定)이었으나 뒤에 문헌(文獻)으로 바뀌었다.
이행이 갑자년에 거제(巨濟)로 귀양가서 살아 있는 친구와 죽은 친구를 생각하여 절구(絶句) 10수(首)를 지었는데 각각 주(註)를 달았다. 그 시에 이르기를,
비방과 칭찬이 많은 사람의 입에 시끄러워도 / 毁譽紛紛萬口勝
이 사람의 마음 자리는 주저하지 않았다 / 此公心地不模稜
초 나라 강 어느 곳에 굴원의 자취를 찾으랴 / 楚江何處尋遣佩
원컨대 통을 얽어맨 오채승을 부치겠네 / 願寄纏筒五綵繩
순부(淳夫) 정희량(鄭希良)은 임술년 5월 5일에 스스로 강물에 빠져 죽었다.
이 사람은 백운향(白雲鄕)에 있어야만 되는데 / 斯人合在白雲鄕
한 번 속세에 귀양오니 벽해(碧海)가 상전(桑田) 되었네 / 一謫塵區海變桑
아 광릉(廣陵)이 이제 끊어졌으니 / 痛器廣陵今已絶
이승에서는 다시 아양곡(峨洋曲)을 들을 수 없으리 / 此生無復聽峨洋
중열(仲說) 박은(朴誾)은 갑자년 6월 15일에 화를 당했다.
칼날을 무릅쓰고 혼자 나아가니 / 橫衢白刃獨能前
하늘이 요기로 햇빛을 가리우네 / 天遣妖氛翳日邊
꿈속에 만난 그대는 평소와 같은데 / 半夜夢魂如宿昔
두어 줄기 맑은 눈물은 요를 적시었네 / 數行淸淚濕寒氈
통지(通之) 권달수(權達手)는 갑자년 겨울에 나와 함께 두 번이나 옥에 갇히어 심한 고문을 당했다. 어느 날 나의 손을 이끌어 하늘을 가리키면서, “햇빛 아래 흰 기운이 공중에 뻗친 것을 자네도 보았는가?” 하므로,나는 “못 보았다.” 하였더니 통지는 하늘을 쳐다보고 한참 있다가, “아 내가 죽을 것이다. 꼭 나를 두고 이른 것이다.” 하였다. 12월 1일에 화를 입었다. 근일 밤 나의 꿈에 통지가 평상시와 같으므로 함께 말한 것이다.
맑기는 가을 하늘에 흰 이슬이 맺힌 듯 / 澹若秋空白露溥
굳세기는 지주가 달아나는 물결을 진정하는 듯 / 剛如砥柱鎭奔瀾
백년에 전할 가야의 명행기는 / 百年名行伽倻記
의춘(宜春)의 글씨를 빌려 비단폭에 쓰려했도다 / 要倩宜春酒素紈
인로(仁老) 김천령(金千齡)은 계해년 9월에 병들어 죽었는데 갑자년에 다시 화를 당했다. 중열(仲說) 박은(朴誾)이 일찍이 인로(仁老)의 이름난 기행문을 초해 두었다가 사화(士華) 의춘(宜春)의 필적을 얻어 뒷 세상에 전하고자 하였다.
그 아버지 높은 절개는 가을 기운과 같고 / 乃翁高節倚秋明
경술과 문장은 한 나라 유경생(劉更生)이로다 / 經術文章漢更生
문벌이 마침내 한 번에 다 죽었는데 / 門地終須一網盡
요망한 여우는 어찌 다시 하늘 맑음을 기하는고 / 孽狐寧復忌天睛
영지(寧之) 이유녕(李幼寧)은 갑자년 4월에 화를 당했다. 그 아버지 주계군(朱溪君)은 일찍이 바른 말로 간사한 신하에게 거슬리어 이해 가을에 또한 화를 당하니 온 집안에 남은 사람이 없었다.
서남에서 세월이 거듭하니 / 憔悴西南歲月重
온갖 풍상이 붉은 수염을 희게 만들었네 / 風霜變盡紫髥茸
죽산 길가에서 창황히 만났더니 / 竹山路上蒼董面
맹렬한 불길은 마침내 백 길 소나무를 꺾었네 / 烈火終摧百丈松
계문(季文) 성중엄(成重淹)은 갑자년 겨울에 화를 당했다. 나는 갑자년 6월에 잡혀서 서울로 올라오다가 계문을 죽산(竹山) 길에서 만났는데 얼굴이 파리하여 서로 보아도 알 수 없었다. 이내 말을 꾸짖어 소리를 냄으로 그제야 계문인 줄 알았다. 서로 눈물을 뿌리고 흐느끼면서 작별하였다.
문성공의 후손으로 좋은 가문이니 / 文成之後是淸門
시례의 풍류가 근원이 있도다 / 詩禮風流自有源
사나 죽으나 몸은 보전하기는 너 혼자뿐이니 / 生死保身知汝獨
넉자 높이의 외로운 무덤이 한남촌에 있도다 / 孤墳四尺漢南村
선지(善之) 안처선(安處善)은 문성공(文成公) 향(珦)의 후손이다. 갑자년 4월에 병들어 죽었다.
남쪽 변방에서 서쪽 기러기를 만나기 어려운데 / 南塞難逢西鴈
밤새 바람 비는 부질없이 재촉하네 / 來夜來風雨謾相催
흰 머리 그대만이 강호에 있는데 / 白頭湖海惟君在
어디에도 다시 회포를 풀어볼 길이 없구나 / 懷抱無因得再開
사화(士華) 남곤(南袞)은 양덕(陽德)에 귀양갔다.
상산(商山)은 멀고 멀어 천 산이 막히었고 / 商山迢遞隔千峯
제수(濟水)는 넓고 넓어 만 길이 넘는구나 / 濟水汪洋過萬尋
공갈못가 한 잔 술로 / 公建池邊一盃酒
어느 때에 문자를 다시 토론할고 / 幾時文字更㪺深
숙달(叔達) 권민수(權敏手)는 상주(尙州)에 귀양갔었는데, 지난 해 가을에 내가 숙달을 공갈못[公儉池] 가에서 작별하면서 ‘公建池邊一盃酒, 西風爲助生離愁’ 란 글귀를 지었다.
가을인데 비만 오고 개인 날은 없으니 / 秋來陰雨不逢晴
동쪽 울타리 국화 줄기가 걱정스럽다 / 愁殺東籬菊花莖
죽다 남은 몸뚱이에도 마음만은 있어 / 九死一身心尙在
나의 여생에 태평 세상 볼까 하네 / 擬將餘齒看河淸
하였다.
윤석보(尹碩輔)
윤석보는 자는 자임(子任)이며, 본관은 칠원(漆原)이다. 임오년에 진사과에 올랐다. 성종 임진년에 문과에 올라 벼슬이 직제학에 이르렀다. 갑자년에 강음(江陰)으로 귀양가서 을축년 12월에 죽었다. 병인년에 도승지를 증직하고 염근리(廉謹吏)에 기록되었다.
○ 공이 사간원에 있을 때 동료를 거느리고 바른 말을 올렸는데 말이 매우 위태롭고 간절하였다. 갑자년에 이르러 이 일을 소급하여 죄를 주어 강음으로 귀양 보냈다. 그 당시의 동료들 중에 죽은 사람이 많으므로 사람들이 혹 말하기를, “일이 벌써 오래되었으니 죽은 동료들에게 미룬다면 죄를 면할 수 있다.” 하였다.이에 공은 “나도 이 세상을 버릴 날이 멀지 않았는데 어찌 차마 저승에 간 사람에게 죄를 돌리리오. 설령 이로 인하여 죄를 면한다 하더라도 무슨 낯으로 돌아가 죽은 사람을 보겠는가.” 하였다.
○ 일찍이 공이 풍기 군수(豐基郡守)가 되었을 때 사내종 하나와 계집종 하나만을 데리고 갔다. 부인과 자식은 풍덕(豐德) 본집에 남겨 두었는데, 배고픔과 추위로 살아갈 수가 없었으므로 그 부인 박씨(朴氏)는 그 집안에 전해 내려오는 비단옷을 팔아서 1묘(畝)의 토지를 사서 두었다. 공은 이 말을 듣고 편지로 빨리 그 토지를 돌려주게 하고, “옛 사람은 한 자 한 치의 땅을 넓히는 일로 그 임금을 저버리는 행동을 하지 않았다고 하는 이가 있는데, 지금 내가 대부 군수(郡守). 가 되어 녹을 먹으면서 토지를 사서 둘 수 있겠는가. 백성과 서로 물건을 팔고 사는 일로 나의 죄를 보태지 말라.” 하였다. 박씨는 마지못하여 그 밭을 돌려주었다. 후에 공이 성주 목사(星州牧使)가 되었을 때 부인 박씨가 임신 8개월의 몸인데도 말을 타고 가게 하고 가마를 타지 못하게 하였다. 박씨의 아우 중간(仲幹)이 상주 목사(尙州牧使)로 있었는데, 관아의 살림살이가 매우 가난함을 보고 소금을 보내 왔다. 공은 즉시 이것을 돌려보내면서 그것으로 자기 몸을 더럽히는 것처럼 여겼다.
○ 공은 염근리(廉謹吏)로 뽑히었다. 임진란(壬辰亂) 후에 청백리의 명부가 없어졌으므로 공의 현손(玄孫) 상(詳)이 소를 올려 다시 포양(褒揚)해 주기를 청하였다. 이에 선조(宣祖)는 대신과 의논하여 특별히 명하여 다시 명부에 쓰게 하고 그 자손을 채용하게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