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치원의 사산비명 중의 하나인 숭복사비
국립경주박물관 정문을 들어서면 제일 먼저 맞이하는 것이 숭복사비이다
한 개의 대석(臺石)위에 두개의 머리를 조각한 귀부(龜趺)로서 이것이 유명한 최치원의 사산비명의 하나인 숭복사비를 받쳤던 귀부이다.
이 귀부는 진성여왕 10년(A.D896)에 만들어 진 것으로 통일신라 전성기의 거북 머리모습에서 점차적으로 용머리로 변천해가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는 중요한 귀부이다.
숭복사비는 신라 사산비명(西山碑名) 중의 하나인 '유당신라국초월산대숭복사비명(有唐新羅國初月山大崇福寺碑名)을 말한다
숭복사비문은 헌강왕이 최치원에게 명하여 짓도록 하였으나, 헌강왕과 정강왕이 잇달아 죽음을 맞이하는 바람에 왕명을 받은 지 한참 뒤인 진성여왕 때 완성하였다.
최치원이 쓴 많은 글 중에 특히 신라 말 고승들의 비문(碑文)인 사산비명(四山碑銘)은 가장 유명하며, 대숭복사비(大崇福寺碑)가 그 중의 하나이다. 현재까지 13개의 비편이 확인되고 있을 뿐이지만 사본이 남아 있어 비의 내용은 소상하게 알 수가 있다.
비문의 내용은 ‘원성왕(元聖王)의 능을 조영하면서 풍수상 길지이던 곡사(鵠寺)터를 왕릉자리로 지목하니, 이에 따라 절은 원래의 터를 비워주고, 현 숭복사지로 옮겨 개창하였다.
그러나 그 후 70여 년간 절은 큰 형세를 이루지 못했다가, 경문왕이 즉위하여 원성왕의 명응(冥應)을 받아 중수하기 시작하여 헌강왕 11년(A.D885)에 절 이름도 숭복사로 바꾸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와 더불어 숭복사비문에는 경문왕과 그의 자녀들인 헌강왕, 정강왕, 진성왕으로 이어지는 2代 4王의 공덕을 기리는 내용이 많이 담겨져 있다.
숭복사비는 최치원의 사산비명이 대체로 선사들의 탑비인 것과는 달리 왕실에서 세운 절에 대한 기록이어서 왕실과 중앙귀족들의 불교신앙을 파악할 수 있는 자료가 된다.
귀부는 1930년에 국고에 귀속된 것으로 보아 당시에 숭복사지에서 경주박물관으로 옮겨진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나 1930년 이전의 정확한 기록이 없어서 귀부가 있었던 원래의 자리에 대해서는 현재까지 여러 의견이 있다. 그러나 대체로 비의 원위치는 숭복사지 금당지와 동탑사이의 동편 수십여 미터 간격을 두고 인접해 있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숭복사비는 신라 사산비명(西山碑名) 중의 하나인 '유당신라국초월산대숭복사비명(有唐新羅國初月山大崇福寺碑名)을 말한다
숭복사비편
해방 전까지 5개의 숭복사 비편이 발견되었는데 거기에서 약 30여 글자가 판독되었다
이후 1961년에 연세대 김상기가 소장하고 있던 비편 1개가 알려져 10여 그자가 더 파악되고 1965년 3월에 신라삼산오악조사단의 조사에서 비편 1기가 발견되었다. 3년 뒤인 1968년 경주시내 골동품상에서 신영훈과 문명대고수가 5기를 발견하여 구입을 하였고 1978년 국립경주박물관의 지표조사에서 비편 2개를 수습하여 5글자가 판독되었다
그래서 지금까지 모두 13편의 조각에서 99자가 판독이 되었으며 이 비편들은 국립경주박물관과 동국대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숭복사지비석 조각의 글씨에는 해서와 행서 두가지가 있다
해서는 구양순(557-641)의 해서를 따랐으며, 행서는 왕희지(307-365)의 행서체와 비슷하다
숭복사비는 현재, 다수의 비편이 수습되어 보존되어 있고, 비문이 필사본으로 전해져 오고 있어 복원을 시도해 보는 것도 바람직한 일이라 생각된다.
그렇게 된다면 최치원이 지은『봉암사 지증대사비』·『성주사 낭혜화상비』·『쌍계사 진감선사비』등 3개가 현재 남아있는 상황에서『대숭복사비』의 복원이 이루어진다면 진정으로 가치있는 복원이 되리라 본다.
숭복사지 삼층 쌍탑
숭복사지
숭복사지는 경주시 외동읍 말방리(괘릉에서 남쪽으로 보이는 마을)에 있다.
원래는 현재 원성왕릉(괘릉)이 있는 자리에 곡사(鵠寺)라는 이름으로 있었는데 원성왕릉을 조성하기 위해서 곡사(鵠寺)를 말방리로 옮기게 되었다.
오랫동안 이 절터는 말방리사지로 알려져왔으나 최치원이 찬한 숭복사비석 조각이 발견되고 해독이 되면서 숭복사지임이 밝혀지게 되었다.
현재 이 곳에는 완전하지 못하지만 쌍으로 된 삼층석탑과 금당지의 초석, 그 외 수많은 석물들이 남아 있다.
괘릉에서 승용차로 5분 거리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