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역사전쟁

한국전쟁(Korean War)의 발발과 전개 그리고 영향과 인식

작성자마이피|작성시간13.10.10|조회수814 목록 댓글 0

 

한국전쟁(Korean War)의 발발과 전개 그리고 영향과 인식

 

 

 

 

1 개요

같은 민족이었던 남북한이 60년 넘도록 둘로 나뉘어져 수많은 이산가족을 만들고 서로 미워하게 된 상황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한국사 최대의 비극 중 하나.

한반도와 그 부속 도서에서 1950년 6월 25일북한대한민국을 침공하여 발발했고, 1953년 7월 27일부로 종전된 전쟁, 정확히 말하면 휴전협정되었기 때문에 휴전[1]. 때문에 만약 남한과 북한 사이에 다시 전쟁이 터진다면 그건 2차 한국 전쟁이 아니라 한국 전쟁이 재발했다고 봐야 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2013년 현재 남북은 휴전 60년째를 맞이했다.

말 그대로 한반도 전체를 휩쓰는 한국사에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대전쟁으로, 한반도 내에서 벌어진 최초의 현대전이라고 할 만하다. 물론 이에 수반한 충격 또한 남북 모두 한동안 이 전쟁의 영향력에서 벗어나지 못할 정도로 컸으며 앞에서 말했듯 대대로 남북한의 이념과 정치에 큰 영향을 미쳐 왔고 냉전이 끝난 21세기인 지금까지도 영향을 끼치고 있다. 물론 안 좋은 쪽으로 영향을 미치고 있는데, 1980년대까지 독재이 집권할 때 내세웠던 명분이 반공(을 빙자한 민주화 운동, 야당세력 탄압)이었고, 북한에서 김일성이 전후 독재 체제를 구축하는 과정에서 정적을 제거하는 명분 역시 6.25 전쟁이었다는걸 생각해보자.

세계사적으로도 제2차 세계대전 종결과 함께 전개된 냉전 구도가 '열전(熱戰)'으로 폭발하게 된 거의 최초의 사례로 꼽히며, 2차 세계대전 당시 아군이었던 미국소련, 중국이 직간접적으로 전쟁을 벌인 사례이기도 하다. 또한 6.25 전쟁은 지금까지도 해외에서 '한국'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단어가 될 정도로 현대 한국에 대한 인식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한편으로 일본이 부흥하고 요시, 포스트 시즌!, 대만이 살아나는 어부지리에도 영향을 주었다.

6.25 전쟁은 전쟁이라는 국난에서 지도층, 각 국민이 보여준 행동을 현대적인 관점에서 다시 보여준 사례이자, 전쟁의 참혹함을 다시 한 번 일깨워준 역사적인 가치가 있다.하지만 그 가치를 살리자고 또 전쟁을 벌이자는 위험한 주장을 하지는 말자. 죽는 것은 혼자만으로 족하다. 자신이 누리는 자유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잊지 말자. 전쟁을 좋아하는 민족은 반드시 망한다. 그러나 전쟁을 잊은 나라 또한 망한다.

 

 

 

2 전쟁 발발과 전개

2.1 주동자는 누구?

들어가기에 앞서, 남침은 북한이 남한을 침략했다는 뜻이고, 북침은 남한이 북한을 침략했다는 뜻이다. 혹시 뜻을 반대로 알고 있는 사람은 이 문서의 '기타' 소목차를 참고하라.

2013년 현재까지 밝혀진 자료에 의하면 정권 확립과 당시의 우세를 활용해 조기에 남한을 제압하려던 김일성과 빨치산을 비롯한 남로당 인맥을 통해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다지려던 박헌영의 주도로 전쟁이 일어났다는 것이 정설이다. 북한이나 남한의 극소수 세력은 북침이나 소련의 배후 조종설을 주장하기도 했으나, 소련 기밀 문서의 공개 등으로 대부분 설득력을 잃었다.

북한의 주장을 제외하면 정말로 남한이 북한을 선공했다는 북침설을 주장하는 이들은 문자 그대로 극소수에 불과하며, "저들은 북침설을 주장한다!"라고 지목되는 학자들의 대부분은 반공 이데올로기로 인해 가려진 부분을 지적하는 것을 의도했던 것이 대부분이다. 대표적으로 지목되는 브루스 커밍스[2]의 <한국전쟁의 기원>에서도 6월 25일날 먼저 총공세를 펼친 것은 북한이 맞다고 서술하고 있다. 다만 그 이전에 38선 부근에서 서로 2 ~ 10km씩 전진과 후퇴를 반복하는 국지전이 있었다는 사실을 국내 학계에선 최초로 도마 위에 올렸고, 한국전쟁은 그것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주장했을 뿐이다.

그러나 국지전은 매우 소규모의 무력시위에 불과했다. 일단 규모 자체도 어떤 경우엔 분대급에 불과했고 보통 중대급, 커봐야 대대급에 불과했다. 그리고 이런 국지전이 6.25 전쟁과 직접적인 연관은 없다는 것이 2013년 현재 학계의 결론. 굳이 6.25 전쟁과 국지전이 관련이 있다면 당시 교전 규모를 봤을 때, 38선 부근의 국지전은 신생 조선인민군경험치 획득 전투 경험 습득과 교리 시험을 위해 북한이 지속적으로 남한지역에 내습을 감안한 것이라고 평가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니까 다시 말해 전면전 발발 이전부터 북한은 부단히 전쟁 준비를 하고 있었다는 것.[3] 실제로 1949년 쯤 가면 개성시에서 조선인민군 부대가 박격포로 하도 빵야빵야를 해대는 지경에 주민들이 고만해 미친놈들아!라고 항의하는 수준까지 갔다고 한다. 그러니까 커밍스가 틀렸다. 그러나 커밍스의 연구는 해당 분야에 대한 극초기의 연구이므로 이는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21세기에 들어와서 전쟁 직전의 남한은 물자와 장비가 부족하고 군사훈련도 제대로 안 되어 있어 전면전의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다는 결론이 학계의 정설이 되었다. 특히 1990년대 공산권이 붕괴되면서 소련측 외교문서가 공개되자, 신전통주의적 해석이 지지를 받게 되었다.

그리고 소련의 배후 조종설 또한 오해의 소지가 있다. 이 주장의 핵심은 북한 정부는 아무런 기능을 하지 못했고, 소련 정부가 표면상 내세우는 꼭두각시에 불과했다는 것에 있다. 그러나 6.25 전쟁사와 관련된 연구 초기부터 한국전쟁 발발 이전에 북한에 대한 소련의 막대한 물자 공여와 장교 파견이 있었음이 확인되었다. 냉전 종결 이후 소련의 기밀 문서가 공개됨으로써 이것은 기정사실이 되었으나 이것이 과연 소련이 주도한 것인지는 의문점이 남는다. 김일성이 이전부터 마오쩌둥, 스탈린과 접촉한 징후가 보이기 때문. 즉 김일성이 공산권 거대 국가들에게 지원을 요청하고 공산권 국가들이 이를 들어준 형색이다. 스탈린은 김일성이 전쟁을 일으키고 싶어 안달하는데도 그걸 48번씩이나 거절했는데 김일성이 그치지 않고 애치슨 라인까지 들먹이며 뗑깡을 부리자 요구를 하자 끝끝내 승인했다고 한다.

결론은 정말로 북한은 가만히 있는데 남한이 먼저 공격했다거나, 북한은 그럴 의지가 없는데 소련이 시켜서 한 짓[4]이라고 주장하는 학설이 전혀 없지는 않다. 거의 퇴출 단계라서 그렇지…

한편, 전쟁 당시 신의주에서 교사를 지냈던 <성문종합영어>의 저자 송성문은 한국전쟁이 북한에 의해 1947년부터 주도면밀하게 계획된 남침이라고 증언하고 있다. #

 


그 당시 같은 사회주의 국가인 유고슬라비아 신문에서 만든 만평. 사실 남북을 뒤집어서 북침이 맞다.

같은 사회주의 국가에서도 남한의 북침설을 잘 받아들이지 않았고, 결국 60년대 중국에서도 북한의 남침으로 교과서 수정이 이루어졌다.

북한은 북침설을 주장하며 "미국의 조종을 받는 한국군미군이 북침했다"는 주장으로 일관하지만, 실제 역사는 중국 및 소련의 지원을 받는 북한이 남침을 한 것이며 실제로 전쟁 발발 직전에 남한의 미국의 군사 고문단은 철수 중이었지만 소련은 북한에 영관급 장교를 군사고문단으로 파견했다. 중국과 러시아에서 기밀 해제된 문서들은 아예 정확한 날짜와 과정을 열거하며 남침 준비를 위한 준비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단, 북한이 쳐들어올 걸 뻔히 알면서도 미국에서 수수방관했다는 음모론은 존재한다. 일명 '남침유도설'로, 2차대전 중 돈을 신나게 빨았던 미국의 군수산업이 종전이 되자 만든 물건 어디 써먹을 데 없나 걱정이었는데 김일성이가 뻘짓하는 게 빤히 보이니 낚싯줄을 드리웠다는 것이 그 골자이다.

당시 이승만 정권의 군비 군수 확장 요청에도 미군은 거절로 일관했고 이에 대해서는 북진을 공공연히 주장한 이승만의 탓도 있다. 당시 38선은 단순히 남한과 북한의 경계선이 아니라 동아시아에서의 미소국경선 정도의 의미를 갖고 있었다. 즉, 남한군이 38선을 넘어 북진통일을 시도하면 소련과의 전면전이 불가피할 것이라 판단한 미국 정부는 이승만의 호전적인 태도에 응해줄 수 없었다. 그리고 애초에 한국은 미국의 주요 관심사도 아니었고 미국 정부와 이승만은 사이가 안 좋았다. 또한 애치슨 라인에서도 한반도를 제외함으로써 확인사살까지 했다. 이승만 정권은 양치기 소년처럼 되도 않는 소리를 떠들고 다니다가 진짜 일이 닥치자 도움을 받지 못했다고 할 수 있겠다.

이걸 밀고 들어가서 "북한은 미국의 음모에 휘말린 또 하나의 희생자일 뿐이예염."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이 주장이 강간범이 자신의 범죄 동기에 대해서 '여자가 야하게 입고 다녀서 유혹하는 줄 알았다'라고 진술하는 것과 다를 게 뭘까? 잘 이해가 안 간다면 비슷하게는 제2차 세계대전도 나치 독일의 책임이 아니라 영국프랑스의 음모에 히틀러가 휘말렸을 뿐이라는 주장을 떠올리면 쉽다. 말이야 뭔들 못하랴.

더구나 만약에 남침유도설이 맞다면, 남침을 유도해놓고 정작 미군은 왜 박살이 나는데?(아래 찰스 스미스 부대 / 24사단 참고) 게다가 군수산업을 돌릴 큰 시장을 미국이 원했다면 차라리 중국의 국공내전을 장기화하는 것이 더 낫지 않았을까? 장제스가 그만큼 꼴 보기 싫었나?

더불어 소련의 비밀문서가 공개되면서 남침유도설은 완전히 박살나고 말았다. 최근에도 남침유도설을 정설로 주장하는 서적이 나오곤 하지만 순전히 책을 팔아먹기 위한 수작일 뿐이다. 일례로 남침유도설을 정론으로 내세운『한국전쟁의 수수께끼』의 경우 한국전쟁 50주년을 노리고 출판했다가 반응이 시들하자 10년 후에 한국전쟁 60주년 기념으로『6.25 미스터리』라는 제목으로 내용을 살짝만 바꾸어 신간으로 속여 출판했다. 저자 자체가 이글루스에 스스로 만점 먹이면서 완벽한 책이라고 홍보하다가 왕창 까지고도 계속 남침유도설이 만고의 진리임을 전파하는 걸 보면 정말 책 팔고 싶은가 보다.님들 책좀 사주세염 돈을 못벌어염

한편 도올 김용옥은 남침도 북침도 아니고 최고 원흉은 일본의 제국주의 역사, 그 다음으로는 미국의 제국주의 역사가 조선 땅에서 만들어 낸 죄악이라고 주장했다.NL돋네 물론 소련과 중국의 비밀문서가 공개되었기 때문에 자신도 인정했고 자신의 강의에서도 소련의 비밀문서에 대한 언급을 보였다.

2.2 전쟁 전야

전쟁 이전에, 남북한 모두 남북 분단이 가시화된 시점부터 상대 지역을 '미수복 영토'로 보고 북한에서는 '북한을 먼저 사회주의화시켜 민주 기지로 삼은 뒤 남한을 점령해 사회주의화시킨다'는 민주 기지론을, 남한에서는 이승만 정권이 주장했던 북진 통일론을 주장하고 있었다. 그러나 남한의 북진 통일론은 진정성이 있었는지, 그저 반공 이데올로기 조성을 위한 것이 아닌지에 대해 많은 의심을 받고 있다. 게다가 이를 근거로 무기와 군사적 보조를 요구하는 이승만의 요구는 미국에게 그냥 까여서 당시 남한은 사올 무기도 제대로 못 사오는 형편이었다. 당시 남한에는 탱크가 0대, 전투기도 0대였으며 연습기만 10여 대가 있었고, 반면 북한은 둘 다 수백 대를 보유한 상태. 당연히 김일성으로서는 구미가 당기는 상황이 아닐 수 없었다.

북한 내부에서는 서서히 김일성에게 정치적인 힘이 기울어가고 있었다. 연안파 세력은 국공내전에 실제로 참전 중인데다가 소수 조선의용군이나마 입성하다가 소련에게 무장 해제를 당하는 등 북한 내의 입지를 넓히기에 힘이 달렸고, 소련파 또한 행정가로서는 뛰어났지만 소련에서 태어난 한인 2, 3세로 구성되어 북한 내에 기반이 존재하지 않았다. 이 결과 두 세력은 김일성파에게 협력하는 식으로 정권에 참여해야 했다. 남조선노동당 세력은 활동의 연혁이 오래되어 지지 폭은 넓었으나 말 그대로 남한에서 쫓겨온 식이라 실질적으로 정치적 입지는 좁았다. 김일성은 서서히 이들을 압박해 나갔고, 그 결과 박헌영은 "우리가 남침을 행한다면 남한 해방을 원하는 빨치산 10만 명이 일어날 것이다."라고 호언장담했지만 1994년 공개된 북한-소련 외교문서에 의하면 김일성은 이를 부정적으로 생각하며 남로당 봉기설은 접었다[5]#

김일성의 계획안은 대략 이러했다.

  • 한반도를 적화통일시킬 경우
    • 한국이 소련에 편입될 경우 김일성은 소비에트 연방의 '까레야 공화국' 서기장이 된다.
    • 독립을 유지한 상태로 공산국가가 된다면 김일성은 적화통일된 한국의 수령이 된다.
  • 이 전쟁에서 북한이 패배했는데 땅을 잃지 않을 경우
    • 이 패배를 핑계로 패전의 책임을 박헌영을 비롯한 정적(政敵)들에게 죄다 뒤집어 씌워서 싹 숙청하고 비록 반쪽짜리일지언정 북한의 수령이 된다.
    • 결과적으로는 이렇게 되었다. 실제로 1953년에 휴전이 되자 김일성은 이걸 핑계로 1955년에 자신의 정적인 박헌영 등을 포함해 연안파, 소련파를 숙청했다. 다만 최용건은 숙청하지 않았는데 바지사장으로 활용하기 위해서였다.
  • 이 전쟁에서 북한이 패배하고 땅마저 잃었을 경우(멸공통일)
    • 김일성은 소련으로 망명해서 그곳의 군 수뇌부 중의 한 명이 된다. 언젠가는 다시 공산국가로 만들게 될 한국의 임시통치자의 직함도 겸함으로서…. 다만 이 정도라도 김일성의 안위를 매우 위태롭게 할 수는 있었겠지만, 위의 군사력 관련 내용을 보라. 도저히 북한이 질 것 같지가 않았을 것이다.
즉 김일성에게 불리한 카드는 거의 없는 상황이었고, 김일성은 전쟁 계획을 더욱 가속화할 수 있었다. 결국 김일성이 나름대로 생각한 6.25 전쟁은 전혀 밑질 것이 없는 장사인 셈이었다. 이기면 적화통일되는 거고 패배함으로 인해서 잃는 것이라는게 자신의 정적들이다. 최악의 경우까지 상정해도 보신할 수 있는 보험이 있었다. 김일성의 이러한 정치적인 목적 역시 6.25 전쟁의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그래서 스탈린한테 50번씩이나 떼를 쓴 거였구나

이에 따라 김일성은 소련과 중국에 계속해서 지원을 요청했으나, 1949년 이전까지 중국과 소련은 북한을 돕기에 곤란한 요소가 많았다. 중국은 비록 마무리 단계이기는 했으나 국공내전을 진행하고 있었고, 소련도 제2차 세계대전 참전으로 국토가 황폐화된 이래 미국에 대한 군사적 열세 의식을 지니고 있어 참전을 꺼렸다. 그러나 중화인민공화국국공내전에서 우세를 굳히면서 1949년 10월 1일 정식으로 건국을 선언했고, 1950년 5월에는 전쟁이 종결되었다. 이 때 중국 내 한국인들을 편성해 총괄하던 조선의용군 2 ~ 3만 명이 북한 내로 유입되어 조선인민군을 증강했다. 소련도 생각보다 미국에게 밀리지 않고 냉전이 굳혀지는 상황을 확인했고, 1949년 6월 핵실험에 성공하면서 군사적인 자신감을 회복했으며, 결정적으로 애치슨 라인을 보면서 마음을 돌리게 된 것으로 보인다.

반면 1949년 후반부터 1950년 초반까지 미국은 동아시아 지역의 정세에 대해 다소 혼란스럽게 생각했던 듯하나, 앞서 언급했듯 대체적인 골자는 '남한 침공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였던 듯하다. 1949년 12월 작성된 미국의 NSC-48/2에서는 한국을 방위 지역에 넣지 않았으며, 1950년 1월 '애치슨 라인'에서도 남한과 대만을 방위 지역에서 제외했다.

미국의 정보기관들이 북한의 공격 준비 움직임을 포착하지 못한 것은 아니다. 38선 지역의 교량 건설 작업이나 북한군의 배치 상황 등이 수많은 루트를 통해 맥아더 사령부로 흘러들어가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맥아더는 별다른 행동을 취하지 않았는데, 이것은 알면서도 무시한 것이라기보다는 그냥 무시한 것에 가깝다. 애초에 한국은 형식만 맥아더의 관리지 미국정부가 직접 관할하는 곳이라서 맥아더는 일본의 통치에만 골몰했으며, 트루먼을 비롯한 미국 고위관료들의 인식 속에 북한은 소련의 꼭두각시 이미지로 남아 있었기에 미국은 소련이 미국과 전면전을 벌일 생각이 아니라면 북한을 이용해서 남한을 밀고 들어오진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전략을 구상하고 있었다. 즉 "남침할 것 같은데 일단 지켜본다"가 아니라 "남침 가능성 거의 없다" 정도의 태도였던 것이다. 문제는 아래에도 서술되는 바와 같이 영 께름칙해하는 스탈린을 김일성과 박헌영이 설득해서 원조 협정을 받아낸 데 있다. 미국의 인식과는 달리 북한 정부는 훨씬 더 독립적인 행동을 취하면서 독자적으로 남침을 계획하고 있었다.

다만 1950년 4월, NSC-68에서는 이러한 눈치를 집약해 좀 더 적극적인 방위안을 계획했으나, 여전히 한국에는 특별한 군사적 조치가 취해지지 않았다. 오히려 1948년 12월, 소련이 북한에 주둔하던 소련군을 철수시키면서 간접적인 압박을 받아 군사 고문단만을 남겨둔 채 1949년 6월 남한에 주둔하던 미군이 철수한 바 있었고, 이를 원하지 않았던 이승만과의 갈등도 커졌다. 앞서 말했듯, 이승만과의 갈등은 도리어 남한에 군사적 지원이 더욱 축소되는 결과를 낳았다.

한편 앞서 언급했듯, 6.25 전쟁이 발발하기 전에도 남북간의 충돌은 소규모로나마 제법 빈번하게 벌어지고 있었다. 1948년 남북한에 독립 정부가 구성된 이후부터 남북한 양측은 각자 내부에서 좌우익 간의 대립으로 혼란스러운 상태였고 38선에서는 크고 작은 국지전이 계속되고 있었다.[6]

주로 개성, 옹진, 의정부 등에서 이러한 국지전이 벌어졌는데, 대개 38선에 걸친 산과 봉우리를 두고 분란이 벌어졌다. 개성과 옹진은 도시를 남한이 영유하고 그 뒷산을 북한이 영유한 상태였으며 북한은 여기에 진지 구축을 시작했다. 비교적 뒤늦게 이러한 상황을 파악한 국군은 이를 완화하기 위해 38선에서 걸친 고지의 점유에 보다 적극적이게 되었고 이 과정에서 일진일퇴의 공방전이 벌어졌다. 단, 이러한 국지전은 1949년 6월부터 8월 경까지 활발해지는데, 여기에 대해서 주한미군의 철수로 인해 불안해진 이승만이 국제적 관심을 환기하기 위해 보다 공방전에 적극적이었다는 설이 있다.

더욱 전쟁에 가까워지는 6월 중순, 하순은 남한의 농번기였고 당시에는 농업이 국가의 주력산업이었던지라,[7] 남한군에서는 농번기에 장병들에게 모내기 휴가를 대대적으로 보내어 6.25 전쟁 개전 당시 남한 육군 전 병력의 3분의 1 가량이 휴가 상태였다고 한다.

2.3 전쟁의 전개

2.3.1 북한의 기습 남침

1950년 6월 25일 일요일 새벽 4시, 북한은 전면적인 남한 침공을 개시하였다. 물론 북한에서는 열심히 '남한이 먼저 쳤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히틀러도 폴란드가 먼저 쳤댔지, 아마? 이런 식의 전투가 있었는지에 대해서도 회의적이며, 있었다 한들 이전에 빈발했던 국지전 수준의 전투를 전쟁의 명분으로 삼았다는 설이 절대 다수이다. 쉽게 말해서 책상 위에 금 긋고 '헐 님 손가락 넘어왔으니까 팔 자름ㅋ'하는 상황. 이러한 와중에 군 수뇌부는 미 군사고문단과 함께 이렇게 급박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육군본부 장교클럽에 모여서 놀고 먹는데 여념이 없었다.

게다가 본격적 개전 이전부터 연속되던 국지전의 책임이 누구에게 있느냐, 6월 24일의 국지전이 있었느냐, 있었다면 어느 쪽 책임이냐 하는 문제를 떠나 3일 만에 서울을 점령한 것은 북한이 전쟁 준비를 했다는 움직일 수 없는 증거이다. 현실적으로, 미리 준비하지 않고 대부대가 전투를 수행하며 수십 킬로미터를 전진한다는 건 불가능하니까. 요컨대 설령 한국전쟁의 개전이 남한의 선공에 의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북한이 남한에 대한 공격의사가 명백했음이 결과론적으로 증명된다는 것이다.

1950년 6월 25일. 장마철과 겹쳐서 군대의 진군에는 적절치 않은 시기인 초여름에 개전한 이유가 가관인데, 김일성 자신이 8월 15일 광복절에 맞춰 통일 선언을 하기 위해서였단다. 38선에서 최종목표 부산까지 500km라 가정하고 소련군 고문관이 계산한 하루 10km씩 진격할 것을 가정하면 50일이 소요되는데 8월 15일에서 50일을 역산하면 6월 25일이니까 이 날을 개전일로 택일하여 북한군이 선제 공격에 나서면서 전쟁이 발발하게 된다.

그래도 국군 전방지휘관들이 모두 바보는 아니었기에 북쪽의 동향이 수상하다는 첩보에 따라 24일 저녁에 전방 사단에서 몇 개 팀의 정찰조들이 38선을 넘어 정찰을 나갔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리고, 그 중의 한 조가 대규모의 전차들이 남진하는 것을 목격했으나 재수가 없으려면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진다고 보고하려고 하니 당시로는 최첨단 통신장비였던 미제 SCR-300 무전기가 맛탱이가 가버렸단다. 정찰대원들은 결국 적 후방에 남겨졌고 일부는 실종, 일부는 인민군을 털어서 변복을 하여 겨우 퇴출할 수 있었다. 뭐... 무전기가 고장나지 않아서 전차가 떼로 몰려온다는 보고가 들어갔다고 해도... 다만 이 이야기는 공식 전사에서는 찾아볼 수 없으니, 접하는 이가 알아서 걸러 들을 것.

한국에서는 산이 많고 그나마 조금 있는 평지들은 죄다 질펀한 논바닥이라서 전차가 기동하기 힘들기 때문에, 2차 세계대전의 유럽 전선에서와 같은 대규모 전차전이 절대로 일어날 수 없다고 판단한 미군은 대전차무기를 달라는 국군에 2.36인치 M9 바주카와 57mm 대전차포만 있으면 모든 황군 전차들을 다 까부술 수 있다며 이것들을 주고 갔으나, 그건 미군의 희망사항이었고 현실은 시궁창이었다. 미군이 준 바주카와 대전차포는 구일본군의 97식 전차같은 깡통은 충분히 상대가 가능하지만, 북한이 보유한 소련제 T-34/85 전차들을 막는 데 택도 없었다! 국군 대전차반들은 미군들의 호언장담을 철저히 믿고 있었기에 굴러오는 전차들을 사정거리 내로 끌어들여 정확히 사격을 했으나 멘붕에 빠져버렸다. 포병대가 나서서 M3 105mm 견인곡사포로 적 전차에 직접조준사격까지 해 보았으나 효과가 없었다.

전차가 없는 전선에서도 열세는 명백했다. 황해도 옹진반도를 지키던 육군본부 직할 17연대[8]의 경우, 적에게 전차가 없었으나 3배의 병력과 포병, 장갑차만으로도 압도적이었다. 17연대는 전력을 다해도 인민군의 진격을 저지할 수 없자 해군이 급히 파견한 LST를 타고 해상을 이용해 하루만에 남은 병력이 무사히 철수했다. 원래 옹진반도는 애초에 38선 이남 지역과 육지로 연결되어 있지 않았으므로 퇴로는 바다 밖에 없었던 것을 감안한다면 당시 전체 상황에 비추어 보면 비교적 성공적인 탈출 케이스였다. 여기에 낙동강으로 물러서기까지 말 그대로 용전분투하면서 공을 세웠기 때문에 이에 대한 보상으로 17연대는 해병대가 아닌 육군 부대임에도 인천상륙작전에 참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같은 사례는 전체 전선의 절망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당장 숫적으로도, 장비로도 열세인 상황에서 농번기까지 닥치자 대규모의 외박, 외출로 인해 38선에 실제 배치된 병력은 편제보다도 더 적었고, 여기에 채병덕의 뻘짓까지 가해지자 제6보병사단춘천에서 북한군 2군단을 3일간 저지한 것을 제외하고는 전체 전선에서 신나게 밀리고 있던 상황이었다. 게다가 그나마 남은 병력이 서울 주변의 산악지대에서 방어전을 펼치고 있었지만, 육군본부가 혼란에 빠진데다가 정치계에서 무리한 반격 요구를 내미는 바람에 의정부 방면에서 무리한 반격이 수행되었으며, 결과적으로 무리한 반격의 결과 방어선이 붕괴하고 남쪽에서 올라오는 병력은 오는대로 축차투입해서 허무하게 사라지는 것도 모자라서 북한군 전차 2대가 서울 시내에 진입하자 서둘러서 한강대교한강철교를 폭파하는 바람에 그나마 남았던 병력이 총붕괴되었다.

덕분에 전쟁 3일만에 남한의 수도인 서울이 함락되면서 국군의 병력은 개전 전 10만여 명에서 이후 3만 명으로 줄어들었고, 얼마 안 되는 장비와 물자도 한강교가 끊기면서 한강 이북에 놓고 온 탓에 대부분 잃어버려 전쟁이 조기에 북한군의 승리로 종결될 가능성이 보였으나, 미국이 개전 이틀 만에 UN군 파병을 결정하면서 전쟁은 국제전 양상을 띄게 된다.

당시 소련은 미국의 참전을 반대했으나, 소련이 우연히 불참해서 파병안 가결을 한 것이라는 게 근 40 ~ 50년간 정설이었다. 그러나 소련 붕괴 이후 기밀 해제된 스탈린 정권 시절 문건에 따르면, 스탈린은 한국전쟁에 북한을 도와 참가하는 것을 탐탁치 않게 여겨 당시 체코슬로바키아의 국가원수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썼다.

스탈린은 특히 "미국이 한국전 개입을 지속하고 중국 또한 한반도에 끌려들게 된다면 어떤 결과가 올지 생각해보자"며 "유럽에서 사회주의를 강화할 시간을 벌고 우리에게 국제 세력균형에서 이득을 안겨줄 것"이라고 강조했다.[9]
#[10]

그런데 그 우연이라는 것도 시각의 차이일 뿐 우연이 아니다. 당시에는 UN이 대만에 있는 국민당중화민국 정부(화이트 차이나)만을 공식적인 중국 정부로 인정했기 때문에 중공(레드 차이나)이 UN에 참가할 수 없었다. 이 때문에 소련은 중공을 인정해줄 때까지 UN에 불참하겠다고 선언하고 유엔의 모든 회의에 대해서 계속 보이콧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소련이 만약에 안전보장이사회에 참석하여 거부권을 행사하며 UN군 결성을 반대하였더라도 미국은 어떻게든 UN의 이름을 따낼 작정이었다. 그래서 혹시라도 소련이 변덕을 부려 다시 출석할까봐 안보리가 아닌 총회의 이름으로 참전을 결정하게 한 것이다. 총회는 안보리상임이사국의 독점권이 의미가 없는데다가 당시 유엔 회원국의 대다수가 미국 편인 서방 진영의 국가들이었으므로 소련의 반대 따위는 표로 눌러 버릴 수가 있었다. 그리고 밑의 내용을 더 보면 알겠지만 소련이 안보리에서 거부권을 행사하면 소련이 북한을 지원했다는 사실이 공식적으로 인정되어 소련 영토까지 전쟁터가 되기 때문에 이를 기피해서 반대를 안 한 거다. 어찌되었건 결론은 소련에게 있어서 유럽 + 중국 >> 넘사벽 >> 북한이었던 것 뿐이다.

이승만은 '정부는 서울을 지키고 있으니 안심하고 생업에 종사하라'는 요지의 방송을 하고서 한강대교한강철교를 폭파하고 남쪽으로 도주했다. 서울시민들은 이승만이 서울에 남아 방송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승만과 정부는 이미 도주한 뒤였다. 이 방송을 믿고 피난을 떠나지 않은 서울시민들은, 다음날 한강대교 A, B, C선이 모두 폭파되 피난을 갈수도 없게 되었고, 서울시가 북한에 점령되는 모습을 보아야했다. 한강 인도교 폭파로 민간인 600~700명이 사망했다. 한강대교 폭파에 대한 비난과 원성이 높아지자 무책임하게도, 거부할수 없는 상관의 명령을 받아 폭파를 한 공병감 최창식 대령에게 책임을 전가하고 그를 적전비행죄로 총살시켰다. 후일 최대령의 아내가 남편의 무죄를 강력히 탄원하여 사면복권되었지만 죽은 자는 말이 없다.

어쨌든 전쟁 3일만에 서울은 함락되다. 그러나 북한군이 처음에 계획한, 대한민국 국군을 포위섬멸한다는 전략은 수포로 돌아갔다. 대한민국 국군 제6보병사단춘천-홍천 전투에서 대승을 거둠으로서, 북한군의 제 2군단의 진격을 3일이나 저지하고 막대한 피해를 입혔기 때문이다. 이 전투의 패배를 책임지고 북한군 제 2군단장은 해임당했으며, 북한군의 한강 도하가 늦어진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 6사단은 그 후 동락리 전투에서도 북한군 연대 하나를 전멸시키고 소련제 무기를 대량으로 노획하여 북한의 배후에 소련이 있었음을 짐작하게 해주었다.

2.3.2 낙동강 전선

제대로 된 전쟁 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상황인데다가 국가 차원의 전쟁 계획은 없었고 육군 차원의 방어계획이 있긴 했는데 그나마도 1950년 3월에서야 나왔다. 각 사단들이 이를 수령해서 작전계획을 짠 건 그해 5월이 되어서였다. 설상가상으로 그나마 있던 병력과 물자를 너무 이른 한강교 폭파로 제대로 날려먹은 남한은 지연전을 펴면서 낙동강 전선까지 후퇴하였고, 남한 정부는 대전-대구를 거쳐 부산에 자리잡았다. 더글러스 맥아더 UN군사령관은 부산에 미8군사령부를, 일본에 UN군 사령부를 설치하였다.

 

 

7월 5일경 북한군과 UN군의 첫 교전이 일어났으며, 미군 찰스 스미스 특수임무대대를 시작으로 모부대인 미 24보병사단이 후속 투입되었으나 오산-죽미령 전투를 시작으로 전투마다 패배를 거듭하여 결국 대전 전투에서 사단장인 윌리엄 딘 장군이 실종됐다가 포로로 잡히는 참패를 당했다.


 

최초로 파견된(쪼매 멀리 소풍을 온) 미군부대인 스미스 특수임무대대는 태평양 전선에서 일본군 전차나 따던 것을 상상하며 "너님들 말은 믿을 수가 없셔. 우리는 킹왕짱인 75mm 무반동총도 있으니 문제 없셔."하며 초여름 햇볕에 얼굴 탈까봐 양산을 받치고 배식을 받아 축음기로 음악감상까지 하시며 식사들을 드시고는 느긋하게 휴식을 취하며 주접을 떨더니, 오산에서 인민군 전차대에 발렸다. T-34/85 전차는 구경도 해본 적이 없기에 일본군 전차처럼 딸 수 있을 것이라 믿었으리라. 그리고는 철모며, 총이며, 야포며 모두 버리고 군복만 걸친 채 남쪽으로 튀다가 상당수가 전사하거나 인민군에게 붙잡혀 포로가 되었다.


 

놀란 미국은 일본에서 M24 채피 경전차대를 부랴부랴 보냈지만 또 발렸다. 미군이 머리를 짜내보니 T-34/85 전차를 바를 수 있는 미군 전차포는 M4 셔먼 전차의 76mm 포와 M26 퍼싱 전차의 90mm 포였는데 M-26 전차는 일본에 없었고 일본의 미군 공창에 조립하다 만 상태로 있는 것까지 탈탈 털어서 M-4 셔먼 전차 7대가 전부였다. 대전차화기로는 개발은 했지만 2차 세계대전이 끝나는 바람에 필요가 없어 양산을 하지 않은 M-20 3.5인치 RKT 슈퍼 바주카나 되어야 T-34/85를 바를 수 있었다. 이 무기들을 부랴부랴 미국 본토에서 실어오는 동안 미군 24 사단은 겨우 공수한 슈퍼 바주카 하나 들고 버티다가 대전에서 하루만에 인민군 3개사단에 포위당해 박살나버렸다. 여기서 얼마나 상황이 안 좋았냐면, 사단장이 슈퍼 바주카로 직접 T-34를 격파하기도 했다. 그리고 사단장은 낙오되어 도피 중에 인민군에 잡혀버렸다. 모두들 소련이 김일성에게 넘겨준 잉여 T-34/85 전차들 앞에서 "탱크!!"를 외치다 개발살나버렸다.


 

딘 장군이 포로가 된 사연에 대해서는 서로 다른 두 가지 기록이 있는데 하나는 해당 사건 당시, 월리엄 딘 장군이 약간의 호위병력과 함께 피신하다가 근처 민가에서 휴식하던 중 포로로 잡혔다고 한다. 이때 방에 들어가 쉬기 위해 군화를 벗었다가 북한군이 들이닥치자 군화 끈 묶을 시간이 없어서 맨발로 도망치다 잡힌 것인데, 뭐 군화 신었다고 탈출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던 것 같긴 하지만 전시와 같이 위급한 상황에서 군화 함부로 벗는 것 아니라는 점, 즉 불과 수분이라도 전쟁 중에는 목숨을 좌우할 만한 심각한 시간 소모가 될 수 있으니 유사시에 대한 대비를 언제나 하고 있어야 한다는 산 증거 되시겠다. 아닌 거 같으면 맨발(두꺼운 양말을 신었더라도)로 산길 한 시간만 뛰어 보시고. 다만 이것은 북한의 자료가 딘의 포로됨을 비난하고자 하는 글에서 나오는 이야기이다.[11]


 

딘의 회고록인 딘 장군의 이야기나 기타 일반적인 기록은 이와는 다르다. 딘 장군은 후퇴 중 부대와 분리되어 소수의 병력과 함께 산길로 이동하는 도중 식수를 찾다가 능선에서 굴러떨어졌다. 이때 머리에 자상, 어깨에 골절 등 부상을 입고 기절했고, 같이 있던 병력은 수색을 하다가 포기하고 떠나 대구에 있는 부대와 합류했다. 딘 장군은 중간중간 한국 민간인들에게 도움을 받으며[12] 한 달 간 산길을 따라 남쪽으로 이동하며 중 민간인에게 밀고를 받은 북한군에 결국 포로로 잡혔다. 공교롭게도 그날은 딘 장군의 결혼기념일이었다 한다. 당연히 밀고한 사람은 북한군의 치하를 받고 딘이 가지고 있던 달러와 인민위원회가 보관한 쌀을 받았다. 이후에 부역자로 체포되어 총살당했다고 한다. 이 윌리엄 딘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에도 참전했는데 그때 그의 사고방식은 전사하는 것보다도 더 굴욕적인 게 포로로 잡히는 것이었으며, 그가 지휘했던 사단은 가장 적에게 잡힌 포로 수가 적은 사단이었다. 그랬던 그가 전쟁 초반에 포로로 잡힌데다가 제24보병사단은 가장 포로로 잡힌 숫자가 많은 사단이 되어 버렸다. 이때 북한군은 초고속으로 남진하기도 바쁜데 포로가 있으면 귀찮다고 다수의 포로들을 FM 소련식으로 두 손은 뒤로 모아 철사줄로 묶고 무릎을 꿇린 후 머리에 권총으로 한 방씩 박아넣어 죽여버렸다. 이 시체들은 나중에 유엔군이 북진할 때 발견되었다.

 

 

각설하고 국군과 UN군은 낙동강 전선에서 최후 방어선을 설정했다. 이에 북한은 9월까지 대공세를 펼쳤으나 대구, 칠곡, 영천 등지를 두고 벌어진 다부동 전투왜관 전투에서 국군과 UN군은 방어선을 사수하는 데 성공했다.

2.3.3 인천상륙작전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벤치마킹한 인천 상륙작전 이후 경상도 지역에서 북진이 시작되었고, 9월 28일을 서울을 탈환했다. 이후 이승만 정권의 의사가 많이 반영되어, 10월 1일 국군은 38도선을 넘어 진격하였다. 이것이 국군의 날의 기원이 되었다.

UN군의 본래 참전 목적이 방어였던 만큼 38도선을 넘는 데는 UN의 결의가 필요했으며, 이 즈음 북한과 중국이 접촉하였으나 미국을 비롯한 UN측에서는 대수롭지 않게 여겨서 국군보다 조금 늦은 시기에 UN군 또한 38도선을 넘었다. 10월 19일에는 평양을 점령하였으며, 11월 후순에는 압록강두만강 유역에 이르렀다.

2.3.4 중공군의 참전

그러나 10월 중순 이후부터 이미 중공군이 한반도에 진입해 있었으며, 압록강과 두만강 유역에 이르렀을 때 이른바 인해전술로 알려진 중공군의 대반격이 시작되었다.

이때 더글라스 맥아더 UN군사령관은 중국에 대한 핵폭격을 실행하고 장개석의 국민당군을 중국 남부에 상륙시키는 등 거의 3차 대전을 고려한 반격을 계획했으나, 이 핵폭격 문제로 트루먼 대통령과의 정치적 갈등으로 인해 해임당했다. 처음엔 트루먼도 핵폭격에 상당히 긍정적인 반응을 보여 세계를 기겁하게 했고 영국 총리 애틀리는 트루먼에게 핵무기만은 안 된다고 거의 애걸복걸했다 한다. 결국 트루먼은 핵폭격 반대론자가 된다.

중공군의 대대적 참전으로 국군과 UN군은 후퇴하기 시작하였다. 장진호 전투, 흥남 철수 등이 이 시기에 이루어졌고, 1월 4일에는 서울을 재점령당했다(1.4 후퇴). 전선은 평택, 오산까지 내려왔으나 이후에는 전력을 수습하고 반격을 시작하여 3월경 다시 서울을 재탈환하였다.

2.3.5 휴전

이후에는 양측 모두 힘으로는 상대방을 박살낼 수 없다는 점을 암묵적으로 인정한데다가, 몇 번 후방에 침투한 북한군 게릴라에게 쓴맛을 본 UN군이 신중하게 전진했고, 북한군과 중공군은 산악지대에 많은 수의 진지를 만들어 놓았기 때문에 이때부터 산악에서 엄청난 국지전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목적은 휴전협정에서 보다 더 유리한 입장을 점유하기 위해서였다. 당연한 결과겠지만 덕분에 병사들만 죽어나갔다. 대표적인 전투는 백마고지 전투, 단장의 능선 전투, 피의 능선 전투 등이 있다. 이때의 분위기가 얼마나 막장이었는지는 영화 고지전을 보면 알 수 있다.

1951년 6월 경, 소련의 제의로 휴전협정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2년간 협상을 지지부지 끄는 동안 조금이라도 더 영토를 확보하기 위해 국지전은 오히려 더 활발해졌다. 이렇게 협상이 지연된 이유는 21세기에 비밀 해제된 구소련의 문서에서 밝혀졌다. 이유는 스탈린의 고의적인 지시 때문이었다. 북한군과 중국군은 연일 UN 공군으로부터 맹폭격을 당하느라 죽을 맛이어서 소련에 휴전을 간청하는 상황이었다. 특히 북한의 피해가 극심했는데, 북한의 경우 전쟁 초기부터 주요 도시의 비행장과 공장 등이 한국 및 UN 공군의 직접 공격대상으로 선정되어 시작부터 말 그대로 빵빵 터졌다. 특히 원산은 공군의 공격에 더해서 해군의 공격까지 받는다. 폭격덮밥. 이후에는 휴전까지 북한군이 보일 만한 곳이라면 무조건 공격 대상이 되어 무차별 폭격을 받는 등 북한 전역이 공군의 폭격 대상이었다. 당시 상황에 대해 미군 폭격기 조종사가 "북한은 석기시대로 돌아갔다"고 묘사한 바도 있고, 평양 시내를 폭격하기 위해 출격한 비행기가 적절한 목표를 못 찾아서 폭탄을 쓰지 않고 귀환한 사례도 있다. 당시 미군이 설정한 폭격 목표는 2층 이상의 모든 건물이었다. 요컨대 평양의 비행구역 내에 2층 이상의 건물이 하나도 안 남아났다는 것이다 하지만 스탈린은 이를 받아주지 않고 협상을 끌도록 지시했다. 당시 소련은 자국의 군사력을 미국보다 약하다고 평가하고 있었으므로, 미국이 서유럽에 힘을 집중하지 못 하도록 교착 상태의 한반도에 묶어놓고 싶어하였다. 게다가 전쟁이 길어짐으로 해서 피를 흘리는 것은 중국과 북한이지 소련이 아니었다. 결국 스탈린이 1953년에 갑작스레 사망하고서야 협상이 급물살을 타 비로소 휴전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만일 스탈린이 더 오래 살았더라면 협상기간은 그만큼 더 길어졌을 것이다.

1953년 6월 이승만 정권이 단독으로 거제도에 수용하였던 공산 포로들을 석방하여 문제가 되기도 했다. 당시 대한민국은 휴전 협상 당사자에서 완전히 배제되어 있었는데, 소외된 이승만은 휴전에 반대하는 입장이었고, 이미 미국의 눈 밖에 난 상황이었다. 당장 1952년 8월 2일, 부산에서 이승만은 암살당할 뻔 한다. 범인은 CIA, 이유는 협상에 비협조적이여서. 참고로 이런건 한두번이 아니다. 에버레디 작전으로 여러번 이승만을 암살하려고 했다. 따라서 이승만은 국면을 바꾸기 위해 이러한 사건을 터트린 것이다. 이승만의 이 행위에 대해 미국은 상당한 충격을 받았다. 물론 당시 이승만의 행동에는 인도주의적이었다고 평가받을 만한 면이 분명히 있다. 북한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는 포로들도 일괄송환될 가능성이 있었으니까. 다만, 국제법에 따르면 이 같은 행동은 분명히 불법이다. 당시 처칠은 남한이 망하든 말든 냅둬야 한다고 거의 길길이 날뛰었고 북한과 중공도 국제법 위반이라고 입에 게거품을 물었지만 중공은 몰라도 북괴가 국제법 드립을 칠 입장은 아닌듯 하다 일은 이루어졌으며 스탈린의 죽음으로 인해 또 한번 국면이 전환되면서 7월 27일 휴전 협정이 이루어졌다. 사실 휴전 협정의 발목을 제일 잡고 있는 것이 반공포로 문제였는데 미국은 포로의 의사를 존중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북한은 일괄 송환을 주장했는데, 이 문제가 몇개월을 질질 끌었고 이승만은 둘이서 시끄럽게 떠드는 사이 반공포로들을 죄다 풀어줘버려 논쟁거리를 아예 없애버린 것이다. 뒤통수 맞은 미군 수뇌부는 뒷목은 잡았지만 차라리 잘 됐다고 기뻐했다고 한다.

3 전쟁의 영향

3.1 부정적 결과

 


전쟁 기간 동안 남북을 합쳐서 약 200만 이상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며 미군 사망자도 45,000명에 이르는 등 기간에 비해 사망자가 많다. 이후 베트남전에서도 그러했듯 전체 사망자 중 민간인의 비중이 압도적으로 높다.[13]

정치적으로는 휴전 이후 김일성과 이승만이 자신의 반대파를 숙청, 탄압하는 대의명분을 얻으면서 양측의 권력이 공고화되는데 엄청난 공헌을 하게 되었다. 물론 안 좋은 의미로. 북한의 김일성은 소련파, 남로당파, 연안파 등의 조선로동당 내부의 다른 파벌들을 거의 숙청하여 북한 지도부를 종전의 연립정권 형태에서 김일성의 직계인 만주파가 정권을 독식하는 구조로 바꿔버린다. 한국에서는 종전 이후 공산주의에 대한 증오와 혐오를 바탕으로 국가보안법을 악용하여 야당 인사들을 탄압하였다. 특히 남한에서는 휴전 이전부터 발췌 개헌이 전쟁시의 혼란상을 이용해 이루어지기도 했다. 거기에다가 북한에서 현재까지 독재가 진행되고 남한에서도 1987년 6월 항쟁 이전까지 독재가 이뤄졌던걸 보면 정치수준을 다시 일제시기로 되돌려 놨다고 봐도 좋다.

6.25 전쟁의 실질적 최대 수혜자는 다름 아닌 일본이였다.
국제적으로는 태평양 전쟁 이후 쫄딱 망한 일본이 한국 전쟁을 계기로 미국에서 대량의 보급물자 생산 및 수송을 발주받은 덕에 불황을 벗어나 경제 성장의 발판을 다졌고, 이 때문에 일본에서는 소독약만 팔아서 떼부자된 사람들도 존재했을 정도다. 의리없는 전쟁 초반에 야쿠자들이 '한반도에서 전쟁이 났는데 뭐 껀수 없나?'하고 잡담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후 일본은 베트남 전쟁 때 비슷한 방식으로 또 한 번 떼돈을 벌어먹었다. 또 일본에서 차출된 미군 병력의 공백을 막기 위해 1954년 자위대의 전신인 경찰 예비대(警察豫備隊)가 신설되었다.[14] 다만 당시 일본 총리였던 요시다 시게루가 한국에서 전쟁이 나자 "일본은 살았다!"라고 외쳤다는 소문이 있는데 전혀 사실이 아니다.[15] 그러나 그런 소문이 날 정도로 일본에게는 호재였다는 이야기…

한편, 중국은 1949년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이후, 1년 내에 대만을 쩝쩝쓱싹하기로 계획을 세워 놓았다. 그래서 1950년 10월에 타이완 침공을 계획했었지만, 공격 개시 넉 달을 남겨두고 김일성이 남한으로 쳐들어가는 바람에 미국이 달려와서 대만 해협에 항공모함을 박아버렸다. 게다가 타이완 침공에 사용하려던 병력과 장비도 한국의 상황이 북한군이 잘 나가던 초반부가 지나면서 영 안 좋게 돌아가자 증원을 위해 곶감 빼먹듯이 쏙쏙쏙… 결과적으로 김일성이 장개석을 살려준 셈.

다만 한국전쟁 당시 미국과 겉으로 보기엔 대등 혹은 압도하는 모습을 보여준 덕에 중국의 국제적 위상이 오른 면이 있었으며, 이는 후에 중국이 UN 안보리 상임이사국 지위를 대만에서 빼앗아 오는 데 영향을 주었다. 또한 국공내전 당시 득템한 국민당 포로군을 전장 속으로 폐기처분시키고, 중공군 포로의 대다수였던 국민당군은 거의 송환을 거부하고 대만으로 돌아갔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공산당 1당독재를 공고히 하는 데 요긴하게 써먹기도 했다. 게다가 원래 북한을 밀어주고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소련이 간도의 지배권을 북한에게 넘겨주려다 북한이 전쟁에서 지자 중국에 줘버렸다는 설도 있다.

덤으로 당시 남로당 활동으로 잡혔다가 프락치와 만주군 인맥으로 사형은 면하고 예편당한 박정희도 이 때 군으로 복귀한다. 체포되지 아니었으면 박정희의 삶도 한국 정치사도 많이 변했을 것이다.

김일성이 남한 껴안고 자폭해서 참 여럿 살려줬다. 아 이거슨 고결한 희생정신은 개뿔. 이런 개자식……

국민적 차원에서는 동족상잔의 비극이라는 말 그대로 전쟁을 겪었던 장년층들은 물론 그 이후에 중년층, 그리고 현재의 한국 청년들에게도 크나큰 시련을 만들어준 계기가 되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6.25 직전부터 지금까지 꾸준하게 이어져 내려오는 대한민국의 징병제로 한국의 현 징병제는 6.25 전쟁이 가장 큰 계기로 작용하였다. 대한민국 국군 창설 초기 미국은 이승만의 북진통일 주장 때문에 한국군의 규모를 약 10만명 선에서 제한을 두었는데, 전쟁이 터지고 전황이 UN군과 국군 측에 불리하게 돌아가자 대한민국 국회는 1951년 5월에 징병제를 부활시켰다. 그 이전에는 모병제였고, 법을 다시 고치지 전까지는 거리에서 청년들을 징집시키거나 가택수색까지 해서 청년을 군대에 처넣었다고 한다. 물론 남북대립이 징병제 도입의 직접적 원인이기는 하나, 남북분단이 없었더라도 징병제 자체는 도입되었을 것이다. 무엇보다 한국의 위쪽에 중국과 소련이 있었으니까. 그래도 지금처럼 전체 국민에게 적용되는 형식이 아니라 대상자 중 일부만 선택적으로 징병하는 것으로 바뀌었을 것이다. 또한 징병제뿐만 아니라 경제적, 사회적인 분위기 또한 과거는 물론 현재까지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나이 든 세대들이 빨갱이란 말에 어떻게 반응하는지 한번 생각해 보자.

국내 경제에 끼친 영향 또한 무시할 수 없다. 전쟁이 진행되는 동안 남한의 경제적 중심지였던 서울이 인민군에게 점령당하고 한국군에게 재수복되는 과정이 반복되면서 그나마 일제강점기 동안 구축해놓고 해방 이후에 개수하여 사용되던 건물이라거나 유물, 그리고 절대 다수 국민의 생활 터전 등 물질적 재산 요소가 다수 파괴되어 전쟁 이후에 다시 지어야 했다. 그리고 경제적 파탄을 해결하는 차원에서 미국으로부터 받은 원조물자는 기초경제를 미국에 크게 의존하게 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또한 이 기간 동안 엄청난 양의 전통 문화재가 파괴, 소실, 행방불명되었으며, 전국 산간 지역의 수많은 사찰들이 미군의 빨치산 토벌 작전 중에 파괴된 바 있다. 특히 108개의 절과 암자가 있었다고 할 정도였던 금강산 지역에서는 2개 빼놓고 모든 절이 소장하고 있던 엄청난 양의 자료와 유물들과 함께 소실되었다.

북한군 게릴라 토벌에만 신경 쓴 나머지 해인사 폭격 명령까지 내려왔으나 이 때 공군 조종사였던 故 김영환 장군이 이를 거부하고 설득 작업에 들어가 폭격을 막았다[16] 김 장군은 이후 금관문화훈장을 추서받았다. 또 빨치산 토벌로 유명한 차일혁 총경도 문화재 보호에 공이 있는데 구례 화엄사를 불태우라는 명령에 차일혁 총경은 고민하다가 화엄사의 문짝을 떼어내 태워서 불지르는 시늉만 했다고 한다. 전후에 조계종에서 차일혁 총경에게 감사패를 전달했다고 한다.[17]

게다가 태조부터 순종까지 역대 조선 임금들의 어진[18]과 왕실 인사들의 초상화가 공산군의 약탈을 피하기 위해 부산으로 옮겨졌는데 공산군의 공격이 아닌 전후(1954년) 관리부재로 인한 화재태조 이성계(전주, 함흥 등에 다른 어진이 남아 있었다), 영조(유일하게 온전히 살려낸 어진. 세자 시절을 그린 것 또한 겨우 살려냈다), 철종(반만 탔다), 고종(어진이 많고 사진 자료도 남아 있다), 순종(사진 자료가 남아 있다) 등 극소수 인물을 제외하고 전부, 그야말로 완전히 타버려 어떤 방법으로도 얼굴을 확인할 수 없게 되었다[19]. 이 밖에도 이성계의 활 등 수많은 국보급 유물이 파손되고 자취를 감추었다.

지금에 와서야 국가 이미지가 많이 개선되었지만 그래도 여전히 외국인들이 '한국'하면 분단국가와 더불어서 대표적으로 떠올리는 것 중에 하나가 한국전쟁이다. 그러니까 전쟁 건 이북의 태조를 탓하자. 김일성 개객기 해봐

한편 전쟁 중의 학살 문제에 대해서는 말이 많은데, 남북 양 측은 서로 상대편의 학살을 비난하며 이를 본격 병림픽 이데올로기 대립에 이용한 바 있으며, 그게 아니더라도 이 시기의 충격으로 이에 관련한 문학 작품도 많았다(대표적으로 반공 문학). 때문에 남한에서는 민주화 이후 반공 이데올로기에 대한 반동으로 미군과 국군에 의한 학살이 대두되기도 했다. 물론 북한은 아직도 독재 체제라서 그런 거 없다.

주체가 누구이냐를 떠나서 이러한 학살 문제는 결국 당시 국민들을 극도의 공포 상태로 몰아넣었다. 때문에 전후 문학에는 단순히 반공 문학뿐만 아니라 국군과 북한군의 사이에서 휘둘려야 했던 민중의 고통을 논하는 작품 또한 많다. 전란의 혼란상으로 인한 사회의 황폐화는 몽실 언니 등의 작품, 국군과 인민군의 학살로 인한 민중의 공포와 트라우마는 소문의 벽 등의 작품에서 찾아볼 수 있다.

3.1.1 UN군과 국군에 의한 학살

 


미군이 주축인 UN군폭격으로 인한 38도선 이남 지역의 궤멸적인 피해는 폭격의 역사 같은 외국 서적을 통해서나 겨우 알 수 있는 지경이다. 물론 전 국토가 전장이었던 만큼 오폭 등에 의한 피해도 어느 정도는 불가항력이었으리라 볼 수도 있지만, 적 전력을 압도하기 위한 불필요한 폭격 및 초토화 작전이 다수 있었다는 것은 부정하기 어렵다. 대표적인 예로 B-29네이팜탄을 몇백 톤을 쏟아부었지만 정작 북한군에게 직접적으로는 별다른 피해를 입히지 못한 왜관-다부동 전투 융단폭격. 정확하게는 보급시설 등에만 피해를 줬고 병력에는 피해를 주지 못했다고 한다.

사실 이 당시에 미국의 폭격기사령부는 폭격기 수를 2차대전 이후로 크게 줄이지 않는 등 막강한 공군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전쟁 기간은 길었고 땅은 좁았으며 이런저런 난항을 겪었던 2차대전 때와는 달리 한국전쟁이 벌어지던 때에는 폭격 교리와 장비도 완성 이후 테스트까지 마친 상황이었다. 그리고 한국전쟁보다 훨씬 짧은 기간 안에 일어난 일본에서의 공습피해를 생각해 보면, 전쟁기간 중 상대적으로 북한에 훨씬 심한 폭격을 가했을 것이다. 전쟁 중의 보고 중에 전쟁 후 평양에 멀쩡한 건물이 2채 밖에 없었고 원산에는 함포사격까지 겹쳐서 남은 건물이 없었다는 말이 있다. 자료에 따르면 미공군은 전쟁이 시작된 그 주에 제공권을 확실히 장악했고, 부산으로 몰렸을 때에 이미 전략폭격 목표를 찾을 수 없다고(즉, 모든 주요 공장을 파괴했다고) 보고했다고 한다. 그러고도 공군은 계속 하늘을 날았으며, 전선고착 이후에는 철도와 저수지(!)에 대한 폭격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졌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러한 자료들의 근거들은 폭격의 역사가 쓰여진 이후에 발견된 미군의 작전 보고서와 그 사진들이다. 이러한 폭격 때문에 북한 정부는 굴을 파고 지하에 모든 생활 기반들(공장, 시장 등등)을 마련하여 버텼다. 베트남 전쟁에서의 월맹군과 비슷하게 산 듯. 이는 KBS에서 방영한 10부작 다큐멘터리 <한국전쟁> 중 7부에서 그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그 외에 황해도 신천군에서 미군이 1950년 10월~12월 사이에 3~4만 명의 양민들을 학살했다고 북한에서는 주장하는데, 이를 '신천대학살'이라고 부르고 있다. 그리고 북한에서 황해도 신천군에 '신천박물관'을 설립하고 반미주의 교육 장소로 활용하고 있다. 실제로 신천군에서 민간인들이 학살된 사건은 분명히 존재했었다. 그러나 학살의 주체는 미군이 절대 아니다. 당시 미군과 유엔군은 북진을 하면서 평양을 선점하려는 경쟁이 붙었기 때문에 황해도 신천군에 오랫동안 머물지 않았다. 또한, 북한 측에서 주장하는 '미군&유엔군 주도 주장'을 확증할 만한 증거가 없다. 신천대학살은 신천군 주민들 내 우익세력들이 학살을 주동하여 3~4만 명의 좌익계열 민간인들이 학살된 사건이다. 그 전에 북한군이 남으로 내려왔을 때 공무원, 우익 계열 민간인들이 무더기로 학살당하고서 북한군이 밀려올라가자 보복으로 했다는 말도 있다. 자세한 설명은 신천군 사건 항목을 참조하기 바란다.

참고로 이쪽처럼 남측도 북한으로부터 수복한 북한 및 남한 지역에서 상당수 주민을 학살하였다. 이와 관련해서 알려진 대표적인 사건이 바로 보도연맹 학살사건이다. 이 보도연맹 학살사건에서 CIC 특무대장 김창룡이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한편 빨치산 토벌작전 시에도 의도하지 않은, 혹은 의도한 학살사건들이 여럿 있으며, 특히 의도적인 학살로는 거창 양민 학살사건이 유명하다.

미군에 의한 학살로는 노근리 학살사건이 있다.

또한 의무병으로 참전했던 박남식의 회고록 '실낙원의 비극' 에는, 장군들이 시찰을 오면 사단장이 근처 피난민촌에서 민간인을 납치한 다음 처녀성 검사를 하고 성상납을 했다는 언급이 있다.

3.1.2 북한군에 의한 인민재판과 학살

사실 최근 미군과 국군에 의한 학살이 재조명되고는 있다 하나, 어디까지나 북한군에 의한 학살이 다수였다는 점을 잊으면 안 된다. 개전 3일만에 벌어진 서울대병원 학살사건이 대표적.

또한 북한군은 북으로 후퇴하면서 이광수, 안재홍, 김규식, 조소앙, 정지용 등 수많은 정치, 문화, 경제계 인사들을 납북하였으며 당시 유력한 중도파 국회의원으로 안재홍, 김규식, 조소앙, 조봉암이 있었는데 조봉암 빼고 납북당하여 중도파로 은을 견제할 인물은 조봉암 밖에 남지 않게 되었다. 이는 남한 정치의 커다란 손실로 평가된다.

현대사 연구 권위자인 서중석 교수는 이 부분에 대해 '5.30 총선거(제2대 국회의원 선거)로 통해 중도파 세력들이 다수 점유했다. 그러나 한국전쟁 발발로 중도파 의원들 상당수가 납북당해 이승만과 친일파 세력들에게 정계에 커다란 입지를 주는 빌미를 마련했다'며, '한국전쟁이 발발하지 않았더라면 지금 같이 극단적 반공국가로 가지 않았을 것'이라고 현대사의 비극으로 정의하고 있다.

또한 납북된 중도파 정치인들(특히, 김규식, 조소앙, 안재홍)은 오랜 기간 동안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철저히 금기시당해 왔었다. 제1공화국 정부 시기 동안 조소앙은 아예 '북한의 간첩'이라고 규정되었을 정도였다. 또한, 그의 가족들은 대한민국에서 오랜 기간 동안 소위 연좌제의 굴레를 받으면서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한다. 다행히도 나중에 훗날 1987년 6월 항쟁 이후 1989년에 복권되었지만……

이렇게 이름이 알려진 저명인사 외에도 북한군은 반공 인사, 경찰관, 공무원 및 그 가족을 대량 학살하였다.정확히 해서 지들 밸꼴리는대로 죽이고 본 것이다

 


북한군은 처형할 때 대중을 동원한 공개 재판의 형태를 취할 때가 많았는데 이를 '인민재판'이라고 하였다. 이 '인민재판'이라는 용어는 한국 사회에서 '마녀사냥'과 비슷한 의미로 현재까지도 흔히 쓰이고 있다.

북한군이 낙동강 일대까지 물밀듯이 밀려들어왔을 때 사회에 불만을 가지고 있었던 빈농계층의 젊은이들은 계급 해방되는 사회주의 세상이 오는 줄로 알고 북한군 밑에서 한자리 꿰차고 그 동안 아쉬운 감정을 가지고 있었던 친일파, 지주, 경찰, 공무원, 서북청년단 등의 동네의 세력가들을 반동으로 몰아 인민재판에 회부해 처형하는 데에 적극 앞장섰는데, 이는 서울 지역에서 인민재판이 행해진 여파로 말미암은 것이었다. 문제는 세력가들 중의 상당수가 주변 민심을 얻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래서 평소에 민심을 얻어놓은 세력가는 인민재판을 받았어도 죽음은 면했지만 그래도 간신히 살아남는 정도였다고 한다.

여담이지만 스탈린은 한국전쟁 중 인민재판에 대한 정보를 전파받자마자 "김일성 동무는 이 미친 짓을 규제하지 않고 무얼 하는 건가?"라며 격분했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공산군이라는 집단은 인민의 협조를 얻는 것을 미덕으로 하는데 그 인민에게 반감을 불러 일으키는 짓을 하는 건…… 이런 짓을 한 놈도 격분하게 만드는 김일성의 위엄!

전쟁 초 북한군이 남진하고 있을 때는 북한군 지휘부의 승인으로, 지역 동조자 또는 내무서(북한에서 경찰서를 부르는 말), 정치보위부 등 치안기구가 담당하여 인민재판을 행했다. 대체로 북한'군'이 직접 손을 대지는 않은 것. 단, 당시 북한군과 내무서원은 계급장만 다른 동일한 제복을 착용했으므로 내무서원에 의한 학살이 북한군에 의한 것으로 잘못 전해졌을 가능성은 있다.

예외로 국군과 미군 포로 상당수는 북한군에 의해 직접 학살되고 시체도 마구 훼손된 경우가 흔했다. 국군의 경우 간부나 이북 출신자들은 거의 예외없이 고문당한 뒤 처형당했다고 한다. 부상자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인천 상륙작전으로 전세가 역전되어 북한군이 북으로 후퇴하는 과정에서 이들은 점령지 주민에 대해 대규모 학살을 자행했으며, 이는 RG 153의 미군 전쟁범죄조사국(The War Crimes Branch) 문서들에서 명백히 드러난다.

북한군이 군기가 엄정해서 점령지 주민들에게 신사적으로 대했다는 이야기는 완전한 거짓말은 아니지만 유대인을 살려준 친위대나 위안부를 사랑한 일본군처럼 개별적인 특수사례로 국한된다. 전쟁 전 기간으로 이를 넓혀 적용하면 말 그대로 코미디가 된다. 특히 전면패주 중에 공황상태로 자행한 학살은 한국군이 개전 초에 저지른 대규모 학살과 유사하다. 이 문제에 관해서는 한국군이든 북한군이든 입이 열 자라도 할 말이 없다.

사실 전쟁을 겪은 사람들의 증언에 따르면 중공군이 제일 매너가 좋았다고 한다. 중공군은 모택동대장정 시절부터 어떤 일이 있어도 민가에 피해를 끼치지 않고, 인민과 함께 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철칙이 있었기 때문에("물고기가 물을 떠나면 살 수 없다"라는 비유가 유명), 절대 민가에 피해를 주지 않았다고 한다. 이는 국공내전에서 모택동이 장개석을 이긴 큰 요인이다. 장개석 군대인 국부군은 기강도 해이했을 뿐만 아니라 민가에 온갖 민폐를 끼치는 등 상태가 안 좋았기 때문에 민중들은 알아서 모택동을 도왔다고 한다. 당시 증언에 따르면 중공군은 잠을 자도 꼭 헛간이나 마당에서 잤고 음식을 얻어먹으면 돈은 못 줘도 하다 못해 일이라도 해주면서 꼭 보답을 했다고 한다. 이중 문식이 있는 중공군이 있으면 한자로 소통을 하거나 조선족 통역을 통해 주민들에게 자신들의 입장을 전달하며 민심 확보에 매우 주력했는데 이는 제법 긍정적으로 평가해줄 요소다. 또한 중공군은 포로들에게도 제법 신사적이라 겨울날 포로들에게 뜨거운 물을 주기 위해 폭격의 위협을 무릅쓰고 물을 끓여주기도 했는데 이 물은 마시라고 준 물이었다. 헌데 미군들은 이 물을 씻으라고 준 물인줄 알고 열심히 씻었고 중공군들이 격노하는 사태가 있었다고도 한다.화낼만도 하네 물론 사람이 모이다 보니 중공군 중에도 간혹 상태가 안 좋은 인간은 있었다고. 장진호 전투 당시에 포로들을 죽인 중공군이 있었다는 증언도 있다.

미군은 어느 동네를 가건 초콜렛이건 과자건 스팸이건 먹을 것을 마구마구 뿌려댔기에 매너에 관계없이 인기가 좋았고 쇼미더머니의 위엄? 국군과 인민군은 전쟁이 진행되면 진행될수록 상태가 안 좋아졌다고 한다.

게다가 북한군 낙오병이나 북한군에 협조했던 동조자들은 자신이 처형했던 사람들의 주변인들에게 그대로 보복당하거나 아니면 동네에서 도망쳐 빨치산이 되어 게릴라 전투를 수행하다가 죽거나 감옥에 가게 된다. 결국 같은 동네나 이웃 동네 사는 사람들끼리 서로 씻을 수 없는 불신과 증오의 상처를 남기게 된 것이다.

이같은 인민군의 가혹한 인민재판과 학살, 그에 따른 반목으로 인한 한 마을의 비극은 윤흥길의 소설 장마에도 아주 잘 드러나 있다.

시중의 도서로는 2010년에 출간된 '마을로 간 한국전쟁'(박찬승 저, 돌베개)를 참조해도 좋다. 이 책에서 저자는 진도 현풍 곽씨 동족마을, 영암 영보리, 부여의 두 동족마을, 당진 합덕면, 금산 부리면 해평 길씨 동족마을을 선정하여 인민군이 진주하면서 벌어진 비극을 잘 취재해 다루고 있다.

직접 학살은 아니지만 결국 관련된 사람들을 죽게 만든 명백한 잔학행위로는 점령한 남한지역에서 군인을 충원하기 위해 청년들을 의용군이라는 명목으로 징병해서 끌고 간 것도 있다. 물론 제1차 모집 때는 순수 지원자만 받았지만, 그랬더니 지원자가 원하는 숫자만큼 나오지 않아서 곧바로 강제동원으로 전환했다. 서울 함락 직후에 실시한 1차 의용군 참가 궐기대회의 지원자 수가 단 406명이었던 것이다. 북한군이 소백산맥을 넘기 시작할 때부터 시작한 제2차 모집부터는 강제징집에 가택수색까지 합쳐진 것이라서 이미 말만 의용군이지 자기 의사로 북한군이 된 사람은 별로 없었다. 미군의 화력에 의한 북한군의 병력 소모가 엄청나다 보니 이를 보충하기 위한 남한에서의 의용군 징병은 엄청난 수에 달했고, 그러다 보니 낙동강 전투시에 북한군의 1/3이 남한 출신 의용군일 정도로 많았다. 덤으로 북한군이 허겁지겁 패주하고 병력을 상실하면서 점령지에서 많은 숫자의 젊은이들을 징집해갔으며, 1.4 후퇴 당시 서울이 재함락되었을 때가 가장 심했다고 한다. 이런 식이었으니 필사적으로 북한군과 싸워 물리친 후에 전장을 청소하다가 북한군 옷을 입고 신음하는 동생을 발견하는 일이 낙동강부터 백마고지까지 다반사였다는 것.

 

 

 

3.2 긍정적 결과

일어나지 말아야 했을 전쟁이긴 해도 한국전쟁이 가져온 긍정적 효과가 없지는 않다. 다만 이것이 소 뒷걸음질 치다가 쥐 잡은 격(다만 정치적으로는 중요한 계기가 된 것도 사실이기는 하지만)에 불과하다는 점임은 기억해야 할 점.

일단 남과 북을 막론하고 한국인의 의식 속에 남아있던 계급 의식을 완전히 타파한 것. 해방 이후까지 남아 있던 '이웃집 김서방은 조상이 백정, 뒷집 이서방은 조상이 양반' 같은 식으로 남았던 계급 의식은 극심한 인구 이동이 이루어지고 전통적인 마을의 구조가 크게 변화했기 때문에 완전히 깨졌다. 일단 계급 의식 자체가 정착 생활, 즉 농업 사회에서 강한데 전쟁으로 인해 정착하는 것이 불가능해졌으니 자연스럽게 계급 의식도 해체된다. 특히 전란을 겪으면서 토지의 소유관계가 불분명해지고 대다수의 지주들이 땅을 잃고 쫓겨나거나 학살당하면서 오랫동안 굳건하게 자리잡던 지주계급이 아주 깔끔하게 해체되었다. 그 덕분에 60년대 정부가 농업보다 공업화를 우선시한 경제개발정책을 시행했음에도 지주의 반발로 무산되는 일은 전혀 일어나지 않았다. 이는 보수기득권세력인 농장지주들이 공업화에 반대하여 국가차원의 경제개발을 제대로 이행할 수 없었던 남미 국가와 대비되는 부분이다.

해방 전후의 호전적인 양측 대결론자들이 이 전쟁을 통해 대거 전사, 숙청 등르로 사라지면서 더 이상 어지간해서는 전면전을 생각하지 않게 된 것도 있다. 사실 북한이 말로는 호전적이지만 실질적으로는 전면전을 생각하지 않는다는 게 그 예다. 그때의 북한은 핀치에 몰리더라도 킹왕짱 소련 동무들이 도와줄 거라고 철썩처럼 믿었지만, 정작 뚜껑이 열리자 소련은 매우 소극적으로 일관하여 이후 소련에 대한 의존성 역시 크게 줄였다. 무엇보다 군사대결에서 경제대결로 패러다임을 선회한 것은 전후 경제발전에 크게 기여하기도 했다.

광복 이후 남한 내 각지에서 기승을 부리던 빨치산도 전쟁을 통해 인민군과 같이 북으로 쫓겨가거나 지리산으로 집중되어 쉽게 토벌됐으며, 애초에 북한 측도 빨치산을 도울 생각이 별로 없었으니 이것도 그나마 다행일지 모른다. 확실히 전쟁 전보다 국지전이 크게 줄긴 했다. 즉 남한 내부에 존재하면서 남한 체제에 반감을 가짐과 동시에 무장을 한 집단이 한번의 커다란 단기간 전쟁으로 싸그리 갈려나가 더이상 존재하지 않게 된 것. 남베트남의 예를 들더라도 이러한 무장세력이 잔존했다면 두고 두고 골치거리였을 것이다. [20]

남한의 경우 일제강점기에 그나마 있었던 근대적 시설물들이 거의 다 개박살나면서 일제와는 상관없이 한민족의 근성노력으로 경제발전을 했다! 라고 주장할 수 있게 된 것도 그나마 다행이라면 다행.[21]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처음이자 마지막 전면전이라는 점에서도 의의가 있다. 이 전쟁이 아니었다면 국군은 아직까지도 실전 경험의 부족으로 전술 교리 체계를 미국과 일본에 의존해야 했을지도 모른다. 또한 주변국에게 '현대 들어 전쟁다운 전쟁 한번 없었던 나라'라는 취급을 받으며 전투 역량이 저평가되었을 가능성도 높다. 한국전쟁이라는 현대전의 경험을 통해 국군은 적지 않은 전훈과 교리를 얻을 수 있었고, 국내에서 실전 경험을 보유한 지휘관들이 국군 창립 멤버로 자리잡아 후대에 지대한 영향을 끼칠 수 있었다. 특히 해군의 아버지로 추앙받는 손원일 제독이 대표적으로, 손 제독과 한국전쟁 덕에 해군은 그 전과 비교가 안 될 만큼 급성장을 이루어 전쟁 당시부터 지금까지도 북한에 확실한 우위를 점하게 되었다.

영토 면에서 대한민국은 경기도 북부 및 황해도 남단 일부를 상실했지만 대신 강원도 북단을 북한에게서 탈환했다. 현재의 고성, 인제, 양구, 화천, 철원 등이 그것으로, 전쟁 당시도 이곳의 고지에서 가장 격렬한 공방이 있었고 하나같이 전술적 가치도 높은 땅이여서 지금도 매우 유용하게 지켜내고 있다. 전쟁이 아니었으면 이곳 주민들은 지금도 북한의 치하에 있었을 것이다. 대신 개성, 옹진 반도를 상실하면서 서해에서 북한의 입김이 강해졌다. 물론 휴전 시점에 북한의 해군력은 괴멸상태였기 때문에 남한 본토보다 북한에 훨씬 가까운 서해 5도는 지켜낼 수 있었지만 결과적으로 본다면 서울이 북한과 더욱 가까워졌다. 남한의 중요시설의 대부분이 이 주변 지역에 집중되어 있기에 북한의 도발과 관련해서 매우 소극적인 자세가 되었다. 어쨌든 전쟁 전후의 영토 크기를 비교해보면 38선이 그어졌던 때보다는 약간이지만 더 넓어졌다. 그리고 38선보다 휴전선 길이가 훨씬 짧기 때문에 철책의 범위도 줄어들었다.

미국애치슨 라인을 지정했을 당시 하마터면 거의 버릴 뻔했던 한반도의 중요성을 재인식하게 되어 막대한 투자를 들여 쭉 보조한 것도 주목할 만하다. 한국전쟁 이전까지는 한반도를 그저 전후 일본의 처리 과정에서 떠맡은 부산물을 잠시 관리하는 정도로 인식했지만, 전쟁을 통해 자국민이 투입되어 를 흘림으로써 양국은 진정한 혈맹(血盟)으로 거듭나게 되었다. 현재 대한민국의 국방에 위협이 닥치면 미국이 즉각적으로 '당연히' 도와줄 거라고 철썩처럼 믿을 수 있는 근거도 이것 때문이다.

이 전쟁으로 미국은 36,000명이 넘는 희생과 상당히 많은 노력을 들였지만, 2차 세계대전 이후 자유 수호나 경찰국가라는 명분하에 치렀던 많은 전쟁 중 자신들이 옳았다고 내세울 수 있는 몇 안 되는 사례 중 하나로 꼽힌다. 거기다가 한국은 미국이 추구하는 자유화[22]와 선진화[23], 그리고 민주화[24]까지 차근차근 달성시켜 나갔기 때문에 명분적으로 한국은 더더욱 미국에게 있어 중요한 국가가 되었다. 이미 미국은 8.18 도끼만행사건, 아웅산 묘소 폭탄 테러사건과 1993년 1차 북핵 위기 같은 남북간 전쟁 위협이 고조될 때마다 한국과 협력을 강화, 안전보장을 약속하고 실제 군사적 행동으로도 보여주면서 이를 입증하고 있다.

냉전 말기인 1980년대 후반 세계 정세가 다원적인 구조로 재편되는 과정에서 미국도 한국의 중요도를 낮추려는 시도가 있기는 했다. 주한미군 철수에 대한 이야기가 대표적인 것이고 한국의 대미 무역에 대한 각종 규제도 이 때 많이 나왔다. 특히 김일성 사망 직후 이런 시도가 많았으며, 이 당시에는 김일성이 없는 북한이 몇 년 못 가고 붕괴된다는 전문가들의 시각도 많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안타깝게도 이후 북한 체제가 김일성의 아들인 김정일을 중심으로 다시 공고화되고, 중국이 커지고 러시아가 부활하면서 동아시아 주변 정세가 미국에게 유리하다고는 할 수 없는 방향으로 흐르면서 2000년대 들어 이런 시도는 거의 없어졌다.

다른 걸 다 떠나더라도 냉전 종식 이후 세계 각지에서 민주화 운동이 불 때마다 미국이 해당 국가의 제2의 한국(사회적으로 자유로운 민주주의 국가에 경제도 성장하고 대체적으로 미국에 우호적인 나라)화를 시도하고 있다는 점[25]에서 미국 내 일반인들의 인식이 어떻든 미국 정계에는 다른 전쟁들 못지 않게 중요하게 인식되고 있는 전쟁이라고 볼 수 있다.

 

 

 

4 전쟁에 대한 인식

4.1 명칭에 관하여

미국을 비롯한 해외에서 부르는 'Korean War'의 번역된 명칭인 한국 전쟁.[26] 한국 전쟁이란 명칭이 외국에서도 쓰는 말이니 한국에서도 그렇게 하자는 사람들도 종종 있다. 반대편에서는 외국에서 쓴다고 해서 자국에서 일어난 전쟁을 외국식대로 불러야 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라고 반박한다. 하지만 6.25 전쟁이란 명칭은 사람들의 인식이 '6월 25일'에 일어난 전쟁에 그치고 그 3년간의 나머지 역사는 잘 인식되지 않을 가능성도 있다고 한다. 그런데 21세기 초인 현재의 학생들 보면 연도는커녕 개전일도 모르는 통탄스러운 경우도 있다. 이름이 6.25인데 개전일을 모른댄다. 찍어도 맞추겠다. 그러나 휴전일과 휴전연도는 성인들도 모르는 사람이 태반이다.[27]

6.25 사변[28] 등으로 불리기도 하나,[29]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에는 '육이오 전쟁'과 '한국 전쟁'으로 올라와 있다. 옛날에는 남북전쟁이라고 불리기도 했지만 단어 자체가 1860년대 미국의 내전을 지칭하는 단어로 인식되는 경향이 강해서인지 요즘은 잘 안 쓰이는 추세.

북녘에서는 '조국해방전쟁'이라 부르지만 물론 현실은 조국적화전쟁…… 국내에서는 당연히 이 표현이 통용되지 않는다. 혹시 이 표현을 즐겨 사용하는 사람이 보인다면 일단 회사에 연락을 취하자. 득템할지도 모른다. 반대로 한국의 극우단체 중에서도 극히 일부에서는 아예 '김일성의 난'[30] ,'경인공란(庚寅共亂)'[31]이라고 하기도 한다 카더라. 적절하다.

미국에서는 이 전쟁을 'Korean War' 외에도 '잊혀진 전쟁(The Forgotten War)', '알려지지 않은 전쟁(The Unknown War)'이라고 흔히 부르며, 한국 전쟁을 다룬 다큐멘터리들은 대체로 이런 제목들이 붙는다. 형식을 갖춘 문서의 경우가 아니면 오히려 이 쪽이 더 흔하게 보인다. 동 제목의 한국전쟁을 소재로 한 게임도 있다. 당시 미국 대통령 해리 S. 트루먼의 이름을 따 'Truman's War(트루먼의 전쟁)'라고도 부른다.

중국측에서는 '항미원조전쟁(抗美援朝战争)'이라고 부른다. 미국에 대항해서 조선(북한)을 도와준 전쟁이라는 뜻. 이런 6.25 전쟁에 대한 중국의 인식이 한국과의 국교 수립 이후 문제가 되자 중국에서는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남침으로 발발하여 중공군이 개입하기 이전까지는 '조선전쟁', 중공군이 개입하기 시작한 1950년 10월 말부터 종전까지를 '항미원조전쟁'으로 구별해서 불러야 한다는 학설이 주장되기 시작했다. 즉 6.25 전쟁의 개전 당시인 조선전쟁은 남북한 간의 내전에 불과하나, 미군을 주축으로 한 UN군의 진격으로 한만 국경에까지 도달하는 등 중국이 위협받기 시작하자 중국을 지키기 위해 북한을 도와 참전한 전쟁인 항미원조전쟁은 구별되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항미원조전쟁의 개념을 완전히 부정하면 당시 중공군이 침략군이 되어버리며, 그렇다고 계속해서 밀고 나가자니 한국과의 외교 마찰이 발생하는 모순을 피하기 위해 만들어낸 조금은 억지스러운 개념. 하지만 중국을 중심으로 보자면 아주 틀린 말은 아니기는 하다. 물론 우리의 입장에서는 받아들이기 곤란한 개념인 건 똑같지만.

일본에서는 조선전쟁(朝鮮戦争, ちょうせんせんそう)이라고 부르는데, 딱히 비하 명칭은 아니고 일본에서는 한반도를 '조선반도'라고 부르기 때문에 그냥 고유명사 같은 것이다. 아니, 애초에 남한을 제외한 한자문화권에서는 남북한을 어우르는 명칭이 조선(朝鮮)이다.

 

 

 


4.2 외국군의 참전과 국제적 인식

당사국인 대한민국과 북한에 더해, 전투병을 파병한 참전국의 숫자로 보면 UN군 16개국(미국 이외에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벨기에, 룩셈부르크, 그리스, 터키, 필리핀, 태국, 콜롬비아, 에티오피아,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캐나다, 남아프리카공화국)과 중국의 총 17개국. 의료지원부대를 파병한 국가는 스웨덴, 인도, 덴마크, 노르웨이, 이탈리아[32], 체코슬로바키아(여긴 북한 편) 6개국이다. 그 외에 물자 지원을 포함, 대한민국을 지원한 국가는 현재까지 밝혀진 것만 총 67개국이다.

6.25 전쟁은 한편으로 역사상 가장 많은 국가가 단 한 나라(대한민국)를 돕고자 지원한 것으로 기록된 전쟁이며 이에 따라 기네스북에 오른 전쟁이기도 하다. 당시 대한민국에 병력, 물자, 전후복구를 지원한 나라는 무려 67개국으로, 당시 세계 국가들 중 무려 73%에 달한다. 이 중에는 아이티, 인도네시아처럼 별다른 이해관계가 없거나 경제력이 낙후된 국가들조차 포함될 정도이다. 특히 영국이나 프랑스 등은 이전에 2차 세계대전까지 타국의 침공을 당했던 경험도 있었기 때문에 이들 국가들은 그 때의 참상을 기억하면서 참전하였다고 한다.

이는 개전 당시 북한의 선전포고 없는 무력침공이 전세계적으로도 천하의 개쌍놈들이나 하는 짓으로 취급되었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근거 중 하나이기도 하다. 관련 기사 이렇게 북한이 천하의 개쌍놈들 취급을 받은 이유는 역시 이 무렵이 2차대전이 막 끝난 무렵이었다는 사실 때문일 가능성이 크다. 2차대전의 악몽이 가시지 않은 통에 침략전쟁이 일어났으니 당연히 세계의 시선이 곱지 않을 수밖에 없었던 것.

이외에 소련과 일본도 비밀리에 참전하여 각각 항공 지원과 소해 임무를 담당했다. 참전한 소련 조종사들은 중국인민지원군으로 위장하기 위해 중국어조선어 학습을 받았지만 치열한 교전 중에 낯선 외국어를 쓰는 것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기 때문에 스탈린에게 간절하게 부탁해서 승낙을 받아 실제 작전 중에는 그냥 러시아어로 교신했다고 한다. 물론 그 전에도 긴급상황시 러시아어로 된 무선통신이 들리는 경우를 UN군이 밥 먹듯이 캐치하고 보고했으나, 소련군이 참전했다는 사실이 외부로 알려지면 제3차 세계대전이 일어날까 두려웠기 때문에 해당 보고를 받은 상부 및 지도자층을 포함해서 다 모르는 척했다고 한다.[33]

참전국의 숫자만 따지면 위에서도 밝혔듯이 무려 세계 73%의 국가가 대한민국을 지원했으며 북한측에도 막대한 소련의 병기와 중국의 전투병이 지원되었으므로, 6.25전쟁은 거의 세계대전에 준하는 규모의 대규모 전쟁이었던 것이다. UN군의 절대 다수(90% 정도)가 미군이었으나 67개국의 지원국 가운데에는 꼭 병력 지원만 한 나라만 있었던 게 아니라 물자와 의료진, 기술자를 지원한 나라도 역시 매우 많았기 때문에 단순히 병력만으로 지원국을 규정하는 것은 편협한 시각이라고 할 수 있다.

유엔군으로 참전한 일부 국가의 경우, 이들 나라가 미국과의 특별한 관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한국을 지원했다던가, 2차대전 직후 미국 눈치를 안 볼 국가가 없다면서 이들 국가가 유엔군으로 참전한 이유를 단순히 미국 눈치를 보고 미국에게 잘 보이기 위한 것이라고 정의하는 주장이 있다. 하지만 이는 완전히 넌센스다. 유럽 참전 국가들은 나토 창설 멤버이기 때문에 참전했다고 치더라도 태국, 에티오피아, 호주, 뉴질랜드, 캐나다, 터키, 남아공은 미국의 뜻과는 별개로 참전한 것이다. 또 15개국 군대가 독자적인 작전을 수행한 게 아니라 미군에 배속되어 전투를 했다고도 하는데 이 또한 넌센스다. 미군을 포함한 모든 병력은 유엔군 소속이었고 그 수장이 더글러스 맥아더였을 뿐이다.

사실 UN군의 지휘권이 미군 장성에게 돌아간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이다. 한국군이 1950년 7월 초 북한군의 공격을 막고 있는 동안 유엔의 '한국 군사원조 결의'에 따라 미국의 육, 해, 공군이 참전했고, 이어 영국의 해군과 호주의 해, 공군, 뉴질랜드 해군도 전선에 투입됐으며, 이외에도 다수의 유엔 회원국이 참전을 준비하고 있어서 이들에 대한 지휘 통제 문제가 대두됐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트리그브 리 유엔 사무총장은 7월 3일 6.25전쟁의 가장 무거운 짐을 지고 있는 미국이 유엔군을 지휘하도록 제의했다. 결국 대한민국 방위를 위한 회원국들의 군사행동에 통일성을 유지하고자, 안전보장이사회는 7월 7일 미국이 작성하고 영국과 프랑스가 제안한 '유엔군사령부 설치'를 의결함으로써 유엔군을 지휘하는 통합군사령부가 발족하게 됐다.

이 결의안의 주요 골자는 안전보장이사회를 대신해 한국에서 침략자 북한과의 전쟁을 수행할 수 있는 권한을 미국의 대통령에게 위임하고, 유엔 회원국들이 파견한 군대를 미국의 통일된 지휘하에 둔다는 것이다. 유엔 사무총장은 초대 유엔군사령관에 미 극동군사령관인 맥아더 장군을 임명하고, 그에게 "미국의 작전 임무는 국제 정치상 어디까지나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지원하에 이루어진다"는 지침을 전달했다. 유엔 회원국 중 대부분의 국가가 지지하는 가운데 결성된 유엔군은 한국에 대한 직접적인 책임을 갖고 있으며, 파견 병력 규모와 지원능력 면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한 미국에 의해 좌우될 수 밖에 없었다. 미국 이외의 국가의 참전은 주로 미국의 국무부와 트리그브 리 유엔 사무총장의 협의하에 이루어졌다. (출처: <6.25전쟁 프랑스군 참전사> - 국가보훈처 편저, 2004년)

이와 같이 UN군의 혼란스러운 지휘체계를 안정시키기 위해 UN 안보리와 회원국들이 미군 장성에게 UN군 지휘권을 양도한 것일 뿐, UN군이 단순히 미군의 시다바리 역할을 했다고 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이 전쟁을 보는 시각에는,

  • 미국으로 대표되는 자유주의 진영과 소련으로 대표되는 사회주의 진영을 각각 남북이 대리자의 역할로 전쟁했다는 대리전으로 보는 시각.
  • 남북의 국내전으로 보는 시각. 단 이 시각의 경우 남쪽이든 북쪽이든 각각 처음부터 미국과 소련, 중국의 영향을 강하게 받아 왔었던 데다가([34] 미국과 중국은 자신들의 군대를 보냈었던 만큼(서로 UN군이니 의용군이니 하는 수를 쓰긴 했지만) 이렇게 보는 사람은 거의 없다.
  • 마지막으로 대리전이 아니라 자유주의 진영과 사회주의 진영 자체가 맞부딪힌 세계전으로 보는 시각이 있다.
참고로 소련에서는 미 공군에 대항하기 위해[35] 전투기 조종사를 파견했다. 공식적으로는 그 사실을 숨기기 위해 교신은 중국어나 한국어로 하고 비행기도 북한/중국산으로 위장하도록 지시했다. 이 사실은 자유 진영과[36] 공산 진영(특히 소련)은 모두 전쟁에 개입하면서도 제3차 세계대전으로 확전될 것을 우려해 은폐했으며 더불어 이 전쟁이 한반도 외부로 퍼지지 않도록 힘을 썼다.[37] 당장 1951년 UN군이 북쪽으로 북상할 때쯤 맥아더가 트루먼 대통령과의 마찰이 생겼는데, 맥아더가 중국(정확히는 만주 지역)에 핵폭탄을 사용해서라도 전쟁을 유리하게 이끌어야 한다고 주장하자 트루먼은 전쟁의 확대를 우려해서 1951년 4월 11일 맥아더를 해임시킨 바 있다. 이러한 전쟁의 성격으로 인해 한국전쟁은 냉전 시대 세계 각지에서 벌어진 대리전의 시초로 평가된다.

 

 

 

4.3 유엔과 국제 세계의 시각 및 활동

6.25전쟁은 사실상 거의 유일하게 유엔군이 전쟁의 한 쪽 당사자로 참전한 전쟁이다.

유엔이 성립한 후 개입한 전쟁이나 국제분쟁에서 유엔은 거의 예외 없이 평화유지군, 즉 양측의 중재자 역으로 참여하였던 반면, 6.25전쟁에서만큼은 유엔군이 UN 깃발을 달고 북한 및 중공군과 전투를 수행하였다. 그러나 이후 벌어진 전쟁에서 유엔군이 한 쪽 일방에 유엔 명의로 참전한 적은 없다. 베트남 전쟁, 걸프 전쟁, 이라크 전쟁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걸프 전쟁'이나 '리비아 내전'처럼 '안전보장이사회 승인'을 얻은 전쟁이라 하더라도 거기에 참여한 각 나라 군대들은 각자의 명의로 참전하였다.

또한 현재 각지에 투입되어 활동하는 UN평화유지군들도 차량을 흰색으로 칠하고 기존의 분쟁을 억제하고 양측의 충돌을 막는 역할만을 하지 한쪽편에서 전투를 치르지는 않는다. 물론 어느 한 쪽이 평화유지군을 먼저 공격한다면 그에 대한 방어전이야 수행하지만.

4.4 잊혀진 전쟁(The Forgotten War)

미국에서는 제2차 세계대전, 베트남 전쟁에 비해서 관심이 좀 덜해서 이런 별명이 붙었다. 항목참조.

4.5 기타

  • 모택동의 아들인 모안영은 이 전쟁에 참전했는데 전사했다.# 당시 중공군 총사령관 팽덕회는 혹시라도 모안영에게 위해가 끼칠까봐 전선으로 보내지 않고 사령부에서 러시아어 통역관으로 근무하도록 했는데 사령부가 네이팜탄 폭격을 맞았다. 모택동은 아들이 전사하자 며느리의 호소에도 불구하고 시신을 중국으로 운구하지 않고 전사한 그 자리에 무덤을 만들라고 지시했고 모안영의 영구는 아직까지 북한에 묻혀 있다. 이 묘는 중국과 북한의 혈맹관계를 상징하는 중요한 정치적 도구로 사용되고 있다.

  • 2013년 6월에 뜬금없이 고교생들의 6.25 전쟁 인식이 논란이 되고 있다. 서울신문이 한 여론조사 기관에 의뢰해서 고교생들을 대상으로 조사한 바에 따르면 고교생의 69%가 6.25 전쟁을 북침이라고 생각한다고 응답한다는 기사가 나왔고 이 기사는 보수성향의 국민들에게 심한 충공깽을 일으켰다. 심지어 박근혜 대통령까지도 이 기사를 인용하면서 역사왜곡 문제를 바로잡겠다고 발언하기까지 했으나... 실제 이 기사와 여론조사 설문을 분석해보니 오해하기 쉽게 만든 설문이었다고 한다. 애당초 이 기사의 의도 자체는 고고생의 6.25 전쟁 인식문제를 다룬게 아니라 한국사 교육의 문제를 지적하기 위한것이었는데 고교생 69%가 북침이라고 생각한다는 말에 낚여서 파닥거린 보수성향의 국민들과 박근혜 대통령은 이 대목에만 폭발했다는것. 게다가 설문의 내용도 문제였는데 한국전쟁을 남침이라 생각하는가 북침이라 생각하는가라고 단순하게 물어본것이 화근이라는 지적이 많다. 실제 한 고등학교 교사가 학생들에게 물어보니 북침을 북한이 침략했다로 아는 학생들이 많았다는것. 게다가 2004년 보훈처의 여론조사에서도 학생들의 겨우 0.7%만이 남한이 북침했다로 응답했고 거의 대다수는 북한의 남침이라고 올바로 파악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실소를 금할수 없는 사건. 왜 5.18등의 왜곡도 강하게 대처하겠다고안하시고? 그리고 전교조에서 보훈처가 진행한 여론조사와 같은 질문으로 서울지역 중고생 1499명에게 설문조사 한 결과 89.4%가 6.25 전쟁은 북한이 일으킨거라고(남침) 응답했다. 외우기 어렵다면 다음처럼 생각하자. "손가락이 항문(똥구멍)을 침범한 걸 '똥침'이라 한다. 북한이 남한을 침범한 걸 '남침'이라 한다." 국방부는 이 소식을 들은 후, 한자어에 미숙한 학생들이 헷갈리는 경우를 줄이기 위해 교육용 용어를 '남침' 에서 '북한의 남침' 으로 좀 더 명확하게 들리도록 수정했다.

5 관련 항목

5.1 6.25 전쟁 참전국 및 지원국

2012년 5월 당시 6.25 전쟁 참전국 명단이 새로이 공개되었는데 정확히는 63개국으로 밝혀졌으며 기존 참전국과 의료지원국을 제외하고 물자지원 및 물자지원 의사 및 표명 등을 밝혔던 국가가 추가로 공개되었다.

5.1.1 전투 및 병력 파병국

파병 국가 파병 인원 전사자 실종자 부상자 포로
미국 480,000명 36,516명[38] 8,716명 92,134명 7,245명
프랑스[39] 3,763명 287명 7명 1,350명 12명
영국 63,000명 1,109명 1,060명[40] 2,674명 -
캐나다 26,791명 516명 - 1,042명 -
콜롬비아[41] 1080명 163명 2명 448명 28명
그리스 5,540명[42] 192명 - 543명 3명
에티오피아[43] 6,000명 - - - -
남아프리카공화국[44] 826명 20명 8명
네덜란드[45] 5,322명 124명 - 463명
뉴질랜드[46] 1,389명 33명 -
오스트레일리아 17,000여명[47] 339명 - 1,200여명 -
룩셈부르크[48] 78명 2명
벨기에[49] 3171명 - 5명 478명 -
터키[50] 15,000여명 721명 168명 2,111명 216명
태국 [51] 129명 5명 1,139명 -
필리핀 1,273명 112명 - 229명 -

5.1.4 물자지원 표명의사 국가

5.7 사용된 전차


5.7.3 공산당

6 관련 자료

아마존에서 'Korean War'로 검색하면 5263종의 책이 검색된다. 절반 이상이 참전용사들의 수기.

우선 한국전쟁에 관한 저작의 고전으로 일컬어지는 박명림 교수의 『한국전쟁의 발발과 기원』은 한국전쟁을 학문적으로 이해하려면 반드시 읽어야 하는 저작 중 하나다.

퓰리쳐상을 수상한 저명한 저널리스트 데이비드 핼버스탬(David Halberstam)저《콜디스트 윈터: 한국전쟁의 감추어진 역사》(The Coldest Winter)는 꼭 읽어보도록 하자. 한국전을 둘러싼 열강들의 정치싸움과 맥아더의 삽질을 잘 알게 될 것이다. 단, 미국인이 지은 책인 만큼 한국의 시각과 한국군에 대한 내용은 전무하다시피 하니 이 점은 참고하도록 하자.

군 복무 중인 밀덕이라면 한국군이 편찬한 <한국전사>#를 열람해볼 수도 있다. 몇 가지 버전이 있지만 21세기 들어서 아주 크고 아름다운 파란색 표지 버전이 새로 출간되고 있으며, 2010년 1월 기준 6권까지 나와 있다. 이 <한국전사>는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에서 웹으로도 공개돼 있는데 PDF로 다 공개돼 있으니 관심 있으신 위키러들은 언제든지 참고 가능. 세금이 아깝지 않은 훌륭한 사례 중 하나다. 물론 책으로 소장하려면 구입도 가능하다.

그 이전인 1970년대 ~ 1980년대 출간된 서적들은 대체로 한문의 압박이 좀 크다. 특히 전투사는 아직 재간이 돼 있지 않다. 한문이 후달린 밀덕에겐 약간 아쉬운 부분. 하긴 영어, 한문은 기본에 일본어/러시아어/독일어 해독능력 하나쯤은 가지고 있는 코어 밀덕에게는 문제가 아닐지도.

밀덕질 / 깊숙한 역덕질은 아니고 개론적이지만 전반적으로 꼼꼼히 설명된 자료를 찾는다면, KBS에서 방영한 10부작 <한국전쟁> 다큐멘터리를 추천할 만하다. 전쟁의 배경, 당시 한반도와 관련된 국제적 역학, 관련 인물들의 증언 등이 잘 소개되어 있으며, 한편으로 비참한 전쟁의 충격에 대한 당시 '휘말린' 사람들(참전해 끔찍한 기억을 증언하는 군인이나 학살이 일어난 지역의 주민 등)에 대한 인터뷰도 많이 담겨 있다. 다만 DVD 판매 때문에 KBS 홈페이지에서 다시 보기는 할 수 없으며, DVD로 구입해야 하는데 선례들이 그렇듯이 좀 비싼 편.

7 관련 작품

7.1 문학

7.2 영화

한국 영화가 아닌 것은 괄호 안에 제작국가를 명시하였다.

7.4 PC게임

----
[1] 다만 대한민국은 휴전협정에 참여하지 않았기 때문에 정전이라고 보는 시각도 있다.
[2] 대표적인 수정주의 학자로, 미국 외교 기밀 문서가 공개되면서 그에 기반해서 냉전사를 해석하였다. 참고로, 미국의 외교 기밀 문서들은 25년을 시한으로 공개된다.
[3] 사실, 북한군이 미리 전쟁을 준비했다는 가장 큰 증거는, 남침 직후 수십~수백킬로미터 수준의 작전기동을 했다는 것 자체다. 군대 갔다 온 사람은 누구나 알겠지만, 미리 계획을 세우고, 충분한 준비를 해 두지 않았다면 부대는 자기 주둔지를 떠날 수 없다!
[4] 북한이 자주성이 없는 정권이라고 까기 위해 이 주장을 인용하는 경우도 있다. 결국 이래도 까고 저래도 까는 것.
[5] 출처는 kbs역사스페셜 한국전쟁 최대 미스터리! 북한군, 왜 3일간 서울에서 머물렀나?
[6] 육군의 육탄 십용사도 이 당시 이야기다.
[7] 인구의 60 ~ 70%가 농업에 종사하고 있었다.
[8] 당시 연대장은 백선엽 장군의 동생 백인엽 대령.
[9] 정치적인 의미이기도 하지만, 당시 소련은 유럽에서 불원간 미-서유럽 동맹과 공산권의 무력충돌이 일어날 경우 전력 면에서 소련이 열세하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10] 단 이는 전쟁이 이미 시작된 뒤에 보낸 편지라는 점에 주의하자. 스탈린의 주장은 '변명'일 가능성도 크다.
[11] 북한 영화중 하나에서는 그런거 없이 그냥 북한군이 몰려오자 철도변에서 찌질대다가 비겁하게 손을 들어주신다.
[12] 여담으로 미국의 역사학자 존 톨랜드가 유족을 찾아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당시 딘 장군이 얻어먹었던 음식 중 하나가 마늘 장아찌였는데 딘 장군은 마늘 장아찌의 맛에 매우 감탄하여(...) 일부러 하산해서 더 얻어오기까지 했다. 흠좀무
[13] SBS에서 한국전을 배경으로 만든 다큐멘터리에서는 확인된 사망자만 600만이라고 방송하기도 했다.
[14] 처음부터 군대가 아니였고 이를 계승한 자위대는 형식상 군대가 아니다.
[15] 다만 전쟁이 터지자 지지율이 큰폭으로 상승해한건 사실이다.
[16] 이 때 이승만은 도리어 김 장군을 사임시키려 했다고 한다.
[17] 그러나 차 총경은 화엄사 소각 명령에 불복종한 것과 1953년 9월 사살한 남부군 총사령관 이현상의 시신을 직접 수습하여 화장한 유골을 수목장시켜준 것이 화근이 되어, 휴전 후 지방 경찰서장 등 한직만 전전하는 인사상 불이익을 당했다. 결국 공주 경찰서장으로 재직 중이던 1958년 8월 9일, 가족들과 함께 금강으로 피서를 갔다가 수영 도중 심장마비로 인해 향년 38세로 세상을 떠났다. 차 총경은 2011년 에야 6.25 때의 공적이 인정되어 뒤늦게 경무관으로 추서되었다.
[18] 물론 당시에 남았던건 태조, 세조와 숙종 이후의 임금들의 어진만이 있었다.
[19] 다만 왕실 족보인 선원보감에 어진이 남아 있는 왕들이 있긴 하나, 질은 당연히 어진에 비해 조악하다.
[20] 북한이 빨치산을 도울 생각이 없었긴 하나 만일 이러한 세력이 장기간 남한 내에서 존재한다면 어떻게든 이용하려고 했을 것이다. 최악의 경우 남베트남의 경우처럼 장기간에 걸친 내전과 암살, 테러 등으로 국민의 피로도는 더 증가했을 수도 있다. 일어나지 말아야 할 전쟁이지만 그래도 일어났다면 짧게 끝나는 것이 차라리 낫다.
[21] 애초에 산미증식계획으로 늘어난 쌀이 어디로 갔는지를 생각하면 이해가 쉽겠지만.
[22] 이 의미는 냉전 붕괴와 함께 많이 퇴색되었다.
[23] 1970~80년대의 급속한 경제발전.
[24] 1987년 6.29 선언으로 대통령 투표권이 국민에게 돌아옴으로서 일단 달성. 그 이전은 민주주의라고 부르기에는 힘든 상황이었다. 독재 정치에 군사 정변, 부정 선거 등등……
[25] 2010~2011년 아랍 민주화 운동에서 미국 정계에서는 아랍 국가들이 한국 모델을 따르게 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많이 나왔다.
[26] 위키백과에서는 이 명칭을 쓰고 있다
[27] 개전 1950년 6월 25일, 휴전 1953년 7월 27일.
[28] '사변'은 선전포고 없이 다른 나라를 공격하는 것이다.
[29] 한국전쟁, 6.25 사변은 이 항목으로 리다이렉트가 걸려 있다.
[30] 북한의 정통성이 없음을 보다 강조하는 표현이기도 하다.
[31] 1950년이 경인(庚寅)년이었다. 즉 경인년에 공산당이 일으킨 난.
[32] UN에도 가입하지 못한 상황에서 적십자 소속의 의료지원팀을 꾸려 파견했다.
[33] 사실 소련도 공군력 딸리는 북한과 중공을 지원하긴 해야겠는데 대놓고 지원하면 자기들이 귀찮아지니까 비밀스럽게 진행했다. 한마디로 말해 양쪽이 알고도 모른 척 한 셈
[34] 당장 북한이 초기공세 때 쓴 T-34 전차를 과연 어디서 구했을까?
[35] 당시 북한과 중공은 공군력이 미국에 비해 배우 열세였다.
[36] 아무리 위장을 한다 해도 조종사는 소련인이고 격추되는 일도 있었기 때문에 당연히 그 당시에도 자유 진영이 이 계획을 알게 된다.(이른바 북한 전투기를 격추시켰더니 조종사가 코쟁이)
[37] 그래서 소련은 소련 붕괴전까지 자신들의 전쟁 개입을 부인했으며 실제로 휴전협정에도 참여하지 않았다.
[38] 이중 2,830명은 질병이나 사고로 인한 비전투 사망인원.
[39] 랄프 몽클라르 중장은 이 전쟁에 참전하기 위해 자신의 계급을 스스로 중령으로 강등시키고 참전했다. 하지만 미군으로부터 그대로 중장 대우를 받았다.
[40] 포로인원과 합친 수
[41] 남아메리카 및 스페인어 국가 중 유일하게 지상군을 파병하였다.
[42] 8명의 여성간호장교 포함
[43] 하일레 셀라시에 1세 황제가 특별히 자신의 친위대를 내줘서 파병했다. 단 에티오피아에 제대로 된 상비군이 친위대 밖에 없었다고 한다.
[44] 아프리카의 잊혀져버린 6.25 참전국. 대부분의 사람들은 6.25 전쟁에선 에티오피아만이 아프리카 유일의 6.25 전쟁 참전국으로 기억한다.
[45] 과거 식민지였던 남아메리카 수리남(1975년 독립) 등 속령지역 용사 들도 동원시켜 참전했다.
[46] 마오리족까지 탈탈 털어서 참전했다.
[47] 지상군 5,038명 / 해군 구축함 2척, 3,320명 / 공군 1개 전투비행대대
[48] 벨기에 - 룩셈부르크 연합으로 파병되었다.
[49] 벨기에 - 룩셈부르크 연합으로 파병되었다.
[50] 타흐신 야즈즈 소장의 지휘하에 미국과 영국, 캐나다 다음으로 많은 병력을 파병했다.
[51] 1개사단, 1대의 C-47, 4대의 프리킷함, 1대의 수송선
[52] 놀랍게도 공산권이었다!
[53] 한국계 미국인이며 한국전쟁 때 처음으로 한반도 땅을 밟았다.
[54] 자료에 따라서 랄프 몽클라르 또는 몽클라르라는 가명으로 표기되기도 한다. 그가 2차대전 및 한국전쟁에서 이 가명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