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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백제 초기 역사

작성자라이크|작성시간14.01.28|조회수178 목록 댓글 0

 

사라진 백제 초기 역사

 

 

백제는 고구려나 신라와 달리 건국시조 설화부터 논의가 엇갈린다. 예컨대 삼국사기를 비롯한 우리의 고대문헌기록은 백제의 시조는 온조라고 기술하고 있는데 반하여 ‘주서(周書)’ 49권 백제전, ‘수서(隋書)’81권 백제전 등 중국 사서 가운데 일부는 백제의 건국시조를 구태(九台)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 같은 차이는 백제의 초기역사기록에 문제가 있음을 말해준다.

 

일본의 옛 문헌인 ‘신찬성씨록’(24권 제번 우경 하) 구다라노기미(백제공) 조에는 구다라노기미가 백제국 추모왕의 30세손인 혜왕의 손자 문연왕 후손이라고 했는데 삼국사기 왕세계표에는 혜왕이 온조왕의 18세손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추모왕으로부터 계산하면 19세손이 된다. 이것은 삼국사기 왕세계표에 온조왕과 다루왕 사이 11명의 왕이 빠져 있음을 의미한다.

 

또 ‘신찬성씨록’(24권 제번 우경 하) 후지이노수쿠네 조에는 그가 백제 추모왕의 10대손 귀수왕의 후손이라고 했는데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귀수왕(214~234년)은 시조의 5대 손, 동명왕의 6대 손이라 되어 있다. 역시 온조왕과 다루왕 사이에 4명의 왕이 빠져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보다 ‘신찬성씨록’에 왕이 4대 혹은 11대나 더 많다는 것을 통해 초기 백제의 역사가 잘려나갔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신찬성씨록’에는 추모왕의 아들로 전하는 음태귀수왕, 추모왕의 손자라고 하는 덕좌왕 등의 이름이 보이나 삼국사기에는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이런 식으로 잘려나간 초기 백제의 역사가 얼마나 되는지 정확히 알 길이 없다.

 

백제 역사의 뿌리가 상당부분 삭제된 것은 백제 건국 초기의 수도변천과정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예컨대 ‘백제본기’에 의하면 백제는 처음 하남 위례성에 수도를 정하고 국가 성립을 선포한 다음 불과 10여년 만에 수도를 한산, 즉 지금의 남한산 일대로 옮겨 2년 후 왕궁을 지었다. 10여년 만에 수도를 옮기고 연이어 궁전을 건립하는 대역사를 진행한다는 것은 영역이 100여 리에 불과했던 백제 초기의 경제능력으로 보아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따라서 백제가 수도를 하남 위례성으로 옮기기 이전, 하북 위례성에 이미 초기 백제가 있었을 개연성이 높고 바로 이 하북시대의 백제사가 잘려나간 것으로 추정된다.

 

우리는 이와 관련해 다음과 같은 가정을 할 수 있다. 즉 하남 위례성에 한반도 백제가 수립되기 이전 하북에 대륙백제가 건립되어 있었는데 대륙백제를 세운 시조는 구태이고 한반도 백제의 시조는 온조였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 온조의 기록만 남고 대륙백제의 역사가 사라진 까닭은 무엇일까. 그것은 후기 신라의 역사편찬자들이 신라 중심으로 역사를 재편하면서 백제사의 시작을 신라 창건보다 후대로 끌어내리려 한반도로 이주해온 후 온조왕 시대를 백제의 창건 기준으로 설정하고, 온조 이전 대륙백제 구태왕 시대를 잘라버린 데서 연유된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한반도 백제는 자생적으로 성립한 나라가 아니고 대륙 서북지역으로부터 선진적인 제도와 기술문화를 가진 동이 부여계통의 사람들이 집단적으로 이주해 와서 건립한 나라다. 따라서 한반도 하남 백제 이전에 대륙의 하북 백제가 있었다는 논리를 전면 부인할 수 없다. 그동안 우리는 하남 위례성을 한성으로 인정해 왔다. 그러나 한강은 역사적으로 강(江)이지 하(河)가 아니다. 백제가 실제 요서 진평 등을 지배한 기록이 중국문헌 여러 군데 나타나는 것으로 미루어 하남 위례성의 ‘하’를 한강이 아닌 지금의 랴오닝성 요하(遼河)로 보는 것이 더 설득력이 있지 않을까. 그러므로 초기 백제 역사의 복원을 위해서는 하남 위례성 시대 이전 대륙의 하북 백제와 그 시조 구태에 대한 연구가 수반돼야 한다.

 

백제가 요서(遼西)를 지배했다는 최초의 기록은 ‘송서(宋書)’ 97권 백제전에 실려 있다. ‘고구려가 요동을 지배하고 백제는 요서를 지배했는데 백제의 소치(所治)는 진평군 진평현이다.’ 이 기록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부분은 ‘백제의 소치(所治)’라는 표현이다. ‘치(治)’는 고대사회에서 도성을 가리키는 용어로 군치(郡治) 현치(縣治)일 경우에는 지방장관이 거주하는 군청, 현청 소재지를 뜻하고 국가의 소치(所治)는 소도(所都) 즉 국도를 의미했다. 따라서 백제소는 백제국의 도성, 즉 국도를 가리킨 것으로 보아야 한다.

 

청나라 때 편찬된 ‘흠정만주원류고’에서는 이런 고기록을 근거로 백제의 국도는 요서에 있었다(國都在遼西)고 잘라 말했다. 그런데 한국사학계는 그동안 이 치(治)를 도성이 아닌 통치로 해석하는 오류를 범했다. 백제의 수도가 있었다는 요서 진평군은 과연 중국의 어느 지역일까. 마단림(馬端臨)이 지은 ‘통고(通考)’에는 그 지역을 당나라 때 유성과 북평의 중간지라고 했는데 ‘흠정만주원류고’에서는 다시 마단림의 견해를 기초로 이곳을 청나라 때 금주, 영원, 광녕 일대라 추정했다.

 

그러면 백제가 중국의 요서 지역에 국도를 정했다가 한반도 지역으로 도읍을 옮긴 시기는 언제쯤이었을까. ‘흠정만주원류고’는 그 시기를 양나라 천감(天監)시대로 보았다. 천감이란 중국 양나라 무제의 연호로 천감 1년은 서기 502년이며 신라 지증왕 3년, 고구려 문자왕 11년, 백제 무령왕 2년이 이에 해당한다. 그러니까 백제 수도가 본래는 요서에 있다가 무령왕 때 비로소 남쪽 한반도로 천도해 왔다는 것이다. 이 주장의 근거는 ‘양서(梁書)’ 백제열전에 있다. “진(晉)나라 때 요서, 진평 두 군을 차지하고 있던 백제가 남제(南齊) 천감시대에 고구려와의 싸움에서 패하여 국력이 크게 약해지자 그 후 남한(南韓)지역으로 옮겨갔다.”

 

삼국유사는 ‘구당서’를 인용하여 백제는 부여의 별종인데…왕의 거처로 동, 서 두 성이 있다고 했다. ‘북사(北史)’의 백제국에 대한 설명 가운데는 백제의 왕은 동, 서 두 성에서 사는데 하나는 거발성(居拔城)이고 다른 하나는 고마성(古麻城)이라고 되어 있다. 그런데 고마성의 고마는 곧 곰(熊)을 뜻하므로 웅진성의 우리말인 ‘고마나루’의 ‘고마’를 한자로 음사(音寫)한 것이 아닐까 추측할 수 있지만 거발성은 어떤 성을 가리키는지 우리 학계에서는 아직까지 정설이 없는 실정이다. 그런데 ‘흠정만주원류고’는 거발성이 바로 요서의 진평성(晉平城)이라고 적시했다.

 

양나라 때 외국사절들의 용모를 그린 그림과 함께 그 나라에 관한 간단한 설명을 덧붙인 ‘양직공도(梁職貢圖)’를 보면 ‘백제국기(百濟國記)’를 인용하여 백제는 옛날의 내이(萊夷)이며 마한족이라 했다. 내이는 우이와 함께 청주(靑州), 즉 오늘의 산둥성 일대에 거주하던 동이족의 하나다(‘서경’ 우공편). 산둥성 내산(萊山) 밑에 살아서 그들을 내이(萊夷)라 불렀는데 내산은 바로 오늘의 칭다오와 옌타이 일대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571년에 북제(北齊)가 백제 위덕왕에게 ‘사지절도독동청주자사(使持節都督東靑州刺史)’의 직을 수여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이는 이 지역에 대한 백제의 지배를 승인한 것으로 간주되는데 동청주는 오늘날 산둥성 자오저우완 일대에 해당된다. 역사학자 허광웨는 부유인이 본래는 산둥성에 있다가 차츰 이동하여 춘추시대에 요서에 도달하고 전국시대에 다시 오늘의 지린성 부여지역에 도착했다고 주장한다. 이런 기록들을 미루어 볼 때 원래 한반도 지역에 있던 백제가 중국의 요서에 진출하여 요서, 진평을 잠시 경략했다기보다, 대륙의 요서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백제 세력이 나중에 차츰 남하하여 한반도에서 정착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백제의 요서 지배에 관한 기록은 ‘송서’ 이외에도 ‘양서’ 백제전, ‘남사’ 백제전, ‘자치통감’ ‘위서물길전(魏書勿吉傳)’ 등에 나타나는 명백한 사실임에도 일본의 나카 미치요(那珂通世)를 위시한 식민사학자들은 대체로 이를 부정하거나 묵살하는 태도를 취했다. 요서 지방은 한반도 서남부에서 바다를 사이에 두고 수천 리 떨어져 있는 곳인데, 백제가 이곳에 진출해야 할 필요성이나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것이다. 우리나라 고교 국사교과서는 ‘백제가 괄목할 만한 발전을 이룩하게 된 것은 4세기 후반 근초고왕 때의 일이었다…백제는 수군을 증강시켜 중국의 요서 지방으로 진출하였다”라고 기술하여 백제의 요서 지방에 대한 지배를 진출로 폄훼했고, 또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서 발간한 ‘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한술 더 떠서 “근초고왕은 해상무역에도 힘을 기울여 요서지방에 무역기지로서 백제군을 설치했다”고 기술하여 지배와는 상관없는 무역기지의 건설로 왜곡했다. 이는 일제 식민사관의 잔재를 탈피하지 못한 데서 온 오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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