丁若鏞의 『大學』 解釋에 관한 연구
나카 스미오中純夫
(일본 京都府立大學 文學部 조교수)
역자 李承律
(성균관대 유교문화연구소 연구원)
1. 머리말
이 논문은 丁若鏞(호는 茶山, 1762∼1836)의 『大學』 해석에 관해, 주로 朱子學이나 陽明學의 『대학』 해석과 비교하여 그 특색을 밝히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중국 近世의 『대학』 해석은 크게 朱熹 『大學章句』의 해석과 그것을 부정하고 『禮記』 「大學」(이른바 「古本大學」)을 채용한 王守仁의 해석의 두 방향으로 나뉘어진다. 양자는 그들이 근거한 판본은 물론, 三綱領이나 八條目에 대한 해석에서도 커다란 견해차이를 보이고 있다. 주자학이 절대적인 권위를 가지고 思想界를 지배하고 있던 조선시대에 주자학적인 『대학』 해석이 일반적으로 널리 채택되고 있었음은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그러한 분위기 속에서 정약용의 『대학』 해석은 주자학적 해석이나 양명학적 해석과도 다른 독자적인 색채가 매우 강한 개성적인 것이었다.
정약용의 『대학』 해석에는 언뜻 보기에 양명학의 입장과 매우 유사하다고 생각되는 점이 상당히 많다. 판본의 선정에 있어서 『대학장구』가 아닌 「고본대학」을 채택하고 있는 점, ‘明明德’을 타자와의 관계의 場(人倫) 속에서의 행위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점, ‘親民’을 ‘新民’으로 고치는 程朱의 校訂을 비판하는 점, ‘格物’을 卽物窮理로 보는 주희의 해석을 채택하지 않는 점, ‘격’을 ‘量度’, ‘물’을 物有本末의 ‘물’이라고 하는 해석이 王門의 王艮(心齋)의 이른바 淮南格物說과 유사한 점, 등등에 그것이 단적으로 나타나 있다. 그러나 정약용의 『대학』 해석의 전체 구조를 조감해 보면 오히려 주자학적 발상에 가까운 면도 있다.
이 논문에서는 이러한 정약용의 『대학』 해석의 특색에 대해 고찰하고, 아울러 정약용의 『대학』 해석이 정약용 사상 전체 속에서 차지하는 위치나 의미에 대해서도 논급하고자 한다.1)
참고로, 정약용에 관한 자료로는 『與猶堂全書』, 景仁文化社, 1973년(전20책)을 이용했다.(이하 『全書』라고 한다)
2. 「大學公議」와 「大學講義」
정약용의 『대학』 해석을 보여주는 專著로는 아래의 두 종류가 있다.
○ 「大學講義」(正祖 13년 己酉, 1789년, 28세)
『全書』第2集, 經集, 第2卷(第4冊)
○ 「大學公議」一, 二, 三(純祖 15년 乙亥, 1815년, 54세)
『全書』第2集, 經集, 第1卷(第4冊)
「대학강의」는 28세의 나이로 文科(甲科)에 합격한 정약용이 抄啓文臣으로 熙政堂2)에서 정조로부터 직접 試問을 받았을 때 문답한 기록이다.
○乾隆己酉春, 余?甲科, 卽被內閣抄啓. 四月, 上御熙政堂, 召抄啓諸臣講大學. 歸而錄之如左.3) (「大學講義」1a)
건륭 54년 기유란 곧 정조 13년(1789)으로 당시 정약용은 28세였다. 아래의 기록에 의하면 정조를 비롯하여 徐有隣(弘文館提學, 당시 52세), 金憙(奎章閣直提學, 당시 61세)가 試問官으로 임석하여 정약용의 『대학』 해석을 시문하고 있었다. 구체적으로 다루어진 것은 정약용의 기록에 의하면, 朱熹 『大學章句』 序 및 傳 7장, 8장, 9장, 10장이었다.
○課講旣畢, 上特命諸試官與諸講員, 合同會坐, 總抽一篇之旨, 更相問難, 一如私室講學之儀. ?, 其爲盛擧也.(「大學講義」9b)
개개의 講員에 대한 시문이 끝나자 다시 시문관과 강원이 한 자리에 모여 자유롭게 토론했다. 강원으로 이름이 거론되고 있는 인물은 정약용을 비롯하여 安廷善(己酉丙科, 당시 24세), 金履喬(己酉丙科, 26세), 沈能迪(己酉乙科, 29세), 金羲淳(己酉甲科, 33세) 등, 모두 그 해에 문과에 합격한 신진 문신들이었다.
한편 「대학공의」의 성립년대에 관해서는 다음의 문장 속에 잘 나타나 있다.
乾隆辛亥, 內閣月課, 親策問大學. 臣答曰. 臣妄竊以爲大學之極致, 大學之實用, 不外乎孝弟慈三者. 今欲明大學之要旨, 必先將孝弟慈三字疏滌表章, 然後一篇之全體大用, 乃可昭也. 經曰. 明明德於天下, 則明明德歸趣, 必在於平天下一節矣. 興孝興弟之法, 恤孤不倍之化, 其果非明明德之眞面目乎. 卷旣徹, 命擢置第一. 時蔡樊翁爲讀卷官, 謂所言明德之義, 違於章句, 降爲第二. 以金羲淳爲第一. 今二十四年前之事也.(「大學公議」一, 8b)
건륭 56년 신해란 정조 15년(1791)으로 당시 정약용은 30세였다. 明德의 내용을 孝弟慈에 의해 파악하는 것은 「대학공의」에 명시되어 있는 입장인데, 30세의 정약용이 이미 그러한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와 동시에 정약용이 주희『대학장구』의 명덕 해석(“明德者, 人之所得乎天而虛靈不昧, 以具衆理而應萬事物也.”)에 따르지 않았던 것이 부정적인 평가의 요인이 되고 있는 점이 흥미롭다.4) 어쨌든 이 기록에 의하면 「대학공의」의 집필은 정조 15년으로부터 24년 뒤에 해당되므로, 순조 15년 을해(1815), 당시 정약용의 나이 54세 때의 일이 된다.
「대학공의」는 『대학』 全文에 대한 주석서인데 반해, 「대학강의」은 이미 언급했듯이 정약용의 나이 28세 때의 『대학』 해석을 부분적이고 단편적으로 보여주는 자료에 불과하다. 또 「대학강의」에는 “今案, 此對有誤. 義見余公議.”(2b)라고 스스로 加筆하는 등, 나중에 정약용 자신에 의해서도 젊었을 때의 미완성된 설이라고 평해지고 있다. 따라서 이 논문에서는 「대학공의」를 중심으로 정약용의 『대학』 해석을 검토하고, 「대학강의」와의 차이에 대해서는 필요에 따라 언급하기로 한다.5)
3. 『大學』의 版本
「대학공의」는 『대학』의 전문을 인용하면서 자신의 해석을 덧붙이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거기에 인용된 『대학』의 판본은 『예기』「대학」과 거의 완전히 일치한다.6) 즉, 정약용은 주희의 『대학장구』를 부정하고 왕수인과 마찬가지로 고본대학을 판본으로 채택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은 「대학공의」一의 첫머리의 “禮記四十九篇. 鄭目錄大學第四十二.”라는 문장에도 단적으로 나타나 있다.7)
또 주희 『대학장구』의 판본교정에 대한 구체적인 비판도 「대학공의」의 도처에서 발견할 수 있다.8)
○議曰. 自‘知止而后有定’以下至此節, 都是格物致知之說. 格物致知, 不得更有一章. (「大學公議」二, 17b)
이것은 “此謂知本, 此謂知之至也”라는 부분에 삽입되어 있는 문장이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주희는 程헉에 따라 “此謂知本”을 衍文이라고 하고, 또 “此謂知之至也” 앞에는 빠진 구절이 있으며, 본래 거기에는 격물치지를 해석하는 傳文이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하여 스스로 그 전문을 보충했다.(『大學章句』「傳第五章」 이른바 「格物補傳」 정약용은 원문(『예기』「대학」) 그대로도 격물치지를 해석하는 데에는 문제가 없다고 주장하고, 주희에 의한 「격물보전」 그 자체를 부정했다.
○朱子曰. ‘彼爲善之’上下, 疑有闕文誤字. … 鏞案, … 未見其爲闕文.(「大學公議」三, 45a)
여기서도 원문에 궐문과 오자가 있다고 하는 주희의 견해(『대학장구』「傳十章」)를 부정하고, 궐문은 없고 원문 그대로도 의미는 통한다고 주장한다.
○古經不宜輕改. 曰‘慢’曰‘怠’, 將何徵矣. 大學改三字(原注‘親’‘身’‘命’三字), 恐皆當以不改爲善也.(「大學公議」三, 44a)
이것은 “見賢而不能擧, 擧而不能先, 命也.”라는 부분에 삽입되어 있는 문장이다. 이 ‘命’자에 대해 鄭玄은 이것을 ‘慢’의 오자, 정이는 ‘怠’의 오자로 보고, 주희는 그 두 가지 설을 함께 기록해 두었다.9) 정약용은 판본을 이와 같이 고치는 것에 대해 부정적이었다. 참고로 “大學改三字”란 여기서 말하는 ‘명’자 외에, ‘친민’을 ‘신민’으로 고치는 문제(『대학장구』「經」)와 “身有所忿 ?, 則不得其正”의 ‘身’을 ‘心’으로 고치는 문제(『大學章句』「傳第七章」)를 가리킨다.(‘친민’에 대해서는 나중에 언급한다)
4. ?子의 學
정약용의 『대학』 해석의 커다란 특색 중의 하나는 대학을 太學(=國學)으로 파악하고, 대학이란 ?子를 교육하는 장, 대학의 道란 ?子를 가르치는 도라고 해석하는 것이다.
○大學者, 國學也. 居?子以敎之. 大學之道, 敎?子之道也.
○議曰. 舊音‘大’讀爲‘泰’. 今人如字讀, 非也.(「大學公議」一, 1b)
子란 太子를 의미하는데 구체적으로는 天子의 嫡子나 庶子, 三公諸侯의 적자를 의미한다.
○?子者, 太子也. 惟天子之子, 嫡庶皆敎, 而三公諸侯以下, 惟其嫡子之承世者, 乃入太學. … 非匹庶家衆子弟所得與也.(「大學公議」一, 3a)
그렇다면 정약용은 왜 대학을 ?子를 가르치는 장이라고 한정적으로 파악하는 것인가? 그것은 대학이 최종적으로는 治國平天下를 지향하는 학문이기 때문이다.
○天子之太子, 將繼世爲天子, 天子之庶子, 將分封爲諸侯. 諸侯之適子, 將繼世爲諸侯, 公卿大夫之適子, 將繼世爲公卿大夫. 斯皆他日御家御邦, 或君臨天下, 或輔弼天子, 道斯民而致太平者也. 故入之于太學, 敎之以治國平天下之道.(「大學公議」一, 3a)
위의 문장에 나타나 있듯이, 천자의 태자는 천자의 지위를 계승하고 천자의 서자는 제후가 된다. 제후의 적자는 제후의 지위를 계승하고 공경대부의 적자는 공경대부의 지위를 계승한다. 즉, 그들은 장래에 혹은 천자로 혹은 천자의 보좌로 모두 천하 국가의 정치에 참여하여 치국평천하의 책무를 담당해야 할 존재이다. 그렇기 때문에 태학에 입학하여 대학의 도를 배우는 것이다.
이것을 다른 각도에서 보면, “寒門賤族,”“編戶匹庶之子,”“匹庶凡民之子”는 치국평천하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존재이며, 따라서 태학에 입학할 수 없는 존재이다.10) 이것은 대학을 ‘大人之學’이라고 하여 천자의 적자·서자로부터 서민 중 뛰어난 자에 이르기까지 모두 15세가 되면 대학에 입학하여 배울 수 있었다고 하는 주희의 해석과는 크게 다른 점이다.11)
○今也, 爵不世襲, 才不族選, 寒門賤族, 亦可以蹴到卿相佐人主而治萬民. 先儒習見此俗, 不?古制, 故以太學爲萬民所游之地, 以太學之道爲萬民所由之路. 看太學二字, 原不淸楚, 謂治國平天下, 未必爲太學所專之道. 故改之曰‘大人之道學’, 欲以之爲公共之物耳. 然古之太學, 原有主人, 編戶匹庶之子, 雖冠而爲大人, 恐太學未易入也.(「大學公議」一, 3b)
한문천족 출신의 사람이 군주를 보좌하고 국정에 참여한다는 현상이 설령 있다 하더라도, 그러한 현상에 맞추어 古制의 해석을 잘못해서는 안된다고 한다. 여기서 말하는 ‘先儒’는 분명 주희를 가리키고 있다. 그리고 정약용 자신의 표현을 빌리면, 주희의 해석은 대학을 ‘만민이 배우는 곳’ 대학의 도를 ‘만민이 의거해야 할 도’라고 하여 대학을 ‘공공의 것’으로 생각하는 입장이지만, 여기서 정약용은 그러한 해석을 전면적으로 부정하고 있다.
그런데 아래의 자료를 보면, 정약용이 여기서 거론하고 있는 문제를 사실은 주희도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曰. ‘治國平天下者, 天子諸侯之事也. 卿大夫以下, 蓋無與焉. 今大學之敎, 乃例以明明德於天下爲言, 豈不爲思出其位, 犯非其分. 而何以得爲爲己之學哉.’ 曰. ‘… 君子之心, 豁然大公, 其視天下, 無一物而非吾心之所當愛, 無一事而非吾職之所當爲. 雖或勢在匹夫之賤, 而所以堯舜其君堯舜其民者, 亦未嘗不在其分內也. 又況大學之敎, 乃爲天子之元子衆子·公侯卿大夫士之適子與國之俊選而設. 是皆將有天下國家之責而不可辭者.’(朱熹『大學或問』山崎嘉點本, 8b∼9a)
여기서 주희는 치국평천하는 천자나 제후가 주관해야 할 사항이므로 경·대부 이하는 아무런 상관이 없지 않는가, 경·대부 이하가 치국평천하에 참여하는 것은 신분에 맞지 않는 월권행위(“思出其位”)12)가 아닌가 라는 물음을 스스로 던지고 있다. 그리고 그것에 대한 대답 속에 주희는 비록 필부(=서민)이라 할지라도 요순의 치세의 실현을 지향하는13) 것은 신분의 고하와는 관계없는 일이므로, 위로는 천자의 적자·서자로부터 아래로는 서민 중 뛰어난 자에 이르기까지 모두 천하 국가에 대해 책무를 맡아야 할 존재라는 견해를 보여주고 있다.
양자 사이에 이러한 견해가 생긴 이유는 무엇일까? 그 하나는 주희가 『대학장구』를 단지 옛날 대학의 교육이념을 기록한 서적을 주석한 책으로서가 아니라, 자신의 학문관이나 학문방법론에 가탁하여 표명한 책으로 집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주희에게 있어서 『대학』을 읽는 것이란 바로 고인의 학문방법론을 배우고 그것을 스스로도 실천하는 행위였던 것이다.14) 『대학』이 일개 필부에 이르기까지 학문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학문하는 강목’15)이 될 수 있기 위해서는 천자 제후에게만 관련된 책으로 규정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과거제도의 사회적 침투에 의해 宋代에는 종래의 귀족사회·문벌사회와는 달리 신분의 수평화가 진행되어, 적어도 이념적으로는 과거에 합격하면 모든 사람들이 국정에 참여할 수 있는 상황에 있었다. 주희의 『대학』 해석도 그러한 시대사조와 무관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정약용은 과연 어떠한 태도로 「대학공의」를 집필했던 것인가? 어디까지나 경서로서의 『대학』에 대한 정확하고 실증적인 해석을 지향하려고 했던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무언가 스스로의 학문관이나 사회관을 투영시키려고 했던 것인가? 사실 이 문제에 대해 필자 자신은 아직 명확한 견해를 가지고 있지 못하다.
○‘虛靈不昧’‘心統性情’曰‘理’曰‘氣’曰‘明’曰‘昏’, 雖亦君子之所致意, 而斷斷非古者太學敎人之題目.(「大學公議」一, 7a)
○明心固亦吾人之要務, 但此經之云‘明明德’, 必非明心.(「大學公議」一, 10a)
○答曰. 我所言者經也, 非我也. 治心繕性, 固亦君子之要務. … 心性之論, 雖高明精微, 於此經, 了不相關.(「大學公議」一, 12b∼13a)
위의 문장들은 모두 주자학의 중요개념 혹은 주자학적인 학문방법론을 언급한 것들이다. 여기서 정약용은 그 개념들이나 학문방법론 그 자체의 當否와 경서 해석의 타당성을 일단 분리시키고, 어디까지나 경서 해석의 타당성에 비추어 이것을 비판한다는 신중한 자세를 보여주고 있다. 특히 세 번째 자료에서는 “내가 여기서 말하고 있는 것은 어디까지나 경서의 해석이지 내 자신의 입장이 아니다”라는 취지의 발언을 하고 있는 점에서 주목할만 하다.16) 다만, 「대학공의」에 정약용 자신의 학문관이나 사회관이 전혀 반영되어 있지 않다는 것도 또한 생각하기 어렵다.
정약용은 主著 「牧民心書」의 「辨等」조에서 「변등」 즉 위 아래의 등급을 변별하고 존비귀천의 구별을 명확하게 해야 할 필요성을 자주 강조하고 있다.17)
雍正辛亥以後, 凡私奴良妻所生, 悉皆從良. 自此以後, 上弱下强, 紀綱陵夷, 民志以散, 不相統領. … 大抵小民愚蠢, 無君臣之義, 師友之敎. 非有貴族高門爲之綱紀, 則無一非亂民也. 一自辛亥以來, 貴族日彫, 賤類日橫, 上下以紊, 敎令不行. 一有變亂, 卽土崩瓦解之勢, 莫之能禦也. … 愚謂奴婢之法不復, 則亂亡不可救也.(「牧民心書」卷8, 禮典, 「辨等」, 5a∼6a)
옹정 9년 신해란 영조 7년(1731) 때의 일이다. 조선초기 이래 노비는 公·私 노비의 구별없이 부모 중의 한쪽이 노비 신분이면 그 자식은 모두 노비의 신분과 노역에 따른다고 규정되어 있었다. 이윽고 顯宗 10년(1669)이 되면 부친이 노비이고 모친이 양민일 경우 그 자식은 모두 양민이 되어 良役에 따른다고 하는 奴良妻所生從母役法이 실시되게 된다. 그런데 당시 종모역법을 주장한 것은 오로지 西人뿐이었고 南人은 그것에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그 때문에 서인과 남인의 당쟁과 정권의 귀추에 따라, 이 법은 몇 번이나 반복적으로 남인에 의해 폐지(還賤)되거나 서인에 의해 재실시(從良)되게 된다. 그리하여 肅宗 15년(1689)에 폐지된 뒤 42년이 지난 영조 7년(1731) 1월에 다시 종모역법이 실시되게 되었다.18) 이 자료에서 정약용은 종모역법은 상하신분의 질서와 기강을 문란하게 하는 것으로 격렬하게 비난하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 정약용이 星湖學派(남인파)에 속하는 인물이었던 것을 생각하면, 노비신분에 관한 정약용의 이러한 견해는 남인양반 일반과 그 인식을 공유하는 것이었다고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19)
어쨌든 대학을 ?子의 학으로 규정하는 「대학공의」의 해석에는 소민을 우매한 존재로 단정하는 것을 꺼리지 않는 정약용의 사회관·신분의식도 어느 정도 반영되어 있다고 생각된다.20)
5. 格致六條
논의의 편의상 삼강령과 팔조목 중 먼저 팔조목에 대해 살펴보기로 한다. 팔조목에 대한 정약용의 해석은 ‘格致六條’라고 불리는 독특한 것이다. 먼저 그 ‘격물’‘치지’의 해석부터 확인해 보도록 하자.
○‘物有本末, 事有終始. 知所先後, 則近道矣.’…‘物’者‘意’‘心’‘身’‘家’‘國’‘天下’也. ‘事’者‘誠’‘正’‘修’‘齊’‘治’‘平’也. 本始所先, 末終所後. …‘意’‘心’‘身’本也. ‘家’‘國’‘天下’末也. …‘誠’‘正’‘修’始也. ‘齊’‘治’‘平’終也.(「大學公議」二, 15a)
○‘致’至之也. ‘格’量度也. 極知其所先後, 則‘致知’也. 度物之有本末, 則‘格物’也.(「大學公議」二, 15b)
○‘意’‘心’‘身’‘家’‘國’‘天下’, 明見其有本末, 則物格也. ‘誠’‘正’‘修’‘齊’‘治’‘平’, 明認其所先後, 則知至也.(「大學公議」二, 17a)
정약용은 ‘격물’에 대해 ‘격’을 ‘量度(헤아리다)’, ‘물’을 ‘意’,‘心’,‘身’,‘家’, ‘國’,‘天下’로 정의한다. ‘격물’이란 구체적으로는 ‘물’에 대해 그 근본(의·심·신)과 말단(가·국·천하)을 헤아리는 것이다. ‘치지’란 ‘誠’‘正’‘修’‘齊’‘治’‘平’의 6가지 일에 대해 그 시작(성·정·수)과 끝(제·치·평)을 완전히 아는 것이다.21)
이것을 도표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그림1)
그림1 格致六條
이처럼 ‘격물’‘치지’란 팔조목 중 ‘성의’ 이하 ‘평천하’에 이르는 6조에 대해 그 실천에 앞서 미리 본말과 선후를 헤아려서 아는 것을 말한다. 즉 실질적인 착수처는 ‘성의’로부터 시작되며, ‘성의’ 이전에 다른 2조의 공부가 있는 것이 아니다.22) 이러한 팔조목 이해를 정약용은 스스로 ‘격치육조’라고 명명하고 있다.
○文雖八轉, 事惟六條. ‘格物’‘致知’, 不當幷數之爲八. 名之曰‘格致六條’(「大學公議」二, 17a)
참고로 아래의 자료에는 ‘終始’‘成己’‘成物’‘修身’‘化民’이라는 개념의 관계가 언급되어 있다.
○『中庸』曰. ‘誠者, 物之終始.’始者成己也. 終者成物也. 成己者修身也. 成物者化民也.(「大學公議」二, 15b)
이것을 물의 본말 사의 종시에 관한 정약용의 규정(그림1을 참조)과 대조해 보면, 그림2와 같이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림2 六條와 成己成物
다만, ‘제가’를 화민에 분류하는 것에 대해서는 정약용의 독자적인 ‘民’ 해석에 비추어 볼 때 약간의 문제가 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나중에 다시 언급하기로 한다.
참고로 「대학강의」를 읽어 보면 정약용의 격치육조설의 골격은 「대학강의」를 집필한 28세 때에 이미 성립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23)
6. 明明德
1)‘明明德’
정약용은 삼강령의 ‘명명덕’에 대해 명덕의 내용을 孝弟慈로 해석한다.24) 효제자란 『대학』 ‘治國必先其齊家’절에 나오는 말로, ‘君’‘長’‘衆’이라는 타자와의 인간관계, 즉 인륜을 의미한다.25) 따라서 ‘명명덕’이란 인륜을 밝히는 것이다.26)
2)‘誠意’‘正心’
정약용이 말하는 ‘명명덕’의 개념의 특징을 더욱 명확하게 하기 위해 여기서 정약용의 ‘성의’, ‘정심’ 해석에 주목해 보고자 한다. 정약용의 ‘성의’, ‘정심’ 해석의 커다란 특징은 실천자가 자신의 ‘意’나 ‘心’과 對峙하면서 전념하는 행위로서가 아니라, 항상 타자와의 관계의 장 속에서 전념해야 할 행위로 파악하고 있는 점이다.
○‘誠意’‘正心’雖是學者之極工, 每因事而誠之, 因事而正之, 未有向壁觀心, 自檢其虛靈之體, 使湛然空明, 一塵不染. … 徒意不可以言誠, 徒心不可以言正.(「大學公議」一, 9a)
여기서는 ‘성의’‘정심’은 항상 ‘事’에 입각해서 실천해야 한다고 기술되어 있다. 그렇다면 ‘사’란 무엇인가?
○先聖之治心繕性, 每在於行事, 行事不外於人倫. …‘誠’‘正’每依於行事, ‘誠’‘正’每附於人倫. 徒意無可誠之理, 徒心無可正之術.(「大學公議」一, 13a)
‘사’란 바로 인륜이다. 인륜, 즉 타자와의 관계의 장을 떠나 자신의 ‘의’나 ‘심’과 대치하는 것과 같은 실천방법은 확실히 부정된다.
○若不據人倫, 單取此‘意’, 求所‘誠’之, 單取此‘心’, 求所‘正’之, 則滉퀄恍惚, 沒摸沒捉, 其不歸於坐禪之病者, 鮮矣.(「大學公議」一, 13b)
위의 두 자료에 보이는 ‘徒意’, ‘徒心’을 이 자료와 대조해서 설명하면, ‘도의’란 바로 인륜을 떠나 단독으로 생겨난 ‘의’, ‘도심’이란 인륜을 떠나 단독으로 생겨난 ‘심’을 의미한다. 이러한 ‘도의’, ‘도심’을 대상으로 한 ‘성의’, ‘정심’은 마치 좌선하는 사람이 벽을 향해 마음을 보는(向壁觀心) 것과 같은 것으로, 그것은 성인이 가르치는 실천(先聖之治心繕性)이 아니라는 의미이다.
이러한 ‘성의’‘정심’ 해석에 분명히 나타나 있듯이, 정약용의 경우 ‘명명덕’은 한 사람의 실천자가 자기완결적으로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타자와의 관계의 장(인륜) 속에서 수행되어야 하는 것이었다. 이 점은 나중에 주자학과 양명학의 ‘명명덕’ 해석과 대비해 보기로 한다.
3)‘一綱三目’說에 대한 비판
앞절에서는 ‘성의’‘정심’과의 관계에서 ‘명명덕’의 특징을 논했다. 그러나 정약용의 『대학』 해석에서 ‘성의’‘정심’을 과연 ‘명명덕’과 대응하는 것으로 볼 수 있는지의 여부는 사실 좀더 검토해 보아야 할 문제이다. 그것은 더 나아가서는 정약용의 『대학』 해석에서 삼강령과 팔조목의 대응관계의 문제이기도 하다. 후자에 대해서는 나중에 다시 논하기로 하고, 여기서는 전자의 문제에 한하여 확인해 두고자 한다.
정약용은 ‘一綱三目’설을 거론한 다음 이것을 비판하고 있다. ‘일강삼목’설이란 삼강령의 명명덕과 신민(친민)에 대해 德과 意心身, 民과 家國天下를 각각 「綱―目」의 관계에서 파악하는 견해이다.
○或問曰. ‘原有大學有綱有目. 意心身者, 德之目也. 家國天下者, 民之目也. 先王明意心身之德, 斯謂之明明德. 新家國天下之民, 斯謂之新民. 今乃孝弟慈爲明德, 可乎.’ 答曰. ‘意心身者, 善惡未定之物, 烏得徑謂之德乎. 德猶不可, 烏得徑謂之明德乎. … 意心身之非明德, 豈不明甚. 誠意·正心·修身之非明明德, 又豈不明甚乎. … 一綱三目, 認之爲天成地定, 原是大夢也.’(「大學公議」一, 8b∼9a쪽)
○或問曰. ‘意心身者, 德也. 家國天下者, 民也. 今子親民之義, 專主下民爲說, 將親民不得爲綱, 家國天下不得爲目乎.’答曰. ‘…’(「大學公議」一, 11a쪽)
이 일강삼목을 주자학의 삼강령과 팔조목의 대응관계와 비교해 보면 아래의 도표와 같다.(그림3·그림4)
그림3 ‘一綱三目’說
그림4 주자학의 삼강령과 팔조목
그림4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주자학의 삼강령과 팔조목의 관계는 ‘격물’, ‘치지’, ‘성의’, ‘정심’, ‘수신’이 ‘명명덕’과 대응하고, ‘제가’‘치국’‘평천하’가 ‘신민’과 대응하고 있다.27) 정약용의 경우 격치육조설에 의해 ‘격물’‘치지’는 구체적인 실천항목과는 별도로 취급된다. 따라서 그림4에서 격물·치지를 제외하면 그림3의 일강삼목설과 거의 대응되게 된다. 그리고 정약용은 이 일강삼목설을 명확하게 부정하고 있다. 따라서 앞의 두 자료 중 전자에 기술되어 있는 것처럼, ‘성의’, ‘정심’, ‘수신’과 ‘명명덕’의 대응관계도 부정되게 된다.(“誠意·正心·修身之非明明德, 又豈不明甚乎.”) 만약 이 기술을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성의’, ‘정심’을 통해 ‘명명덕’의 특색을 논하려고 한 앞절의 고찰은 의미를 잃게 된다.
그러나, 정약용이 일부러 일강삼목설을 거론한 뒤 그것을 부정한 이유는 다음의 2가지 목적 때문일 것으로 생각된다. 하나는 명덕의 내용이 효제자임을 명확하게 하기 위해서이고, 다른 하나는 民이 下民을 의미함을 명확하게 하기 위해서이다. 그것은 앞의 두 자료 중 전자가 ‘명덕=효제자’라는 해석을 비판하는 물음을 제기하고, 후자가 ‘민=하민’이라는 해석을 비판하는 물음을 제기한 뒤, 각각에 반론을 시도하고 있는 것으로부터도 분명하다. ‘민=하민’이라는 해석에 대해서는 나중에 언급할 예정이므로 후자의 반론부분은 생략하기로 한다. 전자에 대하여 말하면, 여기서 정약용이 부정하고 있는 것은 어디까지나 효제자라는 인륜을 벗어난 ‘의’, ‘심’(즉 ‘도의’, ‘도심’)을 대상으로 한 ‘성의’‘정심’을 ‘명명덕’의 내용으로 보는 것과 같은 이해이다. 반대로 말하면, 인륜에 근거하여 행해지는 ‘성의’, ‘정심’은 바로 ‘명명덕’의 내실을 이루는 것이 될 것이다. 다음의 자료는 단적인 증거가 된다.
○其所謂‘誠意’‘正心’, 亦其所以爲孝弟之妙理方略而已.(「大學公議」一, 7a)
여기서는 ‘성의’, ‘정심’이 ‘효제(자)’를 실현하는 구체적인 방법으로 규정되어 있는데, 그것은 바로 ‘명덕=효제자’를 밝히는 행위이다.
이상으로부터 팔조목의 ‘성의’, ‘정심’은 삼강령의 ‘명명덕’과 대응관계에 있고, 따라서 ‘성의’, ‘정심’의 분석을 통해 ‘명명덕’의 특징을 논한 앞절의 고찰은 여전히 그 타당성을 잃지 않고 있다고 생각한다.
4) 朱子學과 陽明學의 ‘明明德’ 해석
정약용의 ‘명명덕’ 해석의 특징을 더욱 명확하게 하기 위해 주희 및 왕수인의 ‘명명덕’ 해석과 비교해 보자.
주자학의 경우 ‘명명덕’은 수기의 공부이고 ‘신민’은 치인의 공부로, 먼저 자신을 닦고 그 다음에 타자의 교화로 이어진다는 실천의 순서가 상정되어 있다. 따라서 수기로서의 ‘명명덕’은 그 자체가 하나의 독립된 자기완결적인 행위로 규정되어 있다.
○今吾旣幸有以自明矣, 則觀彼衆人之同得乎此而不能自明者, 方且甘心迷惑, 沒溺於卑汚苟賤之中, 而不自知也. 豈不爲之惻然而思有以救之哉. 故必推吾之所自明者以及之, 始於齊家, 中於治國, 而終及平天下, … 是則所謂新民者.(朱熹, 『大學或問』, 山崎嘉點本, 4a∼4b)
이 자료에서는 이미 ‘명명덕’의 실천을 끝낸 사람은 그것에 만족하지 말고 반드시 타자를 교화하고 구제해야(제가·치국·평천하) 한다는 취지가 기술되어 있다. 여기에는 ‘명명덕’과 ‘신민’의 선후관계가 명확하게 나타나 있다.28)
이것에 대해 왕수인의 경우 명명덕과 친민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曰. ‘明德, 親民, 一乎.’ 曰. ‘一也. … 德不可以徒明也. 人之欲明其孝之德也, 則必親於其父而後孝之德明矣. 欲明其弟之德也, 則必親於其兄而後弟之德明矣. … 故明明德必在於親民, 而親民乃所以明明德也. 故曰. 一也.’(『王文成公全書』卷7, 「親民堂記」)
예를 들면 효라는 명덕을 밝히는 행위는 반드시 아버지에게 친하게 대한다는 실천을 통해 행해져야 하며, 제라는 명덕을 밝히는 행위는 반드시 형에게 친하게 대한다는 실천을 통해 행해져야 한다. 즉 ‘친민’이라는 장을 떠나 그것과 별도로 행해지는 ‘명명덕’ 따위는 있을 수 없다. 왕수인에 있어서는 어디까지나 ‘명명덕’과 ‘친민’의 일체성이 강조된다.29)
이상의 고찰을 토대로 하면, 정약용의 ‘명명덕’은 타자와의 관계라는 개방된 장에서의 실천이 지향되고 있다는 점에서 주희의 해석보다도 왕수인의 해석에 가깝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주희의 ‘명명덕’은 ‘신민’과 결부되고, 왕수인의 ‘명명덕’은 ‘친민’과 결부되어 있다. 그리고 다음 장에서 고찰하듯이, 정약용은 무엇보다도 ‘신민’설을 버리고 ‘친민’설을 채택하고 있다. 그것은 양명학설과의 친근성을 더욱 더 예상하게 한다.
그러나, 정약용의 ‘명명덕’, ‘친민’ 해석은 사실은 양명학과 커다란 차이가 있다.
7. 親民과 新民
1)‘親’과 ‘新’
정약용이 『대학』의 판본으로 『예기』에 수록되어 있는 것을 채택한 것에 대해서는 이미 언급했다. 주희 『대학장구』의 판본교정에 대해 정약용은 한결같이 부정적이었다. 『대학』 본문 중의 ‘친’‘신’‘명’ 3자를 고치는 것에 대해서도 한결같이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였다.(제3장 참조) ‘친민’과 ‘신민’의 문제를 논하기 전에 확인을 위해 또다른 자료를 인용해 보자.
○程子曰. ‘親當作新’王陽明曰. ‘親字不誤’議曰. 明德旣爲孝弟慈, 則親民亦非新民也.(「大學公議」一, 10b)
이처럼 정약용은 언뜻 보기에 정주의 해석을 버리고 왕수인의 ‘친민’설에 따르고 있는 것 같지만, 문제는 ‘친민’의 내용이다.
먼저 ‘친’에 관해 살펴보자. 아래의 자료는 모두 ‘친민’설의 근거를 보여주는 것이다.(모두 「大學公議」一, 10b에서 인용)
○舜命契曰. ‘百姓不親, 汝敷五敎.’(『尙書』「舜典」)五敎者, 孝弟慈也. 舜命契敷孝弟慈之敎, 而先言‘百姓不親’, 則孝弟慈者, 所以親民之物也.
○魯展禽之言曰. ‘契爲司徒而民輯.’(『國語』「魯語」上)民輯者, 民親也.
○孔子曰. ‘先王有至德要道以順天下, 民用和睦.’(『孝經』「開宗明義」)民用和睦者, 民親也.
○孔子曰. ‘敎民親愛, 莫先於孝. 敎民禮順, 莫先於弟’(『孝經』「廣要道」)民親愛者, 民親也.
○孔子曰. 「立愛自親始, 敎民睦也. 立敎自長始, 敎民順也.」(『禮記』「祭義」)民睦民順者, 民親也.
굵은 글씨 각각의 부분에 의해서도 분명히 알 수 있듯이, 여기서 말하는 ‘친민’이란 백성이 서로 친하게 지내는 것이다. ‘명명덕’의 실천주체를 가령 ‘나’라고 표현한다면, ‘친민’에 있어서 친하게 대하는 주체는 ‘백성’이지 ‘내’가 아니다.
○敎民以孝, 則民之爲子者, 親於其父. 敎民以弟, 則民之爲弟者, 親於其兄, 民之爲幼者, 親於其長. 敎民以慈, 則民之爲父者, 親於其子, 親(當作‘民’)之爲長者, 親於其幼. 太學之道, 其不在於親民乎.
여기에 분명히 나타나 있듯이 ‘나’는 ‘백성’에 대해 효제자를 교화하고, 그 교화나 감화에 의해 ‘백성’이 서로 친하게 대하는 것이다. 즉 ‘친민’이란 ‘내’가 ‘백성’에게 친하게 대한다라는 의미가 아니라, ‘백성’을 친하게 대하게 한다라는 의미이다.30) 양명학의 ‘친민’이란 ‘내’가 ‘백성’에게 친하게 대한다는 것이므로 정약용의 ‘친민’ 해석은 이 점에서도 이미 양명학과 다르다.
사실 정약용은 한편으로 ‘신민’설까지도 허용하여, 오히려 ‘친민’‘신민’이라는 2가지 해석 중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는 것을 경계하고 그 병용병존을 주장하고 있다.
○若云‘盤銘’‘康誥’‘周雅’之文爲‘新民’之明驗, 則‘新’(當作‘親’)‘新’二字, 形旣相近, 義有相通. 親之者, 新之也. … 總之, 兩義不可偏廢.(「大學公議」一, 10b∼11a)
‘신민’, ‘친민’이라는 2가지 해석의 병존이 어떻게 해서 가능한 것인가? 그것은 바로 그 어느 해석에 의해서도 의미가 통하기 때문이다.
○經曰. ‘一家仁, 一國興仁. 一家讓, 一國興讓.’又曰. ‘上老老而民興孝, 上長長而民興弟.’興也者, 作新也. 舊廢而新興也. 此之謂‘新民’.(「大學公議」一, 11b∼12a)
○‘新民’本是使民興孝, 使民興弟.(「大學公議」二, 23a)
여기에 언급되어 있듯이, ‘신민’이란 백성이 효제자의 덕에 흥기하는(=각성하여 분기하는)것이다. 백성이 효제자의 덕에 흥기하는 것이란 곧 백성이 서로 친하게 대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처럼 정약용에 있어서는 ‘친민’과 ‘신민’은 동일한 의미이다.
왕수인의 ‘명명덕’‘친민’ 해석에서 명덕을 밝히는 주체와 백성에게 친하게 대하는 주체는 동일한 ‘나’이다. ‘명명덕’과 ‘친민’은 불가분의 실천이며, 더 나아가 양자는 실질적으로 동일한 실천이었다. 그에 반해 정약용에 있어서는 ‘명명덕’과 ‘친민·신민’ 사이에 사실은 명백한 선이 그어져 있다.(나중에 언급) 왕수인의 ‘친민’이 수기와 치인, 성기와 성물을 일체화하는 의의를 가지고 있는데 반해, 정약용의 ‘친민·신민’은 분명히 치인·성물의 뜻으로 사용되고 있다. 그러한 의미에서 정약용의 ‘친민·신민’은 오히려 왕수인의 ‘친민’보다는 주희의 ‘신민’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정약용에 있어서의 삼강령의 두 번째는 본래 2가지 해석의 병존이라는 것를 고려하여 ‘친민·신민’이라고 표기해야 하겠지만, 아래에서는 특별히 필요가 없을 경우에는 번잡을 피하기 위해 ‘신민’으로 표기하기로 한다.
2)‘民’
이미 언급했듯이 정약용에 있어서 『대학』이란 ?子의 학으로 일관되어 있고, 따라서 『대학』에서 실천주체로서의 ‘나’는 학문을 하는 사람 일반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子였다. 그렇다면 ‘신민’에서 ‘민’이란 무엇인가?
○‘新民’二字, 亦主下民而言. 不可曰家在民中. 父母兄弟, 可云民乎. … 孝於父悌於兄者, 語人曰我新民, 可乎.(「大學公議」一, 9a)
○孟子言庠序學校之制而繼之曰. ‘學校所以明人倫也. 人倫明於上, 小民親於下.’亦豈是他說乎. ‘明明德’者, 明人倫也. ‘親民’者, 親小民也.(「大學公議」一, 10b)
○或問曰. 意身心者, 德也. 家國天下者, 民也. 今子親民之義, 專主下民爲說. 將親民不得爲綱, 家國天下不得爲目乎. 答曰. … 家者, 父子兄弟之所在也. 父子兄弟, 可云民乎.(「大學公議」一, 頁11a∼11b)
위의 자료에는 하민과 소민이라는 표현이 보인다. 이 경우 하민이나 소민이란 타자 일반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子가 장래에 천자나 제후, 공경대부가 되었을 때 ‘성물’의 대상으로 삼아야 할 서민을 가리키고 있다. 첫 번째와 세 번째 자료에 보이듯이 ?子 자신의 부모형제는 ‘신민’의 ‘민’에는 포함되지 않는다.
주자학의 ‘신민’과 양명학의 ‘친민’에서 ‘민’은 ‘나’와 대치된 타자 일반을 가리키고 있기 때문에 이 점에서도 정약용의 ‘신민’ 해석은 특이하다.
그런데, 父子兄弟란 ‘제가’의 대상을 구성하는 사람들이다. 따라서, 부자형제가 ‘신민’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는 것은 ‘제가’는 ‘신민’과는 대응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팔조목 중에서 ‘제가’, ‘치국’, ‘평천하’ 중 ‘제가’가 ‘신민’과 대응하지 않는다는 것은 정약용에게 있어서 삼강령과 팔조목(실질적으로는 육조목)의 대응관계 전체에 파급되는 문제이다. 그것은 또 정약용에 있어서의 ‘명명덕’과 ‘신민’의 관계를 고찰할 때에도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8. 止至善
먼저 정약용이 ‘止至善’을 어떻게 정의하고 있는지 확인해 보자.
○‘止’者至而不遷也. ‘至善’者, 人倫之至德也. …‘止於至善’者, ‘爲人子止於孝, 爲人臣止於敬, 與國人交止於信, 爲人父止於慈, 爲人君止於仁.’凡人倫之外, 無至善也.(「大學公議」一, 12a)
여기에 기술되어 있듯이 ‘지선’이란 인륜의 최상의 상태를 의미한다. ‘지지선’이란 그러한 상태를 실현하는 행위이다. 구체적으로는 ‘孝’‘敬’‘信’‘慈’, ‘仁’의 5가지 예가 제시되어 있는데, 이 5가지는 실질적으로는 효제자 3가지로 수렴할 수 있다.31) 따라서 ‘지지선’이란 효제자를 실현하는 행위이다.
한편 ‘명명덕’이란 효제자를 밝히는 것이었고, ‘신민’이란 백성이 효제자에 흥기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지지선’이란 효제자를 실현하는 것이다. 즉, 정약용에 있어서 『대학』의 삼강령은 효제자의 실현이라는 한 가지 관점에서 일관되게 해석되고 있다.32)
그런데 정약용의 ‘지지선’ 해석에서 특징적인 것은 이것을 ‘自修’의 행위로 규정하고 있는 점이다.(‘자수’는 『대학』에 나오는 말이다.33))
A 止至善一句, 雖爲明德新民之所通貫, 而若其用力, 仍是自修. 非治人使止於至善也. …‘爲人君止於仁.’亦只是自修. 堯舜不强勸民使止於至善也. 經曰. ‘堯舜帥天下以仁.’帥也者, 率也, 導也. 堯舜身先自修, 爲百姓導率而已. 强令民止於至善, 無此法也.(「大學公議」一, 12a)
자료의 앞부분에 기술되어 있듯이 ‘지지선’은 ‘(명)명덕’과 ‘신민’ 모두를 포함하는 개념이며, 또 동시에 그 실천은 ‘자수’에 의한다고 한다.
B 且聖人之道, 雖以成己成物爲始終, 成己以自修, 成物亦以自修. 此之謂身敎也. … 我旣治心, 又治民心, 偕期於止至善, 豈經文之所言乎. … 我旣至善, 民自隨我而至善. 然民之至善, 非我所强. ‘爲仁由己, 而由人乎哉.’(「大學公議」一, 13a)
여기서는 成己와 成物이 모두 ‘자수’에 의한다고 기술되어 있다. 위의 두 자료에서 말하는 ‘자수’란 무엇인가?
B에 의하면 성기란 ‘내’가 善에 이르는 것을 의미하고, 성물이란 ‘백성’이 선에 이르는 것을 의미한다. 다만 그 경우 ‘백성’이 선에 이르는 것이란 ‘내’가 ‘백성’에 대해 작용을 가하거나 강제로 시킨 결과로서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나’의 ‘지지선’의 감화가 저절로 ‘백성’ 자신의 ‘지지선’이라는 결과를 낳는다는 것이다. 그것은 A에서도 마찬가지로 강조되고 있다.(“非治人使止於至善也”“强令民止於至善, 無此法也”)
또 A의 ‘명명덕―신민’은 B의 ‘성기―성물’과 대응한다고 생각해도 좋을 것이다. A와 B를 종합해서 그 논점을 정리하면, ‘명명덕’(성기)과 ‘신민’(성물) 각각에 ‘지지선’의 행위가 있고, 또 동시에 그 어느 쪽도 ‘자수’에 의한다는 의미가 될 것이다. ‘명명덕’의 경우 ‘지지선’의 주체는 ‘나’이고, ‘신민’의 경우 ‘지지선’의 주체는 ‘백성’이다. ‘명명덕’에서는 ‘내’가 ‘신민’에서는 ‘백성’이 각각 스스로 주체적으로 ‘지지선’의 실천자가 된다. 이것이 바로 ‘자수’이다.
참고로 정약용의 ‘친민’‘신민’ 해석의 경우 ‘백성’을 교화하고 감화시키는 것은 ‘나’이지만, 그 결과 서로 친하게 지내는 것은 ‘백성’ 자신이며(‘친민’), 효제자에 흥기하는 것도 ‘백성’ 자신이었다.(‘신민’) ‘성물’이 ‘자수’에 의한다고 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이것을 도표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그림5).
그림5
‘明明德’(成己) = 我之‘止至善’ (我之‘自修’)
‘新民’ (成物) = 民之‘止至善’ (民之‘自修’)
주자학에서는 ‘내’가 ‘명명덕→신민’에 전념할 때의 자세에서 ‘지지선’이 요청되고, 양명학에서는 ‘내’가 ‘명명덕=친민’에 전념할 때의 자세에서 ‘지지선’이 요청된다. 즉, 주자학과 양명학 모두 ‘지지선’의 주체는 ‘나’이다.34) 또 ‘지지선’의 내용은 ‘명명덕’과 ‘신민’, 혹은 ‘명명덕’과 ‘친민’에 전념하는 실천주체(=‘나’)의 자세를 규정하는 것이었다. 그에 반해 정약용이 말하는 ‘지지선’이란 바로 효제자의 실현이므로, 실질적으로는 ‘명명덕’이야말로 ‘나’의 ‘지지선’이며, ‘신민’이야말로 ‘백성’의 ‘지지선’이다.
9. ‘明明德’과 ‘新民’
앞에서 정약용의 경우 ‘명명덕’과 ‘신민’ 사이에 명백한 선이 그어져 있다고 지적했다.(제7장) 여기서는 다음으로 그 문제에 관해 차례대로 논의를 진행해 보고자 한다.
A. 總之大學之三綱領, 皆人倫之說. 今其說條目或頗不明. 횃爲圖如左.
(「大學公議」一, 12a∼12b)
B. ‘所謂治國必先齊其家者, 其家不可敎而能敎人者, 無之. 故君子不出家而成敎於國. 孝者所以事君也, 弟者所以事長也, 慈者所以使衆也.’… 孝弟慈, 大學之敎也. 身治孝弟慈, 以御于家邦, 不必別求他德. …〔引證〕『孝經』曰. ‘君子之事親孝, 故忠可移於君. 事兄悌, 故順可移於長.’(「大學公議」三, 33b∼34b)
C. ‘所謂平天下在治其國者, 上老老而民興孝, 上長長而民興弟, 上恤孤而民不倍.’老老謂天子養耆老也. 長長謂世子齒于學也. 恤孤謂天子饗孤子也. 此三禮, 皆太學之所有事也. … 總之, 上老老者, 太學之養老也. 上長長者, 太學之序齒也. 上恤孤者, 太學之饗孤也.(「大學公議」三, 頁36b∼38b)
A에서 정약용은 삼강령의 구체적인 내용을 나타내는 부분을 『대학』 본문 속에서 발췌하여 위에서와 같이 도표로 나타내고 있다. 그리고 B·C에서 굵은 글씨 부분과 A의 도표를 대조해 보면 알 수 있듯이, 자료B는 ‘명명덕’과 대응하고, C는 ‘신민’과 대응하고 있다. 이 점을 먼저 확인하고 다음 논의를 진행하고자 한다.
D 自修之孝弟慈, 已言於上節, 不必再言. 此節之孝弟慈, 皆老民之老, 長民之長, 慈民之幼, 而使民興起自新, 各自爲孝弟慈也.(「大學公議」三, 36b)
E 朱子曰‘老老所謂老吾老也.’鏞案, 天子諸侯之自養其親, 其可曰老老乎. … 今以此節爲自修之孝弟慈, 則孝弟慈三德, 仍與太學無涉, 此書不得爲太學之書, 此道不得爲太學之道.(「大學公議」三, 36b∼37a)
D에서 정약용은 자수의 효제자에 대해서는 이미 앞절에서 언급했기 때문에 이 절에서 되풀이할 필요는 없다고 한다. 즉, 이 절의 내용은 자수의 효제자가 아니라는 해석이다. 또 E에서도 만약 이 절도 자수의 효제자로 해석한다면 효제자의 세 덕이 태학과의 관계를 잃게 된다고도 말하고 있다. 그런데 「대학공의」三의 전후의 문맥으로부터 분명하게 알 수 있듯이, D에서의 ‘上節’이란 B(명명덕)를 가리키고, 또 D와 E에서의 ‘此節’이란 C(신민)를 가리키고 있다. 따라서, 이상의 논의를 일단 정리해 보면, ‘B=명명덕=自修之孝弟慈’, ‘C=신민≠自修之孝弟慈’라는 것이 된다.
그런데 「대학공의」 속에서 정약용은 종종 ‘자수―화민’‘자수―치인’을 한 쌍의 개념으로 사용하고 있다.35) ‘화민’이나 ‘치인’과 쌍을 이루는 개념인 ‘자수’는 ‘수기’나 ‘성기’와 동일한 의미라고 해도 좋다. 한편, 앞에서 이미 정약용의 ‘지지선’ 해석에 근거하여 언급했듯이, 정약용의 ‘자수’에는 “성기도 성물도 모두 자수에 의한다”고 하는 용법도 있었다.(제8장 참조) 성기와 성물에 근거하여 언급되고 있는 ‘자수’와 ‘성물’,‘치인’과 쌍을 이루는 개념으로서의 ‘자수’는 분명히 용법이 다르다. 그리고 D·E에서 말하는 ‘자수의 효제자’란 분명히 후자의 용법(‘자수’=‘성기’‘수기’)이다. 따라서 혼란을 피하기 위해 D·E에서의 ‘자수의 효제자’를 편의상 ‘수기의 효제자’로 바꿔 말하기로 한다. 그리고 나서 다시 논의를 정리하면, ‘B=명명덕=수기의 효제자’, ‘C=신민=치인의 효제자’라는 것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신민=치인의 효제자’란 구체적으로 어떠한 내용을 가리키는 것일까? C에 보이듯이 그것은 ‘老老’ 즉 천자가 태학에서 노인을 봉양하는 것, ‘長長’ 즉 세자가 태학에 입학하여 연장자에 대해 겸양의 덕을 보이는 것, ‘恤孤’ 즉 천자가 태학에서 고아를 불쌍히 여기고 기르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E에서 주희의 해석을 부정하고 있는 것으로부터도 알 수 있듯이, 여기서 말하는 ‘신민’의 대상은 ‘吾老’,‘吾長’,‘吾幼’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民之老’,‘民之長’,‘民之幼’이다.36) 즉, 정약용의 『대학』 해석에 있어서 ‘민’을 ‘하민’‘소민’으로 한정적으로 해석하는 입장은 일관되게 유지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오로’,‘오장’,‘오유’란 바로 ‘제가’의 대상이었다. 따라서 이미 지적했듯이 정약용의 경우 ‘제가’는 ‘신민’(치인)의 범주에서 제외되고 있는 것을 여기서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다. ‘제가’는 글자 그대로 가정을 그 실천의 장으로 삼는 행위로 ‘태학’을 실천의 장으로 삼는 ‘신민’(치인)은 이것과 구별되는 것이다.
그것에 대해 ‘명명덕=수기의 효제자’란 B의 내용을 가리키고 있다. 그리고 B에 인용되어 있는 『대학』의 본문은 ‘제가’의 설명에 해당하는 부분이며, 그 증거로 인용되고 있는 『효경』(「廣揚名章」)의 내용에 비추어 보아도 여기서의 효제자는 자신의 부모나 형 등을 대상으로 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老吾老’‘長吾長’‘幼吾幼’라는 행위이다. 즉, 정약용은 ‘제가’를 ‘명명덕’(수기)의 범주 속에서 파악하고 있는 것이다.
정약용의 경우 ‘명명덕’이란 ‘도의’,‘도심’을 대상으로 하는 것과 같이 ‘나’ 속에서 자기완결되는 행위가 아니라, 반드시 타자와의 관계의 장 속에서 수행되어야 할 것이었다. 부자형제와 같은 타자를 그 대상으로 하는 ‘제가’가 ‘명명덕’(수기)의 범주 내에 자리매김될 수 있었던 것도 정약용의 그러한 ‘명명덕’에 대한 관점에 기인하는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제가’,‘치국’,‘평천하’는 주희의 경우는 ‘신민’과 대응하고, 왕수인의 경우는 ‘친민’과 대응한다. ‘제가’를 ‘명명덕’에 대응시키는 정약용의 입장은 그 격치육조설과 함께 팔조목 해석으로는 독특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참고로, 정약용도 성기와 성물, 수기와 치인 사이에 선후관계를 상정하고 있었다.37)
이상의 고찰을 토대로 주희·왕수인·정약용 각각의 『대학』 해석을 정리하면 <그림6>과 같이 대조해 볼 수 있을 것이다.
10. 맺음말
정약용의 경우 ‘명명덕’은 인륜에 근거한 실천을 지향하는 것이었으며, 타자와의 관계의 장속에서의 행위라는 개방된 것이었다. 그 점에서는 이론상 양명학과 같은 ‘명명덕’과 ‘친민’의 일체화로 접근할 수 있는 면이 있었다. 그러나 정약용의 경우 ‘명명덕’에 있어서 관계를 맺는 대상으로 상정되었던 것은 양명학의 경우와 같은 타자 일반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자신의 부자형제 등이었다.
‘신민’의 민을 하민이나 소민으로 한정적으로 해석함으로서 ‘제가’는 ‘신민’의 대상에서 제외되고, ‘명명덕’ 쪽으로 편입되게 되었다. ‘제가’를 편입함으로서 정약용의 ‘명명덕’은 확실히 인륜에 근거한 실천이라는 성격을 확보했다. 그러나 ‘제가’를 ‘신민’으로부터 분리함으로서 ‘신민’의 내용은 ‘民之老’, ‘民之長’, ‘民之幼’를 대상으로 한 태학에서의 禮라는 성격을 띠게 되고, 그 실천의 대상이나 실천의 장도 ‘명명덕’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것이 되었다. 그 점에서 정약용의 『대학』 해석은 ‘명명덕’과 ‘친민’을 일체화한 양명학의 해석보다는 ‘명명덕’과 ‘신민’을 대치시킨 주자학의 해석에 오히려 가깝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왕수인이 ‘신민’설을 부정하고 ‘친민’설을 채택한 것도 ‘친민’을 ‘명명덕’을 실천하는 장으로 자리매김함으로서 수기와 치인(성기와 성물)의 일체화된 행위가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약용은 수기와 치인(성기와 성물)을 오히려 별개의 행위로 파악한다. 정약용이 ‘친민’설에 고집하지 않고 ‘신민’설까지도 허용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정약용의 ‘격물’ 해석은 ‘격물’을 본말을 헤아린다는 의미로 해석하는 점에서는 왕간(호는 心齋, 1483∼1540)의 이른바 회남격물설과 유사하다. 왕간은 ‘물’을 ‘물유본말’의 물, ‘격’을 ‘?度’(헤아리다)으로 규정하고, 본말을 헤아려서 아는 것이 격물이라고 말하고 있다.38) 정약용 자신도 왕간의 학설의 존재는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다.39) 다만 그 내용적인 면에서는 커다란 차이가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왕간의 경우 본말이란 몸이 근본이고 천하 국가는 말단이라는 것을 의미한다.40) 보다 구체적으로는 몸을 ‘矩’로 여기고 천하 국가를 ‘方’으로 여기는, 즉 자신을 규구·척도로 삼아 천하 국가를 바르게 하는 것이 격물이다.41) 이처럼 왕간의 회남격물설은 바로 천하 국가를 자신의 임무로 삼는 경세제민의 의식과 대장부로서의 자부심을 극명하게 표명한 것이었다.42)
정약용의 격물치지 해석(격치육조설)은 팔조목 중 성의나 평천하의 본말 선후의 순서를 정리한 것 이상의 특별한 의의를 갖고 있지는 않다. 본말의 내용도 왕간과는 다르다. 원래 ‘編戶匹庶之子’에 지나지 않는 왕간(왕간은 泰州安豊場의 鹽丁 출신)이 천하 국가를 자신의 임무로 본 것 자체가 소민을 우매한 존재로 단정하고 대학을 ?子의 학으로 규정하는 정약용으로서는 용인될 수 없는 것이었을 것이다.
정약용의 『대학』 해석이 주자학의 해석을 묵수하고 답습하는 것이 아니었던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그 해석은 언뜻 보면 판본선택, 문자의 교감이나 훈고 등 양명학의 해석과 유사한 점이 많다. 그러나 그 해석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분석하고 검토해 보면, 양명학적 해석과 비교해도 역시 그 차이점은 두드러진다는 인상을 받는다. 결국 정약용의 『대학』 해석은 주자학적인 해석과도 양명학적인 해석과도 다른 독자적인 색채가 매우 강한 것이라고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
정약용은 李瀷(호는 星湖, 1681∼1763), 權哲身(호는 鹿菴, 1736∼1801) 등의 뒤를 이은 이른바 성호학파의 학통으로 분류되는 인물이다. 성호학파의 학술은 주자학에서 다시 洙泗(孔子)로 거슬러 올라가 성인의 깊은 뜻을 궁구하려고 하는 데에 그 특색이 있다.43) 정약용 자신의 말을 빌리면, 권철신의 『대학』 해석에는 정약용의 해석과 공통되는 부분이 적지 않게 있었다.44) 수사로까지 거슬러 올라가 성인의 본지를 찾는 것이란 주자학이나 양명학의 해석에 구애받지 않는 자유로운 발상으로 경서와 대치하는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45) 주자학을 극복하고 직접 성인의 가르침을 배우려고 한 일본의 古學者에 대해 정약용이 긍정적인 평가를 하고 있었던 것도 그 지향성에 있어서 공유하는 바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46)
이러한 점에서 정약용의 『대학』 해석도 넓게 말하면 성호학파의 일련의 경학연구 속에 위치를 점하는 것이라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주
1) 정약용의 『대학』 해석에 관한 선행연구로는 주로 다음의 논저들을 참조했다. 高橋亨,
「丁茶山の大學經說」, 『天理大學學報』18집 1955; 李乙浩譯, 『정다산의 대학공의』, 明文堂, 韓國古典名著精選12 1974; 蔡茂松 , 「韓儒丁茶山反朱學內容之硏究」, 『歷史學報』4호, 國立成功大學歷史學系編 1977; 山內弘一, 「丁若鏞の事天の學と修己治人の學について」,『朝鮮學報』122집 1987; 鄭炳連, 『茶山四書學硏究』, 景仁文化社 1994; 鄭一均, , 『茶山四書經學硏究』, 一志社, 2000.
2) 『增補文獻備考』卷38, 輿地考, 宮室「昌德宮」, “熙政堂. 在大造殿南. 便殿視事之所也.”
3) 『承政院日記』 正祖 13년 4월 2일, “辰時, 上御熙政堂, 抄啓文臣親試課講入侍.”
4) 蔡樊翁(蔡濟恭, 호는 樊巖, 1720∼1799)의 뜻에 따라 정약용을 두 번째로 김희순을 첫 번째로 바꾸었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알 수 없다. 혹은 다음과 같은 자료가 관련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正祖實錄』 15년 8월 乙卯 13일, “中批, 金羲淳爲弘文館修撰. 敎曰. 近日文臣, 於經義看作 ??而向來中庸策問, 及日前大學策問之居首也, 能使賢關靑衿, 讓頭屈膝, 而外此經旨, 有問輒稱旨. 似此之人, 合置顧問之任. 仍有是命.”(『承政院日記』 同年月日도 동일한 취지). 참고로 정약용의 「自撰墓誌銘集中本」(『全書』1集, 詩文集, 16卷)(第2冊)은 자신의 저서를 열거하는 가운데 “大學公議三卷, 熙政堂大學講義錄一卷”을 언급하고는 있지만(13a), 執筆年次에 관한 기술은 없다.
5) 61세 때 집필한 「自撰墓誌銘集中本」(『全書』1集, 詩文集, 16卷)(第2冊)에도 자신의 『대학』 해석을 언급하고 있는 부분이 있다.(17a∼17b). 정일균 씨는 초기(=「대학강의」), 중기(=「대학공의」)에 대해 이것을 정약용의 후기 대학관계 저술로 규정하고 고찰을 가하고 있다. 정일균, 앞의 책, 201∼213쪽.
6) 시험삼아 「대학공의」에 인용된 『대학』을 嘉慶 20년 重刊十三經注疏本『예기』「대학」과 비교해 보면 8군데 정도에 문자상의 차이가 있다. 그러나 그것들은 모두 “詩云邦畿千里, 維民所止”(「大學公議」一, 25b, 注疏本‘維’作‘惟’), “堯舜帥天下以仁”“桀紂帥天下以暴”(「大學公議」二, 34b, 注疏本‘帥’作‘率’)이라는 사소한 차이에 불과하다.
7) 鄭玄, 『通德遺書所見錄』, 「三禮目錄」
8) 정병련, 앞의 책, 57∼60쪽 참조.
9) 『禮記』 「大學」 鄭玄注, “命, 讀爲慢, 聲之誤也.”; 『河南程氏經說』卷五, “伊川先生改正大學”“作怠之誤也.”; 朱熹, 『大學章句』 「傳第十章」, “命, 鄭氏云, 當作慢, 程子云, 當作怠. 未詳孰是.”
10) “寒門賤族, 古法原屬之司徒, 不關於太學. 確分二等, 不相混雜. 故其在堯典, 契爲司徒, 以敎百姓, 허爲典樂, 以敎?子. … 古之太學, 原有主人, 編戶匹庶之子, 雖冠而爲大人, 恐太學未易入也.”(『大學公議』一, 3a∼3b), “大學者, ?子國子之學宮也. ?子國子, 有臨下治民之責, 故敎之治平之術. 非匹庶凡民之子所得與也.”(『全書』1集, 詩文集, 16卷, 「自撰墓誌銘集中本」17a)(第2冊)
11) 朱熹, 『大學章句』, “大學者, 大人之學也.”; 朱熹, 『大學章句』序, “及其十有五年, 則自天子之元子衆子, 以至公卿大夫元士之適子, 與凡民之俊秀, 皆入大學, 而敎之以窮理正心修己治人之道.”
12) 『論語』 「憲問」第14, “子曰. 不在其位, 不謀其政. 曾子曰. 君子思不出其位.”
13) 『孟子』 「萬章」上, “吾豈若使是君爲堯舜之君哉. 吾豈若使是民爲堯舜之民哉.”
14) 『朱子語類』卷14, 26條, 葉賀孫錄, “大學所載, 只是箇題目如此. 要須自用工夫做將去.”; 同, 28條, 游敬仲錄, “今人都是爲人而學. 某所以敎諸公讀大學, 且看古人爲學是如何, 是理會甚事. 諸公願爲古人之學乎, 願爲今人之學乎.”
15) 『朱子語類』卷14, 22條, 記錄者名闕, “大學是爲學綱目. 先通大學, 立定綱領, 其他經皆雜說在裏許.”
16) 그러나 정약용은 용어의 해석을 둘러싸고 번쇄하고 무용한 논쟁을 일삼는 동시대의 성리학자들의 세태에 대해서는 비판적이었다. 『全書』1集, 詩文集, 11卷(第2冊), 「五學論」一, “今之爲性理之學者, 曰理, 曰氣, 曰性, 曰情, 曰體, 曰用, 曰本然氣質, 理發氣發, 已發未發, … 千條萬葉, 毫分縷析, 交嗔互쿼, 冥心默硏, 盛氣赤頸, 自以爲極天下之高妙, … 門立一幟, 家築一壘, 畢世而不能決其訟, 傳世而不能解其怨, 入者主之, 出者奴之, 同者戴之, 殊者伐之, 竊自以爲所據者極正. 豈不疎哉.”(19a∼19b)
17) “吾東之俗, 辨等頗嚴, 上下維各守其分. 近世以來, 爵祿偏枯, 貴族衰替, 而豪吏豪?, 乘時使氣, 其屋宇鞍馬之侈, 衣服飮食之奢, 咸踰軌度, 上陵下替, 無復等級. 將何以維持聯絡, 以之扶元氣而通血脈乎. 辨等者, 今日之急務也.”(『全書』第5集, 「牧民心書」卷8, 禮典, 「辨等」, 1b)(第17冊), “君臣奴主, 斯有名分, 截若天地. 不可階升.”(同上, 2a)
18) 『續大典』卷5, 刑典, 公賤, “公私賤娶良妻所生男女, 竝從母役.”(原注)“顯宗己酉(10년, 1669)始命從良. 肅宗乙卯(1년, 1675), 還賤. 辛酉(7년, 1681)又從良. 己巳(15년, 1689)還賤, 而已屬良役者勿論. 當庚戌(영조 6년, 1730), 又命辛亥(7년, 1731)正月初一日子時爲始, 所生竝從母役.” 平木實, 「朝鮮後期の奴婢制硏究」, 177∼195쪽.(同氏, 『朝鮮社會文化史硏究』所收, 國書刊行會, 1987년) 참고로 위의 『속대전』에 보이는 숙종 15년에 이르기까지의 繫年은 반드시 정확한 것이 아님을 같은 책에서 지적하고 있다.
19) 서인과 남인에 견해차이가 존재했던 배경으로 平木 씨는 다음과 같은 흥미로운 추측을 보여주고 있다. “당시 서인과 남인 사이에 커다란 견해차이가 있었다는 점에서 다음과 같은 추측도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즉, 일반적으로 조선왕조 후기의 양반관료들의 경제기반이 지방의 대토지 소유에 의존하고 있었다고 한다면, 경기도와 충청도를 중심으로 하는 서인파는 경상도를 중심으로 하는 영남학파의 남인들보다 경제기반이 약하고, 더욱이 노비의 소유수도 적었다고 생각된다. 노비를 많이 소유하고 있던 남인들이 그것을 상실하게 되면 그만큼 경제적으로 타격을 받게 된다. 그렇게 생각해 보면 서인파가 노비제를 개혁하려고 주장했던 배경에는 남인들의 노비소유를 제한하려는 목적이 있었다고 추측할 수도 있을 것이다.” 平木, 앞의 책, 180쪽.
20) 정약용의 신분의식에 관해서는 山內弘一 「京城·貴族の誇り―丁若鏞に於ける貴賤と華夷―」, 『上智史學』제44호, 1999,를 참조.
21) “格物者, 格物有本末之物, 致知者, 致知有先後之知也.”(『全書』1集, 詩文集, 16卷, 「自撰墓誌銘集中本」,17a)(第2冊)
22) “然則修身原以誠意爲首功, 從此入頭, 從此下手. 誠意之前, 又安有二層工夫乎.”(「大學公議」二, 15b)
23) “意心身家國天下, 屬物. 誠正修齊治平, 屬事. 物有本末, 則修身爲本, 本亂末治, 此謂知本等本末字, 當是格物之解. 知所先後, 則第四節六箇先字, 第五節七箇后字, 知本知至等知字, 當是致知之解.”(「大學講義」10b). 정일균, 앞의 책, 181∼183쪽도 참조.
24) “明德也孝弟慈.”(「大學公議」一, 14쪽), “若其太學條例, 則綱曰明德, 目曰孝弟慈而已.”(「大學公議」一, 20쪽)
25) “孝者所以事君也. 弟者所以事長也. 慈者所以使衆也.”(『大學』, ‘治國必先其齊家’節)
26) “今國之太學, 郡縣之鄕校, 其外堂皆揭明倫堂三字. 明倫非明孝弟乎. 太學之道, 在於明倫, 故曰. 太學之道, 在明明德.”(「大學公議」一, 10a), “明明德者, 明人倫也.”(「大學公議」一, 10b)
27) 『大學章句』經, 朱注, “修身以上, 明明德之事也. 齊家以下, 新民之事也.”
28) “明德爲本, 新民爲末. 知止爲始, 能得爲終. 本始所先, 末終所後.” (朱熹, 『大學章句』, ‘物有本末’, 朱注)
29) “明明德者, 立其天地萬物一體之體也. 親民者, 達其天地萬物一體之用也. 故明明德必在於親民, 而親民乃所以明其明德也.”(『王文成公全書』卷26, 「大學問」)
30) 이을호 씨도 ‘친민’을 ‘백성을 친애하게 하는 것’이라고 사역형으로 해석하고 있다. 이을호, 앞의 책, 62쪽, ‘〔親民〕백성을 친애하게 한다’. 또 蔡茂松 씨는 ‘백성과 친하게 지낸다’와 ‘백성을 친하게 한다’라는 2가지 뜻을 겸한다는 견해를 보여주고 있다. 蔡茂松, 앞의 논문, 134∼135쪽, “爲政者一方面親於民, 又一方面使民相親. 如上老老而民興孝, 上長長而民興弟等, 指皆親民而又使民相親之事.”
31) “仁敬孝慈信五者, 皆至善之題目. 雖其所列錯落不整, 亦可見經所云至善, 乃孝弟慈之諸德, 非此諸德之外, 別有至善也.”(「大學公議」二, 26a)
32) “大學有三綱領, 三綱領各領三條目. 皆是孝弟慈.”(「大學公議」二, 17a)
33) “如切如磋者, 道學也. 如琢如磨者, 自脩也.”(『大學章句』傳3章; 「大學公議」二, 22b)
34) 『大學章句』, “止者, 必至於是而不遷之意, 至善則事理當然之極也. 言明明德, 新民, 皆當至於至善之地而不遷.”; 『大學或問』(山崎嘉點本, 5a), “欲明德而新民者, 誠能求必至是而不容其少有過不及之差焉.”; 『王文成公全書』卷26, 「大學問」, “止於至善以親民而明其明德, 是之謂大人之學.”
35) “誠意之功, 可以自修, 可以化民, 皆可以止於至善.”(『大學公議』二, 22a), “至誠責於中而威儀著於外. 責中所以自修也. 著外所以化民也.”(『大學公議』二, 22b), “鏞案, 恕有二種. 一是推恕, 一是容恕. … 推恕者, 主於自修, 所以行己之善也. 容恕者主於治人, 所以寬人之惡也.”(『大學公議』三, 35a)
36) ‘老吾老’는 『孟子』「梁惠王」上, “老吾老, 以及人之老. 幼吾幼, 以及人之幼. 天下可運於掌.”에 나오는 말이다.
37) “胃子他日皆有成物化民之責, 故戒之以自明. 恐明明德於天下者, 不先自修而强人之明德也.”(「大學公議」二, 25a), “經所言者, 謂將欲化民, 必先自修. 將欲自修, 必先藏恕.”(「大學公議」三, 35b) 참고로 여기서 말하는 ‘자수’는 ‘성물’‘화민’과 쌍을 이루는 개념으로 쓰여지고 있으므로, 주35)에 인용되어 있는 용례와 마찬가지로 ‘성기’‘수기’와 같은 개념이다.
38) 『心齋王先生全集』卷3, 語錄, 3條, “格物之物, 卽物有本末之物.”; 同卷3, 「答問補遺」3條, “身與天下國家, 一物也. 惟一物而有本末之謂. 格, ?度也. ?度於本末之間而知本亂而末治者否矣, 此格物也.”
39) 『大學公議』二, 18b, “王心齋語錄曰. 格物者, 格其物有本末之物. 致知者, 致其知所先後之知. … 鏞案, 心齋之說, 明白如此. 世猶以姚江之學而非之, 有公論乎.”
40) 『心齋王先生全集』卷3, 語錄, 8條, “大人者, 正己而物正者也. 故立吾身, 以爲天下國家之本, 則位育.”; 同, 32條, “知得身是天下國家之本, 則以天地萬物依於己, 不以己依於天地萬物. ”
41) 『心齋王先生全集』卷3, 語錄, 137條, “吾身猶矩, 天下國家猶方. 天下國家不方, 還是吾身不方.”; 同, 卷3, 答問補遺」4條, “吾身是箇矩, 天下國家是箇方. ?矩, 則知方之不正由矩之不正也. 是以只去正矩, 却不在方上求. 矩正則方正矣. 方正則成格矣. 故曰物格.”
42) 『心齋王先生全集』卷3, 語錄, 98條, “大丈夫存不忍人之心, 而以天地萬物依於己. 故出則必爲帝者師, 處則必爲天下萬世師.” 島田虔次, 『中國における近代思惟の挫折』, 筑摩書房, 1970, 91∼93쪽 참조.
43) 『全書』1集, 詩文集, 15卷(第2冊), 「鹿菴權哲身墓誌銘」, “星湖先生, 篤學力行, 沿乎洛?, 溯乎洙泗, 開發聖門之턍奧, 披示來學. 及其晩慕得一弟子. 曰鹿菴權公. 穎慧慈和, 才德兩備, 先生絶愛之.”(33a), 同上, 「先仲氏墓誌銘」, “公諱若銓. … 以承受星翁之學(原注「李先生瀷」), 沿乎武夷, 溯乎洙泗. … 旣又執贄請敎於鹿菴之門(原注「權哲身」).” 성호학파의 학술에 관해서는 姜在彦, 『朝鮮の西學史』, 姜在彦著作選Ⅳ, 鈴木信昭譯, 明石書店, 1996. 을 참조했다.
44) 『全書』1集, 詩文集, 15卷(第2冊), 「鹿菴權哲身墓誌銘」, “所著有詩稱二卷, 大學說一卷, 餘皆散 無存. 然以餘所聞, 其論大學, 以爲格物者格物有本末之物, 致知者致知所先後之知. 又以孝弟慈爲明德, 而舊本不必有錯簡.”
45) 정약용의 주자학과 양명학에 대한 비판은 각각 『全書』1集, 詩文集, 11卷(第2冊), 「五學論」一(19a); 『全書』1集, 詩文集, 12卷(第2冊), 「致良知辨」(18a)을 참조. 또 정약용의 주자학에 대한 관점에 대해서는 山內弘一, 「丁若鏞の學問觀―朱子學への評價をめぐって―」, 『朝鮮史硏究會論文集』제19집, 1982; 同氏, 「李朝後期知識人の反朱子學批判の一例―淸の毛奇齡と日本の古學派批判―」, 1999, 『漢文學解釋與硏究』2집, 漢文學硏究會, 汲古書院을 참조.
46) 『全書』1集, 詩文集, 12卷, 「日本論」一(第2冊), “日本今無憂也. 余讀其所謂古學先生伊藤氏所爲文, 及荻先生太宰純等所論經義, 皆燦然以文. 由是知日本今無憂也.” 참고로 日本古學派에 대한 정약용의 인식에 관해서는 今村與志雄, 「丁若鏞と日本の儒者―丁若鏞ノ-ト―」, 『季刊三千里』16호, 三千里社, 1978; 河宇鳳 『朝鮮後期實學者稅 日本觀硏究』,一志社, 1989,; 井上厚史譯, 『朝鮮實學者の見た近世日本』, ぺりかん社, 2001; 姜在彦, 「丁茶山の日本觀」, 同氏, 앞의 책, 『朝鮮の西學史』 所收, 1996을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