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역사위인

조선의 인조와 광해군

작성자효성|작성시간12.08.20|조회수152 목록 댓글 0

조선의 인조와 광해군

 

 

흔히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다' 라고 한다. 광해군 하면 우선 폐륜의군주로 떠오른다. 영창대군을 증살하고, 인목대비를 유폐시켰다는 것이 역모의 이유였다. 하지만 지금의 역사학자들은 이는 인조반정의 정당성 확보를 위한 명분이지 사실과 많이 다르다고 주장하고 있다. 어떻던 광해군은 당파싸움에 희생된 비운의 폐주였다는 데는 재론의 여지는 없는 것 같다. 

  

 조선 왕조 오백년 사를 보면, 왕으로 등극하면 맨 먼저 왕권 강화 작업에 들어갔다. 왕권을 위협하는 정적들을 제거하는 데는 한 치도 소홀함이 없었다. 광해군은 서인들이 난을 일으켰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음에도 이를 진압하질 못했다.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볼 때 광해군은 폭군의 기질과는 거리가 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광해군은 세자 책봉 때부터 많은 어려움을 겪으면서 왕위에 올랐다. 그런데도 왕위 계승에 문제가 있다는 이유로 논란이 끊이질 않았다. 그 중심엔 선조의 적출인 영창대군과 친형인 임해군이 있었기 때문이다.


 광해군은 준비된 왕이었다. 임진왜란 때 분조 임무를 기대이상으로 잘해서 조정은 물론 백성들에게 신망을 얻는 등 세자 역할들을 충실히 해내었다. 전란으로 도탄에 빠져 있는 백성들을 또 다시 전쟁터에 내몰지 않기 위하여 평화주의 노선을 택했고, 농민의 세금 경감을 위하여 대동법을 시행하는 등 새로운 민생정치를 펼쳐 나갔다.


 이웃나라 중국에서는 명 ․ 청의 교체기로서 국내외 정치상황이 복잡했다. 광해군은 명과 후금을 두고 중립외교를 펼치면서 자신의 정치노선을 끌고 가다 한순간에 권좌에서 밀려났다. 쿠데타에 성공한 이들은 광해군의 치적을 철저히 폄하하고 은폐했다. 하지만 현대의 역사가들은 전란을 피하게 한 군주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

 

 광해군은 거듭되는 상소를 물리치고 명나라와 신흥 강국인 후금을 서로 견제하는 탁월한 외교력을 펼쳤다. 그 결과 광해군의 집권기에는 안정을 되 찾아가고 있었다. 광해군의 실리주의가 계속 유지 되었더라면 대명관계도 청산되고 국력도 신장 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인조가 집권하면서 조선의 평화는 물 건너갔다. 인조는 광해군의 중립적 외교정책을 지양하고 친명배금주의 정책을 내세웠다. 이 때 후금은 조선을 침입하여 정묘호란을 일으켰고, 국호를 청으로 바꾸어 다시 조선을 침범해 왔다. 이게 바로 치욕의 병자호란이다.


 인조는 나라가 없어져도 좋으니 청나라는 오랑캐의 나라라고 적대시하고, 저물어 가는 명나라만 고집하는 등 국제정세를 제대로 읽지 못했다. 정묘 호란과 병자호란 때는 도성을 버리고 강화도와 남한산성으로 도주하여 백성들로부터 원성을 듣는 등 대책 없는 군주였다.


 인조는 병자호란에 패한 후 삼전도에서 청 태종에게 ‘삼배고구도’ 라는  항복례를 올렸다.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볼모로 잡혀가는 등 50만 명이 넘는 민초들이 청나라로 끌려가서 갖은 수모를 당했다.


 인조는 신하로서 임금을 내쳤고, 부모로서 아들과 며느리 손자까지 죽였다. 즉위기간 내내 굴욕과 고통의 왕위를 유지하였다. 서양문물을 받아들인 소현세자에게 왕위만이라도 물려주었더라면, 일제강점기라는 수탈의 역사도 만들어지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운 생각이 들기도 한다.


 지금 한반도의 국내․외 정세는 광해군시대 이상으로 복잡하게 변해가고  있다. 북핵문제 등 분단국가로서의 풀어야 할 숙제가 한두 가지가 아니다. 과거와 현재를 넘나들고 있는 역사는 우리들에게 산교육의 장이 되어야 할 것이다.


 유명한 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는역사에서 교훈을 얻지 못하는자는 반드시 실패한다고 했다. 역사는 되풀이되기 때문이다.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