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적의 나라 일본이 타국의 해적에게 크게 당한 사건
1019년 3월 27일 도이는 배 약 50척 인원수 3000명의 선단을 이끌고 쓰시마를 습격하여 섬의 각지에서 살인,약탈,방화를 일삼았다. 이 때 쓰시마 국사(國司)는 가까스로 섬을 탈출하여 큐슈 치쿠젠 국의 대재부(大宰府)로 피신해 왔다. 해적들은 쓰시마에 이어 이키를 습격하여, 노인,어린이는 살해하고, 성인 남녀는 배에 끌고가 노예로 삼았으며, 인가를 불태우고, 가축을 먹어치웠다. 해적집단의 습격을 들은 이키국사 후지와라노 마사타다(藤原理忠)는 즉시 군을 통솔하여 이를 진압하려 하나, 병력수에서 열세인 까닭에 전투중에 전원 전사하고 만다.
마사타다의 군을 쳐부순 해적들은 이키의 절인 고쿠분지(嶋分寺)를 태우려고 하나, 고쿠분지측은 절 주지의 지휘하에 승려들이 격렬하게 응전하였다. 이에 3번을 격퇴하나, 그 후의 맹공에 결국 중과부적으로 고쿠분지도 함락된다. 이 때 이 절이 전소된다. 이후 치쿠젠 국으로 상륙하여 4월 8일부터 12일까지 현재의 후쿠오카 부근인 하카다주변을 약탈하였다. 이에 대해 치쿠젠 국의 대재권사(大宰權帥)인 후지와라노 다카이에가 규슈의 호족과 무사집단을 소집, 인솔하여 이들을 겨우 격퇴하였다.
일본측이 입은 피해는 사망 365명, 납치 1289명, 우마 380마리, 가옥 45채이상파손등이었다. 여자와 어린이의 피해가 특히 심하여 이키섬에서는 잔존 주민이 35명에 지나지 않았다고 한다. 또한 유명한 쓰시마 은광도 불에 타버렸다.
일본측은 해적집단의 정체를 파악하지 못했는데, 포로로 잡은 3명이 모두 고려인이었다. 이들은 고려를 습격한 도이에게 붙잡혀 있었다고 사정을 설명하였으나 신라말기에 신라해적이 규슈를 습격한 전래가 있었기 때문에 태재부와 일본조정측은 반신반의하였다. 결국 해적들의 정체가 고려인이 아니라고 판명된 것은 7월 7일 고려에 밀항해 있었던 쓰시마 판관대장 나가미네노 모로치카가 귀국하여 고려의 사정을 보고하면서 부터였다. 9월에는 고려 노인송사(虜人送使)로 파견된 정자량이 보호하고 있던 일본인 270명을 송환해 왔다. 고려사자는 이듬해 2월, 태재부에서 고려정부의 기관인 안동호부(安東護府)로 보내는 답서를 가지고 귀국하였다. 후지와라노 다카이에는 이 고려사신의 노고를 치하하여 황금 300량을 선물로 보냈다고 한다.
도이의 주력은 만주민족의 전신인 여진족으로 생각된다. 당시 여진은 농경민족이 아니었기 때문에, 농경민족을 납치하여 자기세력권내에서 농사일을 시켜 식량을 확보하는 약탈경제였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일본침공의 목적인 단순한 해적행위외에 일꾼의 확보목적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것을 일본은 도이의 입구라 부릅니다. 여진족이 해적질을 한다는 것에 생소한 분이 계실진 모르겠지만 고려사를 뒤져보면 동여진이 선박을 이끌고 어디를 약탈했느니 누구를 납치했다느니 하는 사건들이 많이 나오죠.
도이의 입구에 관련된 한국측 사료는 고려사에 딱 한문장 나옵니다.
"병진일에 진명(鎭溟-덕원 지방)의 선병도부서(船兵都部署) 장위남(張渭男) 등이 해적선(도이의 선박) 8척을 노획하고 그들이 납치하였던 일본인 남녀 2백 59명을 빼앗아 공역령(供驛令) 정자량(鄭子良)으로 하여금 자기 본국으로 호송하게 하였다." 1019년 4월에 일어난 일
출처 : 위키백과
이 외에도 일본은 8세기경 신라 해적들에게 많은 침략을 당합니다. 일본측은 신라구라고 하지요. 이 신라구가 한국 역사서에서는 발견되지는 않으나 일본 사서에서는 무더기로 나오죠. 한국 사서에서는 왜구만 언급함. 또 997년에 일본 정사는 아니지만 야사인 백련초에는 고려가 통상요구를 하며 선박 500여척을 이끌고 침략했다고 하였으나, 우리측 기록인 고려사에서는 저 사건을 언급한 기사가 없으므로 교차검증 불가. 이것을 일본은 쵸도쿠의 한구라 부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