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쑨원(孫文, 손문)

작성자신으로|작성시간13.03.09|조회수173 목록 댓글 0

 

쑨원(孫文, 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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孫文(sūn wén). 한국어로 읽으면 '손문', 본명은 쑨더밍(孫德明, Sūn Dé Míng).


 

Contents

1 소개
2 생애
2.1 청조 멸망과 민국 성립
2.2 군벌의 난립
2.3 제1차 국공합작
3 개인적인 면
4 창작물에서의 쑨원

1 소개

광동성 향산(정확히는 중산, 中山) 출생으로 중국인들에게는 손중산(孫中山, sūn zhōng shān)이라는 애칭으로 불리고 있다. 관화 병음으로는 sūn wén이지만, 영어권에는 그의 호인 일선(逸仙)을 광동어로 읽은 Yat-sen(얏센)으로 알려져 있다. Sun Yat-sen.[1] 참고로, 逸仙은 관화로는 yì xiān으로 읽는다.

중국(중화인민공화국)과 중화민국 두곳에서 국부로 추앙받는 정치가. 하지만 중국에선 존경받는다기 보단 혁명을 선도한 사람으로 인식되고 있다. 쑨원을 너무 높이면 마오쩌둥이 그만큼 가려질 우려가 있기 때문에 적절한 존경만 표하는 걸로 추정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쑨원의 묘를 중국에서는 중산묘가 아니라 중산(中山陵)이라고 표현하는 것을 보면 그가 현대 중국, 타이완에 끼친 영향이 얼마나 큰지 짐작할 수 있을 정도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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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난징 교외에 위치한 중산릉. 1929년 6월 1일에 안장되었다.

2 생애

2.1 청조 멸망과 민국 성립

일반적으론 신해혁명의 기수로 여겨지지만, 사실 그는 신해혁명이 일어날 당시 미국에 있었다. 혁명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노력도 했지만 그다지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미국에서 활동자금을 모으던 사이에 알아서 혁명이 터져버린 것. 갑작스런 혁명에 손문은 급히 귀국해 난징임시정부 임시대총통에 취임하고 을 전복시키고자 했지만 기반이 미약한 그가 지방 각지에서 일어난 혁명군만으로 청을 쓰러트리는 것은 무리가 있었다. 뭔가 이승만 필이 나기도

결국 그가 선택한 방법은 북양군 총사령관 위안스카이(원세개)와의 협상이었다. 일선에서 물러났다가 혁명군 토벌을 명받고 복귀한 위안스카이는 손문이 제안한 중화민국 총통직을 받아들이게 된다. 위안스카이는 그대로 토벌군을 거꾸로 몰아 북경으로 쳐들어가 청 황실을 무너뜨렸고, 혁명은 성공했다.

하지만 이 협상은 청을 무너뜨리는 것까지는 성공했지만, 중화민국을 공화국으로 만들지는 못했다. 완전히 실권을 장악한 위안스카이는 사사건건 의회와 부딪혔고, 결국 손문과 국민당은 위안스카이의 군사력에 쫓겨 남쪽으로 도망쳐야 했다. 한편, 위안스카이는 대외적으로는 일본의 21개조 조약 체결 협박에 시달렸고, 대내적으로는 지나치게 욕심을 부려 황제를 칭하다가 지방 실력자들의 외면에 꼬리를 내리고 물러나 화병으로 죽고 말았다.

2.2 군벌의 난립

위안스카이의 죽음 뒤 중화민국은 완전히 혼란에 빠졌다. 중앙에서는 북양군벌 내의 파벌들[3] 간의 파벌싸움이었다. 나중에는 장쭤린의 봉천파도 가담하면서 헬게이트이 돌아가며 베이징을 장악, 정치적인 실권을 행사했고, 지방에서는 북양군벌과 충돌하던 광동, 광서, 운남 등 지방군벌들이 독자적인 길을 모색했다. 쑨원은 그 와중에 이 지방군벌들[4]과 협력해 1917년 광동 지역에 호법군 정부를 창설, 북양군벌을 토벌하고 중화민국을 되찾기를 시도했다. 하지만 애초에 지방군벌들은 쑨원이 가진 중화민국의 정통성이 필요했을 뿐, 자신들의 세력을 보존하는게 목적이었기 때문에 쑨원의 북벌론에 큰 관심이 없었고 심지어 그를 1918년에 쫓아내기까지 했다.

이후 쑨원은 상하이로 망명가 저술활동하면서 강연하고 지냈다. 1919년 5.4 운동 발발 당시 손문은 상하이에서 저술활동하면서 지내고 있었는데, 손문은 5.4 운동에 커다란 충격을 받아 이를 계기로 혁명 세력의 주체를 '민중들의 힘'으로 인식해 1919년 10월에 국민당을 개창했다. 이는 1914년 7월 도쿄에 있을때 쑨원이 만든 '중화 혁명당'을 개칭한 것이다. 이는 그동안 '위로부터의 혁명'을 구상했던 그가 '아래로부터의 혁명'으로 방향을 바꾸는 결정적 순간이라고 평가된다.

2.3 제1차 국공합작

두번이나 군벌들에게 쫓겨나 도피생활을 하면서 손문은 군사력이 없는 자신들의 한계를 뼈저리게 느끼게 되었다. 그런 그에게 다가온 한가지 계기가 있었으니, 그것은 소련에서 온 특사 마링(Maring)이었다. 소련은 중국 내에 공산당 세력을 키우기 위한 파트너를 찾고 있었는데, 그 대상으로 국민당과 손문을 선택한 것. 마링과 손문은 몇차례 만나며 긍정적인 결과를 이끌어내 제1차 국공합작에 합의했다. 이에 따라 공산당원들의 국민당 입당이 허가되었고, 손문은 국민당의 자체적인 군사력 강화에도 착수했다. 이 과정에서 몇차례 군벌들과 전쟁을 치루기도 했지만, 국민당군 건설작업은 제궤도에 올라 국민혁명군(國民革命軍) 창설로 결실을 맺었다. 하지만 손문 본인은 직후 간암으로 사망하여 북벌의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러한 그의 뜻은 후계자를 자처한 장제스가 북벌을 완수하면서 이루게 된다.

3 개인적인 면

여담이지만, 이 양반이 대륙에서 연설을 할 때 자신들이 잃어버린 영토이며 또한 되찾아야 할 영토를 거론하면서 한반도를 거명했다. OME. 물론 이것은 그의 문제라기보다는 당시 중국인들의 일반적인 시각에 가까울 것이다. 근데 이것도 기분 나쁜데 어찌되었든 당대의 그 역시 중화사상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을 반증한다. 하지만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원조한 바 있고, 이 공으로 1962년과 1968년 대한민국 건국 훈장을 받은 바 있다.

일본 극우 정객들하고도 굉장히 어울려 지내기도 했다. 대표적으로 일진회 고문을 지낸 (우리한테는 천하의 개쌍놈이지만..) 우치다 료헤이를 비롯해 미야자키 도텐토야마 미츠루키타 잇키등 극우파 인사들하고 같이 친분을 쌓았고, 이 일본 극우파 인사들은 쑨원이 조직한 중국혁명동맹회에 가입해 우창봉기, 신해혁명에 적극 가담했다. 다이쇼 데모크라시 시대의 마지막 수상인 이누가이 츠요시와도 친구였다.

이러한 점은 쑨원도 '아시아주의자'로 한국의 김옥균, 안중근, 여운형이나 베트남의 호치민, 미얀마의 아웅산등 주창한 '대아시아주의'와 일맥상통한 면이 없지 않아 있다. 이들은 처음에 일본을 지지하다가 나중에 일본의 속셈을 알아채 반일로 돌아서기도 한다. 쑨원은 일본에 자주 망명을 지낸 경력도 있고, 망명시절 나카야마 쇼우(中山樵)라는 창씨개명까지 하기도 했다. ㄷㄷㄷ[5] 그래서 손중산이란 이름 자체가 나카야마로 읽는 것이라는 말이..

첫 아내는 19세에 결혼한 루무전(盧慕貞)으로 그녀와의 사이에서 아들 쑨커와 딸 쑨얀과 쑨완을 두었다. 둘은 1915년 9월에 이혼했다.(당시에 첩을 두는 제도는 있었지만, 결혼하기로 한 쑨원과 쑹칭링 모두 기독교 신자라서 이혼하기로 한 것임) 아들은 중화민국의 고위직에 오르게 된다. 두번째 아내인 쑹칭링(송경령)은 그의 절친한 친구이자 사상적 동지였던 쑹야오주[6]의 딸이었으며 쑨원의 비서였다.(※쑨원과 쑹칭링의 아버지는 친구사이. 고로 그와 그녀의 사이는 무려 26살 차이.....ㄷㄷㄷㄷㄷ 이 때문에 현재 대만에서는 쑨원이 진성 '로리콘'이 아니었는가 하는 평가도 있고, 그의 패러디 동인지도 있다. http://www.weicomic.com/100roc/100roc.htm)

딸 하나를 두었으나 어릴 때 사망했고, 이후군벌들로부터 도피 생활을 하면서 건강을 해쳐 더 이상 자식을 얻진 못했다. 평생 중국 공산당과 국민당의 화합을 위해 노력하며 중국의 국부인 쑨원의 아내다운 모습을 보여서 현재도 중국과 대만 모두에게 존경을 받는 여인이다.

공식적으로는 광동성 태생으로 되어 있으나, 사실은 미국 하와이 호놀룰루 태생이라는 설이 있다.#

4 창작물에서의 쑨원

쿠보 노리타다의 《도교사》에서는 청조의 관헌에게 쫓기는 도중에 관세음보살을 만났다고 여러 차례 이야기 하고 다녔다고.

서유요원전에서는 백운동의 석벽에 새겨진 천강36성의 명단 가운데 한 명으로 써있다. 서유요원전의 천강36성은 천하를 뒤엎는데 성공하는 천명을 받은 혁명가들의 목록이다. 손문 밑에는 모택동이 써있다.

재미있는 점은, 우리가 흔히 인민복이라 부르는 옷을 발명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흔히들 인민복중국 본토에서만 입는다고 알려져 있는데, 쑨원이 일본 거주당시 일본가쿠란에 영향을 받아서 우리도 저런 실용적인 옷이 있으면 좋겠다 싶어서 만들어 낸 것이 인민복이다. 그래서 북한식으로 인민복이라 불리는 옷의 중국의 명칭은 중산복(中山裝)'이다. 이 옷은 훗날 재봉방식의 변화에 따라 과 타이완의 국민복으로 나뉘게 된다.

http://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3/34/Mao%2C_Hurley_and_Chiang.jpg
2차 국공내전 직전에 중재협상 과정에서 찍은 마오쩌둥장제스. 두 사람이 입은 옷을 보면 둘의 차이를 확실히 알 수 있다. 상의 앞 주머니를 드러나지 않게 안쪽으로 재봉하면 인민복, 드러나게 재봉하면 국민복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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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대만의 중산 대학도 영문명칭은 National Sun Yat-sen University로 쓴다.
[2] 중국에서 묘지명으로 능陵을 쓴다는 것은 그 의미가 큰데, 이유인즉 천자만 쓸 수 있기 때문이다. 중산릉 부근에 몽골을 몰아내고 을 건국해 한족 왕조를 부흥시킨 홍무제의 효릉(孝陵)이 있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3] 주로 돤치루이의 안휘파와 펑궈장, 오패부등의 직예파
[4] 주로 광동, 광서 등 서남군벌 세력들이다.
[5] 여기서 오해해서는 안되는게, 당시 쑨원은 일본에서 망명, 도피생활을 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자기 신분을 숨기고 지내기 위해 가명을 썼다고 봐야 할 것이다.
[6] 한국어론 송가주. '찰리 송'이라는 미국식 이름이 유명하다. 중국어판 성경을 팔아서 떼돈을 번 후, 정치활동=혁명사업에 투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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