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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복지

고구려 안장왕과 백제처녀 한주의 러브스토리

작성자참으로|작성시간16.07.30|조회수361 목록 댓글 0

 

고구려 안장왕과 백제처녀 한주의 러브스토리

 

 

고구려 문자왕은 백제에 빼앗긴 한수유역의 영토를 되찾기 위해 태자 흥안(興安, 후에 안장왕)을 그곳으로 보내 정보수집활동을 시킨다. 태자는 지금의 고양시 고봉산 일대를 돌아다니다 한주라는 여인을 만나고 두 사람은 첫눈에 서로의 수려한 외모에 반해 깊은 사랑에 빠지게 된다. 태자는 꼭 돌아온다는 약속을 남긴 채 고구려로 돌아가고, 홀로 남은 한주는 밤마다 구슬피 우는 자규를 동무삼아 북쪽하늘 을 바라본다. 그런데 한주에게 시련이 다가왔다. 생일을 맞은 그곳 백제 태수가 미모가 뛰어난 한주를 불러 수청을 강요하지만 한주는 정혼한 사람이 있다며 한사코 이를 거부했다. 정혼자가 누구냐고 다그쳐도 입을 다문 체 밝히지 않자 태수는 한주에게 참수형을 내린다.


고구려에 돌아온 태자는 한주를 다시 만날 날을 기다리며 안타까운 세월만 보내고 있었다. 마침내 고구려 22대 왕이 된 안장왕은 국경에 군사를 배치하고 백제의 정세를 살피고 있었다. 한주의 소문을 들은 안장왕은 심복 을밀(乙密)장군을 불러 기습공격 지시 했다. 을밀장군은 그의 부하들을 광대패로 변장시켜 기습공격을 했다. 갑작스런 기습을 받아 우왕좌왕하는 백제군사들 사이에서 을밀장군은 한주를 구출하고 그 곳을 무사히 빠져 나왔다. 이후 안장왕은 이곳을 점령하고 한주를 고구려로 데려가 왕비로 삼았다.


이 이야기는 비록 구전되고 있지만 김부식의 <삼국사기>와 신채호의 <조선상고사>에 기록돼 있고 고봉산에 유적도 남아 있는 엄연한 사실이다. 다만 이름 표기가 조금 달라 삼국사기에는 '한씨 성(姓)을 가진 백제 여인'이라 했고, 조선상고사에는 '백제 한주(珠)미녀'라고 각각 표현되어 있다. 알다시피 삼국사기는 삼국시대 역사를 가장 정확하게 기록한 역사서이고, 조선상고사는 근대에 쓰인 우리나라 정통 역사서이다. 안장왕과 한주의 이야기가 꾸며진 이야기가 아닌 역사적 근거를 바탕으로 한 것임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삼국사기에는 '한씨미녀가 달을성현의 높은 곳에 올라 봉화를 올려 안장왕을 맞았다. 그 후 그 이름을 고봉(高烽)으로 했으며 백제땅 개백현(지금의 행주산성)에서 왕을 맞이했다 하여 왕봉(王逢)현으로 바꾸었다'고 기록돼 있다. 또 조선상고사에는 백제 성왕(聖王)7년(안장왕11년 529년) 고구려가 북쪽 변방 혈성을 빼앗았다는 기록이 나오는데, 혈성이 곧 강화와 인근지역을 가리키는 것이다. 지금의 고봉산에서는 삼국시대 기와편이 무수히 나오며 정상에 봉화대의 흔적도 남아 있다.


이 이야기는 조선 중기에 나온 춘향전과 스토리 전개가 너무나 흡사하여 춘향전의 원전이라는 주장도 나온다. 신채호는 심지어 정몽주의 단심가(丹心歌: 이몸이 죽고 죽어 일백번 고쳐 죽어...)도 한주미녀가 지은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한주미녀가 백제 태수 수청을 거절하고 옥에 갇혀 있을 때 정절을 지키기 위해 안장왕을 향해 읊조렸다는 것이다.


안장왕은 문자왕의 장자로 태어나 498년(문자왕7)에 태자로 책봉되었다가 왕위를 계승하였는데, 대략 10년 정도의 짧은 재위기간이었던 것으로 보아 피살되었다는 설도 있다. 그리고 한주를 구해 내는 데 결정적인 공을 세운 을밀장군은 안장왕의 누이동생과 혼인을 했는데, 그는 조의선인이기는 하였지만, 신분이 미천해 감히 왕의 누이동생과 결혼할 처지는 아니었다고 한다. 그런데 한주미녀에 대한 안장왕의 애달픈 마음을 읽고, 자신의 목숨을 걸면서, 자신이 성공하면 왕의 누이동생과 결혼하게 해 달라고 간청했다한다.


안장왕과 백제 한주미인의 얘기처럼 백제와 고구려는 한강 일대를 놓고 뺏고 빼앗긴 일이 많았다. 523년 무령왕은 지금의 서울 지역인 한성에 직접 가서 고구려를 막기 위한 쌍현성을 쌓도록 지시한다. 그 해 5월 무령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성왕은 8월 고구려 군의 공격에 맞서 싸워 크게 물리친다. 하지만 529년 고구려 안장왕이 친히 군사를 이끌고 쳐들어오자 다시 여러 성을 빼앗겼다. 게다가 좌평 연모가 이끄는 3만의 군대로 고구려군에 맞섰지만, 오곡원 전투에서 패하고 말았다. 북한 학계에서는 이 때 고구려가 현재의 대전 지역까지 밀고 내려왔다고 보기도 한다.


이렇게 다시 고구려에게 밀린 백제 성왕은 수도를 사비로 옮긴 뒤 반격을 시작한다. 하지만 여러 차례의 전투에서 고구려에게 패하고, 그 이후로 한강 유역을 완전히 되찾지는 못했다. 성왕은 단독으로 고구려를 상대할 생각을 버리고 왜ㆍ신라와 적극적인 동맹을 맺어 고구려를 이길 방법을 찾는다. 547년 성왕은 달솔 진모선문 등을 왜국에 보내 군사 원조를 요청했다. 하지만 왜국에서는 군대를 제때에 보내지 못했고, 겨우 화살 1500 개 정도만을 보내주었을 뿐이다. 반면 548년 독산성 전투에서는 신라의 원군과 함께 고구려군을 물리칠 수 있었다. 그러자 성왕은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실질적인 도움이 되는 신라와의 동맹에 큰 기대를 건다.


550년 성왕은 고구려의 도살성을 차지했지만, 금현성을 고구려에게 빼앗긴다. 이 때 신라에서 원병이 왔다. 신라군은 고구려를 물리쳐주고, 도살성과 금현성 모두를 신라 병사가 지키도록 했다. 전쟁의 결과로 따지면 억울한 면이 있었지만, 성왕은 백제의 옛 땅인 한강 유역을 되찾기 위해 신라와 계속 동맹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마침내 다음 해 신라의 진흥왕과 함께 잃어버린 백제의 옛 땅을 되찾기 위한 대규모의 전쟁을 일으키게 된다. 하지만 신라의 진흥왕은 중국으로의 뱃길을 여는 절호의 기회를 맞아 백제와의 동맹을 깨고 한수유역의 땅을 차지해버린다. 배신을 당한 성왕은 신라와의 전투에서 분한 마음에 전사하고 만다. 이 사건이 오늘날 영호남 불신의 출발이 되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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