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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물유적

황남대총(皇南大塚)이란

작성자변강쇠|작성시간15.11.28|조회수199 목록 댓글 0

 

 

황남대총(皇南大塚)이란

 

 

천마총이 있는 대릉원 내에 있으며 표주박처럼 두 개의 능이 불어있는 가장 큰 고분이다.

 

 

 

 

 

 

 

 

 

 

1973년부터 1975년까지 이루어진 발굴조사 이후, 경주시 황남동에 있는 큰 무덤이라는 뜻으로 이름을 지었다. 황남대총은 남북으로 두 개의 무덤이 서로 맞붙어 있는 쌍무덤이다.

남쪽 무덤[남분:南墳]을 먼저 만들고, 뒤이어 북쪽 무덤[북분:北墳]을 잇대어 만들었다. 내부 구조는 모두 돌무지덧널무덤[積石木槨墳]으로 밝혀졌다. 남분에는 왕이 묻혔고 북분에는 왕비가 묻혔다.

남북 길이가 120m이며 동서 지름이 80m인데, 남분은 높이 21.9m이고 북분은 높이 22.6m이다. 신라의 쌍무덤 가운데 가장 크고 주인공들은 화려한 황금 장신구로 치장하고 있어 5세기에 만들어진 왕릉임이 분명하다. 남분의 주인공이 당시에 마립간이란 칭호로 불린 신라의 왕이지만, 누구였는지에 대해서는 학설이 분분하다.

 

마립간, 황금의 나라 신라를 열다.

 

4세기 중반에 고구려는 이미 북방평원을 아우르는 거대 왕국이었고, 백제는 한반도 중부에서 서남쪽으로 영역을 넓혀가며 튼실한 왕국을 만들어 갔다. 이즈음인 356년 신라에서 미추왕[味鄒尼師今]의 조카이자 사위인 내물(奈勿)이 왕위에 올랐다. 내물은 앞서 사용하던 이사금이란 왕호를 가장 높은 지위란 뜻을 지닌 ‘마립간(麻立干)’으로 바꾸었다.

마립간이란, 앞선 삼한시기부터 지역소국(地域小國)을 이끌던 지배자인 ‘干(Khan)’보다 한층 더 높은 통치자를 일컫는 신라 고유의 왕호이다. 이 마립간은 황금에 주목하였고, 황금을 통해 나라의 위계를 새로 만들어갔다. 마립간을 중심으로 일정 범위에 속하는 왕족은 황금제 장신구로 꾸민 복식을 착용하였다. 방계로 멀어진 왕족과 지방의 전통적인 족장세력은 금동 또는 은으로 꾸민 복식을 사용하였다. 이 복식들을 꾸민 장신구는 재질만 다를 뿐 모양이 서로 같았는데, 모두가 신라 사람이라는 표시였던 듯하다. 황금의 나라, 신라는 마립간이 다스리던 시기였다.

 

 

장송은 무덤에서 시작된다.

 

신라의 돌무지덧널무덤[積石木槨墳]은 나무로 널과 덧널을 짜고, 그 주위에 강돌로 돌무지를 쌓고, 그 위에 흙을 높게 덮은 무덤이다. 나무로 짠 널과 덧널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썩어 내려앉는다. 돌무지 역시 덧널이 썩으면서 내려앉는다. 봉분은 흙을 켜켜이 다져 쌓지 않았으므로 표면에 따로 찰흙을 입히지 않으면 금방 흘러내릴 수 있다. 그러므로 돌무지덧널무덤은 생전에 만들어 두기 어렵고, 그러한 증거가 지금까지 발견되지도 않았다.

황남대총에는 봉분이 두 개인데, 그 이유는 약간의 시차를 두고 돌무지덧널무덤 2기를 잇대어 만들었기 때문이다. 발굴조사 결과에 따르면 왕을 모신 남분을 먼저 만들고, 이후에 왕비를 모신 북분을 남분에 붙여 만들었다. 황남대총은 신라 돌무지덧널무덤 중에서 가장 큰 규모의 쌍무덤이다.

 

 

죽은 자의 무덤 위에서 새로이 이어가는 산 자의 권력

 

마립간시기의 신라 사람들은 이승과 저승이 이어져 있다고 여겼다. 이를 계세사상(繼世思想)이라고 한다. 아울러 죽은 조상의 권위는 죽어서도 금방 사라지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무덤에는 생전에 지녔던 권위를 상징하는 물건과 음식을 가득 바쳤다. 저승에서의 삶도 풍족해야 하기에, 이에 따른 재화의 엄청난 손실은 현실에서 마땅히 감내해야 할 의무였다. 산 자는 이 모든 정성을 다하고 나서야 조상의 권위를 물려받을 수 있었다. 계승자는 때때로 시조 사당을 찾아 물려받은 권위를 모든 이에게 각인시켰다. 이로써 산 자는 무덤에서 권력을 이어받았고, 거대한 왕릉은 기념물이 되었다.

황남대총에는 왕과 왕비의 지위를 상징하는 수많은 부장품이 묻혔다. 대부분의 장신구는 황금으로 만들었다. 귀금속과 금동으로 꾸민 큰 칼과 여러 벌의 말갖춤, 그리고 금그릇과 은그릇도 권위를 드러내는 물품들이다. 무력은 여러 자루의 큰 칼과 유독 크고 긴 창, 수많은 화살로 나타내었다. 재력은 여러 개의 큰 독에 가득 담아 둔 곡식과 음식, 엄청난 물량의 덩이쇠로 드러내었다. 농사와 대장간에 쓰는 연모는 백성을 먹여 살릴 생산을 장악하고 있다는 뜻으로 넣었다. 왕실을 더욱 빛나게 한 주변 나라와의 교류는 유리그릇을 비롯한 희귀한 외국 물품으로 대신하였다. 넉넉한 일상은 갖가지 음식과 쇠솥을 비롯한 주방도구, 칠기와 수많은 질그릇으로 드러나게 하였다. 이렇듯 왕릉은 저승의 궁전에 걸맞게 꾸려졌다.

 

황남대총의 주인공은 누구일까

 

황남대총에서 확인된 문화적 요소는 많은 부분이 고구려와 직・�간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이는 신라와 고구려가 서로 잘 지내던 4세기 후엽부터 5세기 중엽 사이에 황남대총이 만들어졌음을 의미한다. 이 기간동안 내물왕, 실성왕, 눌지왕이 세상을 떠났다. 따라서 황남대총 남분의 주인공은 이 세 명의 왕 가운데 한 사람으로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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