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역사왜곡

만주족(여진)의 변천사와 한국과의 관계 그리고 동북공정

작성자스토리|작성시간13.07.05|조회수285 목록 댓글 0

 

만주족(여진)의 변천사와 한국과의 관계 그리고 동북공정

 

 

MRF.jpg

만주 황족의 전통 복식을 갖춰 입은 현대의 만주족


 


 

목차

1 개관
2 한국과의 관계?
3 동북공정?


 

1 개관

만주 일부와 한반도 북부에 거주했던 퉁구스계 반농 반수렵 민족[1]말갈-여진족의 후신. 만주(滿洲)족.먼치킨

아이신기오로 누르하치금나라의 부흥을 걸고 들고 일어나 여진을 통일한 후, 후금을 세우고 종족의 이름을 만주로 이름을 바꾼 후부터 만주라 불리기 시작한다. 누르하치의 아들인 아이신기오로 홍타이지(청태종)가 나라 이름을 으로 개칭하면서 여진이라는 말을 완전히 금지시킨 후부터는 만주라는 말만 쓰이게 된다. 이때가 약 16세기 후반 쯤. 이 시기의 시조 신화는 만주 시조 신화 참조.

중국에서는 만주족 대신 만족(滿族)이라는 말을 많이 쓴다.이는 만주족이라는 이름은 만주라는 영토를 한 소수민족의 몫으로 두는 느낌이기 때문.

전신인 여진족이 그랬듯이 만주족도 한국과 깊은 관련을 갖고 있는데 대표적인 것이 조선시대의 정묘호란병자호란. 조선에서는 만주족들을 오랑캐라 멸시하면서 깔보고 있었지만 거하게 털렸다(...) 임진왜란 때는 여진족이 도움을 주겠다고 했는데 명나라와의 관계상 거절했다는 기록이 있다. 오랑캐 사절요

조선을 공격하긴 했지만 정복하진 않고 속국으로 만들었다. 하지만 의 경우에는 아예 쳐들어가서 나라를 엎어버리고 저항하는 한족들을 대량 학살하였다. 특히 강남지방에서 심했는데 이는 양저우 대학살이라고 불린다. 후엔 위구르, 티베트, 몽골, 연해주 등을 정복하여 엄청난 판도의 제국을 건설하였다. 자세한 역사는 참조.

결국 청대의 만주족은 자신들의 100배가 넘는 한족 인구를 정복하고 지배한 셈. 청의 인구에 비해 만주족의 수가 압도적으로 적었기 때문에 제도를 통해 혈통을 유지해야 했고, 한족과의 결혼은 어느정도 제한을 두었다. 중화인민공화국의 통계자료 조사에서 1982년 430만명이었던 인구가 불과 8년 뒤인 1990년에 985만 명, 8년 만에 2배 이상 증가했다는 비정상적으로 증가한 수치로 신빙성이 떨어져 구라일 확률이 높다. 아니면 反만주족 분위기 하에 성씨를 바꿔서 한족인 척 살다가 만주족으로 커밍아웃한 인구가 늘어난 것일 수도 있고. 하여간 순수한 만주족은 극소수로 추정된다. 애초에 만주족으로 인정받는 기준이 되는 것이 과거 팔기군에 속했는지 여부인데, 팔기군 자체에 한족도 상당히 있었으니... 2010년 조사에서는 10년 전보다 인구가 감소했다.

한족주의를 띤 무협지나 영화에서 주로 까이는 대상이다.

만주족 황실이 본거지를 중국으로 옮긴 이후에도 계속 만주에서 살고 있던 만주족들은 전통적인 생활 방식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살았다. 그들은 조선의 함경도나 평안도 지방의 사람들이나 중국인들과 거래를 하기도 했으며, 가끔 아예 조선으로 건너가서 눌러앉기도 했으나 이들은 본토에서도 적응하지 못해 이주한 하층민으로 조선에 가서도 여전히 주로 사당패 같은 일을 하는 하층민이 되었다.

여진 혹은 만주족의 대명사로 불릴 정도로 잦았던 약탈의 경우는 여진족 시기에나 하던 일이고, 만주-중국을 포괄하는 강력한 중앙 정권인 청이 들어선 이후에는 없어졌다.

을 세운 후에는 점점 중국에 동화되기 시작해서 나름대로 민족성을 지키기 위한 노력을 했다. 관학을 세워 만주어를 가르치고 관리등용 시험 때도 만주어를 장려했다. 특히 만주인이 문관이 되려면 반드시 만주어와 몽골어의 번역 시험을 보도록 했다. 한자와 만주문자가 함께 적혀 있는 현판을 자금성에서 많이 볼 수 있는 까닭이다. 그러나 강희제 시대에 강희자전을 편찬하면서 청 황실에서도 중국어의 사용을 허가하게 되고, 그 후에는 서서히 중국화되기 시작했다. 집단 거주지인 만주를 떠나 베이징 등 각지로 옮겨 간 만주족은 적은 인구로 300년 가까이 한족을 지배했지만, 결국은 한족에게 점차 녹아들었고, 이는 몽골의 경우와는 매우 다르다.

그러나 몽골과 비교하는건 부적절하다는 반론도 있다.[ *2 대개 중국인들의 주장. 실제로 청나라에 대해서는 미국,일본vs중국으로 논쟁이 치열하다.]원나라와는 달리 만족과 한족의 화합국가라는 사실상 다민족 국가를 강조했으며 무엇보다 현재 중국의 이미지에 있어 청나라의 인상이 너무 강하다[2] 게다가 마지막 왕조이기 때문에 현 중국의 영토는 청나라를 계승했기때문에 결국 만족과 한족의 대립을 거쳐 현재의 중국이 완성되었다는 얘기다. 중화인민공화국의 주장을 빌리면 중화민족끼리의 통일이라고(...)

무엇보다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로, 흔히 만주족들이 청이 무너진 이후에도 별 사건을 겪지 않고 독립의 의지도 없이 현 상태까지 흘러왔다는게 일반적인 인식인데 사실은 태평천국운동신해혁명이 반청복명, 반만흥한적 성격을 띠며 혁명파 및 한족들이 만주족을 마구 학살하는 사태가 계속해서 벌어진다. 남의 나라를 정복해서 나라를 망친 주범이라는 구호와 분노가 더해져 아예 만족축출운동이 전개되며 가족 단위로 제거된다. 결국 만주족들은 한족에게 분노하며 독립국가를 세우기위해 움직이지만 힘이 있을리 만무하고, 그 때 일본이 손을 내민것이....

그렇다. 사실 만주사변만주국의 설립은 만주족 독립운동가들이 주체였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 대표적인 인물로 금벽휘(카와시마 요시코)가 있겠는데 일본의 힘을 빌려 만주족의 독립국가를 세우려는 생각을 가진 만주사변의 배후였다. 이런 중화민족논리로 따지면 엄연한 친일매국행위를 저지른 전력 덕분에 만주족에게는 자치구가 주어지지 않았고 다른 소수민족에 비해 조기부터 분열의 싹을 잘라놓았다. 물론 문화대혁명에서도 대차게 굴렀다.

혁명파와 그 직계인 국민당이 원수라선지, 국공내전에 참여한 만주족들은 공산당의 편에서 싸웠다. 공산당이 한족 민족주의가 아닌 평등을 구호로 내세운 탓도 있을듯.

어찌되었던 가까운 근현대까지 지배적인 위치에 있던 민족이 묻힌 것은 매우 특이한 경우이다.혹자는 죽쒀서 개준셈이라 평하기도.영토 늘려주고 사라지다니 정말 고마운 민족

여기에는 청 왕조의 실책에 그 원인이 있다고도 한다. 심지어는 조선으로 건너가 사당패가 되기도 했던 하층민들과는 달리, 만주에 계속 남은 귀족들은 청 황실의 우대정책 덕택에 손끝하나 까딱하지 않고 잘 먹고 잘 살고 있었다. 봉금정책 때문에 타민족들이 만주로 들어올 일도 없었다. 청 황실은 당연히 한족 피지배층의 반란을 최우선의 위협으로 여겼으며, 만약 한족의 반란이 일어난다면 만주는 최후방으로써 만주 귀족들의 도피처가 될 터였다. 동양의 일반적인 구도대로라면 만주는 최전선이 될 일이 없었다.조선은 위협도 아니라 이거지?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전혀 새로운 세력인 러시아가 등장하면서 만주가 최전선이 되고 만 것이다!

러시아 제국은 연해주는 물론이고 하얼빈까지 직할령으로 만들었고 청 정부는 만주를 야금야금 먹어치우는 러시아의 모습에 당황한 나머지 그들을 막기 위해 봉금령을 풀어버리고 말았다. 이후 중국인, 그러니까 한족들은 기근을 피해 만주로 미칠듯한 러시(...)를 시전했고, 원래부터 농부들이었기에 당연히 만주에 가서도 열심히 땅을 개간하고 농사를 지었다. 평생 놀고먹기만 하던 만주 귀족들은 당연히 할 수 있는 게 없었기에 이러한 한족들에게 땅을 임대해 주면서 지대를 받아먹고 사는 등의 생활을 했다.

그러나 농사를 미친듯이 짓던 한족의 경제력이 어느샌가 만주 귀족들을 뛰어넘기 시작했고, 수로 보나 경제력으로 보나 우위에 서게 된 한족들은 결국 만주 귀족들을 누르고 만주를 장악하는데 성공하였다. 일본군의 만주국이 만주를 지배하던 시대에도 만주의 중국인들은 3등 민족으로 여겨져서 탄압을 받긴 했지만 다른 땅으로의 강제이주나 철거령 같은 건 없었기에 그 기반을 잃진 않았고, 중화인민공화국이 들어서면서는 확고한 주도권을 잡게 되었다.[3]


역사적 인식 때문인지 문명이고 뭐고 없는 야만족같이 느껴지지만 의외로 수준 높은 불교 문화와 고유의 문자까지 가졌던 준 문명 부족이었다. 또한, 베이징에서 중국을 지배하던 만주족 황족들과 관료들의 중국어 발음이 썩 신통치 않았는데, 이 시대에는 이들 관료가 쓰는 발음이 표준이었으므로, 현대 중국어 발음(만다린)에도 알게 모르게 영향을 미쳤다.[4] 청나라 시대 만주어로 쓰여진 각종 문헌은 그 수가 너무 많은데, 전문가 수의 부족으로 아직 다 해독에 이르지 못하고 있다.

또한 의외로 오덕계에도 매우 큰 파문(...)을 남긴 민족이다. 바로 차이나 드레스라는 이름으로도 유명한 치파오가 만주족의 복식에서 유래한 것이기 때문. 그 외에도 강시영화의 강시복장, 변발, UFO 모자(...) 등 중국 전통으로 알려진 것들도 본디 만주족의 풍습이다.

그리고 물만두가 바로 이들의 주식이었다. 우리 생활 속에 알게 모르게 족적을 남긴 셈.

만주족 성씨의 방식은 다른 민족들이랑 조금 다르다. 할라(哈拉, hala)와 무쿤(穆昆, mukun)이라는 개념을 이해해야 하는데, 할라는 씨족(氏族) 혹은 큰 범위의 성씨를 의미하고 무쿤은 씨족 내의 씨(氏) 혹은 작은 범위의 성씨를 의미한다. 즉, 할라라는 씨족 내에 무쿤이라는 씨가 있다는 것이다. 황성인 아이신기오로를 예로 들어보면 기오로(覺羅)라는 씨족 내의 아이신(愛新)씨라는 의미이다. 아이신은 만주어로 쇠(金)라는 뜻인데, 만주족의 전신인 여진족이 세운 옛 나라의 국호가 금(金)인 것을 생각하자. 청 왕조가 존속하던 기간 중에 기오로를 사성 받았다면 그건 기오로라는 할라 내로는 받아들인다는 의미이지만 무쿤 내로는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의미이다. 황족의 경우에는 오직 아이신이라는 무쿤 이내의 사람에게만 해당되었다.

현재 중국에선 소수민족 중 하나이며, 만족(滿族)이라 부른다. 이는 만주(滿州)족이라 부르면 만주 대륙은 모두 만주족의 땅이라는 것처럼 보여질 수 있어서 억지로 만족으로 바꿔 부른다. 청나라 시대에 자기 언어와 문화를 잃어버리고 한족에 동화되었으나, 중국 소수민족 가운데는 나름 자부심 있는 민족으로 광시좡족(약 천6백만명~2천만명)에 이어 두번째로 많은 소수민족이다.[5] 약 1068만명 정도가 중국 동북지방을 중심으로 살고있다(2000년도 통계). 자치현이나 자치구도 군데군데에 있긴 한데 어차피 한족에 거의 다 동화된 상태라 한족이랑 별 차이는 없다. 차이점이라면 진(金)씨 성을 가진 사람들이 많은데 이건 신라나 가야와는 전혀 관계 없고 청나라의 황성인 아이신기오로를 한자로 바꾸는 과정에서 나온 성씨일 뿐이다.

동북 3성(랴오닝성, 지린성, 헤이룽장성) 구석탱이에 위치한 도시('치치하얼'이라던가)나 마을에서는 전통을 유지하면서 살고 있는 만주인 마을이 아직도 남아있다.

바로 옆에 붙어있는 한국인들과 중국인들이 를 식용으로 사용했음에도 불구하고 만주인들은 개를 먹지 않는 전통을 가지고 있다. 이는 청 태조 누르하치가 위기에 처했을 때 개가 구해줬다는 전설 때문이다.

언어에 관해서는 만주어 항목 참조. 청 왕조가 존속하던 시대에는 엄연히 국어(國語)의 지위에 있었다. 그 당시 국어라고 하는 건 중국어가 아닌 만주어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관련된 다른 소수민족으로는 청나라 때 신장위구르자치구 쪽으로 강제 이주당한 시버족이 있다. 시버족은 남만주에 정착한 선비족의 한 갈래가 만주족과 섞이면서 탄생한 민족이다. 그들이 쓰는 시버어는 중세 만주어와 유사해서 여진어, 만주어 연구에 쓰이고 있다. 만주어와의 차이는 방언 차이 정도.

2 한국과의 관계?

일단 계통은 퉁구스계 민족. 부계 유전인 Y염색체 하플로그룹과 모계 유전인 미토콘드리아 하플로그룹 모두 한민족과 유전적으로 가장 비슷한 종족이다. 사실 고대부터 거의 붙어있다시피 했고 양 민족이 섞이는 일도 제법 있었으니까 당연한 것이긴 하다. 그래서인지 환단고기류의 위서 애호가들, 소위 환빠나 일부 극단적인 주장을 하는 재야 사가들은 만주족을 우리 민족과 거의 동류로 생각하고 굉장히 친근감을 느끼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어차피 민족이란 유전적 근친성으로 되는 것도 아니며,[6] 문화적 근친성을 따진다고 해도 이미 원삼국시대부터 언어가 다른 별종이라고 삼국지 위지와 후한서에 기록되어 있다. 그러니까 만주족과 현대 한국인은 적어도 2000년전에 갈라진 별개 민족이란 의미.[7]

한국인과 만주인은 고조선과 숙신이라는 각자의 공동체가 형성될 때부터 이미 서로 다른 정체성을 갖고 있었다. 이후 고조선은 부여와 함께 고구려로 이어지고 숙신은 숙신이 잔존하는 상태에서 물길, 읍루, 말갈 등을 이루다가 여진이 되고 만주가 된다. 고조선과 숙신의 구체적인 관계는 알 수 없다. 읍루는 정치적으로 고구려에 복속되어 있었지만, 여전히 고구려와 언어가 달랐다고 기록되어 있다. 후의 말갈은 고구려에 복속되어 있었지만, 고구려-당 전쟁에서 말갈병만 골라서 따로 죽였을 만큼, 고구려와는 구분되는 모습을 보였다. 고구려가 멸망한 이후 등장한 발해는 예맥족과 말갈족이 연합된 국가라고 보면 된다. 다만 좀더 순수한 말갈족은 아무르 강 쪽에 있었던 흑수말갈에 몰려있었다.

이처럼 오랜 세월동안 이웃하며 살아서 그런지 은근히 옆동네 친척정도로 여겼다는 기록이 있다. 사실 우리가 만주를 상실한 발해 멸망 이후에도 여진족은 고려를 부모급으로 취급했고, 사실 여부는 제처두고서라도 여진족의 역사서인 금서에서는 아골타를 고려에서 나왔다고 했으며, 조선도 여진족과 상당히 유착되어 있었다. 조선의 시조인 이성계가 여진족에 상당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고, 이성계의 의형제인 이지란이 여진족 추장이었음을 봐도 그렇다. 또한 조선 초기에 함경도에서 일어난 반란들 , 조사의이징옥의 난 등은 모두 여진족을 끌어들이려고 했다는 점도 근거가 될 수 있다.[8] 서양인이 조선에 대해서 쓴 기록에는 친척 민족에게 공격당했기 때문에(병자호란) 조선인들은 어떤 외국인도 믿을 수 없게 되었다라는 구절도 있다.

물론 현재 이들 거의 대부분은 중국어에 능통하며, 중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확실히 갖고 있는 엄연한 중국인이다. 오죽했으면 중국 정부에서 만주족의 정체성을 보존하려는 사업을 벌이고 있다. 그러므로 금도 청도 다 우리나라! 대륙은 역시 우리 것이라는 환빠적인 말은 지금 남아있는 만주족들이 들으면 코웃음을 칠 얘기다.

게다가 만약 만주족이 중국에 속하지 않고 독립국가를 세웠다고 해도 한국은 이미 고려시대부터 만주족과의 사이가 원활하지 않았으며, 그때부터 끊임없이 싸워왔다. 아마 후금 따먹기에 실패했다면 임진왜란으로 막장이 된 한반도로 치고 내려 왔을지도 모른다. 현대사의 복잡성 때문에 우방이 되었을지 적이 되었을지도 알 수 없고, 복잡하게 얽힌 역사와 이로 인한 영토(예를 들면 요동, 간도, 함경도) 때문에 한국과는 매우 미묘한 국민감정을 가지게 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참고로 만주어로는 한국을 솔호(Solho)라고 한다. 유래는 알 수 없으며 몽골어로 한국을 솔롱고스(Солонгос)라고 부르는데, 이와 관련이 있다고 생각된다.

3 동북공정?

현재 중국에서는 만주족의 기원과 청의 영토를 이용해 역사 및 영토뺏기가 진행중이다.
대표적인 것으로 장백산 문화론. 백두산(창바이산)에 가보면 이 산은 중화민족의 하나인 만주족의 영산이므로 우리 산이다 라는 내용의 설명문(...)을 볼 수 있는데,이 공정의 일환으로 백두산 부근의 공무원은 만주족의 복장을 입고 있기까지 하다(...) 발해와 고구려를 중국의 역사라고 주장하는 근거도 들먹이는 것도 만주족과의 연결이다.

현대사에서 유명한 만주족은 카와시마 요시코와 아이신기오로 울히춘이 있다. 둘 다 여자이다. 카와시마 요시코의 본명은 아이신기오로 셴위로 청나라의 황족이었으나 일본인의 양녀로 입양되었다. 커서는 청 왕조 부흥을 위해 일본에 협력하여 스파이 노릇을 하였고 이 때의 행적 때문에 동양의 전설적인 스파이 중 하나로 유명하다. 제2차 세계대전 후인 1948년에 이적행위로 처형당했다.[9]

아이신기오로 울히춘 교수는 건륭제의 후손으로 그녀의 아버지와 함께 만주어 전문가로 매우 유명하다. 이 외에도 여진어, 거란어 등을 전공하였다. 후에 중국사를 전공한 일본인 학자 요시모토 미치마사(吉本 道雅)와 결혼하여 성이 요시모토가 되면서 이름을 요시모토 치에코(吉本 智慧子)로 바꾸었다. 울히춘(Ulhicun)은 만주어로 지혜라는 뜻을 갖고 있다. 일본식 이름을 지혜를 뜻하는 치에(智慧)를 이용해 지은 것은 의미를 살리기 위해서이다. 현재(2010)는 리츠메이칸 대학 아시아태평양학부의 교수이다.

또한 미군에서 육군 소장까지 복무했던 존 푸(John Fugh)[10]가 있다. 이외에도 소설가 라오서(老舍, 1899-1966)나 피아니스트 랑랑(郎朗, 1982-)도 만주족이다. 뭐 따지고보면 푸이도 가장 만주족일 듯.


----
[1] '만주'라는 부족명을 걸고 활동했을 16세기 당시엔 유목 생활은 반 정도 접은 상태였다. 유목민족은 초원에서 소, 말, 양, 염소, 낙타 등을 키우며 사는데, 만주족의 영역은 삼림지역이었기 때문에 유목보다는 농업과 수렵에 집중했다.
[2] 하지만 중국을 배경으로 하는 애니메이션,만화,소설 작품들이나 전래동화,중국,홍콩의 수많은 사극 영화들이나 드라마에서는 한나라명나라같은 한족 왕조들의 이미지나 청나라 이전 중국의 전통복식인 한푸를 띄우기도 한다..
[3] 도리어 일설에 돌았던 "중간 민족 조선인"들보다 관직을 더 많이 받았다. 일본인>>>넘사벽>>>만주족>중국인>=몽골인>=조선인이었던 것. 조선인의 만주국에서의 위상은 거의 없었다.
[4] 덕분에 만다린 발음과 고어 발음은 한국어와 고어 발음의 차이보다도 더 멀게 떨어졌다.
[5] 인구 수로 만주족 바로 뒤를 잇는 소수민족은 후이족(회족)이다.
[6] 일례로 이스라엘과 중동의 아랍국가들은 유전적-언어적으로 모두 구별이 없지만, 믿는 종교가 유대교, 이슬람교로 갈려있고 제국주의 시대 영국의 잘못된 중동 식민지 정책 때문에 현재 앙숙이다.세르비아와 크로아티아,보스니아등 옛 유고슬라비아 출신 국가들도 민족적,언어적으로 슬라브족이지만 동방정교회,카톨릭,이슬람등으로 종교적으로 달라 서로 원수지간.
[7] 19C초반까지는 함경도 주민과 만주족 주민이 통역 없이 대화가 가능했다는 썰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외국어로서 만주어/중국어/한국어를 배우지 않는 이상 세 언어 사이에서는 의사소통 자체가 불가능하다. 그런데, 구한말~일제시대의 한국의 문학 작품을 보면 그때까지도 함경도에 만주족이 거주했거나, 함경도가 만주족의 거주지라는 인식이 있었던 모양이다. 금, 청을 세운 여진족의 발상지가 두만강 유역이다보니 그럴만도 하다. 사실 유물을 통해 보면 의외로 한국인이 두만강 유역에 지배권을 행사하던 고구려시대에도 만주족이 두만강에서 함경도에 걸쳐 넓게 살았다는 흔적이 발견된다. 이게 당연한 게, 만주족들도 사람이니 만큼 동장군을 피해 계속 남하해서 그렇다.
[8] 물론 이 부분은 정치적 제스처에 기반하여 고찰해 보아야 한다.
[9] 하지만 그 후에도 30년을 더 살았다는 음모론이 있다.
[10] 1934–2010, 중국명 푸루런(傅履仁).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