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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전쟁

정묘호란 직후에도 교전하는 조선군과 후금군, 그리고 명군

작성자참으로|작성시간19.03.08|조회수220 목록 댓글 0


정묘호란 직후에도 교전하는 조선군과 후금군, 그리고 명군

    


 

형제의 맹약을 맺고서 정묘호란이 끝난 직후에도 조선군과 후금군 사이에서는 치열한 교전이 벌어집니다. 약탈을 하려는 후금군과 이를 저지하라는 국왕의 명령을 받은 양 측 간에서 전투가 개시된 것입니다.

 

생각 외로 전투의 규모는 컸고 쌍방이 적지 않은 피해를 입어가면서 싸웠을 정도입니다. 162737일에는 장만이 해주로 후금군이 침공해왔다는 장계를 올렸고 이에 부원수 정충신이 병력을 이끌고 출전하여 이들을 격파합니다.

 

정충신의 부대가 전열을 갖추자 후금군 수백 명이 돌격해왔는데, 이 때 초관 한탁립이 자신의 말을 빼앗기자 적진으로 돌격하여 적장의 말로 추정되는, 실록 기록으로 '안장과 굴레가 은으로 장식되어' 있는 말을 노획해서 돌아왔다고 합니다.

 

적장의 말을 빼앗아 올 정도니 조선군이 이들을 크게 이겼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정충신이 후금군 진영에 해당 말을 돌려보내자 감사의 말을 전하며 후금군이 각각 봉산과 수안, 해변으로 퇴각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이들의 약탈은 지속적이었고, 39일에는 비변사에서 해서 일대가 후금군에게 약탈당하고 있으니 즉각 병력을 출병시켜 저지하도록 하자고 건의했고, 인조가 허락하면서 각 도에서 병력이 추가로 차출됩니다.

 

풍병을 앓아 누운 도원수 장만을 대신하여 부원수 정충신과, 비겁하게 도망친 평양감사 윤훤을 대신한 김기종이 전선에 투입되었죠. 동시에 선전관을 보내어 후금 측에 맹약을 지킬 것을 요구하며 약탈을 금지하도록 요청을 합니다.

 

증원군이 중앙에서 차출되어 중군 이신이 지휘하여 북상하기 시작했고, 310일에 정충신이 서쪽으로 대규모로 이동 중이라며 급보를 보내옵니다.

 

후금 측은 313, 서신을 보내어 조선군이 계속해서 자신들을 공격하니 즉각 중지하라고 엄포를 놓습니다

 

-"독두둔리(禿頭屯里)의 우리 발아인(撥兒人) 네 사람이 해주 병마(兵馬)에게 죽음을 당하였고, 또 황주 영병군(領兵軍)에게 우리 발아인이 대적하다가 다섯 사람이 상처를 입고 말 두 마리가 죽었습니다. 또 평양에 놓아 먹이던 10마리 낙타와 1천여 마리 말과 말을 보는 병정(兵丁) 및 귀순한 고려인(高麗人)이 또 잡혀갔습니다. 그 뒤에 낙타와 말을 요구하였는데 지급해주지 아니하였고, 새로 온 서쪽 오랑캐 35천 명이 의주(義州) 등지에 주둔했는데 앞의 사정을 요구하지는 않았습니다. 영제(令弟)가 올 때에 나는 반드시 화친이 이루어지리라고 여겨, 차관 4명에게 병정 40명을 데리고 의주로 가게 했는데 평양 도당(平壤都堂)이 안주(安州)에 가서 죽였습니다. 확실한 것은 모르겠지만, 양국이 화친을 완성하였기에 우리 사람 8명을 보내 한()에게 보고하게 했는데 또 평양 도당에게 살해되었습니다. 유 부장(劉副將) 낭 참장(郞參將)이 국왕과 함께 강화하고 맹약한 것을 한에게 보고하러 가다가 또 평양 도당에게 추격을 당했는데 죽었는지 살았는지 알 수 없습니다. 우리와 국왕은 한마음으로 좋게 지내고 있는데 다만 변방의 도당과 군사를 거느린 장관들이 일을 내어 양국의 일을 무너지게 하니, 정상이 매우 밉습니다. 국왕은 살피소서."-

 

라고 편지를 보냈고, 조선 측은 후금 측이 맹약을 지켜 약탈을 중지하고 포로로 잡은 조선군민들을 풀어주라고 답변을 보내어 양 측이 팽팽하게 대립하게 됩니다. 조선 측도 가만히 앉아서 당할 이유가 없었고, 국왕이 약탈로부터 백성들을 보호하라는 명령이 내려지면서 북도 일대에서 필사적인 전투가 개시됩니다.

 

평산, 봉산, 서흥, 우봉, 신계, 수안, 재령, 해주, 신천, 문화 등 다수의 읍이 약탈당해 파괴당했으며 보다 못한 평양감사 김기종이 315, 삭주부사 이명길과 평양 판관 권이길 등을 인솔하여 병력을 이끌고 후금군과 격돌하게 됩니다.

 

조선군은 가까스로 후금군을 격파하며 순안에서 몰아냈지만, 평양 판관 권이길이 교전 중 화살에 맞아 전사하고, 좌척후장 정지한과 천총 이충백이 3~4발의 화살에 맞아 중상을 입는 등 심각한 피해를 입게 됩니다.

 

지금으로 치자면 여단장격인 판관 권이길이 교전 중에 전사했고, 연대장급으로 볼 수 있는 정지한과 이충백이 중상을 입을 정도였으니 얼마나 교전이 심각했는지 알 수 있을 겁니다.

 

그러나 조선군은 계속해서 후금군을 요격했고, 316일에는 그래도 보기 드문 승리를 거두며 기세를 올립니다. 운산을 약탈하던 후금군 4~500명을 상대로 경상도에서 징발한 포수 100명과 토병 100, 그리고 영변 판관이 지휘하는 60여 명의 조선군이 집결했고, 야습 걸어 후금군 진영에 집중 포화를 날려 이들을 궤멸시킵니다.

 

동시에 포로로 잡혀갔던 500여 명과 다수의 가축을 되찾는 성과를 거두게 됩니다. 이 때 조선군은 46명이 전사했으며, 전우경이라는 이는 후금군 진영에 난입하여 다수의 적을 사살하는 등 맹활약을 했으나 끝내 교전 중 전사하게 됩니다.

 

이러한 조선군의 활동에 후금은 맹약을 위반한다며 조선을 압박했고, 조선은 반발하지만 전쟁에서 패전한 입장이라 더 이상 할 말이 없었죠. 그럼에도 조선군은 필사적으로 후금군을 저지했고, 백성들도 자체적인 민병을 조직하여 약탈을 저지합니다.

 

용강현의 경우에는 복병장 황산립과 지역 향리들이 합심하여 민병을 조직했고, 이들이 약탈을 감행하는 후금군을 사살하면서 감히 침범할 수 없도록 방어선을 구축하여 더 이상의 큰 피해를 막도록 합니다.

 

한 편 명군도 기어나와서 철수하는 후금군을 공격했으며, 의주에서 식량을 옮기던 200여 명의 후금군을 상대로 모문룡이 급습을 가해 60명을 사살하는 등 교전이 각지에서 치열하게 전개되어 가고 있었습니다.

 

4월에도 여전히 후금군은 약탈을 감행했고, 안주에서 후금군 1명을 사로잡았으나 사살하지는 않고 후금 측 진영에 압송시켜 재발 방지를 요구하게 됩니다. 조선군은 후금군을 저지하느라 각지에서 큰 피해를 입었지만 3만에 달하는 포로들이 구출되는데 지대한 역할을 하게 됩니다.

 

한참 조선군이 악전고투하던 상황에서 모문룡의 명군은 후금군과 조선 모두를 공격하는 트롤링를 시전하죠. 평양감사 김기종은 419일에 급보를 보내어 모문룡의 군대가 안융창과 정주의 피난민 1만 여명을 공격하여 학살했으며, 공격에서 살아남은 것이 고작 300명 뿐이라고 보고합니다.

 

김기종은 급하게 김여수에게 100명의 병력을 편제시켜 급파했으며, 살육을 멈추도록 이야기하고, 말을 듣지 않으면 공격을 가해도 좋다는 명령까지 내릴 지경이었습니다

 

5월에 들어서도 조선은 양 쪽에게 시달리고 있었으며, 56일 기록을 보면 노략질하는 후금군 말고도 모문룡의 군대까지 신경을 써야하는 상황에 처하게 됩니다. 58일에는 1,000여 명의 모문룡의 기병과 보병들이 나와 노략질을 벌였을 정도니까요.

 

516일에 어느 정도 사태가 정리된 시점에도 불구하고, 청천 이북은 모문룡의 군대가 가득해서 감히 조선에서 임명한 수령들이 임지로 향하지 못하여 피해 현황을 알 수가 없다는 김기종의 보고서를 보면 얼마나 상황이 좋지 못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한 편 후금군과 모문룡의 군대가 맞붙는다는 보고도 올라오는데

 

-"의주의 적이 용천(龍川)으로 진영을 옮겼는데, 도독의 군사가 20여 기()의 적을 만나자 무기를 버리기도 하고 물에 뛰어들기도 하였으며 병선을 모두 이끌고 가도(椵島)로 돌아갔으니, 의주의 일은 다시 가망이 없습니다."-

 

라는 한심한 기록이 있는 걸 보면, 모문룡의 군대는 주로 약탈을 위해 해당 지역을 돌아다녔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전후 약 5달 가까이를 조선 측이 고생을 하는데, 후금군과 격전을 치루는 것으로도 모자라 모문룡의 군대까지 트롤짓을 해대는 것을 보면, 장계를 보내던 일선 지휘관들의 마음이 어떠했는지 조금은 이해가 갈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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