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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외세력

알고 나면 분노 치솟는 매국노 `을사오적 5명`의 마지막 모습들

작성자러브인|작성시간20.09.03|조회수390 목록 댓글 0


알고 나면 분노 치솟는 매국노 `을사오적 5`의 마지막 모습들

 

학부대신(오늘날 교육부 장관) 이완용

    


 

1910년 한일 강제 병합 이후 일본으로부터 훈1등 백작 작위를 받았다. 이때 그가 벌어드린 돈은 현재 가치로 400억에서 450억원 정도 된다

 

그가 경기도와 전라도 일대에 소유했던 땅은 여의도 면적에 7.7배에 달한다

 

1920년에 후작으로 승급한 이완용은 192668세의 나이에 폐렴으로 사망했다. 당시 한국인 남자의 평균 수명은 32.4세에 불과했다

 

그가 죽기 직전 아들에게 남긴 유언은 다음과 같다고 전해진다

 

"내가 보기에는 친미파가 득세할 듯하니 넌 앞으로 친미파가 되어라"

 

 

군부대신(오늘날 국방부 장관) 이근택

    


 

을사늑약을 체결한 후 집으로 돌아간 이근택은 "우리 집안은 부귀가 지금부터 크게 시작될 것이니 장차 무궁한 복과 즐거움을 누릴 것이다"라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근택은 1910년 한일 강제 병합에 협조한 공로로 일본 정부로부터 훈1등 자작 작위를 받고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에 임명됐다.  

 

황현의 '매천야록'에 의하면 그는 항상 일본 신발을 신고 일본 수레에 앉아 일본군의 호위를 받으며 다녔다

 

용인 민속촌에 있는 99칸짜리 집이 이근택의 별장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왕을 제외한 사람이 지을 수 있는 가장 큰 집이 99칸이었다

 

그는 55세의 나이로 사망했고, 그의 아들 이창훈은 아버지의 작위를 습작해 대를 이은 친일을 도모했다

 

 

내부대신(오늘날 행정안전부 장관) 이지용

    


 

한일 강제 병합에 협조한 공로로 1911년에 은사공채 10만엔을 받았다. 10만엔은 지금의 가치는 약 20억원이다

 

당시 일본은 조선인 귀족에게 은사 공채를 지급했는데, 은사공채증권을 받게 되면 원금을 5년 거치한 후 50년 이내로 상환 받을 수 있다

 

이 공채는 연 5%의 이자가 붙었고, 매년 3월과 9월에 지불됐다. 이지용의 경우 6개월에 한 번씩 5천만원을 이자로 받았다고 볼 수 있다.  

 

이지용은 이렇게 나라를 팔아먹고 받은 돈을 도박하는데 탕진했다

 

그는 한때 도박죄에 걸려 귀족 예우가 정지되기도 했지만, 더 열정적인 친일로 다시 귀족 작위를 받고 59세의 나이로 죽을 때까지 수당을 받으며 호의호식했다

 

 

외부대신(오늘날 외교부 장관) 박제순

    


 

박제순은 한일 강제 병합 이후, 성균관의 후신이었던 경학원 대제학으로 임명돼 친일 활동을 이어나갔다

 

이후 일본의 총독 정치 옹호 선전을 하며 일본을 유람하다가 191659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박제순의 아들들은 아버지의 작위를 이어받아 당시로서는 드문 오토바이를 타고 다니며 호의호식했다

 

그의 손자 박승유는 할아버지의 명예와 부를 포기하고 독립운동에 나섰지만, 결국 매국노의 자손이란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친일파 할아버지는 편히 삶을 마감했지만, 독립운동한 손자는 쓸쓸한 말년을 보내야 했다

 

 

농상공부대신(오늘날 농림수산식품부, 산업통상지원부 장관) 권중현 

    


 

매국노 권중현은 아이러니하게도 충무공 권율의 9대손 아버지와 충무공 이순신의 9대손 어머니 사이에서 차남으로 태어났다

 

을사늑약이 체결된 후 그는 1908년에 훈1등 욱일대수장을 받았다욱일대수장은 일본 정부가 국가에 공로가 있는 이들에게 수여하는 욱일장 중 가장 높은 등급의 훈장이다

 

19193·1운동이 일어나자 겁을 먹고 귀족 작위 반납을 신청했으나, 일본 정부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3·1운동이 잠잠해진 후에는 다시 친일활동에 가담했다. 노년의 그는 매년 수당으로 3천원(현재 가치로 약 6억원 정도)을 받으며 살다가 193481세로 사망할 때까지 천수를 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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