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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사상

초장왕(楚莊王) ‘명장경인(鳴將驚人)’

작성자아리랑|작성시간15.10.18|조회수173 목록 댓글 0

 

초장왕(楚莊王) ‘명장경인(鳴將驚人)’

 

 

초장왕과 오삼(伍參)

 

춘추전국시대를 통틀어 초나라는 인구도 가장 많았을 뿐만 아니라 영토 또한 가장 넓었다. 중원의 패권은 여러 나라가 돌아가며 잡았는데도 불구하고 남쪽은 시종 초나라가 막강한 위세를 떨친 이유다. 그럼에도 ‘춘추좌전’은 초나라를 시종 남만(南蠻)으로 깎아내렸다. 중원의 진(晉)나라를 높인 것과 대비된다.

초나라가 문득 대국으로 우뚝 서게 된 것은 춘추시대 중엽 제환공과 진문공의 뒤를 이어 사상 세 번째로 패업을 이룬 초장왕(楚莊王)의 뛰어난 리더십 덕분이다. 그의 치세 때 초나라가 사상 최초로 막강한 무력을 배경으로 중원의 패권국인 진(晉)나라를 제압하고 주나라의 도성인 낙양 인근까지 진출한 게 그렇다.

 

그는 특이하게도 즉위 이듬해인 기원전 613년 봄부터 3년 동안 이상한 모습을 보였다. 전혀 호령(號令)을 발하지 않고, 사냥하러 갈 때만 출궁(出宮)하고, 사냥을 나가지 않을 때는 궁내에서 밤낮으로 여러 부인과 함께 술만 퍼마신 게 그렇다. 이때 그는 시종을 시켜 이런 글을 문 밖에 내걸게 했다.

“감히 간하는 자가 있으면 죽음을 내릴 것이다!”

하루는 대부 오삼(伍參)이 간하기 위해 궁으로 들어갔다. 오삼은 춘추시대 말기 천하를 떠들썩하게 만든 오자서의 증조부이다. 마침 초장왕은 왼손으로 정희(鄭姬), 오른손으로 월녀(越女)을 껴안은 채 음악 연주를 듣고 있었다. 초장왕이 위협조로 물었다.
“대부는 술을 마시러 왔는가, 아니면 음악을 들으러 왔는가?”

“며칠 전 신이 교외에 갔더니 어떤 사람이 신에게 수수께끼 같은 말을 했습니다. 신은 그 뜻을 알 길이 없어 대왕에게 이를 알려 드리려고 온 것입니다.”

“무슨 얘기인가?”

오삼이 말했다.

 

“몸에 오색 빛이 빛나는 커다란 새 한 마리가 언덕에 앉아 있은 지 3년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새가 나는 것을 본 사람도 없고 우는 소리를 들은 사람도 없습니다. 과연 이 새는 무슨 새이겠습니까?”

초장왕이 그 뜻을 짐작하고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그 새는 3년 동안 날지 않았으나 만일 한 번 날게 되면 곧바로 하늘로 치솟아 오를 것이다. 3년 동안 지저귀지 않았으나 만일 한 번 지저귀게 되면 사람들을 크게 놀라게 만들 것이다!”

여기서 한 번 떨치고 일어나면 사람을 놀라게 할 만한 재주를 지닌 사람을 지칭하는 명장경인(鳴將驚人)과 일명경인(一鳴驚人) 성어가 나왔다. 당시 초장왕은 ‘명장경인’의 뜻을 헤아렸음에도 이후 몇 달 동안 오히려 더욱 주색을 즐기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하루는 대부 소종(蘇從)이 초장왕을 찾아가 통곡했다. 초장왕이 물었다.

“그대는 왜 이리 슬피 우는 것인가?”

“신은 이제 죽은 몸입니다. 장차 초나라는 망할 것입니다.”

“무슨 이유로 그대가 죽고 초나라가 망한단 말인가?”

“대왕에게 간하면 대왕은 반드시 이를 듣지 않고 신을 죽일 것입니다. 그리되면 대왕은 더욱 하고 싶은 대로 할 것이고 나라는 크게 기울어질 것입니다.”

“그대는 죽음을 무릅쓰고 왜 감히 간하려 드는 것인가?”

 

“지금 대왕을 두려워하는 제후들이 사시(四時)로 바치는 공물이 끊임없이 들어오고 있습니다. 이는 만세의 이익입니다. 그런데 대왕은 밤낮으로 주색에 빠져 정사를 돌보지 않고 있습니다. 장차 대국은 쳐들어올 것이고, 소국은 우리를 배반할 것입니다. 일시의 쾌락을 위해 패망을 자초하려고 하니 이보다 더 큰 어리석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초장왕이 벌떡 일어섰다.

“그대의 말은 사직지신(社稷之臣)의 말이다. 과인이 어찌 그대의 말을 듣지 않을 리 있겠는가? 과인은 다만 때를 기다렸을 뿐이다!”

이후 음악과 여인들을 멀리한 채 만기친재(萬機親裁)하며 본격적인 친정 행보에 나섰다. 법을 어기거나 직무를 게을리한 자들을 가차 없이 주살하고, 초야에 묻혀 있던 인재를 대거 발탁하고, 영윤의 권한을 분산시켜 전횡 가능성을 제도적으로 차단했다. ‘여씨춘추[심응람(審應覽)]’에는 초장왕을 깨우친 당사자가 오거가 아니라 은어(隱語)에 밝은 성공(成公) 고(賈), ‘열국지’에는 신공 무신(巫臣)인 것으로 나온다.

‘사기[골계열전]’에는 주인공 자체가 초장왕이 아니라 전국시대 초기에 명성을 떨친 제위왕(齊威王)으로 되어 있다. 초장왕 때 만들어진 일화가 시간이 지나면서 여러 형태로 전해졌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초장왕의 문정(問鼎)

 

기원전 606 봄, 초장왕이 대군을 이끌고 가 육혼(陸渾) 땅의 융인(戎人)을 친 뒤 내친김에 낙수(洛水)를 건너 주왕실의 경계에 이르렀다. 그는 왜 주왕실의 경계까지 쳐들어간 것일까? 육혼의 융인을 친 것은 하나의 구실에 불과했다. 주왕실을 위협해 천하를 반으로 나누고자 한 것이다. 갓 즉위한 주정왕(周定王)이 크게 두려워했다. 곧 왕손 만(滿)을 초장왕에게 보냈다.

“대군을 이끌고 온 뜻이 무엇이오?”

초장왕이 대답했다.

“과인은 옛날 하나라 우왕이 구정(九鼎)을 만들었는데 그것이 상왕조를 거쳐 지금 주나라에까지 전해졌다고 들었소. 사람들은 구정이 천자를 상징하는 것으로 세상에 으뜸가는 보물이라고 하나 과인은 그것이 어떻게 생겼는지, 얼마나 크고 무거운지, 한 번도 본 적이 없소. 그래서 한 번 구경하러 왔을 뿐이오.”

 

초장왕은 이 일로 인해 후대 사가에게 커다란 비난을 받았다. 여기서 솥의 무게를 물으며 천자의 자리를 노린다는 뜻인 문정(問鼎) 성어가 나왔다. 당시 초나라에 복속한 수많은 장강 일대의 제후국들은 초나라의 칭왕(稱王)을 공인했다. 초장왕이 진나라의 쇠미한 상황을 틈 타 중원으로 진출한 것 자체를 나무랄 수는 없는 일이다. ‘문정’이 결코 황당한 일이 아니었다는 얘기다.

다만 중원의 제후국들이 주나라 왕실을 떠받들고 있는 상황에서 ‘문정’은 시기적으로 너무 앞섰다는 지적을 면키 어렵다. 주왕실은 비록 힘은 없었으나 아직 천자의 위엄이 남아 있었다. 초장왕의 ‘문정’에 대한 왕손만의 통렬한 반박이 그 증거다.

“옛날 하나라는 9주(九州)에서 구리를 바치자 이것으로 ‘구정’을 만들었습니다. 하나라 걸(桀)이 포악하자 구정이 은나라로 넘어갔고, 은나라 주(紂)가 포악하자 다시 주나라로 넘어왔습니다. 주나라의 덕이 비록 쇠미해졌다고는 하나 아직 천명이 바뀌었다는 조짐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천자가 되는 것은 덕행에 있지 ‘구정’의 대소경중(大小輕重)에 있는 게 아닙니다.”

‘사기[초세가]’는 ‘초장왕이 이를 듣고 비로소 돌아갔다.’고 기록해 놓았다. 부끄러운 나머지 이내 철군했다는 느낌을 준다. 그러나 정황상 상황이 여의치 못해 부득이 철군했다고 보는 게 옳다.

 

 

필지역의 승리

 

초나라가 진나라와 패권다툼을 벌일 당시 초장왕을 극도로 자극한 나라가 있었다. 바로 정나라였다. 초나라와 결맹해 놓고도 또다시 진나라를 섬길 뜻을 내비치는 등 수서양단(首鼠兩端)의 모습을 보인 탓이다. 기원전 597년 봄, 초장왕이 대군을 이끌고 가 정나라 도성을 포위했다.

정양공은 진나라의 구원을 굳게 믿은 나머지 악전고투를 거듭하면서도 끝내 항복하지 않았다. 진나라의 권신 조돈(趙盾)은 초나라와 정면 충돌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 3달이 지나도록 진나라 구원병은 나타나지 않자 정양공이 마침내 윗옷을 벗고 양을 끄는 모습으로 초장왕을 맞이했다. 스스로를 노복에 비유하며 목숨을 구걸하는 항복의식이었다. 초장왕의 좌우에서 간했다.

“지금 부득이하여 항복하는 것입니다. 그의 청을 들어주면 또다시 우리를 배반할 것입니다. 그를 사면해서는 안 됩니다.”

초장왕이 말했다.

 

“정나라 군주는 능히 예로써 자신을 낮출 수 있는 사람이니 반드시 믿음으로 그의 백성을 동원할 수 있을 것이오. 과인이 어찌 그의 땅을 바랄 수 있겠소!”

그러고는 30리를 물러났다. 정양공이 친히 초나라 군영을 찾아가 다시 사죄한 뒤 강화를 청했다. 초나라가 이를 받아들였다. 당시 진나라는 정나라가 항복할 즈음 비로소 출병했다. 이들은 황하에 이르렀을 때 정나라가 이미 초나라와 강화조약을 맺었다는 말을 듣게 되었다. 총사령관인 중군 주장 순림보는 이 얘기를 전해 듣고는 회군을 주장했다. 그러나 중군 부장 선곡이 중군대부 조동과 상군대부 조괄 형제에게 말했다.

“나는 휘하 군사만이라도 이끌고 가 싸울 작정이오.”

 

세 장수가 휘하의 군사들을 이끌고 황하를 건너자 전면전이 빚어졌다. 당시 초장왕은 철군 도중 이 소식을 듣고 정면승부를 꾀했다. 결전의 날이 오자 초장왕은 친히 북채를 들고 북을 쳤다. 초나라 군사들의 병거와 보병이 쏜살같이 달려가 진나라 군사를 습격했다. 진나라 군사가 크게 패해 황급히 나루터로 달아났다. 먼저 배를 타려고 서로 밟고 죽이는 생지옥이 연출됐다. 황혼 무렵 진나라 군사를 뒤쫓던 초나라 군사가 지금의 하남성 섬현인 필(邲) 땅에 이르렀다. 대부 오삼이 청했다.

“속히 진나라 군사를 뒤쫓아 가 그들을 모조리 무찔러야 합니다.”

초장왕이 반대했다.

“우리는 전에 성복(城濮) 땅에서 진문공에게 패한 이래 사직까지 치욕을 받아야만 했소. 그러나 이번 싸움으로 가히 전날의 분을 씻게 되었소. 이제 우리도 진나라와 강화할 도리를 생각해야만 하오.”

더는 전진하지 않고 필 땅에 영채를 세웠다. 덕분에 진나라 군사는 황하를 무사히 건널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사지를 빠져나온 진나라 군사들은 이미 크게 놀란 까닭에 대오를 이루지 못한 채 어지럽기 짝이 없었다. 이들은 다음 날 아침이 되어서야 겨우 황하를 모두 건너게 되었다. 당시 정양공은 초나라가 이겼다는 소식을 듣고는 곧바로 달려가 초나라 군사들을 형옹(衡雍)으로 안내한 뒤 크게 잔치를 베풀고 승전을 축하했다.

 

 

무(武)의 뜻풀이

 

당시 한 초나라 장수가 초장왕에게 이같이 건의했다.

“대왕은 어찌해 적의 시체를 모아 산처럼 만든 전승기념물인 경관(京觀)을 만들어 후세의 구경거리로 삼으려 하지 않는 것입니까?”

초장왕이 말했다.

 

“원래 ‘무(武)’자는 싸움을 멈추게 한다는 뜻에서 ‘과(戈)’자에 ‘지(止)’자를 더해 만든 것이오. ‘무’에는 포학을 금하고, 싸움을 그치게 하고, 큰 나라를 보유하고, 천하평정의 공을 세우고, 백성을 편안케 하고, 만민을 화락하게 만들고, 만물을 풍부하게 하는 등 7가지 덕이 있소. 나는 7가지 덕 중 단 한 가지도 이루지 못했소. 장차 무엇으로 후손에게 무덕(武德)을 보일 수 있겠소? 오직 선군의 사당에 승전을 고하면 그것으로 충분하오.”

그러고는 진나라 군사의 시체를 모두 땅에 묻어주었다. 춘추전국시대를 통틀어 적군의 시체를 땅에 묻어준 유일한 사례이자, 용맹할 무(武)를 ‘싸움을 그치게 한다.’는 뜻으로 풀이한 최초의 사례에 해당한다. 초나라가 중원의 일원으로 평가받는 결정적인 계기가 바로 여기에 있다. 사가들이 주저 없이 그를 춘추시대의 3번째 패자로 꼽은 것도 바로 이런 뛰어난 행보 덕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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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준은 역사문화 평론가로 종편 시사교양 프로그램에 고정패널로 출연하고 있다. ‘무경십서’ ‘사마천의 부자경제학’ 등의 저서를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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