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 고전 : 논어, 맹자, 대학, 춘추 이야기
논어(論語)
《논어》(論語)는 공자와 그 제자들의 대화를 기록한 책으로 사서의 하나이다. 저자는 명확히 알려져 있지 않으나, 공자의 제자들과 그 문인들이 공동 편찬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한 사람의 저자가 일관적인 구성을 바탕으로 서술한 것이 아니라, 공자의 생애 전체에 걸친 언행을 모아 놓은 것이기 때문에 여타의 경전들과는 달리 격언이나 금언을 모아 놓은 듯한 성격을 띤다. 공자가 제자 및 여러 사람들의 질문에 대답하고 토론한 것이 '논'. 제자들에게 전해준 가르침을 '어'라고 부른다.
현재 논어는 전20편, 482장,600여 문장으로 전해 내려 오고 있다. 서술방식과 호칭의 차이 등을 기준으로 앞의 열 편을 상론(上論), 뒤의 열 편을 하론(下論)으로 구분하여 앞의 열 편이 더 이전 시대에 서술된 것으로 보는 견해가 일반적이다. 각 편의 이름은 그 편 내용의 첫 두 글자를 딴 것으로 특별한 뜻이 있는 것은 아니다.
역사
공자의 삶과 행동과 사상을 이해하기 위해 가장 널리 읽어온 책이 ≪논어≫다. 정확히 누가 언제 이 책을 만들었는지에 대해서는 아직 정설이 없다. 하지만 ≪논어≫를 읽어본 사람이면 누구나 이 책이 공자가 죽은 뒤 그의 제자들이 스승의 말씀과 행적을 더듬고 자신들의 얘기를 첨가해 만든 것임을 알 수 있다. 공자 사후 그의 제자들은 여기저기 흩어져 대부분 교육에 종사했는데, 여러 곳에서 스승의 말을 죽간 등에 기록해 학생들을 가르칠 때 쓰고 이것들을 나중에 모아서 편찬했을 것이다. 최종 정리는 공자의 가장 나이 어린 제자였던 증삼의 제자들이 했을 것이라는 견해가 유력하다. ≪논어≫의 성립에 의혹을 제기하는 사람은 대부분 ≪좌전≫에서 근거를 찾는데, 최근의 연구 성과에 따르면 ≪논어≫가 ≪좌전≫보다 앞서 성립된 것으로 보인다.
논어는 전한 시대에 처음 출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초기에는 논어라는 명칭 대신 전(傳), 기(記), 논(論), 어(語) 등의 이름으로 불렸고, 지역에 따라 조금씩 다른 판본이 전해지고 있었다. 논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된 것은 전한 (前漢)의 6대 경제 (BC 188 - BC 157 - BC 141) ~ 7대 무제 (BC 156 - BC 141 - BC 87) 기간이라고 하며, 후한에 이르러 현재와 같은 형태로 정리되었다고 한다.
한국에는 삼국시대에 전해진 것으로 추정되며, 3-4세기 경 한성백제시대 목간에 5편인 공야장(公冶長) 편의 주요 내용이 기록되어 남아있다.
논어는 어느 한 시기에 편찬되었다기 보다, 몇 차례에 걸쳐 지어졌다고 보이는데, 첫 번째 공자 사후에 중궁, 자유, 자하 등의 제자가 일익을 주도했고, 두 번째 증자 사후에 유자,민자 등이 일익을 주도했으며, 전국시대 맹자 시기 또는 맹자 사후에 누군가 내용을 첨가하고 보충했다는 것이 정설이다. 이것은 당시 영향력이 있는 인물이었던 관중에 대한 평가가 상론의 팔일과 하론의 헌문에서 다른 서술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 추측할 수 있다. 또한 이것은 관중에 대한 노나라와 제나라의 평가가 서로 나뉘었던 것이 통합되었다는 점에서 노론과 제론을 모두 담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내용
상론 10편과 하론 10편은 문체와 호칭 및 술어 면에서 분명히 차이가 나는데, 상론은 문장이 간략하고 글자수가 짧고 하론은 문장이 길고 글자수가 많다. 또한 상론의 마지막 10편 향당은 공자의 일상 생활을 담아 결말을 내는 셈이어서, 하론 10편의 사실성에 대한 의문이 있다.
공자 사상은 한마디로 하면 인(仁)이다. 공자가 제자들에게 가르친 세부 덕목으로서 지(知, 지혜)와 인(仁, 어짊)과 용(勇, 용기)에서의 ‘인’은 협의의 ‘인’이며, 공자가 내세운 모든 덕목을 총칭하는 개념이 광의의 ‘인’이다.
공자는 법이나 제도보다 사람을 중시했다. 사람을 통해 그가 꿈꾸는 도덕의 이상 사회를 이루려고 했다. 그래서 ‘어짊’을 실천하는 지도자로 군자를 내세웠다. 원래 군주의 자제라는 고귀한 신분을 뜻하는 ‘군자’는 공자에 의해 이상적 인격의 소유자로 개념화되었다. 군자는 도(道)를 추구하고, 도에 입각하고, 도가 통하는 세상을 만드는 존재다. 이 위대한 정치가는 예(禮)로 자신을 절제하고, 악(樂, 음악)으로 조화를 추구한다. 문(文, 문예)을 열심히 공부[學]해 훌륭한 군자로 거듭나고, 정치(政治)를 통해 민생(民生)을 안정시키고 도덕의 이상을 실현해야 한다. 덕(德)과 의(義)가 사회의 중심 가치가 되는 자신의 이상 사회를 끝내 성공시키지는 못했지만, 공자는 지난한 삶의 역정 속에서도 도덕 사회의 구현이라는 처음의 꿈을 끝까지 버리지 않았는데, 이 꿈이 녹아 있는 책이 ≪논어≫다.
子曰:「學而時習之,不亦說乎?有朋自遠方來,不亦樂乎?人不知而不慍,不亦君子乎?」
“공자가 말하기를: "배우고 틈나는대로 익히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 벗이 있어 멀리서 찾아오면 또한 즐겁지 아니하겠는가.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아니하여도 노여워하지 아니하면, 또한 군자가 아니겠는가."
주석서
논어는 수많은 주석서가 있다. 하안의 논어집해를 "고주"라 하고 주희의 논어집주를 "신주"라 하여 중요하게 여긴다. 조선의 정약용이 지은 논어고금주(論語古今注)에서는 고주와 신주에서 각기 보이는 폐단을 극복하고 보다 합리적이고 공자의 원의에 가까운 해석을 하려는 노력을 엿볼 수 있다. 특히 당시 조선에서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던 오규 소라이 그리고 이토 진사이 등 일본 유학자들의 주석에까지 고루 시야를 넓힌 점은 정약용의 유연하고 개방적인 사고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영향
공자 시대 이후로 논어는 중국의 철학자들과 가치관에 깊은 영향을 끼쳤고, 이후 동아시아에도 영향을 미쳤다. 논어는 유교 경전의 다른 세 책과 함께 사서라고 불리며 유교의 기본 가치관인 "예, 의, 충, 인(禮、義、忠、仁)" 이라는 유교적 인본주의를 가르쳐왔다.
광동의 과거 시험장(1873년)
거의 2천년 동안 논어는 중국의 학자들이 배우는 기본 과정이 되어왔는데, 공자의 저작을 공부하지 않은 사람은 도덕적으로 바르고 학식이 있는 사람으로 취급되지 않았다. 중국의 과거 시험은 진나라(265-420)에서 시작되어 청나라 말기까지 지속되었는데, 과거 시험에서는 유교경전을 강조하여 수험생들이 공자의 말을 인용하여 그들의 글에 어떻게 사용하였는지 평가하였다.
논어는 많은 언어로 번역되었는데, 영어로는 아서 웨일리와 찰스 뮬러, 그리고 윌리암 수딜의 번역이 가장 유명하다. 일찍이 16세기 후반에 논어의 일부는 예수교 중국 선교사들에 의하여 라틴어로 번역되었다.
볼테르와 에즈라 파운드는 열 번째 향당편에서 공자가 단순한 사람이었는지 명확하게 보여준다고 지적했다. 근래에 논어를 영어와 프랑스어로 번역한 시몬 레이즈는 이 어록은 유명한 사람의 개인의 삶을 묘사한 첫 기록일 것이라고 말했다. 엘리아스 카네티도 공자의 논어가 가장 오래된 지적이고 영적인 완벽한 개인의 초상이라고 말하며 향당편은 근대적인 책과 같이 감동을 주는데, 모든 것을 담고 있으면서도 정말 중요한 것은 빼놓고 서술하고 있기 때문이다라고 평했다.
논어는 유가(儒家)의 성전(聖典)이라고도 할 수 있다. 사서(四書)의 하나로, 중국 최초의 어록(語錄)이기도 하다. 고대 중국의 사상가 공자(孔子)의 가르침을 전하는 가장 확실한 옛 문헌이다. 공자와 그 제자와의 문답을 주로 하고, 공자의 발언과 행적, 그리고 고제(高弟)의 발언 등 인생의 교훈이 되는 말들이 간결하고도 함축성있게 기재되었다.
《논어》라는 서명(書名)은 공자의 말을 모아 간추려서 일정한 순서로 편집한 것이라는 뜻인데, 누가 지은 이름인지는 분명치 않다. 편자에 관해서는 숭작참(崇爵讖)의 자하(子夏) 등 64제자설(六四弟子說), 정현(鄭玄)의 중궁(仲弓) ·자유(子游) ·자하(子夏)설, 정자(程子)의 증자(曾子) ·유자(有子)의 제자설, 그 밖에 많은 설이 있으나 확실치 않다.
현존본은 <학이편(學而篇)>에서 <요왈편(堯曰篇)>에 이르는 20편으로 이루어졌으며, 각기 편 중의 말을 따서 그 편명(篇名)을 붙였다. <학이편>은 인간의 종신(終身)의 업(業)인 학문과 덕행을, <요왈편>은 역대 성인의 정치 이상을 주제로 하였다. 이처럼 각 편마다 주제가 있기는 하나, 용어가 통일되지 않았고, 같은 문장의 중복도 있다. 특히 전반(前半) 10편을 상론(上論), 후반을 하론(下論)이라고 하는데, 그 사이에는 문체나 내용에 약간의 차이가 있다.
성립
《맹자(孟子)》나 《순자(荀子)》 등 옛 문헌에는 공자의 말이 ‘공자왈’ ‘중니왈(仲尼曰)’ ‘전왈(傳曰)’이라고 인용되었으나, 그것이 논어에 기재된 것과 반드시 같은 것도 아니며, 또 논어가 성립되었다는 것을 제시하는 기술(記述)도 없다. 그러나 한(漢)나라 때에는 제(齊)나라 학자의 <제론(齊論)> 22편, 노(魯)나라 학자의 <노론(魯論)> 20편이 전해졌고, 따로 공자의 옛집의 벽 속에서 <고론(古論)> 21편이 나왔다.
한(漢)의 장우(張禹)는 제 ·노 양론을 교합(校合)하여 <장후론(張侯論)> 20편을 만들었고, 이어 후한(後漢)의 정현(鄭玄:127~200)은 이 세 가지와 고론을 교합하였다. 이 정현본(鄭玄本)을 바탕으로 위(魏)의 하안(何晏)이 《논어집해(論語集解)》라는 주석서(註釋書)를 저술함에 이르러 현존본의 원문이 결정되었다. 근대에 와서 내외의 학자들이 공자의 가르침의 근본을 추구하여, 여러 각도로 논어의 문헌을 비판하고, 논어성립까지의 전승계통(傳承系統)을 탐색하였다. 한편 한(漢)나라까지의 증보(增補)의 경과를 더듬는 등 많은 가설(假說)을 내세우고 있으나, 아직 정설(定說)은 수립되지 않았다.
내용
엄밀히 말하면, 어느 정도로 공자 본래의 가르침을 전하는가가 문제다. 하지만 이것을 이해하는 데에는 논어가 불가결한 문헌임에는 틀림없다. 논어의 문장은 간결하면서도 수사(修辭)의 묘를 얻어 함축성이 깊다. 또한 문장간의 연계가 없는 듯하면서도 깊이 생각해보면, 공자의 인격으로 귀일(歸一)되어 있다.
공자의 불요불굴(不撓不屈)의 구도(求道)의 태도, 관용(寬容) 중에서도 사람을 이상선(理想善)인 ‘인(仁)’으로 이끌고야 마는 교육, 그리고 공자를 중심으로 하여 겸허(謙虛)한 안연(顔淵), 직정(直情)의 자로(子路), 현명(賢明)한 자공(子貢), 그 밖의 제자들의 각기 개성에 따른 상호간의 독려 등, 중국에서는 처음으로 인도주의(人道主義) 사상과 자각자율(自覺自律)의 도덕설(道德說)을 제시한 공자학단(孔子學團)의 활동이 잘 묘사되었다. 모든 내용이 인생 경험의 깊은 영지(英智)의 결정(結晶)으로 음미할수록 가치가 있는 교훈들이다.
전래
유교의 경서는 많지만, 그 중에서 논어는 효경(孝經)과 더불어 한(漢)나라 이후에 지식인의 필수 서책이 되고 있다. 그 해석의 전거(典據)가 된 것은 《논어집해(論語集解)》(古註라고도 한다)이다. 송(宋)나라 때에는 유교의 공맹사상(孔孟思想)에 의한 집주 통일화(集註統一化)가 이루어졌다.
특히 주희(朱熹:1130~1200:주자)가 《사서(四書)》로 추존(推尊)하고, 이를 통일하여 《논어집주(論語集註)》(新註라고도 한다)를 저술한 후에는 이것이 고주에 대체되었다. 중화민국 초기에는 구문화(舊文化) 개조를 위하여 공교(孔敎) ·논어 비판이 행하여졌다. 그 후에도 계속되고 있으나, 연구가 지속되는 것에는 변함이 없다. 한국에도 일찍부터 도래(渡來)되어 한학(漢學)의 성행으로 널리 보급되고, 국민의 도덕사상 형성의 기본이 되었다. 구미(歐美) 각국에도 연구서나 번역서가 많으며, 최근에는 미국에 특히 많다.
맹자(孟子)
《맹자(孟子)》는 사서오경에 속하는 유교 경전이다.
우리 조상들은 아무리 궁벽한 시골에 살더라도 어른이 되면 공자님 말씀, 맹자님 말씀을 예로 들며 자식들을 훈계해 왔다. 그 맹자가 정계를 은퇴한 뒤 말년에 쓴 책이 바로 ≪맹자≫다. 맹자는 공자에 비견되기도 하고, ≪맹자≫는 ≪논어≫의 체제와 비슷하게 만들어져 있지만, 그렇게 된 것은 훨씬 후대의 일이다. 공자가 살아생전인 춘추시대에 벌써 수많은 나라에서 크게 명성을 얻은 탁월한 사상가였음에 비해 맹자는 전국시대의 뛰어난 여러 학자들 가운데 한 사람일 뿐이었다. 공자의 말이 ≪맹자≫에 벌써 최고의 가치를 지니며 인용되었던 데 비해, ≪맹자≫는 한나라 때 잠깐 유행하고 1000년이 흐른 뒤인 송나라 때 와서야 높은 위치를 차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우리나라가 정치적·사회적 이념으로 전면 수용한 유학은 송나라 대 이후의 것이므로 우리의 전통 속에서 맹자는 처음부터 성인의 모습으로 들어왔다고 볼 수 있다.
≪맹자≫는 사후에나 붙이는 시호가 보인다거나 맹자의 행동거지 등을 추측할 어떤 구절도 없는 등 논란이 있지만 대부분의 학자는 맹자가 말년에 제자들과 더불어 만든 책이라고 추측한다. 비록 사건별, 주장들의 난립 형식으로 구성되긴 했지만 책 전체를 볼 때에는 일관된 사유 체계를 읽을 수 있으며, 주장들 사이에 깊은 연관성과 구체성을 띠고 있다. 또한 격동의 정치 상황 속에서 ‘인의의 정치’로 시대 정치의 난맥상을 타개하려는 정치사상 교과서로서의 역할에 충실한 저작이다.
구성
맹자는 아래의 7편으로 구성된다.
양혜왕
맹자가 제후국을 돌아다니며 자신의 뜻을 피력하는 부분으로 상편은 7장, 하편은 16장으로 되었다. 그는 양혜왕(梁惠王)에게 왕도정치를 실시하라고 조언하고 있는데 왕은 백성과 함께 즐거움을 누려야 그 즐거움이 오래갈 수 있으며, 왕이라도 잘못하면 왕위에서 물러나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공손추
맹자는 그의 제자인 공손추와 왕도정치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그리고 패도정치를 축출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유가의 의리(義理)를 밝히고 자신의 포부를 나타내었다. 상편은 9장, 하편은 14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반구제기(反求諸己), 호연지기(浩然之氣), 인화(人和)라는 말이 여기에서 유래하였다.
등문공
왕의 국가통치에 대해서 밝히고 있다. 상편은 5장, 하편은 10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왕이 중국 전대륙을 통치하는 천자가 되기 원한다면 먼저 백성이 풍요로운 삶을 살 수 있도록 해야한다고 말한다. 또한 인간에게는 인륜이 가장 중요하니 이를 저버리면 아무리 훌륭한 행실을 해도 무의미하다고 말한다.
이루
상편 28장, 하편 33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자신의 본성을 추구하라고 촉구하고 있는 맹자는 자신을 바르게 할 것을 주장하고 있다.
만장
상하 편 각 9장으로 구성되어 있는 만장은 덕이 천도에 합치하면 도를 얻을 것이고, 어질면 천하사람을 얻을 것이라며 인도(仁道)를 행할 것을 주장하고 있다. 민의가 천의라는 사상과 관직에 나아갈 때에도 때에 맞게 해야한다는 사상을 나타내고 있다.
고자
맹자와 고자가 인성(人性)에 대하여 대화를 한다. 인의(仁義)는 내적인 것이니 구하면 얻을 수 있고, 구하지 않으면 잃어버린다는 것이 주된 내용이다. 상편은 20장, 하편은 16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구차히 살지말고 의로운 삶을 살라고 이야기 한다. 왕도가 쇠퇴하는 것은 제후나 대부가 도를 숭상하지 않기 때문이고, 왕이 백성에게 예의를 가르치지 않고 이용만 하는 것은 백성을 해치는 것이라고 말한다.
진심
백성이 나라에서 가장 귀하고, 학문에는 순서가 있어야 한다는 내용이 주를 이루고 있다. 상편 46장, 하편 38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세속적인 욕망에 앞서 도덕적으로 깨끗한 삶이 군자로서 더 추구해야할 것이며, 성인의 도를 배우는 데에 순서가 있으며 꾸준히 노력하면 이룰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맹자는 공자가 죽고 나서 100년 정도 뒤에 태어났다. 공자나 맹자나 정확하게 언제 태어나서 언제 죽었는지 확인할 방법은 없다. 가능한 방법은 『논어』나 『맹자』에 실려 있는 그들의 행적을 추적해서, 즉 그들이 만났던 사람들이나, 목격했거나 관련되었던 사건들을 참고해서 연대를 추정하는 것이다.
공자는 대략 기원전 551년경에 태어나 기원전 479년경에 죽었으며 맹자는 기원전 372년경에 태어나 기원전 289년경에 죽은 것으로 추정된다. 역사가들에 의해 공자와 맹자가 살았던 시대는 춘추전국(春秋戰國)시대로 분류된다. 공자는 춘추시대에 살았으며 맹자는 전국시대에 살았다. 춘추시대는 기원전 770년에서 기원전 403년까지이며 전국시대는 기원전 403년에서 진나라가 천하를 통일하기 전인 기원전 222년까지이다.
기원전 770년은 주(周) 왕실이 견융(犬戎)이라는 종족에게 쫓겨 수도를 동쪽인 낙양(洛陽)으로 옮긴 해이다. 그 전까지 중국은 주 왕실을 중심으로 많은 봉건국가들이 위성처럼 분립해 있었으며 이들은 혈연과 제사와 군사에 의해 주 왕실에게 종속되어 있었다. 주 왕실이 동쪽으로 천도할 즈음을 전후해서 이러한 봉건제는 붕괴되기 시작했다.
춘추시대는 패자(覇者)들의 시대였다. 패자는 주 왕실의 명목만은 존중하면서 실상은 무력으로 다른 제후들을 정복했고 그럼으로써 천하를 다스렸다. 차례로 천하를 제패했던 제(齊)나라의 환공(桓公), 송(宋)나라의 양공(襄公), 진(晉)나라의 문공(文公), 진(秦)나라의 목공(穆公), 초(楚)나라의 장왕(莊王)은 5패로 불린다. 춘추시대만 해도 ― 제후국들은 실제적으로 독립한 나라였지만 ― 패자들은 근왕(勤王)의 기치를 내걸었다.
전국시대에 들어서면 주나라는 거의 존재감을 상실하고 제후들도 더 이상 근왕의 명분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춘추시대에 170여개에 달했던 제후국들은 동맹과 연맹의 결성, 외교적․군사적 전쟁을 통해 7개의 제후국으로 정리되었다. 즉 전국칠웅(戰國七雄)이라 불리는 한(韓)․위(魏)․조(趙)․연(燕)․제(齊)․초(楚)․진(秦)이 이들이다. 이들은 천하를 제패한다는 한 가지 목표를 두고 약육강식의 전쟁을 전개했다.
공자는 주 왕실 중심의 봉건제를 이상적인 제도로 생각했다. 공자를 시조로 하는 유가의 눈에서 보면 이러한 춘추전국시대는 인륜이 무너져가는 윤리․정치적 혼란기였을 뿐이지만, 객관적으로 보면 철기와 우경의 보급으로 인한 생산력의 증대와 함께 문화면에서도 비약적인 발전이 이루어진 시대였다. 특히 전국시대에는 국가차원에서 생산력을 높이려는 정책도 시도되었으며, 한편에서는 상인의 세력이 커져서 상인으로서 부에 의해 진의 재상까지 된 여불위(呂不韋) 같은 사람도 등장했다.
전국시대는 또한 제자백가(諸子百家)의 시대였다. 사회의 혼란 속에서, 어떻게 살아갈 것이며 어떻게 세상을 구제할 것인가에 관한 각종 사상이 태어났으며, 사상을 통제할 권력이 존재하지 않았으므로 중국사상사에서 가장 자유롭고 다채로운 논쟁이 전개된 시기였다. 법가, 도가, 농가, 종횡가, 명가, 음양가, 잡가 등을 표방하는 수많은 학자들이 왕성한 사상활동을 펼치고 있었으며 맹자는 그들 가운데 한사람이었다. 맹자는 공자의 제자로 자처하면서, 다른 학파들을 비판하고 때로는 그들과 논쟁하면서 유학의 골격을 완성해갔다.
맹자孟子, 즉 맹선생의 성은 맹(孟)이며 이름은 가(軻)이다. 추(鄒)라는 지방 출신인데 추는 공자가 태어난 노(魯)나라에 속한 지방이라는 설도 있고 독립된 나라라는 설도 있다. 어느 쪽이든 공자의 고향인 곡부(曲阜)에서 가까운 곳이었다.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교육에 열심인 어머니 슬하에서 자랐다. 어머니가 아들의 좋은 교육환경을 위해 이사를 세 번 했다거나 중도에 공부를 그만두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아들에게 명심시키기 위해 자신이 짜던 베를 잘랐다는 이야기들이 전해온다.
맹자는 인의(仁義)의 덕을 바탕으로 하는 왕도정치(王道政治)가 당시의 정치적 분열상태를 극복할 유일한 길이라고 믿고, 왕도정치를 시행하라고 제후들에게 유세하고 다녔다. 기원전 320년경에 양(梁)나라(하남성 개봉시)에 가서 혜왕에게 왕도에 대해 유세했으나, 일이 년 뒤에 혜(惠)왕이 죽은 뒤, 아들인 양(襄)에게 실망해서 산동에 있는 제(齊)나라로 옮겼다. 그곳에서 제나라의 선(宣)왕에게 기대를 걸고 칠팔 년을 머물렀으나, 역시 자신의 이론이 채용되지 않자 떠날 수밖에 없었다.
그 뒤 송(宋, 하남성 상구현), 설(薛, 산동성 등현 서남쪽)을 거쳐 일차로 추에 돌아온 뒤, 다시 문공(文公)의 초대를 받아 등(藤, 산동성 등현)으로 갔다. 역시 이상을 실현시키지 못하고 노魯(산동성 곡부현)를 거쳐 고향인 추로 돌아왔다. 당시의 제후들이 필요로 했던 것은 부국강병의 정치술이었다. 그러한 제후들의 현실적 관심과 맞아떨어질 여지가 없었던 맹자의 이론은 어느 제후에게도 채택되지 못했으며, 맹자는 당대에 자신의 이상을 실현시키는 것은 포기해야 했다.
50세가 넘어서 시작했던 편력을 그치고 고향으로 돌아온 것이 70세 가량 되었을 때라고 추정된다. 고향으로 돌아와 제자들과 함께 『시경』과 『서경』, 그리고 공자의 정신에 대해 토론했으며, 그 때 만들어진 책이 오늘날 전해지는 『맹자』7편이다.
대학(大學)
《대학》(大學)은 사서오경의 하나인 유교 경전이다. 본래 《예기》(禮記)의 제42편이었으나, 송나라 시대에 성리학이 확립되면서 사서의 하나로 받아들여졌다.
《대학》의 원작자에 대해서는 정설이 없는데, 주희는 경문 1장을 증자가 지었고, 전문 10장을 증자의 문인이 해설했다고 주장하였다. 경문은 성인이 직접 언급한 진리이며, 전문은 성인에 버금가는 현인이 경을 정리한 것이라는 의미로 경문과 전문이라는 제목을 사용했다. 삼강령을 밝힌 부분을 경문으로, 팔조목을 밝힌 부분을 전문으로 보았다. 주희는 사서체제를 정립하면서 공자(논어) -> 증자 -> 자사(중용) -> 맹자(맹자)의 도통이 필요했고 이 과정에서 대학을 증자의 저서라 하진 못하더라도 증자와 관계있는 책으로 만들었다.
주희가 정이의 설을 따라 3강령 중 ‘親民’을 ‘新民’으로 고치고, 본래 있던 성의·정심·수신·제가·치국·평천하 조 앞에 격물과 치지의 장을 새로 지어 보망(補亡)한 8조목을 만든 이래, 송대 성리학을 존숭하는 이들과 고본 《대학》에 충실하고자 하는 이들 사이에 수많은 논란이 있었다. 왕수인은 ‘친민’이 옳다고 하여 고본 《대학》을 따랐으니, 주자학과 양명학의 차이점 가운데 하나가 된다. 주희는 사서를 대학, 논어, 맹자, 중용의 순으로 읽으라 할 정도로 대학을 중요시했다.
김용옥은 대학을 순자계열의 사상가에 의해 전국시대 사상을 집대성한 책으로 본다. 저술 목적은 스승의 지위를 확립하여 황제의 권력을 제약하고 길을 제시하기 위함이었으며 집필시기는 여불위가 집대성한 여씨춘추의 집필시기와 일치한다고 보고있다.
내용
《대학》은 자기 수양을 완성하고 사회 질서를 이루는 과정을 일목요연하게 이론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 ‘대학’(大學)이라는 의미는 통치자의 학문이라는 설과 인격자의 학문이라는 설로 나눌 수 있다. 주자는 《대학》이 소학(小學)을 마치고 태학(太學)에 입하하여 처음 배우는 개설서라고 했는데, 오늘날 대학교의 기본 교양 교재와 같은 성격이라고 말할 수 있다.
《대학》은 유가 사상의 주요 사상을 체계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 내용을 요약하면 수기치인(修己治人), 곧 자신을 수양한 후에 백성을 다스리라는 것이다. 즉 사회의 지도자는 먼저 자기 자신을 수양하고 책임과 의무를 다한 후에 이를 주변 사회로 넓혀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내용을 삼강령과 팔조목에 담아 내었다.
삼강령
명명덕(明明德) : 자신의 밝은 덕을 밝게 드러내야 한다.
신민(新民) : 자신의 밝은 덕으로 백성을 새롭게 한다.
고본 《대학》에 수록된 용어는 친민(親民) : 백성과 친하게 된다.지어지선(止於至善) : 최선을 다하여 가장 합당하고 적절하게 처신하고 행동한다.
팔조목
격물(格物) : 세상 모든 것의 이치를 찬찬히 따져보는 것 → 고본 《대학》에는 없는, 주희가 새로 지어 넣은 조목
치지(致知) : 지식과 지혜가 극치에 이르게 하는 것 → 고본 《대학》에는 없는, 주희가 새로 지어 넣은 조목
성의(誠意) : 의지를 성실히 다지는 것
정심(正心) : 마음을 바로 잡는 것
수신(修身) : 자신을 수양하는 것
제가(齊家) : 집안을 화목하게 이끄는 것
치국(治國) : 나라를 잘 다스리는 것
평천하(平天下) : 세상을 화평하게 하는 것
중국에서 유교가 국교로 채택된 한대(漢代) 이래 오경이 기본 경전으로 전해지다가 송대에 주희(朱熹)가 당시 번성하던 불교와 도교에 맞서는 새로운 유학(性理學)의 체계를 세우면서 ≪예기≫에서 ≪중용≫과 ≪대학≫의 두 편을 독립시켜 사서 중심의 체재를 확립하였다.
49편으로 구성된 ≪예기≫ 중 제42편이 ≪대학≫에 해당한다. 주희는 ≪대학≫에 장구(章句)를 짓고 자세한 해설을 붙이는 한편, 착간(錯簡 : 책장 또는 편장의 순서가 잘못된 것)을 바로잡았다.
그는 전체를 경(經) 1장, 전(傳) 10장으로 나누어 ‘경’은 공자(孔子)의 사상을 제자 증자(曾子)가 기술한 것이고, ‘전’은 증자의 생각을 그의 문인이 기록한 것이라고 하였다.
≪대학≫의 저자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는데, 전통적으로는 ≪중용≫과 ≪대학≫이 공자의 손자인 자사(子思)가 지었다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공자세가 孔子世家≫에는 송나라에서 급(伋 : 子思)이 지었다고 기록되어 있고, 한나라 때 학자인 가규(賈逵)도 공급(孔伋)이 송에서 ≪대학≫을 경(經)으로 삼고 ≪중용≫을 위(緯)로 삼아 지었다고 하며, 정현(鄭玄)도 이 설을 지지하고, 송대의 정호(程顥)·정이(程頤)는 “공씨가 남긴 책”이라고만 언급하였다.
주희는 전을 “증자의 사상을 그의 문인이 기술한 것이다.”라 하였는데, 자사가 바로 증자의 문인이기 때문에 그의 주장도 ≪대학≫은 자사의 저작이라는 견해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청대(淸代)에 오면 실증적·고증적으로 검토, 비판하는 학풍이 일어나면서, 종래의 자사 저작설도 비판되어 진한(秦漢) 사이에 또는 전국시대 어느 사상가의 저작이라는 설, 자사가 지은 것이 틀림없다는 설 등이 있으나, 유가의 학자가 지은 것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대체로 일치한다.
≪대학≫의 내용은 삼강령 팔조목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강령은 모든 이론의 으뜸이 되는 큰 줄거리라는 뜻을 지니며, 명명덕(明明德)·신민[新民·親民]·지어지선(止於至善)이 이에 해당되고, 팔조목은 격물(格物)·치지(致知)·성의(誠意)·정심(正心)·수신(修身)·제가(齊家)·치국(治國)·평천하(平天下)를 말한다.
≪대학≫은 ≪예기≫ 가운데 한 편의 형태로 우리 나라에 들어왔을 것이라 추측된다. 7세기경의 신라 임신서기석(壬申誓記石)에는 ≪예기≫를 ≪시경≫·≪서경≫과 함께 습득할 것을 맹세하는 화랑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372년(소수림왕 2)에 세운 태학(太學)을 관장한 사람이 오경박사(五經博士)였으니, 고구려에서도 일찍부터 ≪예기≫가 교수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통일신라기에도 국학 3과정과 독서삼품과의 과목으로 ≪예기≫는 중요시된 경전이었다.
고려 유교의 학풍은 경전중심이어서 예종 때의 국학칠재와 사학(私學) 등에서도 경연의 주요과목으로 ≪예기≫가 자주 강론되었다. 조선 태조는 ≪대학≫의 체재를 제왕의 정치귀감으로 편찬한 송대 진덕수(眞德秀)의 ≪대학연의 大學衍義≫를 유창(劉敞 : 초명은 敬)으로 하여금 진강(進講)하게 하였다. 그 뒤 ≪대학연의≫를 어전에서 강의하는 전통이 마련되었다.
주희가 독립시킨 ≪대학≫은 1419년(세종 1) ≪성리대전≫·≪사서오경대전≫이 명나라로부터 수입될 때 함께 들어왔다.
주희의 ≪대학장구≫에 대한 최초의 비판은 이언적(李彦迪)에서 비롯된다. 그는 ≪대학장구보유 大學章句補遺≫에서 주희의 일경십전(一經十傳)을 일경구전(一經九傳)으로 산정(刪正)하면서 편차의 오류를 지적하였다.
주자학이 관학으로 정립되고 성현의 편언척구(片言隻句)가 신성시되던 조선 중기에는 주희의 체계를 긍정한 바탕에서 나름의 해석을 모색하는 데 그쳤다.
이와 같은 고식적인 풍토에 반발한 윤휴(尹鑴)는 ≪대학고본별록 大學古本別錄≫과 ≪대학전편대지안설 大學全篇大旨按說≫에서 주희의 방법론적 준거였던 ‘격물’이 지적 탐구가 아니라, 종교적 경건으로 해석되어야 하며, 본래 ≪예기≫ 안에 있던 ≪대학고본≫이 아무런 착간도 없는 정본(定本)임을 주장하였다.
박세당(朴世堂)은 ≪대학사변록 大學思辨錄≫에서 철저한 고증에 의해 ≪대학≫이 복원되어야 하며, 주희가 가한 해석이 지나치게 형이상학적이고 고답적이라 비판하면서, 구체적 실천의 관점을 강조하였다.
정약용(丁若鏞)은 정조와의 문답을 정리한 ≪대학강의 大學講義≫, 그리고 ≪고본대학≫에 입각해 ≪대학≫ 본래의 정신을 탐색한 ≪대학공의 大學公議≫를 저술해 명명덕·신민만으로도 강령이 될 수 있으며 격물·치지는 팔조목에 들 수 없다 하여, 격물·치지에 입각한 성리학적 사유의 재검토를 촉구하기도 하였다.
삼국시대에 ≪예기≫는 이미 유포되고 있었던 것이 분명한데, 그 유입과 전파경로는 알 수 없다. 1045년(정종 11) 왕이 당나라의 공영달(孔穎達)이 찬한 ≪신간예기정의≫ 한 질을 어서각(御書閣)에 두고 나머지는 문신에게 나누어주었다는 기록이 있다.
주희의 ≪대학장구≫가 처음 반입된 것은 고려 공민왕 19년(1370) 명나라에서 ≪대통력≫·≪육경≫·≪통감≫과 함께였다는 기록이 ≪고려사≫에 있다.
1423년(세종 5) ≪대학≫을 포함한 사서오경 10부를 성균관·오부학당에 분급(分給)하였고, 1435년 각 도의 수령에게 명하여 그것을 향교에 비치하라고 하였다. 개인이 자비로 갖추고자 할 때는 종이를 보내면 주자소에서 찍어주게 하였다.
15세기 말 함경도·평안도·제주도에까지 ≪대학≫이 보급되었다. 선조 때부터 진행된 언해사업은 1576년(선조 9) 이이(李珥)가 왕명을 받아 13년 만에 완성, 간행하여 도산서원에 하사되었으며, 1605년에 재반포되어 널리 읽혀지게 되었다.
춘추(春秋)
《춘추》(春秋)는 공자(孔子)가 노나라 사관이 저작한 역사서에 자신의 글을 적어서 다시 편찬한 노나라의 역사서이다. 맹자(孟子)는 《춘추》가 등장한 후에 간신적자들이 떨었다고 할 만큼 이 책이 엄중한 역사의 평가가 담겨있으며, 대의 명분을 강조한 역사서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삼국지》의 관우와 두예(杜預)는 평생을 가지고 다니면서 익혔다고 하는 책이기도 하다.
《춘추》라는 책 이름은 일년을 춘하추동으로 나누어 역사를 기록하였기에 나온 이름이다. 필체가 매우 엄중하였으며, 대의 명분을 강조한 역사서이다. 춘추대의라 함은 《춘추》에서 내린 엄중한 대의명분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그래서 춘추필법이라 하면 엄중한 역사적 평가를 내리는 글쓰기 법이라는 뜻이다.
전통적으로 유교에서는 《춘추》의 저자가 공자였다고 전해진다. 다만 시대마다 학자들이 달리 주장하여 한결같지 않다.
최초로 공자가 《춘추》를 지었다고 말한 사람은 맹자이다. 맹자는 요(堯)임금으로부터 현재까지의 혼란 했던 역사를 말하고, 주나라의 쇠퇴하는 난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공자가 《춘추》를 만들었고, 그 문장에는 역사가 기록되어있지만, 그 안에 공자의 이상인 도리를 담았다고 했다.
전한(前漢)의 역사가 사마천(司馬遷)이 지은 사기(史記)에도 비슷한 기술이 있어, 공자가 노나라의 역사서인 원본 《춘추》에 자신의 글을 첨가하여 《춘추》를 지었다고 추정한다. 이와 같이 전한시대 춘추학에서는 오로지 《춘추》에서 공자의 숨겨진 의미를 찾으려고 하는 《춘추공양전》(春秋公羊傳)을 근거하는 공양학이 융성하였다.
신나라를 거쳐 후한(後漢)이 건국된 이후에 공자를 주공(周公)의 조술자(祖述者)로 하는 고문학이 융성하였고, 《춘추좌씨전》에 을 그 것을 해석하는 학문이 나타났다. 《춘추》를 주공의 전통을 계승했던 노나라의 사관이 쓴 노나라의 사기를 그 자체를 보고 공자는 말하였지만 적지 않았다는 것을 조술했다고 하는 견해가 일반적이었다.
당나라 시대가 되자 유지기(劉知幾)의 《사통》(史通)을 시작으로 《춘추》를 의심하는 주장도 나타나기 시작했다. 북송의 왕안석(王安石)은 《춘추》의 내용은 공자가 숨긴 의미가 나타나 있는 것이 아니고, 단순한 문장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공자가 숨긴 의미를 찾겠다면서 대립은 계속되었다.
청나라 시대가 되자 상주학파(常州學派)가 다시 한나라 시대의 공양학을 연구하여 《춘추》를 포함한 육경의 편집자로 공자를 제시했다.
그 후, 근대가 되어서 고사변(古史辯)을 주로 삼는 의고파(擬古派)가 나타나 공자와 《춘추》의 관계를 완전하게 부정했다. 현재는 공자의 저작이라는 강력한 주장은 없지만 어떠한 관계를 인정하는 것과 완전히 관계없다고 하는 것의 두가지 의견이 있다.
《춘추》 주석서
《춘추》는 경문으로 된 단독본이 현존하고 있지 않다. 일반적으로 《춘추》(춘추경)로 불리고 있는 것은 전국시대부터 전한시대에 걸쳐 제작된 전(傳)이라 불리는 주석서로 불린 책으로 전해진 것들이다. 현존하고 있는 전(주석서)은 《춘추좌씨전》, 《춘추공양전》, 《춘추곡량전》 등 3 종류가 있으며, 이들을 춘추삼전이라 부른다.
이 삼전이 전하는 각각의 춘추에는 약간의 차이가 있다. 언급하는 연대도 《공양전》, 《곡량전》은 애공 12년까지이고, 《좌씨전》이 애공 14년까지이다. 어느 전을 선택하는가에 따라서 주장이 달라서 역대 중국 왕조에도 논쟁이 되었다. 초기 논쟁에서는 한나라 시대의 논쟁이 유명하다.
춘추학
《춘추》는 간결하게 된 연표와 간단하게 된 문체로 쓰여있어 문장에는 특별한 사상은 들어가 있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후세에 공자의 사상이 본문의 여러 곳에 숨겨져 있다고 하는 견해가 일반적이었다(춘추필법). 그렇게 《춘추》에서 공자의 사상을 읽으려고 하는 춘추학이 일어났다.
전한 무제때에 공양전에 의거하는 춘추학을 내건 동중서는 《춘추》를 법가 사상의 통치 원리를 나타내는 책이라 주장하였다. 그 후, 오경박사가 설치되어 《공양전》, 《곡량전》을 연구하는 학관을 세웠고, 신나라 때에는 유흠(劉歆)이 《좌씨전》을 연구하는 학관을 세웠다. 후한 대에는 《좌씨전》을 학관에 유지했음에도, 학자들이 주로 《공양전》을 연구를 하였다. 결국 《좌씨전》을 복건(服虔)이 훈고학에 근거하여 주석을 만드는 등, 《공양전》을 연구하는 공양학을 압도하였다. 이에 대항하여 공양학에서는 하휴(何休)가 주석을 붙여 《춘추공양해고》를 만들었지만, 서진의 두예(杜預)가 《춘추》 경문과 《좌씨전》을 하나로 합쳐서 주석을 단 《춘추경전집해》를 만들었으며, 이것이 이후 춘추학의 기본이 되었다. 당나라 시대에 《춘추경전집해》을 바탕으로 《춘추정의》(春秋正義)가 만들어졌다. 그러나, 당나라 이후에는 삼전(특히 《좌씨전》)은 《춘추》의 주석으로는 부정적으로 생각되어, 송나라 시대에는 삼전을 배척하고 새로운 주석이 만들어졌다.
오경(五經) 가운데 하나이다. 경문(經文)이 1,800여 조(條), 1만 6500자(字)로 이루어진 최초의 편년체(編年體) 역사서로서, 춘추 시대 노(魯)나라 은공(隱公)으로부터 애공(哀公)에 이르기까지 12공(公) 242 년간의 기록을 담고 있다. 본래는 단행본이었지만 지금은 주석서인 춘추삼전(春秋三傳 : 公羊傳·穀梁傳·左氏傳)의 부속 형태로 전하고 있다.
‘춘추’라는 말은 시간의 추이(推移)를 상징한 춘하추동(春夏秋冬)의 약어로서 ‘일 년간(一年間)’이라는 뜻인데, 본래는 주 왕조(周王朝) 치하 각 제후국의 독자적인 편년사를 가리키는 통칭이었으며, ≪오월춘추 吳越春秋≫·≪여씨춘추 呂氏春秋≫·≪십육국춘추 十六國春秋≫ 등에서도 그러한 사실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춘추≫는 본래 노나라의 사관(史官)이인기록한 궁정 연대기(宮廷年代記)였는데, 여기에 공자(孔子)가 독자적인 역사 의식과 가치관을 가지고 필삭(筆削)을 가함으로써 단순한 궁정 연대기 이상의 의미를 지니게 된 것이다.
유가의 문헌 가운데 ≪춘추≫에 관한 언급이 최초로 보이는 것은 ≪맹자≫ 등문공하(滕文公下)·이루하(離婁下)로서, 군부(君父)를 시해하는 난신 적자(亂臣賊子)가 배출되는 혼란기에 공자가 명분을 바로잡고 인륜을 밝혀 세태를 바로잡고자 ≪춘추≫를 지었다고 하는 제작 동기가 서술되어 있다.
≪순자≫ 권학(勸學)·유효(儒效)에서는 처음으로 ≪춘추≫를 경(經)으로서 다루고 있다. 이로부터 한대(漢代)에 이르러 비로소 ≪춘추≫에 담겨져 있는 공자의 미언대의(微言大義)를 밝히려는 춘추학(春秋學)이 성립되었다.
≪춘추≫는 단순한 역사적 사실만을 담고 있는 책은 아니며, ≪춘추≫의 경문 속에서는 사건이나 인물이 공자의 예(禮)와 명분을 중시하는 정치 이념 아래 비판 또는 평가되고 있다. ≪춘추≫는 사건에 의탁하여 대의명분을 피력한 책이며, 공자의 독특한 필법이 경문 전체에 일관하고 있다.
공자의 미언대의는 ≪춘추≫의 서술 방식이나 용어 사용의 일정한 원칙 속에서 드러나고 있는데, 경문의 내용이 지극히 간절(簡切)하여 그것을 해석한 전(傳)을 매개로 하지 않고는 원 뜻을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
이 전을 대표하는 것이 이른바 ‘춘추삼전’으로서 ≪공양전≫·≪곡량전≫·≪좌씨전≫인데, ≪좌씨전≫은 기록된 사실과 그에 관련된 사실(史實)을 통해 역사적·실증적으로 춘추대의(春秋大義)를 구명하고 있으며, ≪공양전≫·≪곡량전≫은 경문을 그 자체로 직접 해석, 기록된 사실의 내재적 의미를 구명하고 있다.
이 춘추삼전에 수록된 경문의 내용은 대부분이 커다란 차이를 보이고 있지는 않지만, 인명·지명·국명 등의 문자상에 있어서 약간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 경문의 시작이 은공 1년(서기전 722)인 것은 같지만, 끝이 ≪공양전≫·≪곡량전≫이 애공 14년(서기전 479), ≪좌씨전≫이 애공 16년(서기전 481)으로 차이를 보이고 있다.
한대에 이르러 ≪공양전≫·≪곡량전≫·≪좌씨전≫의 순으로 학관(學官)에 채택되었으며, 이후 삼전이 금고문학파(今古文學派) 사이의 논쟁 속에서 태학(太學)의 교재로서 우열을 다투었으나, 후한(後漢)의 정현(鄭玄) 이후에는 ≪좌씨전≫이 가장 성행하였다.
현재 13경 속에는 3전이 각각 하나의 경전으로 포함되어 있으며, ≪춘추≫의 경문은 ≪좌씨전≫을 기준으로 하는 것이 보통이다. 우리 나라에서도 삼국시대 이래로 ≪좌씨전≫을 유교의 주요 경전으로 삼고 애독하였다.
≪춘추≫에 관한 주요 주석서로는 당대 육순(陸淳)의 ≪춘추집전석례 春秋集傳釋例≫·≪춘추집전변의 春秋集傳辨疑≫·≪춘추미지 春秋微旨≫, 송대 손복(孫腹)의 ≪춘추존왕발미 春秋尊王發微≫, 왕석(王晳)의 ≪춘추황강론 春秋皇綱論≫, 유창(劉敞)의 ≪춘추권형 春秋權衡≫, 호안국(胡安國)의 ≪춘추전 春秋傳≫, 원대 정단학(程端學)의 ≪춘추본의 春秋本義≫, 조방(趙汸)의 ≪춘추사설 春秋師說≫·≪춘추금쇄시 春秋金鎖匙≫·≪춘추집전 春秋集傳≫, 명대 육찬(陸粲)의 ≪춘추호전고오 春秋胡傳考誤≫·≪춘추호전변오 春秋胡傳辨誤≫, 청대 고동고(顧棟高)의 ≪춘추대사표 春秋大事表≫·≪여도 輿圖≫, 홍양길(洪亮吉)의 ≪춘추십론 春秋十論≫, 혜사기(惠士奇)의 ≪반농춘추설 半農春秋說≫, 모기령(毛奇齡)의 ≪춘추속사비사기 春秋屬辭比事記≫·≪춘추모씨전 春秋毛氏傳≫, 임춘부(林春傅)의 ≪춘추경전비사 春秋經傳比事≫, 장응창(張應昌)의 ≪춘추속사변례편 春秋屬辭辨例編≫, 학의행(郝懿行)의 ≪춘추설략 春秋說略≫, 조탄(趙坦)의 ≪춘추삼전이문전 春秋三傳異文箋≫, 이부손(李富孫)의 ≪춘추삼전이문석 春秋三傳異文釋≫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