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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 석축묘의 기원문제에 대한 소고 | |||||||
| 발해의 피지배계층인 속말갈은 지배계층에도 상당히 침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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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 발제문 발해 석축묘의 기원문제에 대한 소고 지금까지의 연구사를 살펴보면, 발해와 관련된 논문에는 발해 석축묘의 기원이 고구려에서 계승한 것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즉, 고구려의 지배계층 사람들이 고구려가 멸망한 뒤 발해 건국에 기여하거나 참여하여 그대로 발해의 지배계층 및 중심세력으로 형성되므로 묘제도 익숙한 고구려의 전통을 따랐을 것이라는 추정을 전제로 발해석축묘의 기원을 상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의견은 일반적으로 한국 학자들에 의해 제기되고 있으며, 이에 따라 많은 관련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그런데 발해 석축묘의 기원문제에 대한 주변국들의 의견은 한국 학계와는 조금 시선이 다르다. (이것은 현대의 민족과 영토 개념 및 국가 정책과도 다소 연관된 부분이므로 경우에 따라 민감하게 여겨지기도 한다.) 그 중 러시아 학계 의견의 일부로서, 발해 석축묘의 기원문제에 대하여 짧은 내용을 덧붙이고자 한다. 일반적으로 러시아의 고고학계 및 역사학계에서는 발해 문화의 상당 부분이 고구려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인정한다. 특히 토기와 같은 대표적인 유물이나 성곽 건축물 같은 유적에서 고구려 양식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이것은 고구려의 공예가들이나 기술자들이 발해에 흡수되어 나타난 결과라 볼 수 있다. 그러나 단지 이것만으로 고구려 상위계층이 발해 전체를 강력하게 지배하였다고 보기에는 근거가 부족하다. 발해 인구를 구성하는 민족의 대부분은 말갈인으로 알려져 있다. 「수서」의 <말갈전>에는 말갈이 속말부, 백산부 등 7개의 부로 나뉘어져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이와 같은 내용은 「북사」 나 「구당서」, 「신당서」 등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말갈 7부 중에서 가장 강력한 힘을 가진 부는 바로 속말말갈과 흑수말갈이다. 러시아학계는 이 중 속말말갈인들을 발해를 세우고 이끌어간 중심 세력으로 보고 있다. 흑수말갈은 발해의 일부가 되지 않고 독자적으로 세력을 형성하였으며 8세기에 발해와 많은 교전을 벌였다.
현재의 발해연구에 있어 한 가지 매우 아쉬운 점은 이렇게 발해와 깊은 연관을 맺었던 속말말갈이나 흑수말갈 같은 말갈인의 매장문화에 대한 연구가 많이 부족하다는 사실이다. 근래에 이르러 지표탐사나 예비조사에 의하여 말갈의 매장지로 추정되는 유적들이 속속 발견됨에도 불구하고, 이를 발굴하거나 연구하는 단체와 인력은 상당히 부족한 실정이다. 러시아에서 속말말갈의 매장풍습은 대표적으로 알려진 속말말갈 매장유적인 트로이츠코예 고분군을 통해 연구되고 있다. 트로이츠코예 고분군은 1970년에 최초로 발굴되었으며, 이후 2004 ~ 2007년 사이에 다시 발굴조사를 실시하였다. 러시아 학자들은 트로이츠코예 고분군의 연대를 8세기 후반 – 10세기로 비정한다. 따라서 트로이츠코예 고분군은 발해가 건국된 이후 형성된 것으로 여겨진다. 당시 만주지역을 떠난 상당수의 말갈인들이 아무르강 지역으로 이주해 와서 이 부근에는 말갈유적이 많이 남아있다. 아무르강 서쪽에 자리 잡은 말갈이 바로 속말말갈족이고 아무르강 동쪽에 자리 잡은 말갈이 흑수말갈족이다. 러시아 학계는 이 지역의 트로이츠코예 고분군이 속말말갈의 고분군이라고 판단하고 있지만, 진짜 전형적인 속말말갈 묘제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만주지역의 말갈고분군을 집중적으로 연구할 필요성이 있다고 여기고 있다. 말갈인들이 아무르강 지역으로 이동한 다음에 거기에 살고 있던 토착 민족과 융화되어 묘제도 일부 변형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무르강 지역에서 발견되는 속말말갈인의 무덤은 거의 대부분 토광묘이다. 러시아에 있는 발해유적 중 대표적으로 유명한 것은 연해주 지역의 말갈유적이다. 이 지역의 발굴조사는 한국의 발굴팀도 다년간 참가하였는데, 이곳에서 석축묘가 발견되었다. 그런데 그 고분군은 발해시대 초기의 것이며, 연해주는 발해의 중심부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외곽지역에 해당하므로 이 또한 말갈묘제를 대표하는 고분군이라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고 판단된다. 따라서 전통적이고 전형적인 말갈묘제를 연구하기 위해서는 중국 동북지방에 분포하고 있는 말갈고분군을 일단 찾아야 한다. 앞서 언급하였듯이 중국의 고문헌 「수서」 <말갈전>에는 말갈이 속말부, 백산부 등 7개의 부로 나뉘어져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말갈인에 대한 기록의 다수가 중국 문헌에 등장하므로 학자들은 대부분의 정보를 중국 문헌을 분석함으로써 얻고 있으며, 문헌들에 의하면 속말말갈인은 제 2 송화강 일대에서 기원한다. 이에 근거하여 전통적인 속말말갈 고분군은 이 지역에 있을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제 2 송화강 유역에서 확인된 대표적인 고분군으로 사리파(査里巴) , 대해맹(大海猛), 노하심(老河深) 고분군을 예를 들 수 있는데, 이들 고분에서 드물긴 하지만 석축묘가 발견된다. 먼저 길림성 영길현 사리파(査里巴) 고분군을 살펴보면, 1986 ~ 1988년 사이에 47기의 고분을 발굴했는데 그 중 4기가 석축묘이고 나머지는 모두 토분이다. 분석 결과에 따라 연대는 수말당초부터 당중기로 비정한다. 사리파고분군의 2호 석축묘에서 출토된 말갈식 부장품의 연대가 6 - 7세기로 판명됨에 따라, 이 묘제를 발해보다 앞선 시기에 조성된 속말말갈의 묘제로 추정하는 것이 가능하다. 길림성 영길현 양둔 대해맹유지(楊屯 大海猛遺址) 제3기 문화유존(第三期文化遺存)역시 고분군으로 세 차례에 걸쳐 발굴조사가 실시되었으며, 토광묘(土壙墓) 90기와 석광묘(石壙墓) 2기가 확인되었다. 이 석축묘의 양식은 인근 사리파 고분군의 석축묘와 유사하여 비슷한 시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노하심 고분군의 말갈무덤은 길림성 유수 노하심유지(老河深遺址) 지층 퇴적의 가장 윗부분에 위치하고 있으며, 1979 ~ 1980년에 걸쳐 37기의 고분을 발굴하였다. 출토된 유물의 방사성탄소연대 측정 결과로 연대는 6-7세기로 추정된다. 이곳의 묘제는 토갱수혈석관묘(土坑竪穴石棺墓) · 토갱수혈목관묘(土坑竪穴木棺墓) · 토갱묘(土坑墓)등 3가지 유형으로 나뉘는데, 이 중 가장 많은 유형은 토갱묘이다. 발굴과정에서 목관묘 1기(M23)가 석관묘(M24) 위에 중첩되어 있는 것이 확인되어 석관묘가 아마도 목관묘와 토갱묘보다 앞선다고 추정할 수 있는데, 이곳의 석축묘 역시 속말말갈의 것으로 인정되고 있다. 따라서 제 2 송화강 일대의 고분군에서 발해 건국 전의 속말말갈식 석축묘의 형태를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이와 더불어 대표적인 발해초기 고분군을 살펴보면, 발해 초기 왕실이나 귀족의 무덤이라 알려진 육정산(六頂山) 고분군을 예로 들 수 있다. 육정산고분군[六頂山古墓群]은 돈화시(敦化市)에서 남쪽으로 5㎞ 떨어진 육정산 위에 위치하고 있으며, 첫 번째 발해수도인 성산자산성(城山子山城) 근처에 있다. 그래서 발해초기와 관련이 많은 것으로 여겨진다. 1949년 8월에 육정산 고분군의 무덤 일부를 발굴하다가 정혜공주묘(貞惠公主墓)를 발견하였다. 출토된 묘비의 해석에 의하면 정혜공부는 777년에 사망하여 780년에 매장되었으므로, 육정산 고분군의 최소 연대는 8세기말로 비정할 수 있다. 육정산 고분군은 두 구역으로 나뉘는데, 제 1구역에는 30여기의 묘가 있고, 제 2구역에는 50여기의 묘가 있다. 묘제는 석축묘가 대부분이다. 발굴 조사가 완료된 34기의 고분중에서 토광묘(土壙墓)는 4기로 극히 소수이다. 그런데 이 유적의 일부 석축묘 부장품에서 말갈적인 요소가 확인된다. 제 1구역의 102호묘에서 출토된 금속제 교구(鉸具)와 띠돈은 영길 사리파 고분군 제 9호묘에서 나온 것과 유사하다. 이러한 유형의 금속제 교구(鉸具)와 띠돈은 말갈유적에서 빈번하게 출토되는 유물이며, 트로이츠코예 고분군에서도 출토된 바 있다. 제 2구역에서는 202호묘와 205호묘에서 대표적인 형식의 말갈토기가 출토되었다.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205호묘에서는 고구려 양식의 토기도 출토되었는데, 함께 출토된 다른 부장품들이 말갈 양식을 많이 따르고 있는 것을 볼 때 피장자가 고구려 계통이라기 보다는 말갈인에 가까운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206호묘에서 출토된 옥수석 재질의 구슬들과 207호묘에서 출토된 방울도 말갈 무덤에서 흔히 출토되는 유물로서, 이들 역시 트로이츠코예 고분군에서 비슷한 구슬과 방울이 발견되었다. 이처럼 육정산 고분군의 석축묘에서 말갈식 토기와 장신구가 출토되었으며, 이와 유사한 양식의 부장품이 사리파 고분군이나 아무르 지역의 트로이츠코예 고분군에서도 확인된다. 따라서 이러한 고고학적 증거에 의하여 발해의 지배계층 다수가 단지 고구려인만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라는 가능성을 제기할 수 있다. 실제로 발해가 건국된 후 영토 내에 석축묘가 광범위하게 축조되기 시작하는데, 묘제라는 것이 상당한 보수성과 전통이 함축된 요소라는 것을 고려하였을 때 이를 바탕으로 발해를 구성하고 지배하는 민족에 대한 정보를 유추할 수 있을 것이다. 러시아 학계에서는 속말말갈인이 발해의 피지배계층뿐만 아니라 지배계층에도 상당히 침투해 있었다고 보는 시각이 주류를 이루며, 이들이 발해가 건국된 후 많은 부분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하였을 것이라고 여긴다. 물론 아직까지 ‘말갈인’의 범주에 대한 정의 자체가 모호하여 국제적으로 다양한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으며, 발해 관련 유적과 유물에 대한 연구도 이제 초보적 단계에 불과하므로 발해라는 국가의 정체성에 관하여 확실하게 단정 짓기는 어렵다. 발해 석축묘에 대한 고고학적 자료의 축적 역시 빈약한 수준이기 때문에 이것의 기원 문제에 대해서는 앞으로도 많은 연구가 필요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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