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임진왜란

동래성 ‘송상현의 결사항전’…왜군들까지 詩 지어 애도 표하다

작성자러브인|작성시간16.06.30|조회수165 목록 댓글 0

 

동래성 ‘송상현의 결사항전’…왜군들까지 詩 지어 애도 표하다

적장이 제사 모신 동래부사 송상현

 

적군이 동래성 남문 밖에서

‘싸우고 싶으면 싸우고, 싸우고 싶지

않으면 길을 빌려달라’고 하자,

부사인 그가 ‘싸워 죽기는 쉬우나

길을 빌려주기는 어렵다’라며

글을 써 항전 천명…

사후 조정서 벼슬을 증직·정려 명해

 

 

 

 

 

 

 

송상현(宋象賢·1551~1592)의 본관은 여산(礪山), 자는 덕구(德求), 호는 천곡(泉谷)·한천(寒泉)이며 시호는 충렬(忠烈)이다. 전라도 정읍에 태어났다. 남달리 재주가 뛰어나 10대 초에 경사(經史)에 통달했다. 15세에 승보시(陞補試: 고려·조선시대 국학생에게 보인 승급시험)에 장원을 하면서 문장을 떨쳤다. 1570년 진사시에 입격(入格)해 진사가 되고, 1576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승문원 정자에 보임됐다. 여러 벼슬을 거친 후 1591년에 집의(執義)로서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승진되고 동래부사(東萊府使)에 임명됐다.

1591년, 41세에 동래부사 임명 쇠못·기왓장으로 왜군 공격 대비



송상현은 성격이 치밀하고 준비성도 철저했다. 왜구가 쳐들어올 것을 대비해 동래성 주변에 나무를 많이 심어 복병을 숨기기 좋은 여건을 조성하고, 동시에 멀리 떨어진 곳에서는 성이 보이지 않도록 했다. 성문 밖에는 능철(마름쇠: 끝이 송곳처럼 뾰족한 서너 개의 발을 가진 쇠못)을 깔아 왜군 보병과 기병의 공격에 대비했다.

또한 기와를 뜯어 기왓장마저 왜구를 방어하기 위한 도구로 활용하도록 하는 등 동래성을 지키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최선을 다했다.

1592년 4월 14일 부산진성을 침범한 왜군이 동래성으로 밀어닥쳤을 때 적군이 남문 밖에 목패(木牌)를 세워 ‘싸우고 싶으면 싸우고, 싸우고 싶지 않으면 길을 빌려달라(戰則戰矣 不戰則假道)’고 하자, 부사인 그가 ‘싸워 죽기는 쉬우나 길을 빌려주기는 어렵다(戰死易 假道難)’라고 목패에 글을 써서 항전할 뜻을 천명했다.

송상현은 많은 사람 앞에서 맹세하고 성(城)을 돌면서 방어하는데 왜군의 화살과 총알이 난무해 산이 무너지는 것 같은 형세였다. 송상현은 급히 조복(朝服: 관원이 조정에 나아가 하례할 때 입던 예복)을 가져다가 갑옷 위에 차려입고 망루에 올라 호상(胡床: 등받이가 있는 접는 의자)에 앉으니 그 모습이 산과 같았다.

중과부적인 상황에서 마지막으로 적이 밀어닥치자 그는 호상에서 내려와 북쪽 대궐을 향해 절하기를 마치고 부친에게 서찰을 썼다. ‘군신은 의(義)가 중(重)하고 부자는 은혜가 경(輕)합니다.’ 이윽고 의연한 모습으로 왜군에게 피살되니 나이 42세였다. 송상현의 부하 신여로(申汝櫓)와 첩(妾) 금섬(金蟾)도 함께 죽었다.

왜군은 송상현의 시신을 수습해 금섬과 같이 동문(東門) 밖에 묻은 뒤 표지를 세우고 시(詩)를 지어 제사 지냈다. 이후 성의 망루 위에는 항시 자기(紫氣: 자줏빛 기운)가 하늘까지 뻗쳐 수년(數年)간 가니 적이 두려워했다.

조정에서 벼슬을 증직(贈職: 충신·효자 및 학덕이 높은 사람에게 죽은 뒤에 벼슬을 주거나 높여 주던 일)하고 정려(旌閭: 충신·효자·열녀 등을 그 동네에 붉은 칠을 한 정문을 세워 표창하던 일)를 특별히 명했다. 또한 그의 아들에게 벼슬을 주고 예관(禮官)을 보내 사제(賜祭: 임금이 죽은 신하에게 제사를 지내 주던 일)했다.

1595년 유족들이 조정에 청해 반장(返葬: 객지에서 죽은 사람을 살던 곳이나 고향으로 옮겨서 장사를 지냄)할 것을 원했다. 당시 왜적이 아직 동쪽 변두리를 점거하고 있었기에 임금이 지역 관리에게 적을 회유(誨諭: 타일러 일깨워 줌)하도록 명해 유족들이 적진에 들어가 시신을 찾아 돌아왔다. 송상현이 동래에 있을 때 성신(誠信)으로 정치를 해 백성들이 부모같이 받들었는데 영구가 환향함을 듣고는 서로 달려와 부여잡고 울부짖으며 차마 놓아주지 않았고, 적장 평의지(平義智)를 비롯한 왜군들이 모두 말에서 내려 경례를 올렸다.

 

성신(誠信)으로 백성들을 돌보니 부모같이 받들어…왜군도 경례 올려


그의 성품은 지극히 효성스러워 어버이가 집에 계실 때는 하루 종일 모시고 서서 유건과 허리띠를 벗지 않았고 아우 상인(象仁)과도 우애가 매우 깊었다.

또한 과부가 된 누나를 잘 봉양하고 조카들을 사랑하길 자기 자식같이 해 이웃 사람들이 모두 감탄했다.

첩 금섬은 함흥기생 출신으로 송 부사가 함경도 경성판관으로 있을 때 그의 첩이 돼 동래로 따라왔으며, 미모와 재주가 뛰어났다. 동래성 전투 때 송상현이 조복을 가져가는 것을 보고, 여종 금춘(今春)과 함께 관아의 담을 넘어 송상현 곁에 달려갔다가 왜적에게 잡혀 살해됐다. 지금은 충북 청주시 흥덕구 수의동 동래부사 송상현 충렬사 동문 밖에 별도 사당이 만들어져 있으며, 송상현의 묘 옆에 묻혀 있다.

송상현은 온 가문과 노복·첩까지도 국가를 위해 충절을 다했으니 우리의 호국 의지를 다시 한 번 되새겨 볼 때다.


<박희 한국문인협회 전통문학위원장>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