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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국력의 밑바탕이 된 '경당'

작성자변강쇠|작성시간17.03.07|조회수258 목록 댓글 0

 

 

고구려 국력의 밑바탕이 된 '경당

 

"무크리인들은 날마다 훈련을 통해 익힌 경험때문에 무장전투에서 대단히 용감하거니와 위험이 코앞에 나타나도 흔들림이 없었다."  

(동로마 역사학자 테오필락토스 시모카테스 , 7세기)

 

7세기 동로마의 역사학자 시모카테스가 말한 무크리, 그가 이 무크리인들에 대해 중국의 동쪽 변방에 살던 민족으로 기록한 것으로 봐서 우리의 조상 '고구려인'들이란 사실을 어느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그가 이 무크리인들에 대한 짧은 소개를 하게된 이유가 6,7세기 동쪽의 대흥안령산맥 이서(以西)지역으로부터 동로마제국 인접지역인 중동에 이르기까지 광할한 초원지대의 패자로 등극한 투르크가 본래 자신들을 지배했던 유연의 잔당을 토벌하는 과정에서 북중국인 북주, 북제로 도망쳤다가 결국 고구려에 의탁한 유연의 한무리들을 추격하는 과정에서 고구려와 대규모 무력충돌이 발생했던 사건때문이었다.

 

김부식의 삼국사()에는 고흘이 고구려와 말갈의 기병을 이끌고 만주의 신성 등에 침공해 들어온 투르크군을 패퇴시켰다는 짧막한 기록만 전하고 있으나 동로마의 사료에까지 이당시 고구려와 돌궐간의 전쟁이 소개된 것을 보면 양국간에 결코 작은 규모의 전투는 아니었던듯 하다. 이외에도 수서 돌궐전에는 이계찰이 이끄는 돌궐군이 고구려, 말갈군에 크게 격파?다고 소개하고 있다.

 

사실 고구려와 투르크는 당시 내몽골 동쪽지역의 최대 무역 중심지였던 영주지방과 이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거란족의 지배권을 두고 6세기 후반 내내 충돌을 거듭했었다. 삼국사기에는 ?막하게 고흘의 승전기록만을 전하고 있으나 사실 그당시 투르크와의 무장충돌은 결코 기록 한두줄만으로 처리할만큼 사소한 사건이 아니었다. 앞서 말한대로 투르크는 가공할 기병전력을 앞세워 아시아의 초원지대를 장악했을 뿐만 아니라 그 힘으로 북위에서 갈라진 북주와 북제 두나라의 황제들을 '효순한 어린아이'라 대놓고 깔볼 정도로 북중국을 철저히 유린하다시피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12세기에 일어난 몽골군에 비견할만큼 6세기의 투르크는 그당시 대적할 적수가 없는 무적의 군사집단이나 다름없었다. 신속한 기동력과 용맹함으로 무장한 투르크군대가 북중국을 속국화하다시피한후, 자연스레 그힘을 대흥안력산맥 동쪽으로 뻗치기 시작하는데 그당시 고구려로서도 남쪽의 신라가 자신들의 영토를 잠식해 들어와도 일단 묵인하고 서북방 전선에 집중해야할만큼 투르크의 세력은 막강했던 것이다. 아무튼 고구려는 그당시 중국을 수탈하고 중동의 초원지대까지 장악할 만큼 최강의 군사력을 자랑했던 투르크와 간헐적이면서도 지리한 군사적 대립을 지속하다 7세기 초를 기점으로  양세력은 친선관계를 유지해 나간다.

 

고구려가 투르크와 무력충돌을 거듭하는 동안 고구려의 관군뿐만 아니라 말갈군또한 고구려 군세에 중요한 몫을 담당했다. '말갈'에 대해 중국의 동북공정에 맞물려 그 정체에 대한 논란이 한중간에, 그리고 한국학계 내부에서 한창 진행되고 있지만, 내 소견은 국인(國人)이었던 고구려인과 구별되는 이민족이 아니라 고구려가 '국가'라는 타이틀이라면 '말갈'은 고구려를 구성하는 주된 민족에 대한 비칭이었다고 본다.

 

중국사서에도 '말갈''맥구려'가 이음동의어라 분명히 밝히고 있는 기록이 있다. 즉 만주와 한반도의 맥인들이 스스로를 일컬었던 '맥구리, 막구리, 무크리'를 이민족을 가리킬때 비하의 뜻이 담긴 한자로 표현하기를 즐겨했던 중국인들이 '말갈'의 한자로 비칭했던 것인데, 이것이 '말갈''고구려'사이에 서로 다른 타자라는 오해를 불러일으키게 되었다고 본다.

 

지금도 남아있든 고구려어의 흔적중에 '멍텅구리''구리'가 있는데, '구리'란 고구려시대에 '사람'을 뜻하는 단어였다고 한다. 몽골리아의 '골리()'. 만주족의 '게레,구룬' 가야의 본래 발음 '가라', 순우리말 '겨레' 등등 고구려어 '구리'와 뿌리를 같이하는 단어들이 적지 않다. , 맥구리란 '맥인' '맥족'을 일컫는 고구려시대의 고구려말로서 이것을 중국인들이 비하와 경멸의 뜻을 담아 짐승을 뜻하는 말갈의 한자로 비칭했을뿐국가체제, 국가의 타이틀인 '고구려'와 이 고구려를 구성하는 그 주류민족인 '맥구리''말갈'이란 비칭때문에 "말갈과 고구려인은 다르다"라는 결론을 도출하는 것은 한마디로 코미디라 하지 않을 수 없다는 소리다.

 

다시 말해, 지금도 우리는 대한민국이란 나라에서 살고 있는 한국인이나 한국인의 절대다수 민족적 구성은 옛 고조선을 뿌리로 하는 예맥족이듯, 삼국시대 당시 '말갈'이란 '고구려'란 나라를 구성하는 절대다수의 민족인 '맥구려, 맥구리'인들의 나쁜 표현일 뿐이라는 것이다. 아무튼 말갈이란 뜻 해석으로 잠시 곁길로 빠진 느낌이 있는데, 내가 말갈의 정체에 대해 적지 않은 소개를 한 이유는 고구려가 돌궐과의 군사적 충돌이나 이후 벌어진 수와 당나라의 수백만 대군의 침공 그리고 발해건국에 이르기까지 '말갈'로 비칭되는 민족세력이 상당한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고구려가 투르크와의 전쟁에서도 고구려군이란 이름의 관군뿐만 아니라 말갈군이 합세하여 승리할 수 있었고, 수와 당나라와의 당시 세계최대규모의 대전쟁에서도 말갈이 많은 역할을 담당했다. 뿐만 아니라 발해건국에 있어서도 속말수 유역의 말갈인들이 거의 주도적 역할로 고구려인들과 함께 발해를 건국하는데 성공했다. 앞서 말한대로, '말갈''맥구려, 맥구리'인들의 중국식 비칭이라 이해하면 그저 고구려인들이 자기 나라를 위해 관군과 함께 돌궐,,당나라의 침략군에 맞서 싸웠고, 고구려 멸망후에는 가기 나라의 회복을 위해 독립투쟁을 벌여 '발해'란 이름으로 다시 나라를 되찾는데 성공했다는 것으로 쉽게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그런데, 왜 삼국사기는 물론 중국사서에서 고구려인 그 자체일 수밖에 없는 이들 '말갈'인들을 고구려와 구별하여 '말갈'로 병용 기록하는 경우가 적지 않은 것일까? , 고구려와 말갈이 내 생각과는 달리 다소 이질적인 민족구성이었던게 사실이기 때문일까? 이에 대한 이유에 대해서는, 삼국시대 당시의 고구려사회를 제대로 바라보아야 한다.

 

고구려는 건국초부터 멸망시까지 부여계통의 민족군, 나라들에 공통되는 5부체제가 줄곧 유지되었던 나라였다. 물론, 소수림왕때부터 외세의 침략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위해 국력을 결집시키는 노력을 기울여 계루, 절노, 관나부 등등 5부족 연맹체의 족벌적 성격을 국가방위적 지방체제로 전환시키는 등 성격이 달라지기는 하였으나 고구려는 멸망당시까지도 각 나부의 전통이 살아있는 '부족'의 기반이 존재하던 나라였다. 또한, 5부 각각의 영지하에 소속되있던 여러 피정복세력들에 대해서도 어느정도의 자치를 허용하였는데 이들 피정복세력들은 대부분 동부여 북부여 동예 옥저 개마 소수맥 양맥 등등 예맥계 부족들이었던 것이다. 다만, 그들 부족 내지 소국들의 본래 명칭을 그대로 유지시키기 보다는 지방통치의 편의상 이들을 하나로 묶어 통칭할 수 있는 표현으로 '맥구리'란 말이 자연스레 널리 쓰였고 이것이 6,7세기 당시 중국에서는 말갈이란 표현으로 비칭되어 말갈 7부란 이름으로 소개되었던 것이다.

 

중국의 수서 등의 역사기록 등에서 소개되는 말갈7부는 하나같이 각각의 종족명으로 묶었기보다는 속말말갈, 백산말갈, 흑수말갈 등등 '말갈'로 불리는 부족들이 터잡아 살던 지역의 이름을 붙인 것으로봐서 고구려 영토 내 각지에 흩어져있던 예맥계 피정복부족들을  편의상 그지역의 이름을 붙여 부른 것에 부른것에 불과하다고 본다, 지금의 송화강인 속말수유역에 살던 부여계통의 피정복부족들은 속말맥구리 내지 부여맥구리로 부르는 식으로 말이다. , 고구려사회는 건국초부터 함께한 5나부세력의 후손들과 영토팽창과정 중 3대 국성, 대성, 여러 성 등에 거주하는 신흥귀족세력이 중심이 된 '국인(國人)'들과 고구려 영토내 각지에서 준자치권을 가지고 나라에 세금과 공역, 군역 등을 담당하는 부족들이 어우러진 통치체였던 것이다. 그리고 이 부족들은 말갈의 본래 발음인 '맥구리'에서 보여지는 바와 같이 국인들과 구분되는 이민족으로서의 준자치적 피정복 부족들이 아니라 같은 종족의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었다는 사실이다. 참고로, 맥구리의 뜻에 대해 내생각을 부연하자면, 고구려의 최고 관직명인 '막리지''or 막리'나 속말수 이북의 부여계통의 소국이었던 '두막루''' 등을 보면 고구려어 ''이 으뜸, 머리, 최고 등을 뜻하는게 아니었을까 한다. 또한, ''''가 서로 깊은 상관관계가 있는 다시말해 뜻이 거의 일맥상통하는 유음어라고 본다면, 고구려를 세운 추모성왕의 '추모'가 활을 아주 잘 쏘는 사람, 고구려 최고무관직인 '대모달''', 광개토태왕의 신하였던 모두루의 '', 왕을 뜻하는 고구려어 ''와 붙은 성이름 개모성의 '' 등도 으뜸, 최고의 의미를 가진 말로서 맥구리에 대한 중국식 표현인 '말갈'의 중국식 발음인 '모허'이고 중국 북방의 몽골계통 민족들의 고구려인들에 대한 표현 중에서도 맥클리 뿐만 아니라, 무클리, 모클리 등도 나타나는것으로 봐서 맥클리, 막클리, 모크리 등등이 사투리적인 의미에서의 미세한 차이일뿐 모두 고구려인들 스스로 자신의 종족을 일컬어 '으뜸되는 민족'이란 뜻에서 맥구리라 부르지 않았을까 한다.

 

결국, 고구려에 편입된 각지역의 준자치적 피정복부족세력들의 '준자치성'을 지나치게 부풀려 이를 가지고 '국가체제''고구려'와 그 안에 산재해있던 각지역의 '피정복 예맥계부족'들을 이원화하여 서로 다른 민족세력으로 바라보려는 중국의 고구려관이 오해의 발단이었던 것이다.

 

중국은 고구려에 대한 침략이 본격화되던 수,당시대에 자신들을 오랫동안 괴롭혀오던 투르크를 다룰때도 '분열책동전략'을 요긴하게 썼고 그 효과는 주효했다. 우선 돌궐을 동, 서로 나뉘도록 공작을 벌이고 서돌궐이 내분으로 자멸하도록 끊임없이 획책하여 결국 그노력은 잠시나마 돌궐에 대한 지배라는 결실로 나타났다. 마찬가지로 수와 당은 고구려에 대해서도 우선 수와 고구려 사이에 고구려측 최전방 방패막이라 할 수 있는 거란과 이지역 말갈을 고구려로부터 떼어놓기위해 안간힘을 쓰는데 고구려는 이러한 중국측의 공작을 사전에 막기 위해 영양태왕이 1만의 말갈기병을 이끌고 영주를 선제공격하여 이지역의 거란족들을 단속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둔황석굴에서 발견된 당나라시대 문서들에서 당태종이 과거시험으로 고구려 정복을 위한 방책을 시험문제로 출제했을만큼 고구려를 무너뜨리기 위해 혈안이 ?던 중국측이 고구려 사회의 부족제적 성격을 간파하여 돌궐을 무너뜨리는데 썼던 '내부분열책동전략'으로 접근하려 했었으리라 충분히 추측할 수 있다.

 

그러나, 고구려가 광개토태왕이후 급격한 영토확장으로 장수왕때에 이르러 원할한 지방통치를 위해 전국 각지에 '경당'이란 이름의 평민교육기관을 세우는데 이를 통해 전국의 피정복 예맥인 등을 고구려인으로 동화시켜나갔을 것이다.

가령, 해방 이후 북한 함경도 지역에서 발굴된 개마토용에서 보다시피, 고구려 5나부의 핵심 귀족층만의 전유물이었던 '천손의식'이 옥저 동예와 같은 피정복지역의 예맥인들에게도 허용, 교육, 전파되어 이들을 모두 고구려인으로서 하나로 묶는 정신적 구심점 역할을 해주었으리라 생각된다.

 

고구려 멸망후 종래 고구려 지배하에 있던 요서 지방의 거란족들이 거란족만의 나라를 만들려 노력했던바와는 달리 고구려의 지배하에 있던 말갈족 즉 맥구리인들은 고구려 부흥의 중요한 축을 담당한 것을 볼때도 이들 말갈은 다름아닌 고구려인, 맥구리였을 가능성이 매우 높은바, 장수왕때 이후 고구려 전국에서 시행된 경당을 통해 고구려인으로서의 통합을 위한 교육의 결실로 봐야하지 않을까 싶다. 또한, 시모카테스가 언급한 무크리인들에 대한 기록에서 " 매일매일의 군사훈련"이란 군사훈련이 일상적으로 이루어지는 고구려 관군에 대한 소개가 아니라 고구려 영토 전지역에 산재해있던 '경당'을 통해 고구려 일반 평민들이 매일 혹독한 군사훈련을 받았다고 추정할 수 있다.

 

앞서 말한 것처럼, 고구려사회가 5부 성격의 지배층부터 중하층 및 지방에 이르기까지 '부족중심'의 성격을 완전히 탈피하지 않았으나 장수왕시대에 이르러 본격적으로 전국화된 '경당'을 통해 자기 지역 및 혈연의 연고를 뛰어넘는 '고구려'라는 국가 이데올로기를 확립, 주지시키고 강도 높은 군사훈련을 실시하여 고구려 영역내 모든 예맥인들을 고구려란 '나라'의 충성스러운 신민으로 육성하려 노력하였다고 생각한다. 이는 고구려가 수와 당의 수백만 침략군이라는 대규모 국난에 봉착하여도 고구려군으로 불리던 관군뿐만 아니라 고구려 각지의 부족민 등이 말갈(맥구리)란 이름으로 협력하여 고구려란 나라를 구하기 위해 목숨걸고 협력했던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당태종이 안시성에서 고전을 면치 못하자 관군에 협력하는 말갈병 3300명을 생매장하였다고 하는데 이들 말갈이 생매장 당하는 상황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고구려를 위해 대당전쟁에 활약하였다는 사실은 말갈이 다름 아닌 예맥인을 가리키는 고구려어 표현인 맥구리임을 확인시켜준다고 본다. 뿐만 아니라, 고구려가 멸망한후, 보장왕이 당에 의해 조선왕으로 책봉되어 요동지역에 파견되었을때 요동지역 말갈인들과 몰래 공모하여 고구려부흥운동을 획책한 사실이 있는데, 이는 말갈인들이 고구려에 통제만 받는 이질적 성격의 이민족이라면 불가능한 정황이 아닐 수 없다고 하겠다. , 고구려 부흥을 위해 보장왕을 몸소 찾아와 부흥운동을 꾀했던 말갈인들이 고구려인 그 자체인 맥구리일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또한, 발해의 건국 또한, 속말수 유역에 살던 맥구리 인들이 중심이 되어 일으킨 고구려 부흥운동으로서 훗날 속말말갈 출신 대조영의 후손인 발해왕이 왜국에 보낸 국서에서 자신을 고려국왕이라 칭하고 부여의 옛 풍속을 회복했다는 기록이 쉽게 이해된다.

 

아무튼, 건국초부터 이어진 고구려의 지속적인 정복활동으로 고구려에 편입된 수많은 예맥계 부족과 소국들은 장수왕때 이후 고구려 각지에 세워진 경당을 통해 군사훈련 뿐만 아니라 각 지역과 각 부족의 한계를 뛰어넘어 다같은 예맥족이자 '고구려인'으로서의 민족적 정체성이 확립됨으로써 전무후무한 수와 당의 수백만대군의 침공을 막아내고 또한 고구려를 부활시키는 중요한 인적 요소가 되었던 것이다. 다시 말해, 장수왕대 이후 고구려 각지에 세워진 '경당'이야말로 수와 당이라는 엄청난 국난 앞에서도 이를 이겨낼 수 있도록 도와준 고구려의 국력의 핵심이자 그 밑바탕이 되었던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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