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의 黃金人間
'그들은 흉노계였다'고 주장하는 학자들
숭실대학교 역사학과 崔秉鉉 교수가 쓴 [新羅古墳硏究](一志社)는 4-6세기 신라 적석목곽분의 주인공인 신라김씨 왕족은 북방유목민족이 이 시기에 들어와서 만든 것이라고 단정했다. .
지금도 그렇지만 과거에는 대부분의 고고학, 역사학자들이 신라 적석목관분을 이야기할 때 [북방초원의 문화의 영향을 받았다] 정도의 표현만 하고는 더 나아가지 않았다. 문화라는 것이 반드시 사람의 이동을 매개로 하여 전해지는 것인데도, 당연히 북방민족이 이동하여 들어온 결과라는 말을 해야 하는데 그런 표현을 너무 과감하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았다. 그러다가보니까 논문에 실감과 생동감이 실려지지 않았다. 최근 金秉模, 崔秉鉉, 李鍾宣 교수처럼 북방기마민족이 신라지역으로 들어와 적석목관분의 주인공이 되고 집권자가 되고, 그들은 아마도 흉노계일 것이라고 직설적으로 언급하는 학자들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고대사 연구에 깊이를 더하는 것이다.
崔교수는 이렇게 쓰고 있다.
<신라에서 적석목곽분이라는 묘제는 麻立干시기 王京의 최고 지배귀족의 묘제였던 것으로, 필자는 이 積石木槨墳을 신라 역사상에서「麻立干時期의 墓制」라고 주장해 오고 있는 것이다.
신라의 수도 경주에서 主墓制가 早期의 土壙墓로부터 前期의 積石木槨墳으로 바뀌면서 보여 주는 문화상은 그 구조에서만이 아니라 출토유물에서도 현격한 차이를 보여 주고 있다. 우선 馬具만 해도 토광묘의 馬具란 재갈 정도가 출토될 뿐으로 그 시기의 騎馬를 증명해 주기에는 부족하다.
이에 비해 적석목곽분에서는 騎馬具 일색의 각종 마구가 대형분은 물론 웬만한 소형분에서도 풍부하게 출토되고 있다. 甲胄에 있어서도 토광목곽묘 시기는 全영남지방에서 板甲(短甲)이 사용되고 있었던 것이 분명한데 적석목곽분에서는 札甲일색으로 되고 있다.
특히 적석목곽분에서 풍부하게 출토되는 金, 金銅, 銀 등의 貴金屬工藝品은 早期의 土壙墓에서는 기대할 수도 없는 것임은 물론이다.>
최병현 교수는 기마민족의 증표인 등자(발걸이)가 경주지방에 등장하는 것도 연구했다. 그는 등장의 등장은 적석목곽분의 부장품으로서라고 말했다. 그 형식도 목이 긴 북방기마민족 계통이라고 한다. 시기는 4세기 초이다. 일본에서는 5세기 전반기 고분에서 비로소 등자가 나온다. 이 차이는 신라의 경우는 기마민족 출신들이 등자를 갖고 들어왔고, 일본은 한반도의 남쪽으로부터 등자 등 기마문화를 수입하였을 것이라고 말했다.
등자는 말을 탄 사람이 몸을 안정시키고 활을 쏠 수 있게 해주므로 기마민족의 전투술을 획기적으로 발전시켰다.
<그런데 적석목곽분이 출현한 이후 경주에서도 적석목곽분만 만들어진 것은 아니었다. 적석목곽분이 출현한 이후 경주에서도 얼마 동안은 토광목곽묘가 계속되었으며, 그 이후 竪穴式石槨墳, 甕棺墓가 다른 영남지방과 같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다만 경주에서는 적석목곽분이 上位墓制로, 수혈식석곽분이 下位墓制로 된 墓制의 重層구조를 이루고 있었던 것이었다.
경주에서 적석목곽분 축조기에 경주를 제외한 영남일원은 경주의 下位墓制와 같은 수혈식석곽분이 주묘제로 되어, 영남일원의 수혈식석곽분이 경주의 적석목곽분을 포위하고 있는 상태를 이루었고, 이 포위상태는 경주세력이 적석목곽분을 포기할 때까지 계속되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신라의 古墳문화, 한정하여 경주의 積石木槨墳 문화는 嶺南一圓으로 급속히 파급되어 거의 全영남지역을 동질화시켰다.
역사적으로도 경주에서 적석목곽분이 출현하는 시기는 신라에 金氏王朝가 출현하는 시기와 대체로 일치하는 것이었으며, 그 직후부터 신라는 낙동강 동쪽의 영남일원을 석권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신라 적석목곽분은 그 구조 자체만의 문제가 아니라 조기土壙墓文化와의 단절성, 적석목곽분 출현 이후에도 경주와 영남일원에서 조기 이래의 土壙木槨墓의 공존, 경주 안에서 上位-積石木槨墳; 下位-竪穴式石槨墳이라는 묘제의 重層구조, 경주의 주묘제-적석목곽분; 영남일원의 주묘제-수혈식석곽분이라는 묘제의 포위상태, 그러면서도 적석목곽분 문화의 영남일원으로의 급속한 파급, 신라 역사에서 金氏王朝의 출현, 신라의 영남일원 석권 등이 함께 어울려 있는 것이다.
그래서 필자는 이와 같은 고고학적·역사적 사실들이 결코 각각 別個로 일어난 것들도 우연하게 일치하는 것들도 아니며, 그 당시 신라에서 벌어졌던 어떤 큰 변동의 결과가 아니었을까, 그것은 4세기 전반기 중에 경주에 출현한 적석목곽분의 주인공들이 早期 토광묘, 그리고 그것을 계승한 영남일원의 수혈식석곽분 주인공들과는 문화적 배경, 출신과 성장의 배경이 달랐고 지니고 있던 移動力, 戰鬪力이 달랐던 데서 나온 결과가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그러한 신라의 적석목곽분이 騎馬문화를 배경으로 한 북방아시아 積石木槨墳문화에 기원을 둔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경주에 출현한 시기가 4세기 전반기였다. 필자는 그 시기가 북방의 騎馬遊牧民들이 中原으로 남하를 개시했던 시기 직후라는 것도 또한 결코 우연한 일만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韓半島는 오늘날도 마찬가지지만 더욱이 古代에 있어서는 大陸의 激動에 결코 초연할 수만은 없는 위치에 있는 것이다.
이상과 같은 신라 적석목곽분을 둘러싼 고고학적·역사적 상황들을 종합하여 볼 때, 신라 적석목곽분은 결코 내부의 先行墓制가 복합되어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으며, 騎馬문화를 배경으로 한 북방아시아 목곽분 문화의 직접 渡來에 의해 돌발적으로 출현한 것이었고, 그것은 3세기 말·4세기 초부터 일어난 東아시아 기마민족 대이동의 와중에서 한 여파가 밀려온 결과였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신라 적석목곽분의 구조와 기본적으로 같은 골격을 갖고 있는 고분들이 북방아시아에서 찾아지며, 이들은 騎馬문화를 배경으로 하여 급속한 이동력을 갖고 있었던 騎馬民族들이 남겨 놓은 것이었다. 경주의 적석목곽분도 新羅早期까지는 전혀 볼 수 없었던 새로운 馬具類들을 풍부하게 동반한 것은 물론이고, 부장품 중에는 원류를 북방에 둔 유물, 또는 당시에 북방경로를 통하여 들어왔다고 판단되는 유물들도 다수였으며, 고분의 정상부에 騎馬類 일괄유물을 묻어두고 있는 데서 그 주인공들의 騎馬文化的 성격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었다.
이와 같이 신라 적석목곽분은 기마문화를 배경으로 한 북방아시아 목곽분문화 전통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었으며, 그래서 경주에 적석목곽분이 출현하게 된 것은 西晋 말부터 일어난 東아시아 騎馬民族들의 대이동의 와중에서 그 일파가 경주에 도달함으로써 비롯된 것이었다고 판단되었다.
신라 적석목곽분은 신라의 역사상에서 최고지배자의 호칭이 麻立干으로 불리고 있었던 麻立干시기의 墓制였으며, 기마문화라는 강력한 에너지를 갖고 있는 북방아시아계 적석목곽분과 麻立干의 출현은 안으로는 신라의 역사상에서 金氏왕조로 표현되는 새로운 왕조를 탄생시켰던 것이고, 밖으로는 지금까지 오랜동안 평형상태를 유지해 왔던 영남지방 제세력들 사이의 균형을 깨뜨리고 새로운 경주세력, 즉 斯盧에서 탈바꿈한 新羅勢力이 낙동강 동쪽의 영남지방을 단숨에 석권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다고 판단된다.
그러므로 辰韓地域에서 新羅王國의 등장은 북방아시아계 적석목곽분의 출현이라는 배경을 갖고 있었던 것이었는데, 그와 같은 사정은 馬韓地域의 百濟에서도 마찬가지였다고 판단된다. 영남일원이 토광묘문화기였을 때 한반도 중·서부지방, 즉 馬韓地域도 지방적 차이는 있었겠지만 크게 보면 역시 古朝鮮 계통의 토광묘문화가 연장되고 있었다고 판단된다.
그러다가 경주에 적석목곽분이 등장하는 것과 거의 같은 시기에 서울 江南에 方形基壇式 積石塚이 출현하게 되었는데, 그것도 역시 동아시아 騎馬民族 대이동의 와중에서, 경주에 도달한 세력과는 계통과 출발지가 다른 것이었지만, 역시 기마문화를 배경으로 한 세력 일파가 한강유역에 도달한 데서 비롯된 것이었다고 판단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馬韓地域에서는 이 基壇式積石塚을 배경으로 한 새로운 百濟王國이 등장하여 馬韓 제세력들을 급속도로 통합하여 갔던 것이고, 辰韓地域은 적석목곽분을 배경으로 한 新羅王國이 통합하여 감으로써 북쪽의 高句麗와 함께 三國이 정립되게 되었던 것이라 판단된다. 기마문화를 배경으로 한 이 신라와 백제의 중간에 끼어 그 완충지역으로 남은 것이 早期 土壙墓문화를 계승한 伽倻諸國들이었던 것이다.
적석목곽분은 기마문화라는 강력한 에너지를 바탕으로 하고 있었기 때문에 新羅前期에 경주가 묘제상으로는 全 영남지방의 수혈식 석곽분으로 포위되어 있었으면서도 오히려 早期文化를 계승한 영남 수혈식석곽분 지대 가운데 낙동강 동안지방 전체와 星州 같은 일부 서안지방을 積石木槨墳 문화지역으로 만들었다. 그러므로 신라전기 영남지방의 적석목곽분 문화지역이란 조기 이래로 같은 문화기반을 갖고 있던 全 영남지방에서 新羅圈의「分立」이었던 것이었으며, 新羅圈으로 편입되지 않고 早期 이래의 전통이 계승되어 남은 것이 伽倻地域이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수혈식석곽분 지대 가운데 新羅權으로「分立」된 적석목곽분 문화지역의 고분도 그 주인공들은 원래 早期 이래로 토착지배권을 키워 왔던 地方首長들이었기 때문에 그 내부 주체는 竪穴式石槨이었던 것이었으며, 신라는 상당 기간까지 그들의 토착지배권을 인정하는 바탕 위에서 통치권을 행사하였기 때문에 그와 같은 地方古墳이 남게 되었던 것이었다.
그러나 적석목곽분 문화지역내에서 경주고분과 지방고분 사이에 일정한 격차가 있었던 것은 물론으로, 지방고분의 최고수준도 경주고분의 최고수준보다는 하위수준을 유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영남지방 수혈식석곽분 지대 가운데 積石木槨墳 文化地域은 신라의 정치적인 힘이 작용하는 신라의 세력권이었다고 보아야 한다고 판단된다.
그러나 신라의 세력권 안에 거대한 지방고분들이 존재할 수 있었던 것은 신라가 아직까지 지방세력을 완전히 해체시키고 직접 통치를 할 수 있을 정도로까지 통치력이 발전된 것은 아니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며, 따라서 積石木槨墳 문화 지역 지방세력들 가운데 일부는 정치적 상황에 따라 때로 신라로부터 이탈이 가능한 경우도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적석목곽분 문화지역 가운데 특히 거대한 지방고분들이 존재하고 있는 곳들이 낙동강 연안지역들인 것은 그 지역들이 지리적으로도 경주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 그러한 이탈 가능한 강력한 지방세력들이 오래까지 남아 있을 수 있었던 까닭이었다고 판단된다.
이와 같이 新羅前期의 고분문화는 당시까지 지방세력의 존재가 아직 만만치 않았음을 보여 주고 있는데, 신라의 중앙정치에 있어서도 최고지배자의 권력이 아직 초월적인 것은 아니었음을 또한 적석목곽분은 보여 주고 있다. 즉, 신라 적석목곽분에서 최고의 권위를 상징하는 金冠, 金制 허리띠를 착용할 수 있었던 인물의 범위가 당시의 王과 王妃보다 넓은 범위로 나타나고 있고, 또 王陵의 구역이 後期처럼 독립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 그러한 사정을 말해 주고 있는 것이라 판단된다.
한편 신라의 적석목곽분은 墓型이 모두 6개의 유형으로 나뉘어져 있었고 그것은 피장자들의 신분차이에서 나온 것이었다. 신라고분에서 피장자들의 계층차이는 早期 토광목관묘 단계에서부터 볼 수 있는 것이었지만, 이와 같이 墓型 자체가 구분되고 있는 것은 前期의 적석목곽분에 와서였다. 그러므로 新羅 中古期에 들어가 정립되는 骨品制度는 麻立干時期, 즉 적석목곽분 묘형에서 나타나는 그러한 신분격차를 제도화한 것이었다고 이해된다.
法興王代에 처음 정한 6部人 服色의 尊卑之制가 오히려「夷俗」이었다고 한 것은 그 服色의 尊卑之制가 麻立干시기, 즉 적석목곽분 시기의 그것이었음을 말해 주는 것에 다름아니라고 판단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영남지방의 橫口式석곽분과 장방형석실분은 高句麗 橫穴式石室墳의 남하에 훨씬 앞서서 영남지방 자체에서 발생된 것이었는데, 그것은 早期 이래로 그 근원을 서북지방에 두고 있었다고 할 수 있는 영남지방 수혈식석곽분의 주인공들 일부가 서북지방의 樂浪塼築墳에서 횡혈식 Idea를 채용한 결과였다고 판단된다.
6세기 전반기에 들어서서 신라의 중앙귀족들은 이제 그들의 고유묘제였던 積石木槨墳의 축조를 포기하고 橫穴式石室墳이라는 새로운 묘제를 받아들였다. 그것은 신라의 역사상에서 律令頒布와 佛敎公認으로 나타나는 法興王代 初 사회개혁의 결과였으며, 신라 중앙귀족들에게 있어서는 묘제의 교체 자체도 당시 중요한 개혁내용 중의 하나였다고 판단된다.
그것은 경주세력이 그렇게도 배타적으로 고수하여 왔던 적석목곽분이, 다른 지방에서의 묘제 교체과정과는 달리, 橫穴式石室墳과 공존기가 거의 없이 거의 일시에 사라져 버린 데서 짐작할 수 있다. 신라에서 그와 같은 묘제의 개혁은 묘제 자체만의 교체가 목적이 아니라 막대한 물자와 인력이 소모되는 葬禮 자체의 간소화를 의미하였던 것이며, 그래서 신라 석실분은 처음부터 薄葬古墳으로 출발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佛敎의 公認은 그와 같은 葬禮 자체의 혁명적 변화를 위해 당시의 중앙귀족들에게 의식의 개혁을 뒷받침하여 주었다고 판단된다.
6세기 전반기에 경주의 중앙귀족들이 먼저 받아들인 석실분은 新羅前期에 이미 경주에 앞서서 다른 영남지방에서 만들어지고 있었던 長方形石室墳이었다. 그러나 곧 이어 6세기 중엽에 들어가 신라가 소백산맥을 넘어 한강유역을 진출하고 동해안으로는 元山灣 일대까지 올라가면서부터는 고구려로부터 내려오는 신식의 方形穹륭式石室墳을 채용하여 이들을 중심으로 발전시켜 갔다. 그리하여 묘제상으로는 통일신라 말까지 변동이 없이 이 方形穹륭式石室墳이 신라의 주묘제 자리를 지키고 있었던 것이었다.
新羅後期의 신라 고분문화는 신라의 본거지였던 영남지방은 물론 6세기 중엽 신라가 진출하였던 중부지방과 원산만 일대에까지 이식되었다. 이들 신라가 진출하였던 지역의 고분들에는 묘제상으로 竪穴式石槨墳, 橫口式石槨墳, 長方形石室墳, 方形石室墳이 혼재하고 있지만 모두 6세기 중엽경의 특징적인 신라토기인 短脚高杯와 附加口綠長頸臺를 내고 있는 통일성을 보여 주고 있다.
혼재하는 묘제라는 것도 사실은 方形穹륭式石室墳을 제외하고는 新羅前期부터 영남지방의 신라 판도내에서 이미 공존되어 오고 있었던 것이었으며, 이들 新羅後期 지방고분 분포지라는 곳들은 모두 당시 新羅軍의 전초기지들이었던 것을 상기하면 그 주인공들이 어디서 올라간 존재들이었는가가 짐작된다.
그러나 그와 같은 新羅後期의 지방 고분문화는 6세기 중엽 내지는 후반기에서도 이른 시기에 곧 소멸되어 버리고 이후 신라에서는 이렇다 할 지방고분을 찾아볼 수가 없다. 신라후기에 와서 그와 같은 지방고분의 소멸은 신라의 중앙집권화에 따른 지방세력의 소멸의 결과였다고 판단된다. 石室墳期에 와서 王權의 강화는 王陵구역이 이제 일반귀족들의 분묘구역과 완전히 분리되고 있는 데서도 확인할 수가 있는 것이다.
이상 살펴본 봐와 같이 신라의 고분문화는 신라 역사 전개과정의 산물이었으며, 수도 경주에서 묘제의 교체는 신라 최고지배세력의 변동 또는 지배구조 변화의 산물이었다. 그래서 新羅早期 土壙墓는「尼師今」時期, 新羅前期 積石木槨墳은「麻立干」時期, 新羅後期 橫穴式石室墳은「王」時期 최고 지배계층의 묘제였던 것이다. 신라의 고분문화는 신라의 역사와 결코 분리될 수 없는 그 이면사였으며, 신라고분이 내포하고 있는 내용물들 자체는 文獻記錄처럼 후세인에 의한 美化, 加上, 貶下가 가미되었을 리 없는 역사의 생생한 실증물들인 것이다.>
崔秉鉉 교수는 고분을 연구함으로써 당시의 권력체계가 변해간 과정까지 드러내고 있다. 고고학이 역사학의 숙제를 풀어주는 역할도 하고 있는 것이다.
최병현 교수는 신라의 적석목곽분의 족보를 추적하여 이런 묘제가 흑해 연안, 중앙아시아 카자흐 스탄, 몽골 서쪽의 알타이 산맥, 몽골 동부에 있는 스키타이-흉노의 무덤과 거의 일치한다고 주장했다.
적석목곽분의 형식은 목곽을 크게 만들고 그 안에 시신을 담은 목관을 설치한다. 그 위에 자갈을 얹고 흙으로 덮어 봉토를 만든다. 부장품으로는 금관 등 금공예품과 마구, 그리고 순장한 말과 무기류 등이다. 흑해 北岸에서 발굴된 서기 전 7세기 무덤이나, 기원 전 1- 기원후 1세기 사이의 몽골 동부 노인 울라 흉노 무덤이 모두 신라 적석고분과 같은 형식이고 부장품들도 비슷하다.
<신라 적석목곽분에서 우선 숫적으로 돋보이는 황금유물의 盛用이 기본적으로 스카타이를 비롯한 북방아시아 유목민족들의 전통이며, 그 대표적인 신라의 금관, 즉 수목과 鹿角을 기본 모티브로 한 신라관이 사르마트 유목민의 금관을 조형으로 하는 것이며, 시베리아의 샤만의 관모와도 같은 전통 위에 있다. 신라의 白樺樹皮冠帽와 거의 같은 형태의 것이 흉노 무덤인 노인 울라 고분에서 나왔다. 이와 같이 원류나 계통이 북방으로 연결되는 것뿐만 아니라, 당시에 실제로 북방경로를 통해서 들어왔다고 보여지는 유물도 신라 적석목곽분에서는 적지 않게 출토되고 있다.
이들 유물이 백제, 고구려에서는 보이지 않고 유독 신라에서만 출토되고 있는 것은 결코 범상한 일이 아니다. 흔히 북방아시아의 적석목곽분과 경주는 너무 거리가 멀리 떨어져 있고, 그 사이를 연결할 수 있는 중간유적이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북방아시아의 목곽분문화는 기본적으로 흔적을 남기며 점진적으로 이동하는 농경민 문화가 아니라, 흔적을 남기지 않고 단시간내에 장거리를 이동할 수 있는 급속한 이동력을 갖고 있는 기마민족들의 문화였음을 상기하여야 한다>
신라적석목곽분의 주인공들이 북방기마민족 또는 흉노계라고 과감하게 주장하는 崔秉鉉, 李鍾宣은 대표적 적석목곽분인 천마총과 황남대총 발굴에 참여한 이들이다. 기자고 두 고분 발굴의 취재에 참여한 적이 있다. 발굴 현장에서 느낌 주인공들에 대한 깊은 인상이 두 학자들의 확신을 더해준 것 같다.
지금 복원된 천마총 안에 들어가보면 느낄 수 있지만, 금관을 쓰고 가슴에는 수백개의 구슬 장식을 달고, 금허리띠를 차고, 긴 칼을 찬 채 누워 있는 주인공은 황금인간처럼 보인다. 농사 짓고 글을 읽던 우리 조상들에 대한 선입관과는 전혀 다른 조상인 것이다. 이들은 과연 누구인가, 이들은 오늘날의 우리와 어떻게 연결되는가, 이들의 정신세계는 어떻게 달라졌는가 하는 의문을 호기심으로 간직하면서 연구한 끝에 도달한 결론이란 점에서 더욱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