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보고 세력 역사적 의미
1. 머리말
흥덕왕(興德王 : 826 ~ 836) 대를 전후한 시기에 활약하였던 신라의 청해진대사(淸海鎭大使) 장보고(? ~ 841?)는 진작부터 우리 역사상 특기할 만한 경이로운 인물로 주목되어 왔다. 실로 출자조차 분명히 전하는 것이 없었던 그가 황해를 가로질러 나?당?일본 삼국을 잇는 해상교역의 왕자적 지위에 오르고 또 신라 왕실에 대하여 납비(納妃)를 시도하였음은 비록 그의 위세가 자객으로 인하여 당대에 허무하게 마감되었다고 할지라도 일찍이 그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운 큰 사건이라 아니할 수 없다.
따라서 그간 그러한 장보고의 행적과 관련하여서는 여러 모로 검토되어 왔다. 그의 출자로부터 입신 , 해상(海商)으로의 진출 , 청해진의 설치 및 신라 ?당 ?일본 삼국의 교역과 신라 조정에의 막강한 영향력 행사 , 그리고 그 세력의 소멸에 이르기까지의 일대 활약상이 당시의 시대적 상황 및 그에 따른 역사적 해석과 함께 자세히 검토되어 왔다.
본고는 그러한 기왕의 연구에 기초하면서 장보고 세력의 흥망이 특히 신라사의 전개 과정과 관련하여 차지하는 위치가 어떠한 것인가를 이해해 보고자 한 것이다.
2. 황해교역과 신라인의 대당 진출
황해를 중심으로 하는 연안세력의 교역은 이미 고조선 시기부터 활발히 진행되어 왔다.
그리고 그 교역로는 특히 선진세계로의 접속이 서편으로만 가능하였던 당시 한반도 내의 세력들에게는 곧 그 발전의 성패가 달린 것이기도 하였다. 따라서 진작부터 한반도 내의 여러 세력을 장악하고자 하는 자는 의당 그 황해를 통한 대중국 교역로를 제어하고자 하였으며 , 그로 인하여 한민족 지역의 여러 세력들 간에는 때로는 중국의 세력들까지도 결부되는 가운데 크고 작은 정치적 충돌이 있어 왔다.
일찍이 그 전쟁의 빌미 중 하나가 한반도 남부에 있었으리라고 여겨지는 진국(辰國)이 한(漢)과 통교하고자 하였으나 고조선이 그를 가로막았기 때문이라고 전하는 고조선과 한의 전쟁이 그것을 단적으로 보여 주는 것이라 하겠다. 또 그러한 고조선을 이어받은 낙랑을 위시한 한군현에 대한 고구려와 백제의 끝없는 공격 , 낙랑 멸망후의 고구려 ? 백제의 쟁패전 등에도 그 이면에는 역시 그러한 요소가 개재된 것이라 하겠다. 그리고 그러한 상황은 고구려와 백제의 사이를 가르고 경기만 일대를 장악하여 대중 교역로를 확보함으로써 후일 삼국통일로 이어지는 일대 전기를 마련한 신라의 국가적 발전의 예에서 보다 확실해진다. 그런데 이렇듯 신라대에 이르기까지의 황해교역에서 좀더 유의할 것은 신라의 삼국통일 이후 그 양상이 다음과 같이 두가지 점에서 변화를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우선 지적할 것은 그 교역의 중심에 관한 것이다. 당초 황해를 둘러싼 교역은 고조선 - 낙랑 - 고구려 등으로 이어지면서 그 북부 해안을 중심으로 연안 해로를 따라 남으로 연계되어 왔다.
그러던 것이 신라의 삼국통일 이후에는 경기만과 산동반도를 잇는 선의 남쪽에 중심을 두고 황해를 가로질러 이루어지게 되었다는 점이다.
다른 하나는 그러한 교역로를 따라 이루어진 한민족의 중국 방향으로의 진출에 관한 것이다. 황해교역을 주도하였던 한민족계 세력들은 이미 삼국기부터 사적 또는 국가적으로 중국쪽 연안에 그 교역의 근거지를 마련하기도 하였던 것으로 보이며 , 또한 식자층은 보다 넓은 세계를 동경하며 새로운 문물을 접하고자 중국 방면으로 유학의 길에 오르고 있었다.
그러나 신라 통일기에 와서는 일시적 또는 특수한 목적에서만이 아닌 농업정착의 성격을 띤이주가 산동반도와 그 인근의 해안지역에서 이루어지고 있었으며 , 능력 있는 자들의 대중국 진출에는 자기 사회에 대한 비판 의식이 한층 강화되는 면을 보여 가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이러한 변화는 우선 연안항로를 벗어날 수 있는 항해술의 발달 , 그리고 당시 신라의 교역상대국인 당이 극히 개방적이었다는 상황적 조건을 배경으로 가능해진 것이었다.
그러나 좀더 근본적으로는 신라의 삼국통일에 따른 한반도 내에서의 정치적 ? 사회적 변혁에서 , 좀더 좁혀 말하자면 신라사의 전개 과정에서 이루어졌던 것이라 하겠다. 즉 전자의 경우는 신라의 삼국통일 이후 예성강 이남의 한반도가 신라영역으로 합일되고 그에 반해 종래 북부의 중심지였던 대동강 유역이 황폐화되는 정치적 상황의 변화에 기인한 것이었다.
후자의 경우는 크게 보아 이미 삼국 항쟁기로부터 시작되었던 신라사회의 산업발달과 영역확대에 따른 질적 변화와 원래의 신라 귀족 중심체제인 골품체제(骨品體制)와의 괴리에서 오는 정치 ? 사회적 이완현상이라 할 수 있다.
좀더 부연하자면 신라는 삼국통일 이후에도 종래의 진골(眞骨) 중심의 골품체제를 존속시켜 그 정치적 중심을 잃지 않으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왕실 중심의 집권화 시책을 전개하여 넓어진 영역을 효율적으로 제어하고자 하였는데 , 대체로 중대(中代)에는 그를 통하여 정정의 안정과 산업의 발달을 보았던 것이다. 그러나 하대(下代)에 이르러서는 그러한 왕실의 전제화는 결국 진골 귀족의 왕위쟁탈전을 불러들였고 , 그러한 정정의 이면에 결부된 산업의 발달은 대토지 소유를 가능케 하여 많은 무전(無田) 농민을 배출하는 결과를 가져왔으며 골품체제는 점차 비진골(非眞骨) 귀족들의 반신라적 성향을 강화시키는 것이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은 신라의 정치적 통제력의 약화와 함께 흉년 등으로 타격을 입은 농민들을 이미 그 중심이 남쪽으로 이동되어 있던 황해 무역로를 따라 멀리 중국 연안으로 집단 이주케 하였으며 다수의 능력 있는 자들의 도당(渡唐)을 부추기기에 이르렀다. 여기에서 장보고 도당과 그 세력의 기반이 된 재당 신라인 집단의 형성이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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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본 발표문의 핵심 내용은 대체로 필자가 이미 발표한 논문 「張保皐의 政治史的 位置」(위의 『張保皐의 新然究에 수록 )에 기초한 것임을 미리 밝혀둔다.
7) 金文經 앞의 글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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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장보고의 출신과 세력 형성과정
장보고의 이름은 신라 , 당 , 그리고 일본측 자료가 각기 그 표기를 달리하고 있다. 그를 통해 유추해 보건대 대체로 그의 본래 이름은 활 잘 쏘는 아이라는 뜻의 ?활보?였다고 생각되며 신라에서는 그를 표기할 때 훈과 음을 섞어 ?궁복(弓福)? 또는 ?궁파(弓巴)?라고 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도당(渡唐) 이후에는 그러한 의미에서 ?장(張)?이라는 성을 취하고 어미의 음에 따라 ?張保皐?라는 중국식 성명을 만들어 사용하였으며 후일 일본에서는 그의 부유함을 들어 張寶高로 표기 하였다고 생각된다.
그의 출신에 관련하여서는 다만 ?해도인(海島人)?이었다든가 또는 ?측미(側微)?하였다는 전문(傳文)만이 있어 대체로 그가 후일 청해진을 설치하였던 완도(莞島) 지방의 미천한 신분 출신이 아닌가 하는 추측이 있을 뿐이다. 그러니 그가 뛰어난 무재(武才)의 소유자였다고 전하고 있음을 보면, 단순한 생업 백성이라기 보다는 변방의 도서에서 일망정 그 향읍에서는 나름대로 지배적 위치에 있는 , 다시 말하자면 토호(土豪) 집안 출신이 아니었을까
하는 추측을 갖게 한다. 이렇듯 신라의 변방 도서 출신으로 추측되는 장보고가 처음 그 역량을 발휘하여 세인의 눈에 뜨이게 된 것은 당시 어느 수준까지는 외국인에게도 극히 개방적이었던 당(唐)에서의 일이었다.
그의 도당 시기나 당에서의 자세한 행적은 전하지 않지만 그가 출중한 무재의 소유자로 나이 30세경에 서주(徐州)의 무령군(武寧軍) 소장(少將)이 되었음을 전하고 있어 그가 스스로의 능력으로 무장으로 입신하였음을 알려 주고 있다.
그런데 820년대 초반에는 이미 그의 활동범위가 일본에까지가 닿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따라서 당에서의 장보고의 해상(諧商)으로의 변신과 그 세력의 형성은 이미 이 시기에는 이루어졌던 것으로 추측되며 , 실제 당시 산동지역의 정세나 무령군의 형편도 또한 그러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 주고 있다. 819년에는 절도사(節度使)로 4대 50여년에 걸쳐 산동지역을 장악하고 또 신라 ?발해 교역을 통제하던 고구려 유민 출신 이정기(李正己) 일가가 몰락하였으며 대략 821년경에는 그를 토벌할 때 선봉에 선 무령군에 감군(減軍)이 있었던 것으로 예상된다. 이때 대체로 장보고 또한 군에서 나와 이 지역 신라 거류민 집단을 규합하는 가운데 특히 이정기 일가의 몰락으로 일시 공백상태가 된 황해무역권을 장악하게 된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당에서의 그의 활동은 대체로 당의 연안항로와 나?당 항로의 중계지가 될 수 있었던 산동반도의 돌출부인 적산포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일본승려 엔닌(円仁)의 견문에 의하면 그는 그 곳을 중심으로 산동반도로부터 남쪽으로 회수(淮水)와 양자강(揚子江)어구에 이르기까지의 해안과 강안 지역에 분포하여 자치적인 집단을 이루고 있던 이른바 ?신라방(新羅坊)?또는 여타 신라인 촌락의 총수격으로 성장하여 그들 신라인을 결속시키는 가운데 늦게까지 그 지역 해운업을 독점하다시피한 것으로 유추된다. 그리고 특히 적산촌 산중에 위치하였던 그의 원찰(願刹)인 법화원(法華院)은 그의 영향력 아래 있던 신라인들의 정신적 구심점의 역할을 한 것으로 전하고 있다.
위와 같이 일단 당에서 이미 세력을 구축하여 일본에 이르기까지의 해상교역에 주역으로 성장한 장보고는 828년에는 다기 귀국하여 당시 국왕인 흥덕왕에게 해적들이 신라인을 약탈하여 당에 매도(賣渡)하는 것을 막는다는 구실로 그의 고향으로 생각되며 또한 신라와 당 및 일본을 잇는 해상교역의 요충이기도 한 지금의 완도에 청해진을 설치할 것을 청하였다.
그리고 대략 그 인근 주민들의 동원 내지 관할권을 의미한다고 생각되는 ?졸 만인(卒萬人)?을 얻어 그 대사에 취임하였다. 이로써 좀더 확실한 새로운 세력기반을 구축하고 동시에 공적인 지위까지 획득하는 변신을 보였다. 그는 이제 신라의 인정을 받음으로써 국제적으로도 인정받을 수 있는 일정한 지배 영역과 직분을 얻게 되었다. 그리하여 밖으로는 좀더 격식을 차린 견당매물사(遣唐賣物使) 또는 회역사(廻易使) 등의 명칭으로 당과 일본에 교관선(交關船)을 보내는 등 그 교역의 위상을 한층 높여 갔으며 , 안으로는 신무왕(神武王) 옹립에 그 군사적 후견인으로 관여하면서 신라 조정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기에 이르러 급기야는 납비를 자청하고 나서게까지 되었다. 이에 장보고는 신라의 청해진과 당의 적산포를 양축으로 하여 황해 남부의 나 ?당 양안의 신라인 사회를 이끄는 일대 세력권을 구축하게 되었으며 그에 기반하여 명실공히 황해교역에서 왕자적 지위에 오르게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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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金文經 「赤山 法華院의 佛敎 儀式」 『史學法 』1 , 1967
16) 浦生京子 , 앞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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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장보고 세력의 정치 ?사회적 성향
장보고 세력의 기초가 되는 인적 기반은 지역별로 크게 두 집단으로 나뉘어진다. 그 하나는 적산포 중심의 도당 신라인이며 다른 하나는 청해진 관할하의 서남해안 주민들이다. 그리고 조직면에서 보면 장보고 휘하에는 그들 양 지역 주민의 통어 및 해상 활동에 요직을 맡고 참여하는 다수의 유능한 막료급의 인적 자원이 있었던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물론 장보고가 이러한 인적 기반에 밀착될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도 우선 그 처지상 동류(同類) 의식을 가질 수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라고 하겠다. 크게 보아 장보고를 포함한 그들 모두는 골품체제하의 신라 사회에서 볼 때 주변에 위치한 , 그리고 이미 또는 점차 그로부터 이탈해 가고 있는 부류들이라 하겠다.
그리고 좀더 직접적으로는 재당 신라인은 이국에서의 동족(同族)으로 , 또 청해진 관할 주민은 동향인(同鄕人) 으로서 장보고와 결석하기에 좀더 용이한 처지였다. 그리고 특히 그 막료급 인물들은 국내외에서 부랑하던 능력 있는 인물들이 다수 포섭되어 기용된 것으로 보이는데 이들은 더욱 장보고와 같은 처지라 하겠다.
그러나 장보고가 그러한 인적 기반을 이끌고 일대 세력을 이룰수 있었던 것은 동류감에 더하여 이미 노쇠한 당과 신라가 포기 하다시피한 그들의 생존에 대한 보호자 보호자 역할을 대행한 데서 가능 하였다. 우선 그가 한동안 산동 , 서주 지역을 장악하였던 절도사 이정기 일가를 토벌하는 데 선봉이었던 무령군의 무장 출신이라는 점과 그가 처음 자신의 세력으로 삼은 당시 재당 신라인 사회가 기실 자위적(自衛的) 자치집단이었음을 연결시켜 보면 그의 역할이 저와 같았을 것임은 쉽게 예상된다. 그리고 이 점은 특히 청해진 설치에서 한층 더 극명하게 드러난다. 이미 언급하였듯이 그는 신라인을 당에 노비로 약매(掠賣)하는 해적들을 소탕하고자 한다는 명분에서 청해진을 세울 것을 청하였으며 그의 설진(設鎭) 이후 해상에서 신라인 약매자가 없어졌다고 전하는 것을 보면 그가 나 ?당 연안 지역의 신라인 사회를 장악하는 데는 그 주민 보호가 지상의 명분이었다고 하겠다. 그리고 실제 청해진 자체가 군진(軍鎭)일 뿐만 아니라 그의 교관선단도 군사적 편제로 이루어진 흔적이 있음을 보면 그럴만한 실력도 충분히 갖추었다고 하겠다.
한편 그와 같은 세력의 형성 및 유지에는 또한 그의 개방적이고도 포용력 있는 인물 기용이 한몫 한 것으로 생각된다. 당시 신라와 당의 교역로상에는 신분적인 벽 때문에 입신(立身)의 한계에 부딪쳐 도당하였으나 , 당에서도 또한 이방인으로서 여의치 못하여 부랑하던 다수의 능력 있는 인물들이 내왕하고 있었다. 장보고는 그들을 막료로서 폭넓게 포섭 기용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세력을 유지하는데 상호 도덕적 신뢰성을 제고할 수 있는 종교적 배려까지 결하지 않고 있었다. 그는 당초 그의 근거지였던 적산에 이미 언급한 바 있는 선찰(禪刹)로서 법화원을 개창하였던 바 , 그것은 물론 예하 주민의 심적 구심처로 그리고 그들이 지향하는 사회정의의 실천을 위한 도량으로 이용코자 한 것이 틀림없다.
그런데 이제 다시 장보고 세력의 형성에 내재한 이러한 여러 요인을 음미해 보면 그들 집단은 이미 골품제를 근간으로 하는 기존의 신라사회로는 회귀할 수 없는 , 좀더 그 구성원의 개체성(個體性)과 안정된 생(生)이 보장되는 다시 말해 양인(良人)의 처지를 재확립하는 새로운 사회를 지향하고 있었다고 하겠다. 즉 골품체제를 고수하고자 하는 한 신라 왕조와는 병존할 수 없는 한층 진보적인 정치 ?사회적 성향을 지닌 집단이 되고 있었다.
그리고 이 점은 특히 그들 집단의 총수인 장보고와 신라 왕실의 관계에서 좀더 분명해진다.
귀국 후 장보고는 일단 신라의 권위를 빌어 청해진 대사가 되었으나 직함으로 알 수 있듯이 그는 결코 기존의 신라 관직체계에는 편입되지 않고 그 밖에서 특별한 위치로 대우 받았다. 즉 ?청해(淸海)?란 당시 다른 군진명과 비교해 볼 때 일정 지역의 명칭이라기보다는 모든 바닷길을 맑게 한다는 , 바꾸어 말하자면 모든 해상의 권한을 위임한다는 의미로도 풀이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대사(大使)?란 신라의 고유한 관명이 아닌 독립성이 강한 번진(藩鎭)의 의미를 지닌 것으로서 당시 중국의 절도사 별칭에서 유래한 것이다. 그리고 그에게 주어진 그밖의 관명적 호칭도?감의군사식실봉이천호(感義軍使食實封二千戶)?의봉작(封爵)이거나 ?진해장군(鎭海將軍)?의 장군호일 뿐이었다.
따라서 장보고와 신라 왕실의 통혼 기도는 기존의 신라체제를 고수하려 한 세력에게는 그 자체로서 자신의 존재를 부정당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이에 당시 중앙의 실권자 김양(金陽) 과 기존의 질서하에는 청해진 지역보다 우위에 있었을 것으로 여겨지는 무주(無州) 출신 염장(閻長)의 공작으로 장보고는 암살되어 제거되었으며 일단 그 세력은 소멸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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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金文經 , 「赤山 法華院 의 佛敎義式」 앞의 글
23) 浦生京子 , 앞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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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맺음말
이제까지 황해 교역로의 남하와 신라인의 대당 이주 , 장보고의 출신과 그 세력의 형성 과정 , 장보고의 정치 ?사회적 성향등을 순차적으로 살펴보았다. 이를 통하여 얻어진 내용을 다시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장보고 세력의 등장은 신라가 한반도 중남부를 통일함으로써 산동반도를 중심으로 하는 당의 연해지역과 신라의 서남해안 및 일본으로까지 연장되는 해상교역이 크게 번성하고 , 그리고 골품체제의 모순이 점차 노정되면서 신라의 변방통제가 이완되고 그 지배체제에서 이탈하는 다수의 신라인이 도당 이주하였던 시기적 상황과 일찍이 입신양명을 위해 도당한 장보고의 탁월한 무재와 영도력의 만남에서 이루어졌다고 하겠다. 즉 이러한 시기적 조건을 배경으로 그 구성원의 개체성과 안정된 생의 보장을 명분으로 하여 결성된 것이었다.
따라서 그 정치적 ? 사회적 성향면에서 볼 때 장보고 세력은 기존의 신라 지배체제와는 공존하기 어려운 것이다. 이에 납비 시도를 기화로 그는 신라의 중앙귀족에게 사주 받은 자객에 의해 제거되고 그의 세력 또한 종내는 해체되었다. 그러나 그들 세력이 이룩한 내적 지배질서는 분명 신라 사회가 안고 있는 골품체제의 한계에서 본다면 진일보한 것이었으며 비록 해체되었지만 그들 세력은 제2 제3의 그와 같은 세력의 등장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실제 곧이어 수다한 호족세력이 출현하였다. 그 중에서도 특히 경기만의 해상세력에 기초하고 나주 호족과 결탁하여 서남 해안을 장악함으로써 창업의 첫 발을 내딛고 신라 왕실과의 통혼을 통해 후삼국 통일의 주(主)가 될 수 있는 왕자적 권위를 한층 높인 고려 태조 왕건 활약상은 이를 좀더 분명히 보여준다.
― 참 고 문 헌 ―
1. 손보기 혜안 『장보고와 청해진』 1996~1997
2. 손보기 ?김문경 ?김성훈 혜안 『장보고와 21세기』1999
3. 金文經 ?金成勳 ?金井泉 리진 『張保皐』1993
4. 오수정 숙명여자 대학교 『장보고 재당 활동의 배경』1994
☞ 출처: 원광대학교 사학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