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스페셜
신라명신의 비밀
일본의 교토. 흔히 우리나라의 경주의 비견될 만큼 대단히 유서 깊은 도시다. 794년 간무천황에 해서 새로운 왕도가 된 뒤 1869년 메이지 유신으로 도쿄 천도가 이루어지기까지 무려 10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일본에 수도였던 교토. 그래서 지금도 많은 사람들은 이 교토를 일본의 문화와 전통 그리고 정신의 중심지라고 여기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교토를 지키는 대표적인 수호신이 바로 신라명신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가? 우리 한반도의 고대국가인 신라의 이름을 그대로 사용한 신라명신. 대체 신라명신은 어떻게 바다 건너 일본까지 가게 됐으며 또 어떤 이유로 일본이 자랑하는 천년고도 교토의 수호신이 될 수 있었던가? 오늘 역사스페셜에서는 그 비밀을 하나하나 풀어가 보려고 한다.
■교토건설의 주역은 신라인 도래계, 하타 씨
일본 교토(京都). 일본을 이해하기 위해선 먼저 교토를 알아야 한다는 말이 있을 만큼 가장 일본다운 도시로 손꼽힌다. 1000년을 이어온 풍부한 문화유산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역사도시. 일본의 수많은 전통과 문화가 바로 이곳 교토에서 시작됐다. 일본은 대표하는 전통공연 가부키도 그 가운데 하나다. 400여 년 전 교토의 한 신사에서 무녀가 공연한 춤이 가부키의 발상인 것이다. 가부키를 비롯해 게이샤와 불교, 다도 등 일본인들이 사랑하는 전통문화가 고스란히 남아 있는 도시. 교토는 많은 일본인들에게 마음의 고향과도 같다.
무엇보다 교토는 1000년이 넘는 세월 일본의 수도이자 정치의 중심지였다. 그 상징이라 할 수 있는 곳이 바로 교토 중심부에 자리잡은 거대한 궁궐 헤이얀 궁이다. 794년 교토천도로 헤이얀 시대를 연 것은 제50대 천황 간무였다. 도래계 혈통으로 알려진 간무천황(781~806). 그가 새로운 왕도를 택한 것은 이유가 있었다.
이노우에 미츠로 교수 교토산업대학교
“교토에 널리 퍼져 있는 선진적인 문물이 바로 그것이고 이는 바로 도래인들이 이루어 놓은 것들입니다. 간무천황은 두 가지 이유에서 즉 본인이 도래인의 혈통임을 강하게 의식하고 있었다는 점과 하타 씨의 기술 도입 등으로 교토가 상당히 발전해 있었기 때문에 교토를 수도로 택한 것입니다.”
교토시내에 위치해 있는 우스마사거리. 이곳엔 신라계 도래인 족 하타 씨가 세웠다는 절이 있다. 1600개에 이르는 교토의 사찰 가운데 가장 오랜 역사를 지닌 고류지다. 이 절은 일본에서 으뜸가는 국보가 보관돼 있는 걸로 유명하다. 우리나라의 국보 83호 금동미륵보살반가상과 마치 쌍둥이처럼 닮아 있는 미륵보살반가상. 7세기 초 일본의 불교를 중흥시킨 쇼토쿠 태자가 가지고 있었다고 전한다. 쇼토쿠 태자로부터 불상을 하사 받아 고류지를 창건한 사람이 바로 하타가와카츠다. 당시 교토의 대부호였다는 하타가와카츠는 신라에서 건너와 우스마사 지역에 자리잡은 하타 씨 일족의 부장이었다.
데와 히로아키 <신라명신>저자 역사학자.
“하타 씨는 불가사의한 부족으로 고도의 기술력을 가지고 도래한 거대한 집단이었습니다. 그리고 대단히 신앙심이 깊은 부족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역사 무대에는 그다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부족입니다.”
정치무대에서는 크게 부각되지 않았던 하타 씨. 하지만 일본의 고대문명에선 하타 씨의 역할은 실로 대단한 것이었다. 다양한 수공업이 발달해 있는 교토에서도 첫 손에 꼽히는 니시진오리. 일본 최고라 불리는 비단이다. 한 사람이 하루 종일 작업해도 60~70cm밖에 짜지 못한다는 니시진오리는 아름다운 염색과 정교한 짜임새로 이름이 높다. 일본 여인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입고 싶어한다는 명품 중의 명품. 니시진오리는 바로 하타 씨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하라이 도요이치 니시진오리 전통공예사
“하타 족이라는 호족이 교토로 이주합니다. 그 하타 족이 교토에 양잠 기술과 직물을 짜는 방법을 전해줍니다. 그 후 수도가 교토로 천도되면서 국가가 지원하는 관영 직물로 승격됩니다. 그 시점이 바로 진정한 의미에서 니시진오리의 출발점이라고 생각합니다.”
하타 씨가 일본에 전한 선진문물. 이 가운데 빼놓을 수 없는 것이 토목과 관개기술이다. 교토를 관통하는 가쓰라강엔 5세기 무렵 하타 씨가 만들었다는 제방이 있다. 흐르는 강에 둑을 쌓아 저수지를 만드는 공사는 엄청난 시간과 인력, 기술을 요구하는 대규모 토목공사로 당시 일본에선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하타 씨가 이렇게 제방을 쌓고 수로를 연결해 이 일대를 농경지로 개간한 것이다.
이노우에 미츠로 교수 교토산업대학교
“교토는 다른 곳보다 땅이 높아 물을 많이 필요로 하는 수전공업, 즉 벼농사가 불가능했습니다. 그런데 이 지역을 개발하는데 한반도에서 도래한 하타 씨가 커다란 기여를 했습니다. 하타 씨가 선진적인 토목과 관개기술을 사용해 교토의 역사를 100년 정도 앞당긴 것입니다. 바꿔 말하면 하타 씨가 없었다면 교토 또는 일본의 발전은 100년 정도 늦어졌을 것입니다. 하타 씨는 교토의 문화와 역사에 커다란 자취를 남겼습니다.”
일본의 1000년 고도 교토. 이 도시의 문명을 발전시킨 이들은 신라계 씨족 하타 씨였다. 바다를 건너간 하타 씨의 기술과 문화가 일본의 1000년 왕도 교토의 기반이 된 것이다.
신라에서 일본으로 건너갔다고 전해지는 하타 씨는 일본 고대사 상 최대규모를 자랑하는 도래계의 씨족으로 한자로는 秦이라고 쓴다. 그리고 이것은 日本書紀에 5세기 무렵 기록인데 秦人戶數總七千五十三戶 즉 하타 씨 일족이 총 7천 53호나 된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하타 씨는 최소한 이 기록이 쓰여지기 이전에 일본으로 건너가 큰 세력을 구축했다고 볼 수 있다. 이들 하타 씨는 앞서 본 것처럼 양잠과 토목, 제철 등 다양한 분야에서 선진기술을 가지고 있었고 이를 바탕으로 막대한 부를 축적할 수 있었다. 그런데 하타 씨에 대해서 또 한가지 놀라운 일이 있다. 그것은 하타 씨가 모시던 신이 후일에 일본에 천황과 교토를 지키는 수호신이 됐다는 것이다. 신라에서 건너간 한 씨족 집단의 신이 일본이 자랑하는 1000년 고도의 수호신이 됐다. 대체 이 일이 어찌된 것일까.
일본 야마나시 현. 산과 호수를 품고 있는 아름다운 경관으로 이름난 관광지다. 이곳 깊은 산 속 한 사찰인 일본 역사상 중요한 유물 한 점이 보관돼 있다. 일본에서 처음으로 만들어 졌다는 일장기가 그것이다. 이 일장기는 일본 천황이 일본 최초의 무사로 불리는 미나모토 요리요시에게 하사한 것이다. 미나모토 요리요시. 그는 11세기에 일어났던 많은 반란을 진압해 황실에 두터운 신임을 받던 최고의 무사였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이 최고의 무사가문이 신라계 도래인 세력과 깊은 관계가 있다는 점이다. 그에겐 세 아들이 있었다. 이들 삼형제는 저마다 다른 신사에서 성인식을 치른다.
우에츠키 마나부 야마나시 현립박물관 학예사
“교토 서쪽의 이와시미즈 하치만궁, 북쪽의 가모신사, 동쪽의 미이데라(신라명신), 이렇게 교토를 수호하는 서쪽, 북쪽, 동쪽의 신사에서 각각 성인식을 치르도록 했습니다. 당시 무사들은 수도와 조정을 지키기 위하여 교토를 수호하는 대표적인 신사에서 아들의 성인식을 치르게 했습니다.”
이와시미즈 하치만궁. 당대 최고 무사인 미나모토의 장남이 성인식을 올렸을 만큼 교토를 대표하는 신사다. 오래 전부터 교토와 황실을 수호해왔다는 이곳엔 동경 그러니까 구리로 만든 거울로 상징되는 신이 모셔져 있다. 이 신은 과연 누굴까.
데와 히로아키 <신라명신> 저자.
“본래 하치만이 모시는 것은 하타 씨의 신이며 그리고 (하치만의 본궁이 있는) 오이타현에 해당하는 지역은 하타 씨의 왕국이 위치했던 곳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하치만궁은 신라에서 건너온 하타 씨와 매우 관련이 깊었다고 생각합니다.”
오이타 현의 작은 마을 우사. 이곳엔 하치만 신이 최초로 모셔졌다는 하치만 궁의 본산이 있다. 8세기 초반에 세워진 우사 신궁. 1000년이 넘는 오랜 역사와 4만개에 이르는 전국 각지의 하치만 궁을 총괄해 온 위상이 곳곳에 서려 있다. 일본에 존재하는 수많은 신들 가운데 가장 널리 받들어지는 신으로 꼽히는 하치만 신. 이 신이 정말 신라계 씨족 하타 씨의 신일까. 먼저 이곳에 하치만 신이 최초로 모셔진 이유를 알아보기로 했다. 신사를 관리하고 있는 부궁사는 취재팀을 신사의 뒤편 한적한 숲으로 안내했다. 바로 하치만 신이 처음으로 나타났다는 우물이다. 이곳엔 원래 대장간이 있었는데 철을 연마하고 제련할 때 이 우물의 물을 사용했다고 전한다. 지금도 매일 아침 하치만 신에게 바치는 정화수로 사용할 정도로 신성하게 여겨진다. 그런데 이곳을 개척한 사람들은 다름 아닌 신라계였다.
나가히로 겐지 하치만 본궁 부궁사
“가라시마(幸島)씨는 한반도에서 건너온 도래인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들은 뛰어난 문화와 발달된 기술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일본에는 없는 제철기술 등을 가져와 이 땅에 거주하며 우사 하치만궁의 기초를 구축한 부족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뛰어난 제철기술을 갖고 있었던 가라시마시. 이들은 철을 제련하던 그 물을 끌어들여 저수지를 만들고 이를 이용해 농경지를 개간했다. 가라시마시의 이름을 그대로 따온 가라시마 단보. 수천 헥타르에 이르는 이 논은 지금도 오이타 현에서 손꼽히는 곡창지대다. 이 일대엔 아직도 가라시마라는 성을 쓰는 사람들이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5세기 중엽 한반도에서 건너와 교토 일대를 번성시킨 하타 씨. 그들의 세력은 전국으로 퍼지면서 여기서 갈라져 나간 씨족이 스무 개가 넘었다고 전한다. 그들 가운데 하나가 가라시마시인 것이다.
가라시마 하야시 신라도래인 자손
“한반도에서 건너온 하타 씨의 일족입니다. 이 가라시마에 정착하여 신사의 연못물을 관개 시설을 통해 평야로 끌어들여 우사 가라시마 단보(논)의 개척자로 가장 위대한 공로자입니다.”
우사 지역의 농경지를 만들었고 뛰어난 제철기술을 갖고 있던 가라시마시. 그들은 이곳 우사 신궁에 자신들의 신을 상징하는 동경을 모셨다. 동경과 함께 모셔진 또 하나의 신물은 시녀다. 이 가마로 동경을 운반했다는 것이다. 1년에 한번 이 시녀에 모신 동경을 우사 신궁으로 옮겨오는 제사가 있는데 이것은 우사 신궁에서 가장 큰 행사다. 지금은 방생애까지 겸하고 있는 이 행사는 신사가 처음 세워진 8세기부터 지속돼 왔다. 그런데 동경을 운반해 오는 행사를 치른 것은 동경을 우사에서 만들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사 신궁의 동경은 어디서 왔을까.
우사에서 차로 두 시간 거리인 가와라. 산악지대인 가와라는 예로부터 구리산지로 유명하다. 그중에서도 가장 많은 구리가 산출된 지역이 석회암으로 형성된 가와라의 산이다. 우사 신궁에 모셔진 동경은 바로 이곳에서 만들어졌다.
노무라 겐이치 가와라 쵸 사회교육계
“이곳에서 구리거울을 제작하여 우사 하치만궁에 봉납했습니다. 바로 이곳이 그 제작 장소입니다. 그리고 구리를 채굴한 곳이 이 갱도입니다. 이 주변에는 100개 이상의 갱도가 지금까지 남아 있습니다.”
그렇다면 가와라에서 동경을 제작한 사람들은 누구일까. 시내에 세워져 있는 한 비석에 그 단서가 있다. 이 비문은 가와라 지역에서 가장 오래된 역사서인 푸젠(豊前) 풍토기의 일부를 세긴 것인데 이곳에 신라국의 신이 내려와 머물게 됐다고 적혀 있다. 가와라의 내려왔다는 신라의 신. 이 신을 모신 곳이 바로 가와라 신사로 8세기 무렵에 세워졌다. 한반도에서 제철기술을 가져온 가라시마 씨가 우사 신궁을 만든 것과 같은 시기다. 우사와 같이 신라의 신을 모시고 뛰어난 제련 기술을 갖고 있던 집단. 그들은 우사의 가라시마와 같은 신라인이었다.
아카조메 타다오미 가와라 신사 궁사
“가라쿠니 오키나가 오오히메 오오메라는 신라의 신을 모시고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가라쿠니’는 한국을 뜻하는 말이고 ‘오키나가’라는 말은 한국의 어느 지명을 뜻하는 것으로 그 지역의 공주님을 의미합니다.”
가와라 신사에서 매년 정월 초하루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데 이것은 그 제사의 행렬도다. 그림의 길이가 끝이 없을 정도로 행사의 규모가 엄청나다. 당시 가와라 신사와 이 지역이 얼마나 큰 세력을 지녔는지를 가늠할 수 있다. 구리의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했던 시기. 구리산지이자 뛰어난 제련집단이 있던 가와라도 크게 번성하게 됐고 이 신사를 관리하는 궁사에게 황실에서 이름을 내릴 정도로 위상이 높아진 것이다.
아카조메 타다오미 가와라 신사 궁사
“그 시대는 나라에서 구리를 중히 여기던 시절이었습니다. 이 지역에서 구리를 채취하여 조정에 협력하도록 하는 것이 도움이 되었을 것입니다. 이런 연유로 ‘(구릿빛처럼) 붉게 물들이다’라는 뜻의 이름을 붙이도록 한 게 아닐까요?”
이렇게 막강한 세력을 가졌던 가와라와 우사. 이 일대에선 신라에서 전해진 문화의 흔적을 흔하게 찾아볼 수 있다. 신라식 고분인 횡혈식 석실을 비롯해서 신라형 귀고리와 기와는 한반도에서 출토되는 유물과 똑 같은 모양을 하고 있다. 바다를 건너가 이것들을 만든 신라계 도래인들은 선진기술을 바탕으로 일본 내에 신라와도 같은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했다.
오쿠라 쇼우고 우사 향토사학자
“우사는 위치상으로 일본의 중심인 수도는 물론 규슈 지방의 정보도 입수할 수 있었습니다. 이에 더해 한반도 도래인을 통하여 한반도의 정보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우사 특유의 채널을 이용해 우사 지방은 독자성을 키웠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8세기 초반까지 우사의 신라인들은 지방의 큰 호족에 불과했다. 그런 이들이 중앙 무대에 알려지는 역사적 사건이 있다. 745년에 세워진 도다이지(東大寺). 당시 일본에 천황이었던 쇼무가 세운 절이다. 도다이지의 비로자나 대불은 높이 16m 무게는 무려 425톤에 이르는 동양최대 규모의 불상으로 제작에 십여 년이 걸렸다. 이 엄청난 불상을 만들겠다는 쇼무 천황의 계획이 거센 반대의 부딪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타무라 엔죠우 규슈대학 명예교수
“쇼무천황이 그런 대형 불상을 제작하겠다는 것은 당시로서는 비현실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우사하치만이 신탁을 내렸습니다. 어떠한 어려움이 있더라도 우사하치만이 반드시 그런 대형 불상을 만드는데 도움을 주겠다는 것이었고 쇼무천황은 그 신탁에 용기를 얻어 불상을 제작하게 되었습니다.”
우사 집안의 신탁을 뒷받침해 도다이지 대불을 만든 것은 바로 신라인들이었다. 천황이 올 때만 열린다는 이 다리는 우사 신궁이 도다이지 조성 이후로 얼마나 막강한 지휘를 얻게 되었는지를 보여준다. 최대 20만평이나 됐다는 우사하치만 신궁은 이 지역 신라인들의 권력이기도 했다. 미나모토 가문의 장남이 하치만 궁에서 성인식을 한 것도 그 신라 세력의 힘과 지지를 얻고자 했던 것이다.
■일본 역사상 최고의 전쟁 영웅은 왜 이름이 신라사부로인가?
▲신라사부로의 무덤
미나모토 요리요시. 일본 가마쿠라 막부의 뿌리가 됐다는 전설적인 무사다. 그에게는 세 아들이 있었다. 그는 아들 삼형제에게 각기 다른 신사에서 성인식을 치루게 한 뒤 그 신사의 이름을 따 이름을 바뀌게 된다. 먼저 하치만 신사에서 성인식을 치른 장남 요시이에는 하치만 타로로 가모 신사에서 성인식을 치른 둘째 요시스나는 가모 지로가 된다. 그리고 마지막 셋째 아들 미나모토 요시미츠 일본 역사상 최고의 영웅으로 대접받는 다케다 신겐의 조상이다. 그는 자신이 성인식을 치른 신사의 이름을 따 신라 사부로가 된다. 신라사부로. 이 이름에서부터 신라라는 말이 들어있다. 일본 역사에 전설적인 영웅이 어떻게 신라 사부로가 됐을까.
일본을 대표하는 전통무술 대동류합기유술. 이것은 헤이안 시대 후기 최고의 무사였던 신라 사부로로부터 시작됐다. 도쿄에 있는 대동류합기유술 본부. 이곳 수련장에 정면에 걸려 있는 다이아몬드 형 문장은 흔히 신라 사부로의 후손 다케다 신겐을 상징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사실은 신라 사부로가 성인식을 할 때 신관이 옷 위에 그려준 것이다. 다케다 가문에 대대로 전해져 왔다는 이 무술 비전 역시 최초의 창시자를 신라사부로로 추정한다.
가츠유키 곤도 대동류합기유술 본부장
“신라사부로 즉 미나모토 요시미츠를 조상으로 하기 때문에 지금으로부터 그 유래가 850년 전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그러므로 일본의 무도, 무술 중에서 1, 2위를 다툴 정도로 매우 긴 전통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케다 가문의 시조엔 신라사부로. 그는 아버지 미나모토 요리요시와 함께 수많은 전장을 누빈 뛰어난 무장이었다. 붉은 갑옷을 입고 항상 선두에 섰던 그는 패배를 모르는 전쟁의 귀재였다고 전한다. 교토의 동북쪽 히에이잔엔 그 신라사부로가 13살이 되던 해 성인식을 올린 신사가 있다. 신라선신당. 한눈에 보기에도 오랜 역사를 품고 있는 이 신사는 건물 자체가 일본의 국보다. 그리고 이 신라선신당에서도 가장 깊숙한 곳 일반인들의 출입이 허락되지 않는 은밀한 공간에 또 하나의 국보가 있다. 바로 신라명신 좌상이다. 수염이 긴 노인의 모습을 하고 있는 신라명신. 머리엔 산 모양의 관을 쓰고 얼굴은 다소 섬뜩하고 무서운 느낌이다. 신라사부로는 바로 이 신라명신 앞에서 성인식을 올리고 이름을 신라라고 고친 것이다.
우에다 마사하키 교토대 명예교수
“일본에는 많은 신이 존재합니다. 그 중 한국의 신. 예를 들면 백제의 신, 신라의 신도 숭배하고 있는데 신의 이름에 나라 이름이 붙어 있는 경우는 신라명신 뿐입니다.”
그런데 신라명신이 이곳에 모셔진 까닭은 무엇일까. 신라선신당의 본찰 미이데라라는 원래 온조지라는 작은 사찰이었다. 그런데 9세기 후반 신라명신을 불법의 수호신으로 모신 신라선신당이 세워지면서 일본불교의 요람으로 거듭난다. 미이데라의 신라명신을 모신 사람은 지증대사 엔친. 미이데라의 초대 주지다. 그가 불법을 구하기 위해 당나라에 유학했을 때 가고 오는 배편 당나라 현지 생활 등 많은 부분에서 신라인들의 도움을 받았다.
우에츠키 마나부 야마나시 현립박물관 학예원
“(엔친이) 중국으로 건너가 수행을 하고 돌아오는 뱃길에서 신라의 신이 꿈속에 나타나 자신을 모신 절을 지으면 번성할 것이라고 계시하였습니다. 그래서 엔친은 미이데라를 세우고 여기에 신라의 신인 신라명신을 모셨습니다.”
그렇다면 신라명신은 어떤 신일까. 엔친은 단지 꿈속에서 계시를 받았다는 이유만으로 미이데라의 신라명신을 모실 수 있었을까. 이 의문에 한 가지 단서가 되는 것은 미이데라가 있는 오오츠 시에 지리적 배경이다. 교토에 인접해 있는 오오츠 시는 5세기 무렵 신라계 도래인들의 세력 아래 있었다. 그래서 이 일대는 신라 신을 모신 신사가 상당수 있는데 아라 신사도 그 중 하나다. 신사 앞에 세워져 있는 비석엔 이곳에 모신 신이 스사노오 미코토라고 적혀 있다. 스사노오 미코토(素盞嗚尊). 그는 일본 천황가의 시조신 가운데 하나로 바다를 건너와 일본의 왕국을 건설했다고 전한다. 스사노오가 어디서 왔는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주장이 있지만 고도의 제련기술을 가지고 신라에서 건너간 집단의 조상신이라는 설이 지배적이다.
데와 히로아키 <신라명신> 저자.
“자연신앙과 함께 자신들의 조상을 모신 조상묘가 신사의 시초가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물론 그렇게 신을 최초로 모신 사람들은 조몬인이었지만 그 후 벼농사, 철기, 구리 문화를 가진 신라인들이 들어와 조상신을 모시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그런데 미이데라의 신라선신당에서 성인식을 치른 신라사부로. 그의 행적을 따라 가다 보면 뜻밖에도 신라인들의 조상신이라는 스사노오 미코토와 만나게 된다. 일본 열도의 끝자락 아오모리 현에 위치해 있는 이 작은 마을엔 신라라는 이름의 오래된 신사가 하나 있다. 입구에서부터 눈에 띠는 신라사부로의 문장. 신라사부로를 주신으로 모신 이곳 신사엔 또 한 명의 신이 모셔져 있다. 바로 신라의 조상신 스사노오 미코토다. 미이데라의 신라명신 앞에서 성인식을 했던 신라사부로가 스사노오 미코토와 함께 모셔져 있다는 사실. 그렇다면 신라사부로가 수호신으로 모신 신라명신은 신라인들의 조상신이었다는 뜻이다.
야마가와 히로시 신라신사 궁사
“미이데라에는 수호신으로 스사노오 미코토를 모신 신사가 있었습니다. 미나모토 요시미츠(신라사부로)는 어린 시절부터 그 곳에서 놀기도 하고 기도를 드리기도 했다고 합니다.”
말년에 고향으로 돌아온 신라사부로는 죽은 뒤 신라선신당 인근에 묻힌다. 전장에서 평생을 보내는 동안 그에게 승리를 가져다 준 신라명신. 어쩌면 신라명신은 신라사부로가 죽은 뒤에도 그의 영혼을 수호하고 있는 게 아닐까.
■신라명신과 장보고
신라사부로가 수호신으로 삼았던 신라명신은 후에 일본 황실과 교토를 지키는 수호신이 된다. 그리고 신라명신에 본산은 앞서 보신 바 데로 미이데라라는 절의 신라선신당이다. 그리고 이 사찰이 자리잡고 있는 히에이잔은 흔히 일본 불교의 성지라 불린다. 그런데 이 산에는 또 다른 신라명신이 모셔져 있다. 어찌된 일일까. 지금부터 그 이유를 자세히 알아보려 한다.
지금도 일본 각지에서 모여든 불교 수행자들의 발길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는 곳. 히에이 잔은 어쩌면 산 전체가 그대로 불교의 성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곳이다. 일본 불교의 주요 종파 대부분이 이곳 히에이 잔에서 시작됐으며 명망 높은 승려들도 대부분 이곳에서 수행하며 불법을 깨우쳤다. 일본의 불교가 처음으로 들어온 것은 6세기 무렵 하지만 오랫동안 황실과 일부 귀족들만의 종교였던 불교는 헤이안 시대 이곳 히에이 잔에서 대중적으로 확산되는 계기를 맞는다.
고바야시 소조
“히에이 잔의 불교는 다양한 요소를 가지고 있으며 민중구제에 노력하였습니다. 또한 (일본 불교의) 새로운 종파를 열었다는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히에이 잔을 일본 불교의 어머니의 산 즉 모산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히에이 잔 북쪽에 있는 요카와 중당의 적산궁. 그런데 이 신사를 안내하는 설명문엔 뜻밖의 내용이 있다. 이 신사가 다름 아닌 신라명신을 모시고 있다는 것이다. 일본 불교의 총본산 히에이 잔에 왜 신라명신이 모셔져 있는 것일까. 그 비밀을 밝히기 위해선 먼저 적산궁의 본절인 엔랴쿠지(延?寺)를 살펴야 한다. 히에이 잔에 자리잡고 있는 엔랴쿠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돼 있는 일본 최고의 명찰이다. 엔랴쿠지의 역사는 헤이얀 시대 초기 한 승려가 히에이 잔 깊은 곳에 작은 암자를 지면서 시작됐다. 그가 바로 일본 천태종의 개창자인 사이초(最澄)다. 그런데 당시 천황이었던 간무는 교토의 동북쪽을 지키기 위해 히에이 잔에 불교 정토를 만들고자 했다.
803년 사이초가 당나라 유학길에 오를 수 있었던 것도 간무천황의 전폭적인 지원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교토를 떠난 사이초가 도착한 곳은 당나라가 아닌 가와라였다. 가와라 신사엔 당시에 기록이 남아 있다. 사이초가 당으로 불법 수행을 떠나기 전 가와라 신사에 찾아와 기도를 드리고 1년 3개월 동안 머물렀다는 내용이다.
아카조메 타다오미 가와라신사 궁사
“항해가 무척 어렵던 시절이었으므로 가와라 신사에서 안전 항해를 기원하고 무사히 임무를 수행할 수 있기를 빌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당시 가와라와 우사 지역에 모셔진 신라 신은 항해의 신이기도 했다. 뱃길을 떠나는 사람들은 대부분 이곳을 찾아와 안전을 빌었다. 하지만 사이초가 이곳을 찾은 데는 더 중요한 이유가 있었다. 교통의 요지이자 신라계 도래인의 터전으로 해외 정보에 빨랐던 우사지역. 이곳에서 다양한 정보를 얻고자 했던 것이다.
타무라 엔죠우 규슈대학 명예교수
“견당사가 존재하기는 했지만 5~10년 간격으로 있었으므로 당시의 해외 정세를 알 길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사이초는 우사하치만에 가면 신라나 당나라의 정세에 대한 정보를 반드시 얻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던 겁니다.”
사이초가 우사를 찾은 또 하나의 이유는 신라배를 태기 위해서였다.[1] 당시 일본의 선박 수준은 신라보다 한참 뒤처져 있었고 먼 길을 항해할 때는 대부분 신라 배와 선원의 도움을 받았던 것이다. 이렇게 뛰어난 항해 능력을 바탕으로 신라인들은 한반도와 중국 일본을 잇는 해양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있었다. 이는 당시의 일본이 해외 문물을 접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통로였다.
일본 나라 시의 도다이지. 우사와 가와라 지역 신라인들이 만든 도다이지 대불은 지금 봐도 대단한 규모를 자랑한다. 천년 전 이 불상이 만들어질 당시엔 실로 엄청난 사건이었을 것이다. 비로자나 대불의 눈을 그려 불상을 완성하는 개안식 행사엔 수많은 외국사절이 찾아왔는데 여기엔 신라인들도 다수 포함돼 있었다. 그런데 이들이 가져온 물건들은 너무 인기가 많아 큰 혼란이 벌어졌고 결국 5급 이상의 귀족들만 원하는 물건의 목록을 작성해 관청에 신청하게 했다. 매신라물해(買新羅物解) 불리는 이 문서는 당시 신라의 무역 규모를 가늠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다.
도다이지의 북서쪽 일본 황실의 보물창고라는 쇼소인은 8천 점이 넘는 귀중한 유물이 보관돼 있는데 여기엔 신라는 물론 멀리 중국과 동남아, 서역에서 온 것들도 상당하다. 그런데 이 물건들은 바로 매신라물해에도 적혀 있는 것들이다. 당시 일본의 교역은 신라를 통해 이루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 같은 신라의 무역 네트워크는 일본의 해외 문물과 정보를 전달하는 핵심 통로였다.
이성시 교수 와세다대학교
“일본의 견당사도 신라 상인의 도움을 받아야만 하는 상황이 9세기에 일어납니다. 이는 상당히 광범위하게 신라상인과 일본상인 사이에 교섭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신라는 중국 대륙에 다양한 네트워크를 보유하고 있었고 일본은 대외무역에서 신라상인을 매개로 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부득이하게 견당사는 신라상인의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신라 네트워크의 도움을 받아 당나라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사이초는 히에이 잔에서 일본 천태종을 창시한다. 하지만 사이초가 세운 것은 아직 일본 천태종이 기본에 불과했다. 1년 남짓했던 유학기간 동안 충분한 불법을 쌓기엔 한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결국 838년 사이초의 제자가 또 다시 당유학 길에 오른다. 좀더 많은 불법을 구해 천태종의 내실을 다지는 임무를 띠고 당으로 향한 사이초의 제자 그가 일본 불교 발전에 지대한 공로를 세운 엔닌이다.
당나라로 떠나 9년의 긴 유학을 마칠 때까지 엔닌은 스승 사이초와 마찬가지로 신라네트워크의 끊임없는 지원을 받았다.[2] 무엇보다 힘이 된 것은 바로 신라의 해상왕 장보고였다.[3] 당시 동아시아의 해상을 장악하고 있던 무역왕 장보고. 그를 기리는 거대한 동상이 바다를 내려다 보고 있는 이곳은 중국 산동반도의 적산이다. 장보고가 만든 해양 네트워크의 주요 거점으로 대규모 신라방이 있던 이곳엔 장보고가 세운 적산법화원이 있다. 이곳에서 엔닌은 무려 삼 년을 머물며 수많은 도움을 받았다.
고카모 카쿠순 엔랴큐지 스님
“그때의 도움이 없었다면 자각대사(엔닌)는 중국에서 많은 법문을 가져올 수 없었을 것이고 그리고 그 법문이 없었다면 지금 천태종의 기초가 되는 중요한 뼈대가 빠졌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런 점에서 ‘대은인’이었다고 말할 수 있죠.”
엔닌은 당나라에서 돌아온 뒤 불법의 수호신으로 신라명신을 모시게 된다. 이 신은 장보고가 세운 적산법화원에서 받들었던 신라의 신이었다. 제당신라인들과 장보고가 베푼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엔닌은 신라명신을 모셨던 것이다. 엔닌이 히에이 잔에 모신 신라명신은 그 제자들에 의해 교토에 모셔진다. 이곳엔 특히 상인들이 많이 찾아온다. 적산선원엔 보배보 자를 세긴 배가 그려져 있는데 일본인들은 장보고의 寶자를 이 글자로 쓴다. 신라명신이 제신으로 여겨진 것은 장보고와의 관계 때문은 아닐까.
“공무원이나 상인들은 매달 5일마다 수금을 했는데요. 수금 전날 이 곳 적산선원에서 참배를 하면 수금이 잘 된다고 해서 옛날부터 상인들이 자주 참배를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적산선원의 지붕 위엔 이 신사의 본래 역할을 알 수 있는 조각이 있다. 철창 안에 갇혀 있는 원숭이 상이다. 일본에선 예로부터 원숭이 부적이 액운을 막아준다는 얘기가 전해오는데 특히 적산선원의 원숭이 상은 천황에게 다가오는 액운을 대신 맞아 주는 희생양이라고 한다. 교토에 있는 천황 궁의 동북쪽 벽. 다른 곳과는 달리 움푹 들어가 있는 이 벽 역시 천황을 위한 액막이 용이다. 이 벽 위에도 적산선원과 마찬가지로 원숭이 상이 놓여 있다. 도망가지 못하도록 철창에 가둬 놓은 것도 같다. 천황 궁과 신라명신이 모셔져 있는 적산선원 그리고 히에이 잔은 동북쪽 방향으로 일직선 상에 놓여 있다. 히에이 잔의 미이데라와 적산선원이 모신 신라명신. 이 신라의 신이 일본황실을 지키는 수호신이 된 것이다.
■일본에서 지금도 살아있는 신라명신
▲일본 미이데라에 있는 신라선신당
일본 천태종의 양대산맥이라 불리는 엔닌과 엔친. 이 두 승려가 당나라로 불법을 구하려 떠났다가 돌아와서 신라명신을 모시게 되기 까지 장보고와 신라인 세력 그리고 그들이 구축해 놓았던 해양 네트워크는 절대적인 도움이 됐다. 때문에 장보고와 신라명신은 깊은 관계가 있다고 할 수 있다. 고대 일본으로 건너간 한반도 도래인들이 모셨고 8세기 헤이안 시대가 열리면서 일본 황실과 교토에 수호신이 된 신라명신. 헌데 그 신라명신은 수도인 교토에만 머물지 않고 일본 전역으로 퍼져 나가게 된다. 지금부터 그 현장을 따라가 보겠다.
헤이안 시대 후기 일본에선 무력을 기반으로 한 무사계급이 점점 세력을 키우기 시작한다. 원래 조정과 귀족을 보좌했던 사무라이 집단은 마침내 정권을 장악하게 된다. 일본 최초의 무사정권인 가마쿠라막부. 그 초대 수장이었던 미나모토 요리토모는 신라사부로의 형인 하치만 타로의 후손이었다. 도쿄인근 가마쿠라 현에 자리잡은 요리토모는 이곳에 하치만 궁을 세운다. 대대로 미나모토 가문의 수호신이었던 하치만 신이 가마쿠라막부의 권력과 함께 더욱 힘을 얻게 된 것이다.
데와 히로아키 <신라명신> 저자.
“하치만궁은 미나모토의 수호신사였으므로 막부 개조 후 계속해서 각지에 퍼지게 됩니다. 미나모토가 천하를 지배하게 되자 일반인들도 하치만을 숭배하게 되었습니다.”
하치만과 신과 함께 미나모토 가문의 수호신이었던 신라명신 역시 전국으로 확산되면서 확고한 위상을 갖게 된다. 미이데라의 신라선신당엔 여러 점의 신라명신 그림이 전해지는데 제작연대도 다양하다. 신라명신이 오랜 세월 널리 받들어졌다는 증거다. 이 신라명신은 왼손엔 주석으로 만든 지팡이를 오른 손엔 경서를 들고 있다. 승려들에겐 불법의 수호자였던 신라명신은 무사들에겐 승리의 신으로 여겨졌다.
후케이 슈겐 미이데라 부주지
“특히 12세기에 들어 미나모토 가문의 사찰이라는 위상을 부여 받게 되면서 신라명신에 대한 신앙은 미이데라 뿐만 아니라 조정 등 귀족들 사이에도 확산됩니다. 이렇게 신라명신에 대한 신앙이 일본 사회에서 일정한 위상을 얻으면서 다양한 사람들로부터 숭배되었습니다.”
신라명신은 일본황실과 천황에게도 막강한 영향력을 가졌다. 11세기 일본의 고산죠 천황은 매년 신라명신에게 제사를 지내고 많은 곡물까지 바쳤다고 한다. 이 같은 제사는 수백 년이나 계속 됐다. 신앙은 시대를 반영한다. 한반도에서 건너간 신라인들의 조상신이었던 신라명신이 당대 권력자들이 수호신으로 여기는 강력한 신으로 변모해 가는 과정엔 수백 년에 이르는 일본의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5세기 무렵 교토와 우사지역을 중심으로 모셔졌던 신라명신은 헤이안 시대와 막부시대를 거치면서 일본각지로 퍼져 나간다. 일본 열도의 끝 이 한적한 바닷가 마을(아오모리현 하치노헤)에서도 그 세력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이곳은 신라사부로의 후손 하치노헤 남부 가문의 영지였다. 하치노헤 가문은 이곳에 자신들의 선조인 신라사부로를 기리는 신라신사를 세웠다. 신라사부로의 문장이 곳곳에 새겨져 있는 이 신사에는 신라명신도 함께 모셔져 있다. 헤이안 시대 일본 전장의 전역을 누비던 신라사부로. 그와 함께 신라명신도 퍼져 나갔던 것이다. 그런데 신라사부로와 함께 간 것은 신 만이 아니었다.
데와 히로아키
“오슈, 즉 동북지방에서 호족들이 일으킨 전구년의 역(1051)과 후삼년의 역(1083)을 평정하기 위해 신라사부로 요시미츠도 출정하게 되는데 이 때 신라의 기술자들을 함께 데리고 갔습니다. 즉 사철 기술을 가진 신라인들을 데리고 갔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신라사부로와 함께 출정했던 신라인들. 그들은 일본의 신라명신을 모셔온 제철기술자 집단이었다. 신과 그 신을 믿는 집단이 불가분의 관계에 있던 시대에 신라명신의 전파는 바로 신라명신을 모신 세력들의 기술과 문화가 확산되는 것을 의미했던 것이다. 이곳 신사에서는 매년 격구 경기가 열리는데 이것은 신라에서 즐겨 했던 놀이이다. 일본에서 신라명신을 모셨던 사람들도 이렇게 격구를 즐겼던 것일까.
야마가와 히로시 신라신사 궁사
“벚꽃 마장에서 가가미류의 기마타구, 마술 경기를 개최하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하치노헤 번 신하들의 무예를 장려하기 위하여 시작된 것이 바로 기마타구입니다.”
문화와 함께 퍼진 신라명신. 그 흔적은 신라사부로와 아무런 관계가 없는 지역까지도 광범위하게 남아 있다.
무라야마 마사오 마을주민
“신라신사입니다. 신라신사요. 그러니까 한반도의 신라라는 이름의 신사입니다.”
언제 지어졌는지도 확실치 않는 낡은 신사. 주민들은 오래 전부터 이곳에서 신라 신을 참배하고 마을에 평화를 기원해왔다.
“오곡풍년과 가정의 안녕을 빕니다. 저도 1월 1일 밤 12시에 이곳에 와 참배를 합니다.”
여러 차례 보수를 하긴 했지만 신사의 건물은 지붕의 형태 등에서 한반도의 것을 지키기 위해 애쓴다고 한다. 일본의 전통양식과는 조금 다르게 우리의 기와지붕 같은 형태가 남아 있는 것도 그런 이유다. 바다를 건넌 역사. 한반도의 신과 문화는 지금도 일본에서 이렇게 살아 있는 것이다.
신라명신은 시대에 따라 그 성격이 바뀐다. 한반도 도래인의 조상신으로 처음 일본에 자리를 잡을 때는 농경과 기술의 신 또 장보고에게 도움을 받은 승려들에 의해서 모셔질 때는 한계와 재물의 신이 되기도 했다. 또 막부시대가 열리면서는 무사들에게 승리를 가져다 주는 전쟁의 신이 되기도 했다. 이렇듯 신라명신은 시대에 따라 그 성격을 달리 해가며 천 년이 넘는 세월 동안 일본의 황실과 교토의 수호신으로 일본 역사와 함께 했다. 고대 일본으로 건너가 교토의 수호신이 된 신라명신. 우리에겐 생소하지만 일본 전역에서 오늘날까지도 뿌리깊게 살아 숨쉬고 있다.
※ 글의 저작권은 KBS <역사스페셜>에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상업적인 용도로는 사용을 금합니다. 그리고 이곳에 쓰인 이미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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