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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사상

심청전 판타지와 드라마 '기황후'의 반전

작성자러브인|작성시간14.05.23|조회수1,331 목록 댓글 0

 

심청전 판타지와 드라마 '기황후'의 반전

심봉사가 심청을 보고 놀라 눈을 뜰 수 있었던 것은?

 

애니메이션 왕비심청의 한 장면


판소리 5마당이라 함은 심청가, 흥보가, 적벽가, 수궁가, 춘향가 5마당이다. 그 판소리의 바탕이 되는 설화는 어릴 때부터 항상 듣고 자라 너무나 잘 아는 이야기들이다. 그런데 그 중의 심청전 이야기는 다른 설화에 비하여 상당히 독특한 부분이 있다.

 

희생 제물이라는 개념이다. 한반도의 설화 중 그러한 희생 제물이라는 개념이 들어간 이야기는 거의 기억에 없다. 희생 제물의 이야기는 지금의 중동이라 일컫는 고대문명의 발상지에서 신과 인간의 연결에 있어 중요한 요소였다. 고대종교에 있어 희생 제물의 개념은 종교의 성립과 그 종교의 실천적 측면을 나타낸 종교제의에 있어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였음이 발견된다.

 

인간 제물이라는 독특한 소재

 

고대 원시종교에 있어 인간제물은 상시적으로 있었고 그 제물의 공급은 전쟁을 통하여 이루어 졌다. 그러나 문명의 발달과 함께 이루어지는 도덕의 발달과 전쟁을 통한 인간제물의 공급의 한계 등으로 인하여 그 인간제물은 동물제물로 대체되어 갔다. 구약 성서에서 아브라함이 자신의 아들을 제물로 바치는 하나님으로부터 시험을 받고 결국은 그 시험의 통과라는 형태로 인간제물에서 동물제물로 바뀌는 과정을 인류 문명의 발전 과정에서 이루어 지는 하나의 전이적 역사를 신화적 메타포로서 표현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가 된다.

 

그러나 이러한 인간 희생제물의 개념은 종교적 의미를 가진 것으로 살아남아 최종적으로 인류의 죄 사함을 위한 예수의 희생이라는 형태로 기독교에서 살아남아 숨쉬고 있다. 그리고 기독교의 역사에 있어 주요한 종교적 의미까지 부여가 되는 순교행위의 근간에 인간 희생제물의 역사가 숨어 있다.
그러나 중국에서 시작된 동아시아의 문명에서는 희생 제물의 개념과 그로 인한 역사가 아주 오래 전부터 제거가 되어 버렸다. 초월적 존재로서의 신은 일찍 사라졌고 내세의 개념도 없었다. 적어도 샤머니즘적 의미의 내세 이외의 초월적 내세 개념은 없었고 필요하지도 않았다. 인도를 중심으로 전개된 윤회 환생의 개념도 초월적 신이라는 외재하는 존재와 관련된 문제가 아니라 인간의 내적 실체 추구과정에서 나오는 하나의 철학적 사유의 결과물이었다. 이와 같은 문명에 있어 신을 위한 희생 제물이라는 개념도 필요하지 않았고 이와 관련된 종교적 제의도 없었다.

 

이와 같은 문명권에 속해 있던 조선의 설화에 인간 희생 제물의 이야기가 등장하는 것은 굉장히 이국적인 요소이다. 뱃사람들이 인당수 용왕을 달래기 위하여 인간제물을 구하러 다니는 것은 그러한 이국적 요소를 잘 표현을 해주고 있다. 심청전에 의하면 남경 지방의 뱃사람들이라 한다. 남경은 구체적 장소가 아닌 아주 먼 다른 문명을 의미하는 것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뱃사람들의 희생 제물을 구하는 행위도 그저 이국적인 요소를 설명하고 있을 뿐이다.

 

심청전을 새롭게 바라보는 출발점

 

이러한 이국적 희생제의가 조선이라는 사회와 만나 어떠한 조선의 이야기를 만들어 내었을까? 심청전을 새롭게 바라보는 출발점에 서 있다.
우리는 심청전 하면 떠오르는 것이 아버지를 위하여 인당수에 몸을 던진 효성스러운 심청의 희생전으로 기억을 하고 있다. 그러나 과연 우리의 이해와 기억이 맞을까?
孝(효)! 중국 문화권에 있어서의 孝란 무엇일까? 하나의 질서를 의미했다. 그 가족의 질서를 확장하면 국가 군주에 대한 忠(충)으로 연결된다. 그 忠에 희생이 들어가 있을까? 아니라고 본다. 주어진 질서에의 순응이었다. 天(천)으로부터 부여 받은 권력은 이미 주어진 것이다. 새롭게 만들 필요가 없는데 그를 위한 희생은 아예 필요로 하지 않았다. 그저 존재하는 것에 대한 순응만이 요구되었다. 그러다 보니 그를 뒤집어 엎기 위해서 다시 하늘로부터 힘을 빌리는 논리 구조가 필요로 했다. 그래서 역성혁명이라는 복잡한 이론이 만들어졌다.

 

다시 孝로 돌아와 보자. 忠과는 달리 孝는 생물학적 관계를 기반으로 한다. 생물학적 관계를 기반으로 하는 본능에 가장 원초적으로 부여한 윤리 규범이 孝라는 개념이 아니었을까? 특히 농경 사회에 있어 부모의 노후를 보장하는 수단 중의 하나가 자식이었고 그 둘 사이의 관계를, 질서를 유지하는 것은 그 사회 유지에 있어 굉장히 중요한 문제이었다. 그래서 孝는 가장 중요한 원초적 질서의 기본이 되었다. 이러한 孝의 어디에 희생의 개념이 들어가 있는가? 효는 희생이라기 보다 질서 유지를 위한 사회적 규범이었을 뿐이다.

 

심청전을 이끌고 나가는 가장 큰 사건은 종교적 희생제의 이다. 그런데 심청전은 그를 하나의 이국적 사건으로 처리를 해 버린다. 그리고 孝라고 사회적 규범의 이름으로 행하여 지는 심청의 인당수에의 투신이라는 희생 행위도 상당히 코믹하게 그리며 그를 조롱하고 있는 것이 심청전의 속 모습이다.
심청이가 공양미 300석에 팔려가게 된 사건의 전말은 무엇일까? 심봉사의 이름은 심학규이라는 몰락 양반이었다. 당시 애를 놓다가 산모가 사망하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심청의 어머니도 산후 조리로 인하여 7일 만에 죽고 심봉사가 키운다. 그리고 심청이 벌어오는 것으로 빌어먹고 사는 심학규는 일하러 간 심청을 기다리다 기다리지 못하고 심청을 찾아 나섰다가 물에 빠지고 만다. 그런데 지나가던 땡중이 심봉사를 구해주고 눈을 뜨려면 공양미 삼백 석을 바치라고 꼬신다. 이 땡중의 농간에 넘어간 심봉사는 선뜻 약속을 해 버린다. 이런 지키지도 못할 약속을 눈 뜨고 싶다는 욕심 때문에 약속을 해버린 심 봉사가 끙끙거리는 것을 보고 심청이가 몸을 팔겠다고 자청을 하고 나서게 되는 것이 그 스토리이다.

 

비극이라기 보다 笑劇(소극)처럼 보이는 광경

 

孝라는 이름으로 행하여지는 희생 행위의 전의 이야기치고 얼마나 코믹한 이야기인가? 땡중의 사기 행위 그리고 그에 속아가는 자신만 아는 무능하면서도 꿍심이 있는 심봉사라는 인물들을 위하여 인당수에 몸을 던지는 스토리 전개! 욕심과 체면이 뒤범벅이 되어 딸을 죽음으로 몰고 가는 심봉사를 보면서 느끼는 분노가 과연 나만의 것일까? 현대적 소설이라면 심청의 복잡한 심리 묘사가 가능했으리라. 이 모든 것이 하나의 비극이라기 보다 조소와 비아냥을 뒤집어 씌운 笑劇(소극)처럼 보이는 광경이다.

 

결국 심청이는 인당수에서 뱃사람들을 위한 희생 제물로 바쳐진다. 그리고 심학규를 위한 희생 제물로 바쳐진다. 뱃사람들은 공양미 300석이라도 지불을 하였다. 그러나 심봉사는 유일하게 의지한 것이 그 놈의 孝였다. 블랙 코메디와 같은 이야기는 심봉사가 같이 심청이를 꼬신 뺑덕 어멈과 재혼을 하고 다시 나중에 걷어 차인다는 것이다. 물론 땡중에게 속았으니 눈을 못 뜬 것은 당연하고..

 

그는 조선의 가부장적 孝의 현실이었다. 고려와 조선 내내 행하여 진 貢女(공녀)의 배경이 되는 것도 가부장적 질서였다. 민중은 심봉사를 이용하여 우두머리들을 조롱하고 있었다. 세종 때 기록에 의하면 貢女를 보내기 위하여 전국의 15세부터 25세 처녀들의 결혼을 금지했다고 한다. 가공의 이야기가 아니라 현실의 이야기였다. 뺑덕 어멈과 심봉사는 바로 이웃에 있는 그들의 모습 이었다. 조선의 민중에게는 위안부도 결코 새로운 이야기가 아니었다. 그들의 조상이 겪었던 슬픈 역사의 반복이었다.

 

공양미 300백석은 아버지의 눈을 뜨기 위한 재물이기도 했지만 자신의 비참한 삶으로부터의 탈출을 정당화 시켜주는 하나의 꿈이기도 하였다. 공양미 300백석 속에 이미 내포되어 있는 기망을 알고 있었다 하더라도 할 수 없이 매달릴 수 밖에 없었던 마지막 선택이었을 지도 모른다. 공양미 300백석을 바치고도 눈을 뜰 수가 없었던 것은, 그들이 처해 있던 사회 현실의 기망과 절망을 역설적으로 이야기 해 주는 것은 아닐까?

 

 

MbC 드라마 기황후의 한 장면.

얼마 전 기황후라는 드라마가 유행을 했었다. 貢女의 이야기다. 그 이야기는 심청전의 반전을 이용하였다. 도저히 넘볼 수 없는 중국을 우리가 팔아버린 그녀들을 통해 정복한다는 이야기다. 너무나도 비참하고 절망적 희망을 드라마로 만들어 놓고 열광하는 모습을 도대체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내 팽개치고 팔아버린 그들에게서 심청이와 같은 孝를 강요 할 수 있을까?

 

하여튼 심청전에서는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반전이 일어난다. 심청은 용왕에게 구출이 되고 연꽃에 실려 다시 바다위로 떠오르고 결국은 왕비가 된다. 그리고 심봉사를 찾겠다고 전국의 봉사들을 다 모으고 거기서 심봉사는 심청을 만나고 "깜짝 놀라" 눈을 번쩍 뜨게 되었고 그래서 행복하게 살게 되었다가 마지막 이야기다. 심봉사가 심청을 만나러 가는 과정에 뺑덕 어멈은 딴 놈이랑 눈이 맞아 달아나 버린다. 뺑덕 어멈과 심봉사의 협력구조를 깨 버리는 것은 심봉사가 심청을 만나기 전 거쳐야 하는 목욕재계였을까? 조롱과 냉소가 느껴진다.

 

심봉사가 심청을 보고 놀라 눈을 뜰 수 있었던 것은?

 

그런데 여기서 우리의 상상력을 한번 발휘를 해보자. 심청이가 용궁 문지기에게 구출이 되어 용궁 문지기와 결혼을 하게 되었다고 상상해보자. 용궁 문지기이니 문어나 거북이 정도가 되면 그럴듯한 우화가 될까? 그래서 친정에 놀러 간다고 심봉사를 찾아 왔다고 상상해보자. 심봉사가 반겨 주었을까? 그리고 심봉사가 눈이 번쩍 떴을까?

 

역사는 아니었다고 가르쳐주고 있다. 화냥년이 병자호란 때 볼모로 잡혀 갔다가 돌아온 還鄕女(환향녀)에서 나온 말이란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 돌아온 환향녀들의 비극적인 이야기들은 다들 한 두번은 들었을 것이다. 양반댁 여자도 놀림받고 조롱 받으며 비극적 삶을 살았다. 그러나 왕과 결혼한 왕비는 오케이다. 기황후 판타지가 그런 것 아닌가? 하지만 용궁의 문지기와 결혼한 여자는 화냥년이 되고 말았다. 돌아오지 말았어야 하는 길이었다.

 

다시 심청전의 판타지에서 돌아오자. 심청전의 반전은 일어나지 않았다. 심봉사가 심청을 보고 놀라 눈을 뜰 수 있었던 것은 새로운 희망을 보기 위한 처절한 의지의 결과였다. 봉사로 지냈던 것은 그러한 처절한 의지의 결핍으로 인한 것이었음을 심청전 판타지의 마지막 장면이 보여 주었다. 그래 온 힘을 다해 남아 있는 희망을 향해 눈을 뜨자. 땡중과 뺑덕 어멈들이 우리를 슬프게 할지라도 희망을 향해 눈을 뜨자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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