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전]
조선선비 조완벽 베트남을 가다 - 조완벽
2007년 8월 5일 일본 쓰시마.
여름이 되면 국경에 섬인 쓰시마에 축제가 열린다. ‘아리랑 마치리’라 불리는 이 축제는 조선 통신사가 오갔던 영광의 역사를 기념하기 위해 연 축제다. 400년 전 쓰시마를 지나 일본 본토로 들어간 첫 번째 통신사는 돌아오는 길에도 이 섬을 들렀다. 그때 통신사는 일본에서 포로로 잡혀 있던 한 조선 선비를 데려왔다. 조완벽이라는 이름에 선비. 그는 베트남까지 끌려가야만 했다. 마침내 선비가 고향으로 돌아갔다.
올해는 조선 통신사 4백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이 같은 뜻 깊은 해를 맞아서 오늘 한국사 전에선 한 선비의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1607년 조선통신사와 함께 조선의 선비 조완벽은 일본에서 돌아왔습니다. 한 사람의 삶에는 그가 살았던 시대가 그대로 반영돼 있습니다. 조완벽의 삶은 4백 년 전 조선이 겪었던 치욕과 영광의 역사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데 그 이름조차 낯선 인물 趙完璧(조완벽). 그런데 사실 이 선비의 삶은 우리에게 아주 익숙한 기록 속에 숨겨져 있었습니다.
서울시 종로구 낙산공원.
낙산공원에 한켠 조그마한 초가가 있다. 비바람만 막겠다는 의미의 비우당(庇雨堂)은 조선시대 실학자 지봉 이수광이 머물던 곳이다. 1612년 비우당에서 이수광과 부인(안동김씨)이 나눈 대화
“대감, 오늘은 대체 무슨 이야기를 쓰셨습니까?”
“오늘 기이한 이야기를 들은 것을 적고 있었소. 부인, 조완벽이라는 선비에 이야기를 들어보셨소.”
“조완벽이라뇨. 그가 도대체 누구입니까?”
“오늘 남쪽 땅 진주에서 온 친구가 전해준 말인데 조완벽이라는 선비가 있다고 하오.”
이수광은 지봉유설과 지봉집을 통해 실학의 선구자로 평가 받았다. 그 책들 속에 이수광은 조완벽이라는 선비 일생을 적어 두었다. 조완벽은 진주의 선비였다. 선비의 풍류를 간직한 천년고도 진주. 예로부터 영호남의 군사적 요충지였다.
진주의 비극이 시작된 것은 1592년. 바다를 건너온 왜적들은 전라도를 차지하기 위해 길목에 있는 진주성을 공격했다. 그러나 김시민이 이끄는 관군과 의병은 2만의 왜적을 물리쳤다. 다음해 전열을 정비한 일본군은 대규모 화력을 총동원 다시 진주를 덮쳤다. 열흘간에 치열한 전투. 진주성은 적군을 받아들여야 했다.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성장기를 보냈던 진주 선비 조완벽. 그는 다행히 살아남아 스무 살을 맞이했다. 글과 춤을 즐기는 진주선비의 한 사람으로 성장했다. 그에 인생에 불행이 찾아 온 것도 이 시기였다. 조선과 일본 간에 지루한 협상은 결렬되고 일본군은 다시 바다를 건너왔다. 이른바 정유(丁酉)재란이었다. 섬진강을 목표로 진주로 들어온 왜장은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 명나라 병사들이 귀신장군이라고 불렀던 인물이다.
시마즈의 병사들은 일대를 뒤지며 도둑질을 일삼았다. 진주선비 조완벽도 시마즈 군에 손아귀를 벗어나지 못했다. 스무살의 나이에 조완벽은 포로의 신세가 되었다. 진주지역으로 들어오는 바다 사천만. 이곳은 시마즈 요시히로의 왜성이 있던 곳이다.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수륙요새 선진리성은 일본군에 전략적 거점이었다. 남해안에 강력한 세력을 구축한 시마즈 요시히로. 조선과 명나라 연합군은 사천 선진리 성을 겨냥했다. 조?명 연합군에 총공격. 그러나 시마즈 요시히로에 유인작전에 말려들어 전투는 반나절 만에 끝나버렸다.
시마즈는 본국에 삼만 팔천 칠백 십륙 명에 목을 벴다고 보고한 후 성구석에 쌓아 올렸다(조명군총). 노량에서 이순신에게 패하기 전까지 사천만은 시마즈 요시히로의 바다였다. 이상훈 학예연구사(국립진주박물관)의 말을 들어보자.
“그래서 결국은 이 지역을 통해서 일본군이 안전하게 철수를 할 수 있었고 또 많은 우리의 포로라든가 정유재란 때에 지리산을 중심으로 해서 약탈됐던 많은 물자들이 이곳을 통해서 일본으로 빠져나가게 되었다.”
일본으로 끌려갔다 탈출했던 유학자 강항은 배를 타고 끌려갈 때의 비참함을 기록해두었다.
“전라도 무한현의 한 모퉁이로 끌려갔는데 그곳에는 적선 육칠백 척이 수리에 걸쳐서 가득 차 있었고 이배 저배에서 우리나라 남녀가 부르짖어 우는 소리가 바다와 산을 진동하였다.” 강항의 <간양록> 중에서
고향 앞바다에서 일본군의 배에 실렸던 조완벽. 발밑으로는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바다가 일렁이고 있었다.
◆ 16세기 일본의 노예사냥 - 일본으로 끌려간 10만여 명의 조선인 포로들 그리고 조완벽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그 칠년 전쟁을 통해 일본으로 끌려간 조선인의 수는 무려 십만여 명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그 끝없는 행렬 속에 스무 살에 진주선비 조완벽이 있었습니다. 포로들의 공포, 두려움, 절망에 소리로 가득찬 배를 타고 바다 건너 끌려간 조완벽. 과연 적국에 땅 일본에선 어떤 삶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을까요.
과거 사츠마로 불리웠던 큐슈의 남쪽 가고시마 현. 많은 조선인 포로를 끌고 갔던 시마즈 요시히로(1535~1619)는 사츠마번에 17대 번주였다. 전쟁이 끝난 후 이곳으로 끌려온 정희생이라는 포로가 조선으로 비밀편지를 보냈다.
“저희들은 고향을 떠나고 부모와 헤어진 체 지금까지 죽지 않고 있으면서 날마다 조국에서 좋은 소식이 있기만을 기다려왔습니다. 사츠마 주에는 포로로 잡혀온 사람이 총 3만 7백 명이 있는데 이들은 모두 본국으로 살아 돌아가기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광해군일기>중에서
그러나 살아 돌아갈 수 없었던 포로들.
그 후손이 아직 가고시마에 살고 있다. 심수관 가는 시마즈가 끌고 온 도공의 후예이다. 조선인 도공들은 도자기를 빗는 조건으로 조선인만의 마을을 만들었다. 자식이 태어날 때마다 그들은 조선식으로 아이들을 키웠고 100년 전까지만 해도 이 마을에서는 조선의 말과 글을 썼다. 남원에서 끌려 온 도공 심당길에 후손인 심수관 가에는 사백년을 내려오는 가보가 있다. 심수관 가의 후손의 말을 들어보면,
“이것은 우리 가문의 초대인 심당길이 썼던 망건입니다. 400년 세월이 흘러 이렇게 헤져 버렸습니다.”
14대 후손 심수관의 말을 들어보자.
“이 마을 곳곳에 망향의 언덕이 있습니다. 그 언덕에 서면 멀리 바다가 보입니다. 조상들은 그 바다 건너 한국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사실 정확히 말하면 방향이 틀립니다. 한국 쪽이 아니었어요. 그러나 저 바다만 건너면 한국이 있다는 생각으로 망향의 언덕 위에 서서 주머니 속에 간직하던 망건을 꺼내 쓰고 고향의 부모를 향해 절을 했을 것입니다.”
도공들은 그나마 대우가 나은 편이었다. 탈출해 성공한 포로 정희득은 당시 포로들의 상황을 기록(정희득 월봉해상록)하고 있다.
<조선인 포로 정희득의 기록- 월봉해상록>
“최덕량이 염병으로 죽었는데 왜놈들이 다투어 칼을 시험한다며 시체를 갈라놓았다. 담양출신 이승상은 어린 자식이 일본인에 칼에 죽는 것을 목도했으며 자신은 왜인의 외양간과 땔나무 머슴을 하고 있다. 양돌만은 사람들을 모아 배를 훔쳐 도망갔으나 뒤쫓는 왜인에게 잡혀 배 안에 사람에 거의 반이나 베어 죽임을 당했다.” <월봉해상록> 중에서
조완벽도 다르지 않았다. 조완벽 전에 따르면 그 역시 왜인의 종노릇을 해야 했고 그 생활은 심히 고달팠다. 늘상 고향 땅을 그리워하는 나날이었다. 그 고통을 벗어나는 길은 도망쳐서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뿐이었다. 가고시마 항은 일본 최남단의 항구였다. 이곳에는 일찍부터 서양인들이 드나들었다. 가고시마는 남쪽 바다로 열린 일본에 창이었다. 임란 이후로 대륙으로의 길이 막히자, 시마즈는 남방무역에 뛰어들었다. 가고시마는 해외로 떠나는 배와 상인들로 북적이는 국제무역도시로 변모해갔다. 도쿠가나 카즈노부(가고시마 현역사 자료센터)의 말을 들어보자.
“가고시마에서 시마즈 요시히로가 해외 무역을 독점하기에는 벅찼습니다. 시마즈의 배후에는 교토의 상인들이 있었습니다. 가고시마로 들어온 해외물자는 교토의 상인을 통해 교토 오사카 등지로 흘러 들어갔습니다.”
조완벽에게 새로운 운명이 찾아왔다. 교토의 상인에게 팔려가게 된 것이다. 400년에 역사를 지닌 교토의 한 사찰. 사찰의 한 법당. 이 절을 세운 사람을 기리는 공간이다. 토목사업으로 큰돈을 벌었던 전설적인 상인 스미노쿠라 료이(角倉了以). 그가 바로 조완벽을 교토로 데려온 상인이었다. 임란이후 스미노쿠라는 해외무역에 뛰어 들었고 그의 배는 필리핀 그리고 베트남을 향해 바다를 건넜다. 오바야시 도츄(센코지 주지)의 말을 들어보자.
“스미토쿠라 료이는 교토의 주요 운하를 만든 장본인이고 직물사업도 했습니다. 게다가 오늘날로 치자면 금융업에도 관여했습니다. 국내에서 다각적인 사업을 펼치고 있었기에 해외무역을 새로이 시작할 수 있는 사람은 교토에서 스미노쿠라 밖에 없었습니다.”
효해문자. 문자에 능통하다는 이유로 스미노쿠라는 노예 조완벽을 배에 실었다. 스미노쿠라는 당시에 국제어였던 한문을 자유로이 구사하는 조완벽이 필요했다. 조선선비 조완벽. 그는 장사치의 노예로 전락했고, 고향 땅은 더욱 멀어져 갔다.
◆ 조완벽, 베트남에서 "최초의 한류"를 목격하다
탈출만을 꿈꾸며 고된 노예생활을 했던 조완벽. 그러나 그는 탈출할 기회조차 얻지 못한 체, 일본의 무역상인에게 팔려서 또다시 미지의 세계로 끌려가야만 했습니다. 그는 1604년부터 안남국 즉 베트남을 세 차례 걸쳐서 방문하게 되는데 기록에 의하면 베트남을 방문한 최초의 우리나라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베트남에 머물던 도중 그는 매울 놀라운 광경을 목격하게 됩니다.
“베트남은 바닷길로 삼만 칠천리다. 사츠마에서 배를 타고 바다를 나아가 중국의 장주와 광동 등을 지나면 베트남에 도착한다.” 이수광의「조완벽전」중에서
세계는 이미 대항해의 시대였다. 베트남에서는 유럽인과 중국인, 일본인이 드나드는 국제시장이 펼쳐져 있었다. 조완벽이 바다를 건너 도착한 곳은 지금의 하노이 부분에 바닷가였다. 조완벽이 도착했을 무렵 베트남에는 유교문화가 꽃피고 있었다. 유교 교육기관이었던 국자감은 공자를 모시는 문묘이기도 했다. 당시 공자의 사상은 베트남에 통치이념이었고 한자는 베트남에 공식 문자였다. 국자감에 학생들은 유교경전으로 공부했고, 과거를 통해 관리가 되고자 했다. 당시 베트남은 조선 못지않은 유교사회였다. 1604년 어느 날 베트남 관리들은 조선선비 조완벽을 주목했다.
“조완벽은 베트남에 한 지방장관의 집에 초정 받아 갔는데 고관 수십 명이 열을 지어 앉아 있었다. 그들은 그가 조선인이라는 말을 듣고 후하게 대하며 술과 음식을 접대했고 포로로 잡힌 사정을 듣고 왜놈이 귀국을 침범한 사실을 들은 적이 있다며 동정해 주었다. 그리고 나서 한권의 책을 보여주면서 이것이 귀국의 지봉 이수광의 시라며 당신이 고려 사람이니 지봉 이수광을 알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완벽은 지방출신으로 어린나이에 포로로 잡혀가 잘 모른다고 대답하니 모든 사람들이 일을 의아하게 여겼다. 조완벽이 그 책의 내용을 보니 고금의 명시 수백 편을 실었는데 그 가운데 이수광의 시가 첫머리에 있었고 모두 붉은 묵으로 비점이 쳐져 있었으며 그들이 상찬에 마지않았다.” 이수광「조완벽전」중에서
또 조완벽은 학교에서 많은 학생들이 이 책을 끼고 외우는 것을 목격했다. 이들이 어떻게 이수광의 시를 알게 된 걸까? 하노이 근교에 풍씨들의 집성촌이 있다. 풍씨들은 이 마을이 배출한 가장 위대한 선조를 마을 수호신으로 모시고 있다. 오래된 초상화. 베트남에서 학문의 신으로 불리는 이 사당의 주인공. 그가 바로 베트남에 이수광의 시를 소개한 인물. 사백년 전에 대문장가 풍극관(馮克寬, 1528~1613)이다. 풍각성(풍극관의 21대손)의 말을 들어보자.
“풍극관 어른은 70세가 되던 해인 1597년 명나라를 방문했습니다. 그 때 명나라 황제가 화원들에게 초상화를 그리게 해서 돌아올 때 선물해 준 것입니다.”
1612년 경, 비우당은 이수광의 거처였다.
“풍극관이라는 분은 대감의 시를 대체, 어찌 알게 되었답니까?” (처 안동김씨의 말)
“부인, 내가 15년 전에 연경에 사신으로 갔던 것을 기억하시오. 그때 명나라 황실이 불에 타 그 일을 위로하기 위해서 갔던 것이요. 연경에서 우리는 50여 일간 옥하관이라는 곳에 머물렀는데 그 옥하관에는 우리 일행 외에도 월남에서 1년을 걸어왔다는 사신 23명이 먼저 머물고 있었소. 그 사신단의 정사가 바로 풍극관이라는 어른이요.” (이수광의 말)
연경에서 두 나라의 사신은 서른다섯 살의 나이도 잊은 체, 시문을 주고받으며 어울렸다.
“의관이 다르고 살아온 제도가 다르지만 우리 서로 문자를 통해 글을 함께 나눌 수 있네.” 이수광 창
“그대와 나 비록 산과 바다 넘어 살고 있으나 같은 성현의 경전을 읽어왔구려.” 풍극관의 창
“해외에 귀한 성인 서로 만나 보았고 세상에서 못 보던 글 이제야 보았노라.” 이수광의 창
“그대와 나 번갈아 주인과 손님되고 동과 남에 아름다움 갖추었으니 마음대로 칭양하세.” 풍극관의 창
이별을 앞둔 풍극관은 자신의 시집 서문에 이수광의 글을 부탁했고 베트남으로 돌아가면 조선과 이수광이라는 이름을 널리 알릴 것을 약속했다. 두 사람의 만남으로부터 7년 후, 약속대로 베트남에는 이수광의 시가 널리 펴졌다. 일본인에게 끌려 베트남까지 갔던 청년 조완벽(당시 나이 27세로 추정)이 이를 목격한 것이다.
조완벽이 베트남을 처음 갔을 때 많은 베트남 인들은 지봉 이수광의 시를 유행가처럼 외우고 있었는데 조선과 베트남은 같은 유교문화권 안에 있었고 또한 자국 문화에 대한 자긍심이 높다는 점에서 서로 닮은 나라였습니다. 조선과 베트남의 사신들이 중국에서 만나면 서로 시문을 주고받으면서 우정을 돈독이 했다는 기록들이 많이 남아 있는데 특히 1597년. 이수광과 풍극관이 나누었던 시문이 베트남에서 크나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던 것입니다. 조완벽의 베트남 체험에 관해서는 이수광 뿐 아니라 안정복, 이익, 이덕문 같은 실학자들도 상세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당시 동남아 무역의 실상과 베트남에 다양한 정보를 알 수 있다는 점에서 조완벽의 이야기는 일찍부터 일본 학자들에 주목을 받아왔습니다. 그렇다면 조완벽에 삶은 조선에 어떻게 알려지게 된 것일까요. 그것은 조완벽이 기적적으로 고국에 돌아왔기 때문입니다.
◆ 조선통신사의 특명. 조선인 포로를 구출하라!
2007년 8월 5일 일본 쓰시마.
쓰시마에서 지난여름 큰 축제가 열렸다. 쓰시마를 지나갔던 조선 통신사의 역사를 기억하는 축제다. 정확히 사백 년 전 이섬을 지나갔던 첫 번째 통신사의 정식명칭은 ‘쇄환사’였다. ‘새환’이란 끌려간 동포를 샅샅이 뒤져 데리고 돌아온다는 뜻이다. 1607년 쇄환사는 임란 포로를 데려오려는 조선정부의 의지였다.
쇄환사 일행 504명 중 부사였던 칠송 경섬. 경섬은 한양을 떠나던 날부터 귀국하는 날까지 7개월 간 하루도 빠짐없이 쇄환사의 행적을 기록해 두었다. 경창선(쇄환사 경섬의 15대손)씨의 말을 들어보자.
“금년이 꼭 400년이 되는 해입니다. 그 당시 한양을 떠날 때에 아마 거의 돌아오실 수 없다는 그런 심정으로 가지 않았나 생각을 해봅니다.”
전쟁이 끝난지 체 10년이 지나지 않은 바닷길. 적국에 한 가운데로 504명이 건너갔다. 1606년 6월 11일 에도성. 쇄환사는 먼저 일본 막부에 조선 정부에 국서를 건넸다.
“두 나라가 새로 화친을 맺으려하는 지금 사로잡힌 남녀들을 모두 돌려보내주어야 전대의 잘못을 고치는 것이다. 속히 명령을 내려 즉시 쇄환하되 한 사람에 남녀도 빠뜨리지 않아야 앞으로의 두 나라의 교제가 순조롭게 진행될 것이다.” 경섬의 <해사록>중에서
조선과의 국교 제계를 원하던 막부정권은 쇄환사에게 협력을 약속했다. 그러나 그것은 진심이 아니었다. 쇄환사가 오사카에 점포라는 곳을 지날 때였다.
“어떤 남자 하나가 포구의 갈대 밭 속에서 달려 나와 부르짖기를 나는 조선 사람이요 배에 태워주시오 하므로 배를 멈추어 태워주었다. 그 주인 왜인이 놓아 보내려 하지 않으므로 도망쳐와 여기 숨어서 행차를 기다렸다고 한다. 또 남녀 수십 명이 갈대 밭 속에서 나와 부르짖으므로 모두 배에 오르게 하였다. 한 여인은 몸을 빼 달려왔는데 그의 남편 왜인이 칼을 어루만지며 맞서서 놓아주려 하지 않았다. 또 한 여인은 그에 남편이 놓아 보내려 하지 않자 사신의 행차를 구경만 하겠다고 속이고 우리 일행이 지나갈 때에 군번들의 호위행렬 속으로 뛰어들었다. 그 남편이 따라왔으나 잡지 못하였다.” <해사록>중에서
도처에서 가로막는 일본인들을 뚫고 조선 포로들이 쇄환사 행렬로 뛰어들었다. 포로를 옮기고 숨겨놓는 일본에 태도. 이에 쇄환사들은 분통함으로 치(痛憤)를 떨었다.
1607년 6월 교토(Kyoto).
쇄환사가 교토에 머물 때 포로 구출 작전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다. 숙소를 찾아온 은진 출신의 선비 김진생. 멀리 사츠마로부터 처자를 버리고 죽음을 무릅쓰고 쇄환사를 찾아왔다고 한다. 김진생이 쇄환사 앞에 꺼내 놓은 것은 조선인들의 편지. 사츠마에 포로도 잡혀 있는 조선인들이 구출되기를 갈망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교토에 숙소로 또 한사람의 선비가 찾아왔다. 베트남과 일본을 오가며 노예생활을 하던 조완벽이었다.
“윤달 6월 1일 큰비. 왜경에 머물렀다. 숙소로 찾아온 진주선비 조완벽은 영리하여 믿을만한 사람이었다. 유문 한통을 주어 널리 포로들을 불러 모아 쇄환하게 하였다.” <해사록>중에서
유문은 쇄환사가 왔다는 보고문이자, 쇄환사를 대신하여 포로를 구출할 수 있는 위임장이었다. 끌려온 지 10년이 지난 선비들은 현지사정에 밝았다. 이들은 쇄환사의 임무를 위탁받고 일본전역으로 다시 흩어졌다. 홍성덕 학예연구사(전북대학교 박물관)의 말을 들어보자.
“그런데 실제적으로 쇄환사가 가지고간 유문들은 대부분 한자로 쓰여 있었다는 것이죠. 그래서 쇄환사가 왔다는 사실이나 또는 고국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정보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은 당시 선비들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선비들이 그러한 정보를 접하고 적극적으로 일반 백성들을 고국으로 송환시키기 위한 노력을 진행시켰다고 보구요. 그러한 이유들은 기본적으로 조선시대 선비들이 가지고 있었던 임진왜란에 대한 책임감 결국에 국가에 상위층 레벨에서 국가를 제대로 간수하지 못했기 때문에 일어난 전쟁이었다. 그리고 그 전쟁의 피해를 백성들이 입었다는 사실입니다.”
조선정부의 의지는 선비들의 의지였다. 유교이념으로 교육받은 조선 선비들. 그들에게 백성은 하늘이자 근본이었다. 조완벽도 그 의무에 동참했다. 일본인들의 위협을 뚫고 조선포로를 구출하는 것. 선비들을 그 위험한 길을 기꺼이 나섰다.
1607년 윤6월 쓰시마.
선비들의 도움으로 임무를 마친 경섬은 여섯 달 만에 쓰시마로 돌아왔다.
“포로의 몸으로 일본 각지에 흩어져 있는 자가 그 수를 헤아릴 수 없다. 그러나 일본인 주인들이 앞을 다투어 서로 숨기려하니 도저히 어찌할 수가 없다. 되돌아오는 포로를 점검해 보니 남녀를 합쳐 겨우 1418명에 불과했다.” <해사록>중에서
그 1418명 중에 조완벽도 있었다. 발을 내려 한달음에 달려온 고향. 한시도 잊은 적이 없는 고향 진주에는 가족이 기다리고 있었다. 조완벽은 십년 만에 어머니에게 큰 절을 올렸다. 지봉이수광과 그의 처인 안동김씨의 대화를 들어보자.
“참으로 기이한 이야기입니다. 해서 조완벽이라는 선비는 어찌 산다고 합니까?”
“고향으로 돌아와 어머니, 아내와 함께 잘살고 있다고 하니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소.”
“다행한 일이입니다. 참으로 다행한 일입니다.”
“그렇소, 참으로 다행한 일이요.”
※ 조완벽은 노모를 모시고 처와 함께 별 탈 없이 살고 있다. 이수광의 「조완벽 전」중
그로부터 사백년이 지났다. 3년 전 국립진주박물관에 이 지역 명문가에서 보관 중이던 자료 한 점이 기증되었다. 1634년에 작성된 진주향안. 향촌사회에 자치규약과 명망가들에 이름이 적힌 이 향안에 포로 출신에 한 선비 이름이 실여있다. 왜란과 호란 이후 전후 복귀 작업이 한창이던 시절 이 기록은 귀국 후 조완벽에 행적을 보여주고 있다. 이상훈 학예사(국립진주박물관)의 말을 들어보자.
“포로도 붙잡혀서 해외에서 약 십여 년간에 그런 젊은 세월을 보낸 조완벽은 진주로 다시 귀향을 하게 됩니다. 그는 친주에서 향안에 등재되는데 이것으로 보아서 조완벽은 유력자로서 말년을 살아가게 된 것으로 보입니다. 그는 이곳에서 선비로서 또 그리고 지방에 유력자로서 전후복귀에 많은 보탬을 주었던 그런 사람으로 우리는 기억할 수가 있겠습니다.”
조완벽.
1597년 20살의 나이로 왜의 포로가 되었다. 한자에 능통하다는 이유로 일본의 무역 상인에게 팔려갔다. 세 차례 베트남을 오갔고 베트남에서 이수광의 시를 접했다. 1607년 조선정부의 포로구출 작전으로 고국으로 돌아와 전후복구사업에 매진했고 마침내 고향 땅의 흙이 되었다.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사백년 전. 임란이후 최초의 통신사 즉 쇄환사가 1418명에 조선인 포로들을 구해온 뒤에도 조선정부는 포로구출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1625년까지 두 차례 더 쇄환사를 파견 일본인들이 숨겨놓은 포로들을 찾아내서 모두 7500명에 조선인 포로들을 고국으로 데려올 수 있었습니다. 조완벽의 이야기는 사백년 전 전쟁의 비극을 말해주는 한편 베트남과 조선이 이룬 따뜻한 우정의 역사 그리고 일본으로 끌려갔던 자국민을 한사람도 남김없이 데려오려 했던 조선정부의 치열한 노력을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한국사전 오늘은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한결같이 선비로서의 사명을 다했던 진주선비 조완벽편이었습니다.
※ ▶국내 최초의 춤이 있는 다큐멘터리 - <한국사 傳>과 "국수호 디딤 무용단"이 만나다.
* 다시 정리 한다는 의미에서 동영상 방송을 보면서 글을 옮겼다. 그리고 이미지는 KBS에서 방영하는 한국사 전에서 가져온 것임을 알린다. 저작권은 KBS <한국사전>에 있습니다. 상업적인 용도는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