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묘호란(丁卯胡亂)과 병자호란(丙子胡亂)
'정묘호란'(丁卯胡亂, First Manchu invasion of Korea, 1627년)
1 개요 ¶
2 배경 ¶
3 전개 ¶
1627년 l월 아민이 이끄는 3만의 후금군은 앞서 항복한 강홍립 등 조선인을 길잡이로 삼아 압록강을 건너 의주를 공략하고 이어 용천, 선천을 거쳐 청천강을 넘었다. 그들은 '전왕 광해군을 위하여 원수를 갚는다'는 명분을 걸고 진군하여 안주, 평산, 평양을 점령하고 황주를 장악하였다. 조선에서는 장만을 도원수로 삼아 싸웠으나 평산에서부터 후퇴를 거듭, 그 본진이 개성으로 후퇴하였고 인조 이하 조신들은 강화도로 피하고 소현세자는 전주로 내려가서 분조 활동을 했다.
참고로 정봉수라는 사람이(민간신분)철산의 용골산성에서 적들과 맹렬한 전투를 벌였다. 이 항전은 나름 당하기만한 전황상 의미가 매우 크다. 이후 이립이 의병을 모아 적의 진격을 늦추었다.
4 전쟁 이후 ¶
사실, 후금은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으나 3만이라는 적은 병력으로 침략해 왔기에 내부 고립의 위험이 있어 빨리 화약을 맺을 필요성이 있었고, 이로 인해 화약의 내용은 후금 입장에선 충분히 만족할만 것은 아니었다.[3] 그러나 화약을 통해 조선과의 교역을 열어 부족한 물자를 확보하고, 압록강 이남에 군대를 주둔[4] 시켜 가도의 모문룡의 명나라 군대와 조선의 준동을 사전 차단함으로써 내몽고 지역 등 근처 유목부족들을 규합, 세를 불릴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하였으니 그렇다고 후금 입장에선 성과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5]
이후 후금은 자신들의 세를 불려 나가며 1632년에는 '형제의 맹'에서 '군신의 의'로 양국관계를 수정 할것을 요구하면서 많은 세폐를 요구했다. 이에 조선은 경제적 부담이 되어왔던 세폐에 대해서는 절충을 시도했지만, 오랑캐와 형제관계를 맺은 것도 굴욕적으로 여기는 분위기에서 '군신의 의'로 전환하는 것은 결코 받아들일 수 없다며 절화의 태도를 굳히게 되었다. 그러다가 1636년 다시 후금은 국호를 청이라 고치고 사신을 보내 청태종의 존호를 알리고 신사를 강조할 것을 요구하였다. 결국 조선은 청나라와 전쟁을 선포하고 만다. 결국 이후 12월 청나라의 침략으로 병자호란이 발생하고, 이후 삼전도의 굴욕이라는 흑역사를 남기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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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자호란'(丙子胡亂, Second Manchu invasion of Korea, 1636년~1637년)
(삼전도의 치욕을 묘사한 부조. 부조에 묘사된 것과 달리 인조는 삼전도 항복 당시 저렇게 왕의 옷차림(곤룡포에 익선관)으로 나가지 못했다. 갓에 융복 차림으로 나가서 항복 의식을 치렀으며, 남한산성에서 나올 때에도 죄인이라는 이유로 남문으로 나오지 못하고 서문으로 나와서 삼전도까지 가야만 했다.)
"여러 해 동안 강화도를 수축하는데 검찰사 이하가 날마다 술마시는 것으로 일을 삼더니, 마침내 백성들을 다 죽게 만들었으니 이것이 누구의 허물이냐! 나의 네 아들과 남편은 모두 적의 칼날에 죽고 이 한 몸만 남았다. 하늘이시여! 하늘이시여!" - <연려실기술> 인조조고사본말, 병자노란[1]丙子胡亂(병자호란)
1 배경 ¶
정묘호란(1627) 이후 후금과 형제의 맹약을 맺은 조선은 강화조약을 체결한 뒤에도 친명배금정책으로 일관하였다는게 세론이며, 여기에 대해 인조는 명분상으로만 그러했지 실제로는 어느 정도 광해군의 스탠스를 이어갔다는 견해도 일부 있다.[3]
당시 청으로 국호를 고친 청태종 홍타이지가 명나라와의 전면전 전에 친명 성향의 조선을 확실하게 무력화시키고 기근으로 인한 경제적 위기 타개를 목적으로 침공을 계획했다는 견해도 주목을 받고 있다. 청으로서도 조선 원정의 필요성이 절실했다. 1626년 영원성 전투 이후 대명 전선은 사실상 돌파구를 찾기 어려웠다. 태조 누르하치 때의 주요 수입원이었던 명과의 인삼, 모피 교역은 파탄상태에 있었으며 청은 만주족뿐만 아니라 요령의 한족, 새로이 손에 넣은 몽골인까지 먹여 살려야 했다. 청은 수도를 요양에서 심양으로 옮기면서 상업에서 농업 위주로 경제 전환을 노려봤으나 기상 악화로 실패했다. 결국 만주족은 요령의 한족에게서 식량을 쥐어짜내야 했기 때문에 한족과 만주족의 대립이 심각해졌고 상황은 1633년의 식량위기까지 겹치면서 경제적으로 극한 상황에 달해있었다. 이 견해에 따르자면 흔히들 가정하는 광해군이 계속 왕위에 있었다면 청과의 전쟁(특히 병자호란)은 없었을 것이다라는 가정은 틀린 것일 수 있다.[4]
2 원인 ¶
전쟁이 촉발된 가장 큰 원인은 1636년 2월 중순 청이 황제를 선포하면서 조선에 의견을 묻는 이라고 쓰고 사실상 강요로 읽는 사신으로 용골대, 마부대 등과 새로이 복속된 몽골의 왕족들을 보냈기 때문이다. 사신도 명목상 당시 죽은 인조의 왕후에 대한 조문단으로서 왔는데, 하는 소리는 불난 집에 부채질하는 소리였다. 거기다 이미 정묘호란 때 후금은 조선과 화약을 맺으며, 조선과 명 간의 특별 관계(군신 관계)를 인정하고 조선이 청이 아닌 명과도 외교를 하는 것을 인정하고 있었다.(자세한 건 정묘호란항목 참조).[7] 그런 상황에서 청의 칭제 선언은 조선에 대해 명과 청 사이에서 양다리 서지 말고 이제는 설 줄을 명확히 해라는 요구나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이런 사절이 청 태종 자신의 명의가 아닌 모두가 왕자급에 불과했던 8명의 호쇼이 버일러(hošo-i Beile, 和碩 貝勒), 17명의 구사이 어전(gūsa-i ejen, 固山 牛祿),[8] 49명의 버일러 명의로 왔다는 외교적 결례까지 있었다.
정묘호란 이후 광해군의 현상유지적 기미정책을 어느 정도 계승하여 후금의 무리한 요구까지도 대부분 받아들이곤 했던 인조 및 대신들은 이에 대해 격앙된 반응을 보였으나(심지어 강경한 외교문서로 답하려는 기미도 있었다) 정묘호란으로 인해 상대가 강하다는 것을 알고 있어 대응문제로 시간을 끌게 되었는데, 그렇게 되자 후금 사신들은 조선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으로 판단하고 바로 돌아가면서 전운이 고조된다. 게다가 사신이 떠나면서 백성들이 돌팔매 등으로 응수한 것도 사태를 키웠다. 조선의 강경한 반응에 따라온 몽골왕족들이 "조선와 후금은 형제의 나라이니 후금이 황제가 된다면 당연히 기뻐할 줄 알았는데 어찌 이런 반응을 보이느냐?"라며 이해할 수 없다는 소릴했다. 사이가 좋아서 형제가 된 게 아니란 말이지 세컨드 염장
그 후 인조는 조선 내에 전쟁대비를 하라는 강경한 선전(宣戰)의 교서를 내렸는데 그 교서들 중 한 장이 돌아가던 후금 사신들의 손에 넘어간다. 인조가 보내려던 강경한 외교문서도 백마산성에서 잠시 가로막혔으나 역시 후금 사신의 손에 넘어간다
이후로도 지휘관들을 교체하는 등 준전시체제로 돌입하나 대 후금 외교의 베테랑이던 박로가 "지금 우리 걔네 막을 힘 없어요.[9] 지금이라도 미안하다 하고 받아들여요."라고 상소를 올렸고 압록강이 얼어붙으면 끝장이라는 최명길의 상소도 뒤를 잇자 결국 이를 인식하고 화해를 요청하는 사절단을 보내기로 결정한다. 인조는 이쯤되면 전쟁 한판 하자 이거지요?란 강경론을 주도하며 전쟁분위기를 조성해놓고 정작 최명길을 비롯한 현실론의 반박이 있자 충격을 먹고는 자신에게 고무되어 최명길을 비판하는 삼학사등에게 젖비린내나는 애송이라고 꾸짖는 등 완전히 입장을 바꾸지만 때는 이미 늦은 후였다.
그러나 누가 이 조서를 가지고 갈 것이냐를 놓고 거진 7개월 동안 조정에서는 토론이 진행되었다(…). 이뭐병 그도 그럴 만한 것이, 이런 조서를 가지고 간다 해서 그게 쉽게 받아들여질 것 같진 않고, 사신으로 가는 사람은 목숨까지 위태로울 수 있으니... 실제로 토론이 진행되는 동안에도 "정묘화약때 우리와 명의 특별한 관계를 인정하고 애매하게 있을 수밖에 없다는 걸 그쪽도 알잖슴? 칭제 인정건은 좀 넘어가 주세요."라는 취지의 글을 몇번씩 보냈지만 무반응이었다.
결국 11월에 이르러서야 화친 얘기를 꺼낸 박로가 사신으로 직접 가서 화해를 요청하기로 하고 출발했지만...
3 전쟁의 발발과 흐름 ¶
1636년 12월 겨울, 청태종은 타타라 잉굴다이(용골대), 마푸타(Mafuta, 馬福大, 馬福塔)를 지휘관으로 하여 한인, 몽골인, 만주인 혼성부대 10만[11]을 거느리고 침공하였다. 당시 조선의 맹장이었던 의주부윤 임경업은 소수의 병력(고작 400명!)으로 백마산성을 굳게 방비하고 있었으나 청군은 이 길을 피하여 남하하였고 안주, 평양, 개성을 차례로 함락하고 7일 만에 한성에 다다른다. 이는 상당한 무리수였는데 조선군이 보급선을 끊고 곳곳에서 압박에 들어간다면 항복을 하는 쪽은 인조가 아니라 오히려 홍타이지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즉, 초고속으로 진격하여 인조를 굴복시키는 데 실패하면 청군의 패배는 필연이었다. 거란(요나라)의 여요전쟁을 생각해보자.
그러나 청도 나름 생각이 있었는데, 당시 조선군이 임진왜란의 충격을 간신히 추스리던 참에 이괄의 난이 터져 금쪽같은 평안도 북방 정예병 12000명이 절딴나 버리는 바람에 청의 진격로 상에 제대로 된 군대가 아예 없었다는 것이다. 즉 형식상의 방어라도 했다면 모르지만 아예 방어병력 자체가 없었기에 무조건 진격을 거듭하면 조선군이 방어 태세를 갖추고 병력을 소집, 배치하기 전에 상황을 종료시킬 수 있었다. 물론 의병을 일으키고 청군을 본격적으로 압박한다면 이야기가 달라질 수도 있었겠으나 불과 1주일밖에 되지 않는 시간은 그 모든 것을 무의미하게 만들어 버렸다.
급보를 접한 조선은 두 왕자(봉림대군·인평대군)를 비롯한 비빈들과 문, 무반과 그 가족들을 우선 강화도로 피난가게 하고 인조는 소현세자와 함께 뒤따라가려 하였으나 이미 청군이 한강을 도하하여 통진, 김포 일대를 점령하는 바람에 광주 남한산성으로 피신한다.
당시 청군의 공격전략은 산성 따위는 무시하고 큰 길을 통해서 초스피드로 기동하는 것이었다. 조정도 손놓고 있었던 건 아니라서 일반적인 농성전에서 벗어나 산성에서 나와 방어진을 구축할 것을 명령했지만 북도 방위를 맡았던 도원수 겸 매국노 김자점은 이를 대놓고 무시했다. 그가 이끌던 함경도군 2만은 산성에 틀어박혀 방어에만 전념했던 것.
이후 각지에서 방어하려 했던 조선군이 황급히 한성으로 집결해 근왕을 하거나 평지에서 적을 막으려 했으나 대부분은 이미 청군보다 움직임이 한참 늦었으며, 거기에 한심한 지휘관 때문에 패하거나 고립되는 상황이었다.
청군은 식량 등의 물자를 현지에서 조달하며 기동력을 발휘해 한성에 들이닥첬다. 현지조달로는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으니 청군도 상당한 모험을 벌인 것이었다. 일단 몽골은 정리했지만 배후에는 아직 상당한 세력을 유지하고 있는 명군이 있었으며, 당시 만주에는 기근이 들어서 식량도 부족했다. 청이 비록 요동의 한족 인구를 흡수했다고는 하나 여전히 인구에서는 조선이 많았으며, 청은 임진왜란 때 일본군과 마찬가지로 후방을 제대로 정리하지 않고 오직 "왕"만 노리고 공격해왔다.
조선군으로서는 민간의 막심한 피해를 무릅쓰고 청야전술을 시행하는 것이 방어전략의 핵심이었다. 인조가 멀리 도망치면서 근왕군을 모으고, 청군의 기세를 죽이면서 시간을 끌어서 청이 더 이상 못 버티고 물러날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것이 조선의 전략이었다. 조선이 이를 제대로 구사할 수 있었다면 청군으로서는 영락없이 여수전쟁 때의 우중문, 여요전쟁 때의 소배압 꼴 나기 십상이었겠지만, 조선군의 전략은 제대로 작동하지 못했다.[12]
조선군은 청군을 제대로 저지조차 못했고, 한성은 개전한지 단 일주일만에 함락 당해 임진왜란 때의 기록(29일)을 큰 차이로 경신했으며, 인조가 강화도로 들어갈 시간조차 충분히 벌지 못해 남한산성으로 피신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후방으로 도망칠 수도 있었겠지만 제대로 된 군대 하나 없는 상황에서 이는 청군의 포로가 되겠다고 자처하는 것밖에는 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한산성의 방위력은 충분 이상이라 평할 수 있었고, 실제 40여 일간 벌어진 공방전에서 대부분 조선군이 승리했다. 심지어 청군이 공성을 위해 서양 대포인 홍이포를 끌고 와 쐈을 때는 되려 천자총통으로 홍이포를 저격(…)해 버리는 위엄을 과시하기도 했다. 치밀했던 청군이 유일하게 고려하지 못한 것이라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미처 성 외부에 있던 식량고에서 성 안으로 식량을 운반하지 못 해,[13] 남한산성 안의 식량은 쌀 1만 4천여 섬, 간장 100여 독에 불과하였다. 군사 1만 2천여 명이 먹기에는 겨우 50여 일 분. 더구나 그해 병자년 겨울은 정말 추웠기 때문에 그야말로 설상가상이었다.
결국 포위된지 45일 만에 식량 결핍과 추위로 말미암아 성내의 장병은 방어할 기력을 거의 잃게 된다.
물론 조선군이 가만히 있던 것은 아니어서 곧 남한산성을 구원하기 위한 근왕병이 사방에서 몰려들기 시작했다. 청군 또한 이런 움직임에 대응, 남한산성 주변 곳곳에서 전투가 벌어졌다. 그러나 연이은 전쟁과 정치적 혼란으로 정규군이 사실상 소멸된 조선군은 속오군을 강제로 끌어다 머릿수만 채워서 밀어붙이나 전술이나 쓸 수밖에 없었고 정규군인 청군은 이런 조선군을 아주 가볍게 밟아 버렸다. 한국전쟁이 다시 발발하면 조선인민군이 이렇게 망하지 않을까?
대표적인 패배 케이스가 청군 선봉 기병 300 + 그 후방의 수천 병력에게 대군이 제대로 싸우지도 못하고 패주한 쌍령 전투인데, 인조가 후방 피신 대신 남한산성으로 도망친 것도 이런 꼴을 보면 대략 이해가 될 것이다.[14]
그래도 조선군이 아주 깨지고만 있던 것은 아니어서 광교산 전투와 김화 전투 등에서는 값진 승리를 거두기도 하였다. 특히 광교산 전투에서는 청 태종의 사위 양굴리(Yangguri 揚古利, 楊古利, 樣吉利, 白羊高羅)를 비롯한 청군의 굵직한 장수 세 명을 조총으로 사살하는 전과를 거두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런 전투는 속오군이 아닌 정규군이 주축이 되었기에 가능했고, 여기에 기병의 활동이 상대적으로 제한되는 산악 지대를 방어선으로 활용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리고 이런 전투가 제한적으로 이뤄졌다는 것은 그만큼 조선군이 전반적으로 형편없었음을 뜻한다.
그러나 그나마 조선에 남아 있던 최정예 병력인 함경도군 2만을 거느린 도원수 김자점은 태세를 정비한다며 성이 포위당한 수십일간 아무 것도 하지않고 가만히 있었다(…). 애시당초 홍타이지는 후방 따위는 무시하고 무작정 밀고 들어와 청군의 상태도 결코 좋지 않았기 때문에 그가 배후에서 타격에 나섰다면 장기전에서 홍타이지의 운명은 물론, 최악의 경우 명군의 카운터로 청나라의 사직마저 끝났을 지도 모른다.
근본적으로 인조가 남한산성에 갇혀 있었던 탓에 근왕군은 남한산성 구원에 집착할 수밖에 없었으며[15], 지휘권이 분산되어 있어서 통일적인 움직임도 보이지 못했다. 물론 지휘권을 통일했다 해도 그 전력이 속오군이었기에 청군의 상태가 되지 않아 격파-후퇴-반격-격파-후퇴를 반복하게 된다.
청군은 비록 대포까지 동원하고도 조선 본진인 남한산성 공략에는 끝내 실패했으나, 계속되는 조선군의 구원을 물리치면서 남한산성 내의 인조와 장병들을 심리적으로 강하게 압박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조가 버티자 결국 강화도를 공격했는데 당시 방어를 맡았던 김경징이 제대로 싸우지 않으면서 청나라 수군에게 강화도가 함락되고 말았다. 세자와 왕족들은 남한산성으로 압송되었고, 이 소식을 접한 인조는 얼마 후 항복을 결정하고 삼전도로 가게 된다.
인조가 항복한 이유는 간단하다. 다 끝났기 때문이다. 조선군의 상태는 이미 쌍령 전투로 증명되었고, 남한산성 함락도 사실상 시간문제인 상황이었기 때문. 물론 인조가 포로가 되거나 전사한다고 해도 강화도가 건재했다면 조선군의 저항은 지속되었을지 모른다. 어떻게든 이렇게 버텼다면 대몽항쟁 때와 달리 장기전에 대한 대책도 없던 청군은 철수하거나 궤멸되거나 둘 중 하나였을 것인데, 강화도가 함락됨으로써 조선 정부 전체가 완전히 궤멸될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이게 된 것이다. 이 상황에서 항복을 거부한다면 최소한 인조와 그 자손들은 살아남지 못하게 된다. 굳이 왕조를 멸망시킬 것도 없는 게, 어차피 청 입장에서는 광해군이라는 아주 좋은 대안도 있었고 인조와 그 일파의 횡포로 민심도 상당히 이반한 상태였으니 인조가 죽더라도 왕조 전면 교체나 식민화에 따른 조선 전역의 저항에 직면할 필요성은 낮았다.
4 결과와 영향 ¶
음력 1월 10일 이후 최명길 등이 여러 차례 청군과 화평교섭을 진행하였다. 왕은 처음 이를 주저하였으나 강화 함락의 소식을 접하자 전의를 상실. 음력 1월 30일 성문을 열고 왕세자와 함께 삼전도(오늘날의 송파구에 있었던 하중도)에 설치한 수항단에서 청 태종에게 갓에 철릭 차림으로 삼궤구고두의 항복 의식을 치른다. 후에 이것은 삼전도의 굴욕이라고 불리게 된다. 해당 항목 참조.
청은 조선을 멸망시키는 것까지는 어려웠다고 해도[16] 마음만 먹었다면 자신들에게 비교적 협조적이었던 광해군을 다시 세울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애시당초 전쟁 패배 책임만으로도 인조가 퇴위당할 이유는 충분했으니까. 하지만 청은 그러지 않았다.[17] 요나라나 금나라 예처럼 한반도에 발목을 잡히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였을 가능성도 있고, 조선이 생각 외로 극렬하게 저항하는 대신 조용히 항복을 택하고 패전에 따른 복종의사를 표시해서 그랬을 가능성도 있다. 혹시 모를 일본의 침입에 대한 일종의 방파제로 염두했을 가능성도 있다. 그 외에 다양한 가능성이 있지만, 진짜 본심은 그 당사자들 외에는 알 수 없다. 여하간, 청은 목표했던 물자를 해결했고, 후방의 위협을 제거한 것이다.
어쨌든 결국 조선은 청과 강화조약을 체결했다. 강화조약 내용은 다음과 같다.
세폐의 양은 황금 100냥, 백은 1,000냥, 수우각궁면(水牛角弓面; 활을 만들 때 필요한 소의 뿔[22]) 200우, 표범 가죽 100장, 차 1,000포, 수달 가죽 400장, 청서피(靑黍皮; 다람쥐류의 가죽) 300장, 후추(胡椒) 10두, 호요도(好腰刀) 26자루, 단목 200근, 호대지(好大紙) 1,000권, 순도(順刀) 10자루, 호소지(好小紙) 1,500권, 오조룡석(五爪龍席; 화문석의 일종) 4령(嶺), 각종 화석 40령, 백저포(白苧布; 두루마기의 일종) 200필, 각색 면주(綿紬; 명주) 2,000필, 각색 세마포(細麻布) 400필, 각색 세포(細布; 麻布) 10,000필, 포(布) 1,400필, 쌀 10,000포.[23]
이로써 조선은 개국 이래 이어오던 명과의 관계를 청산하고 새로이 청과 군신관계를 맺게 되었다.
요구사항을 놓고 보면, 일단 세폐가 어마어마한 수치로 늘었다. 이는 나라에 보내던 조공품의 몇배에 달하고 병자호란 이전에 청의 공갈협박에 보내던 세폐의 3배에 달하는 수치다. 거기다 하사품도 별거 없어서 그야말로 등골 빠지는 수준의 세폐를 요구했다. 임란 이후 명 사신들이 와서 뜯어가는 걸 고려한다 해도 청나라의 요구로 세폐가 너무 크게 늘어서 조선이 지는 부담은 엄청나게 가중되었다는 것은 변함없는 사실이다. 이는 청이 세폐를 전쟁 배상금 명목으로 생각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여기에 명나라 공격에 원정군을 자비로 파견해야 했다는 점도 엄청난 부담이였다. 실제로 조선군이 참전한 전투 중에는 나중에 항복한 명군 장수들이 조선군의 저격[24] 에 피해가 컸다며 이를 가는 경우도 있었다. 거기다 청은 전쟁 직후 귀환할 때도 약탈을 해대서 치를 떠는 기록이 존재하며, 남하시 현지보급으로 초토화된 서북방면 대신 약탈을 피했던 함경도 방면으로 귀환하는 등 계획적으로 약탈을 시도하는 모습을 보여 북도 일대의 피해는 가중되었다.
물론 장기적으로 보면 (임진왜란 이후의) 명나라에 사대하던 시절보다 크게 나빠진 게 없다고 볼 수도 있다. 어마어마했던 세폐도 청이 입관한 이후 크게 줄였고 하사품이 늘어나 이전의 정상적인 조공외교 관계로 돌아간다. 하지만 그 사이에 뜯긴 걸 돌려주지는 않았기에 조선은 전쟁에서 진 대가를 톡톡히 치러야 했다.
이는 가히 윤관의 여진 정벌 이후 순식간에 완안아골타의 금나라가 군신관계를 주장한 상황 그 이상이었다. 생각해보자. 세종대왕 때는 4군6진의 땅을 뜯어내기도 했고, 유목민[26] = 예비 약탈자라는 상황 탓에, 약탈하러 오기 전에 작살내 놓자는 생각으로(예방전쟁) 조선군이 틈틈히 쳐들어가서 여진족의 농토에 소금을 뿌리고 건물들을 작살내는 통에 노약자들이 울부짖었다는 기록도 많다. 그러니까 조선 초의 여진족은 그냥 조선군과 명군의 동네북이였다. 그것이 이렇게 뒤집힌 것이었다.
또한 당시 청군이 끌고 간 "환향녀" 문제는 당시 조선 사회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이들 중 상당수가 나중에 조선으로 귀환하여 시댁을 다시 찾았는데 인조가 직접 강간피해는 이혼의 대상이 아니라며 내치지 말라고 명령했음에도 사대부들이 무시함으로써 조선의 평판을 크게 깎는 데 기여했다. 결국 이들 대부분은 비구니가 되거나 아니면 친정으로 돌아가거나, 이도 저도 아닌 경우에는 성매매를 하게 된다.
물론 다시 강조하지만, 그래도 조선은 얼마 뒤 멸망한 명나라에 비하면 매우 관대하다고 볼 수 있는 처분을 받았다. 조선 국왕 인조는 자존심에 상처를 입었을지언정 퇴위당하지 않았고(심지어 광해군이라는 대안이 있었음에도), 백성들은 포로로 끌려갔지만 여러 방법으로 돌아올 가능성이 있었다. 무엇보다 탈출한 조선인들에 대한 청나라의 강제적인 송환 요구도 초기의 일이지, 나중에는 적당히 눈감아주는 쪽으로 바뀐다.[27] 조선은 속된 말로 삥을 뜯겼지만 명나라처럼 점령당하지도 않고, 한족들처럼 변발로 머리가 밀리는 등 풍습에 변화를 겪지도 않았다. 당시 동북아시아 각국의 군사적 외교적 관계가 어느 정도 적용이 되었겠지만, 청이 조선에 대해 매우 호감을 가졌음을 엿볼 수 있다. 예를 들어 고위 왕족들이 조선 여인과 결혼을 하려 한다거나, 명을 칠 때 조선을 끌어들이거나, 러시아가 남하하자 나선정벌의 병력을 요청한다거나.
이 전쟁의 승리로 청은 뒷통수가 약간 근질근질하던 후방을 단단히 다져두었고, 경제 문제를 상당히 해결했으며, 명을 공격하는데 모든 전력을 쏟아부을 수 있게 되었다.
5 영향과 평가 ¶
그 피해가 상대적으로 경미했다고 해서, 조선에서 청에 대한 치욕이 잊혀진 것은 당연히 아니었다. 명분상으로나마 북벌론이 제기되었으며 박씨전, 임경업전 같은 정신승리용 가상소설이 출판되었다. 물론 이것들이야말로 자위용 대체역사소설의 선구작 감이다(…).
물론 오늘날 조선 중기는 사극에서도 역덕에게도 매우 흥미로운 시기이지만 호란에 대한 관심은 왜란과 비교조차 안될정도로 미미하다. 왜란은 시작은 안습했을지언정 마지막은 침략자를 몰아내는 통쾌함도 있었거니와 이순신 등 수많은 이야기거리를 양산했지만 호란은 시작부터 끝날때까지 쳐발림의 연속이라 완전히 흑역사 취급. 흥미로운 점은 일본사에서는 센고쿠시대 말기가 매우 인기있는 반면에 역시 (쳐바르다가 결국) 쳐발린 임진왜란은 흑역사 취급당한다는 것이다. 추노 정도가 그에 근접한 시대를 다루었고, 병자호란 시대를 다루려는 추노2가 기획되었으나 현재까지는 깜깜 무소식.
6 여담 ¶
병자호란 이전 조청관계가 악화되는 것을 안 일본은 조선측에 군사원조를 제의한 적이 있었다. 물론 조선에서는 단칼에 거절(....). 이괄의 난 때 이괄군의 항왜를 왜관 항왜를 대응하는 거소차 주저했던 조선이다. 실제 일본에서 정말로 군사원조를 해줄 생각이 있었는지는 따져봐야 할테지만 만약 이 제안이 받아들여졌다면 청일전쟁은 260년 앞서 일어나게 됐을 것이다.[28]
사실 일본은 정묘호란 직후부터 조청관계에 관심을 가지고 대단히 촉각을 곤두세웠다. 쓰시마 도주는 정묘호란 직후의 혼란한 틈을 타 조선과의 관계에서 실익을 챙기고자 노력했고 실제로 조선한테서 삥을 뜯는것도 성공한다. 문제는 쓰시마의 가로(家老)이던 야나가와 시게오키가 쓰시마 도주 소오 요시나리와 뒤집어지게 싸우다가 쓰시마가 조선에게 쳤던 사기[29]를 에도 막부에 까발려서 크게 문제가 되었다. 시게오키는 막부 핵심인사와 친한 자신의 인맥을 믿고 이런 하극상을 벌였지만 정작 막부측에선 조선과의 외교관계가 중요했기 때문에 대조선외교 노하우를 지닌 소오가문을 내칠수가 없어 결국 요시나리의 손을 들어주고 시게오키를 처형한다. 이 사건은 조선에서도 굉장히 관심을 가지고 지켜봤는데, 청과의 관계가 악화되어가는 과정에서 일본에서 조선과의 외교를 전담하는 쓰시마를 건드리고 있으니 불안할 수밖에. 결국 조선은 남쪽방면의 안정을 위해 일본에 유화책을 쓸수밖에 없게 된다.
병자호란이 터지고 인조가 항복한 이후에 명나라로부터 조선에게 도와주지 못해서 미안하다는 황제의 서한을 받는다. 한편 일본에서는 조선의 패전 소식을 듣고 막부 인사들이 회합을 하다가 조선의 나약함을 비웃는 등 남의 불행은 나의 행복 조선의 나약함을 만천하에 알리게 된다(....)[30]
7 관련 항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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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전쟁 중 온 가족을 잃은 어떤 노파의 절규. 병자호란 직후 백성들의 심리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기록이다.
- [2] 이때문에 병자호란은 음력으로는 병자-정축년에 걸쳐있으나 양력으로는 사실상 1637년에 벌어진 전쟁이다.
- [3] 그 견해의 대표적인 근거 중 하나로는 인조반정으로 광해군 정권의 실세이던 대북파는 쑥대밭이 됐지만 광해군대 외교담당(예조) 실무진들은 고스란히 남아있었다는 사실을 들곤 한다. 하지만 광해군 대의 양면화친 외교를 주도한 게 광해군 자신이라는 점과 당장의 후금과의 외교단절(정묘호란 화약 전까지)만 보더라도 광해군의 외교 노선을 그대로 계승했다고 보긴 힘들다. 또한 인조가 광해군의 스탠스를 이어가지 않았다는 증거가 다름아닌 강홍립에 대한 인조의 처우인데 광해군이 조선을 지키려고 일부러 파견한 광해군을 인조는 삭탈관직 시켜버렸다.
- [4] 정묘호란은 청나라의 군대 규모와 이괄의 난이 없었을 경우 등을 상정하면 광해군이 계속 제위에 있었을 시 전쟁을 피하거나 방어가 가능했을 거라 볼 수도 있지만, 병자호란 시는 청나라 군대의 규모가 압도적이었다.
순순히 먹을 것을 내놓으면 멸망만은 시키지 않을 것입니다군신관계를 순순히 따르지 않는 한 전쟁을 피하기 어려웠을 것이며, 그렇다 하더라도 피할 수 있다는 보장도 할 수 없다. 군사적으로 막으려면 군제에 대한 대대적 개혁이 있었다면 가능할 수도 있었겠으나, 그런 움직임은 인조 대에 전혀 없었다. 그나마 광해군 말년에 광해군 자신이 주도하여 병농 분리에 대한 논의가 몇차례 있었다. - [5] 청 태조로 홍타이치의 아버지이며 조선과는 원수를 지는 일이 없어야 한다면 조선과는 화친을 원했다.
- [6] 명의 마지막 명장이자 강한 정치적 영향력을 가지고 있던 원숭환이 고려하던 계획 중 하나. (출처 : 정묘, 병자호란과 동아시아) (하지만 이건 조선 입장에서 적당히 핑계대고 생까면 끝이다. 조선과 명을 잇는 요동을 광해군 13년에 후금에게 잃은 이후, 명 입장에서 조선에게 적극적인 요구를 하긴 어려웠다.) 그리고 '중립외교'를 주장한 건 그나마 광해군 정권에서 광해군 혼자에 가까웠다는 점도 생각해야 한다.
- [7] 여기에는 명과의 조공무역으로 값진 물건을 얻어서 자신들에게 싼값에 파는 빵셔틀이 되라는 이유가 존재했다. 이는 병자호란 이후에도 마찬가지(명과의 조공무역은 막았지만 일본과의 무역에는 아무런 간섭도 하지 않았다).
- [8] 구사(gūsa, 固山)가 만주어로 기(旗)라는 뜻이므로 팔기대신(八旗大臣)이라는 의미를 가졌다. 즉, 각 팔기의 대신들.
- [9] 조선의 방위체제, 특히 청을 막아야 할 평안도의 방위체제는 이괄의 난을 계기로 치명적인 손상을 입은 상태였다.
- [10] 그런데 박로는 이런 상황에서도 용케도 살아남아 남한산성에 피란간 인조에게 합류했다. 본격 생존왕?
- [11] 이 혼성부대에 조선인도 포함되어 있었다(...)
- [12] 최정예 병력인 북도군을 거느린 도원수 김자점이 한달 넘게 가만히 있던 게 컸다.
- [13] 처음 축성될때 성 안에 있던 식량창고를 광주목사 한명욱이 험준한 산에 창고가 있으면 운반하는 백성들에게 민폐라며 성 밖으로 끌어냈는데 이것이 큰 실책이었다. 게다가 이것도 사실 운송을 담당한 상인과 야합했다는 말이 있다.
- [14] 지휘관이었던 경상좌병사는 허완은 말에서 3번이나 떨어지다 결국 도주하는 아군 병사들에게 밟혀죽었다(…). 연려실기술의 쌍령 전투 기록이 과장되었다는 설도 있지만, 조선의 속오군은 정말 한심할 정도로 전투력과 군기가 준비되어 있지 않았다는 사실은 부정하기 어렵다. 다만 청군의 목적 자체가 조선군의 섬멸이 아니라 패퇴에 있었기에 사상자는 많지 않았다. 이후 반격을 준비하지만 그 전에 인조가 먼저 항복하게 된다.
- [15] 참고로 조선 각지의 근왕군이 임진왜란 당시 유연하게 싸울 수 있었던 것은 선조가 안전을 보장받은 게 컸다.
- [16] 애시당초 명이 아직 건재한 상황인데다 조선 각지에서 의병이 조직되고 정규군이 다시 반격하는 한편, 각 지역의 수비군이 산성을 나와 게릴라와 보급선 차단을 목적으로 반격에 착수했다면 상황은 달라질 수 있었다. 쌍령 전투는 남한산성 구원을 위해 오합지졸인 속오군을 제대로 된 훈련과 조직화도 없이 무리하게 끌어다가 투입했기에 일어난 참사고, 정규군은 그런 실수를 하지 않았다.
- [17] 대신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을 인질로 잡아갔다. 그리고 인조는 야사를 중심으로 반청을 했다는 인식과는 달리 청에 대한 복수심을 행동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 [18] 고명(誥命)은 황제가 제후 등등에게 준 임명조서, 책인(冊印)에서 책은 책봉 내용을 담은 문서, 인은 인장을 뜻한다.
- [19] 모문룡이 거처하고 있던 섬을 말한다.
- [20] 다만 이 부분은 시간이 지나면서 지켜지지 않는 일도 있었다. 애시당초 노동력 부족 때문에 끌고 간 것이어서 생긴 문제였지만.
- [21] 이것 때문에 효종이 즉위년에 성곽을 개수하려다가 청나라 사신의 질책을 받은 적이 있었다. 다만 이경석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당시 유배가 있었던 김자점이 효종의 대외정책을 청에 고자질한 것이다. 결국 김자점은 이 사건으로 반역 혐의가 적용되어 사형을 선고받고 처형되었다.
- [22] 그냥소가 아니라 물소의 뿔인데, 조선군의 주력무기중 하나인 각궁의 주요 재료다. 문제는 이게 정작 조선땅에선 나지 않아서 명나라 아니면 일본을 통하여 오키나와에서 수입하던 것...
- [23] 이중 후추는 조선에서 나지 않는 향신료였다. 요즘은 흔해 빠진게 후추지만 당시엔 값도 매우 비쌌고 물량은 전량 일본에서 수입해 조달해야만 했다.
- [24] 실제로 청은 조선군 조총병의 기량 자체는 상당히 높게 평가한 바 있다.
- [25] 다시 말하지만 청은 당시 조선(1,100만명 내외)보다 인구가 훨씬 적었다. 여진족이 50만~100만인 판국에 조선에서 끌려간 포로가 50~60만에 정묘호란까지 합치면 70~80만명에 육박한다. 물론 그때 청에는 귀부한 한인도 여진족만큼 있었고, 몽골인(20만)에다 이들 전체 숫자와 맞먹는 하층민들까지 있어서 총 인구는 그래도 200만~400만까지 나오므로 포로와 여진족 인구가 같은 상황은 아니었다. (따지고 보면 지나치게 증가한 인구로 인한 식량부족도 병자호란의 주요 원인 중 하나였다.)
- [26] 다만 여진족은 유목민이라기 보다는 농사와 수렵, 수렵으로 확보한 모피등을 내다 팔고 부족한걸 사오는 교역을 더 중시하는 반농반수렵 민족이였다. 주변 털러 다니지 않은건 아니였지만.
- [27] 강남에서 한족들은 대학살을 당하고 지금도 만주족이라면 이를 가는 사람이 있을 정도이다. 양주대학살이라든지... 이것때문에 아직도 청나라, 만주족 얘기만 나오면 분노하는 한족들도 많다(...) 병자호란 이야기 가지고 혹시라도 중국 한족에게 시비 걸지 말라는 이야기다.
- [28] 재미있는건 임진왜란 당시엔 여진의 누르하치 측에서 조선에 원병제의를 했다는것.
이놈이고 저놈이고이 제안은 명과 조선 양측에 의해 거절된다.오랑캐는 ㅈㅅ여 - [29] 일개 번에서 보낸 사절을 막부의 사절이라 속이고 국서를 위조했다.
- [30] 하지만 청나라애들이 철수하면서 "일본을 입조시켜라"고 했던걸 안다면 어떨까? 물론 조선에서는 이 명령을 그냥 무시해버린다. 오랑캐라고 비웃던 애들한테 두드려 맞은게 쪽팔리기도 했지만 저런 말을 했다가 일본이 난리를 피면 어쩔지 무서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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