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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서경전

일본서기(日本書紀)해제(2)

작성자변강쇠|작성시간20.04.05|조회수199 목록 댓글 0


일본서기(日本書紀)해제

 

 7. 최종 단계의 윤색 


구분론은 구체적인 일본서기의 편찬과정에 대해서도 중요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일본음을 표현하기 위한 한자 사용에서 아음(牙音)과 후음(喉音)을 명확히 구분하고 있는 점으로 미루어 중국인의 손으로 이루어진 것이 분명한 α군에도 오용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이를 근거로 일단 중국인의 손으로 이루어진 α군에 대하여 일본인에 의한 최종 윤색이 이루어진 것으로 판단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한 오용이 두드러지는 것이 효덕기(孝德紀)이다. 특히 대화개신(大化改新)과 관련된 기사에 대하여 대폭적인 윤색이 이루어졌음을 확인할 수 있다.


α군의 이른바 왜습(倭習)이라고 하는 한문의 잘못된 표현 사례는 다음과 같다. 흠명기(欽明紀) 244월조의 而今被誑新羅, 使天皇忿怒, 而任那憤恨, 寡人之過也에서 被誑新羅被新羅誑혹은 爲新羅見誑이 옳다. 비슷한 표현이 今余被遣於百濟者”(흠명기 52월조), “有高名之人四十余, 被放於島”[황극기(皇極紀) 원년 2월 무자조], “其於倭國六縣被遣使者”[대화(大化) 원년 3월 경자조], “復有妻妾, 爲夫被放之日”(대화 23월 갑신조), “被遣大唐使人, 高田根麻呂等”[백치(白雉) 47월조], “于時, 能登臣馬身龍, 爲敵被殺”[제명기(齊明紀) 63월조] 등에도 보인다. ‘爲夫被放이나 爲敵被殺爲夫見放’, ‘爲敵見殺이 옳다. 이처럼 흠명기의 한반도 관계기사나 효덕기에 집중적으로 왜습이 보인다. 그밖에도 종()의 용법, 사역의 용법 등에서 왜습 혹은 오용이 나타난다.


그 중에서도 한반도 관계 기사 중의 대화문, 유서(類書) 등의 한적(漢籍)을 이용한 윤색문, 효덕기의 조칙에서 오용이 두드러진다. 특히 효덕기 조칙의 경우는 일본서기편찬 최종단계의 윤색 과정에서 발생한 것으로 보인다. 대화개신의 사료적 가치와 더불어 백제삼서(百濟三書) 등의 사료 인용 상황에 대해서 최종적인 윤색 문제를 좀 더 신중하게 판단할 필요가 있다.

 8. 출전론 


일본서기연구에서 또 다른 중요한 성과를 거둔 분야는 출전론(出典論)이다. 에도[江戶]시대부터 이미 일본서기문장 중에 한서(漢書)·후한서(後漢書)등 중국 문헌을 인용한 부분에 대한 연구가 이루어졌다(서기집해(書紀集解)). 그러나 고지마 노리유키[小島憲之]는 중국 문헌을 인용한 부분이 원전을 직접 본 것이 아니라, 예문유취(藝文類聚)(100, 624)와 같은 유서류(類書類)를 통한 간접적인 인용일 가능성을 제기하였다(上代日本文學中國文學-, 1962). 그는 일본서기편찬자들이 주로 예문유취를 이용한 것으로 보았으나, 이후 등촌철야(藤村哲也)와 신야지융광(神野志隆光동야치지(東野治之)수문전어람(修文殿御覽)(360, 573), 뇌간정지(瀨間正之)법원주림(法苑珠林)·화림편략(華林遍略)(720, 524, 逸書) 내지 변정론(辯正論)의 이용 가능성을 제기하였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예문유취만 이용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또한 지전창홍(池田昌弘)육도(六韜)·고열녀전(古烈女傳)·회남자(淮南子)·사기(史記)·후한서를 인용한 것으로 보았던 내용도 화림편략(華林遍略)에 의거한 것으로 보는 견해를 제기하였다.


 華林遍略(長文, 逸書) → 『修文殿御覽(短文, 逸書) → 『太平御覽(短文)
             『文思博要(長文)
             『藝文類聚(短文)



대표적으로 일본서기의 첫머리를 장식하는 古天地未剖, 陰陽不分, 渾沌如鷄子, 溟涬而含牙. 及其淸陽者, 薄靡而爲天, 重濁者, 淹滯而爲地, 精妙之合搏易, 重濁之凝竭難. 故天先成而地後定. 然後, 神聖生其中焉이라는 문장의 경우, ‘溟涬而含牙라는 구절은 예문유취에 보이지 않는다. 이에 대해서 수문전어람의 내용을 거의 그대로 계승하고 있는 태평어람(太平御覽)에는 天地未剖, 陰陽不分及其淸陽者, 薄靡而爲天, 重濁者, 淹滯而爲地, 精妙之合搏易, 重濁之凝竭難. 故天先成而地後定이라는 문장이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이 문장은 화림편략에서 인용한 것으로 보기에 이르렀다.


이처럼 일본서기는 문장의 윤색을 위하여 유서(類書)를 활용하였다는 점이 다른 사서들과 구분되는 중요한 특징이다. 또한 유서를 활용하는 과정에서도 오용이 생기고 있으므로, α군에 대한 최종적인 윤색과 더불어 일본서기의 편찬에서 적극적으로 검토해야 할 과제라고 할 수 있다.


한편 일본서기를 편찬하면서 이용한 자료로는 앞에서 언급한 제기구사이외에도 백제삼서(百濟三書)라고 불리는 백제기(百濟記), 백제신찬(百濟新撰), 백제본기(百濟本記)가 있다. 이들 문헌에 대해서는 편찬 시기나 주체 목적 등에 대하여 다양한 논의가 이루어져 왔는데, 계체기(繼體紀)와 흠명기(欽明紀)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일본 측 사료의 부족을 보완하는 자료로서 크게 중시되었다. 중국 측 자료로는 삼국지(三國志)진기거주(晉起居注)가 인용되었지만, 이용 빈도는 극히 낮다.


그밖에 일본 측 자료로는 정부의 기록, 각 씨족의 시조 전승, 지방에 전해지는 전승, 사원의 연기(緣起), 이길련박덕서(伊吉連博德書), 난파길사남인서(難波吉師男人書), 안두숙례지덕일기(安斗宿禰智德日記), 조련담해일기(調連淡海日記)와 같은 개인 일기가 있고, 고구려의 승려 도현(道顯)이 쓴 일본세기(日本世記)라는 책도 인용되어 있다.


9. 일본서기고사기』–씨족들에 대한 전승 


일본서기의 특징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비슷한 시기에 편찬된 고사기와 어떻게 다른지를 파악할 필요가 있다. 두 문헌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고, 그런 차이를 통해서 일본서기의 성격을 선명하게 조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고사기의 내용 중에서 특색을 이루는 것은 일본서기보다 두 배 가까이 많게 씨족에 대해서 다루고 있다는 점이다. 그 중에서도 주목을 끄는 것은 지방호족, 그것도 동국(東國)의 호족들이 많이 등장한다는 점이다. 동해도(東海道) 호족의 경우 7씨족(일본서기)34씨족(고사기), 동산도(東山道) 호족의 경우 8씨족(일본서기)19씨족(고사기), 북륙도(北陸道)의 경우 2씨족(일본서기)6씨족(고사기)이다. 그밖에 산음(山陰), 산양(山陽), 남해(南海), 서해도(西海道)의 경우는 고사기쪽이 많기는 하지만 큰 차이가 없다. 또한 국조(國造)가 지방호족의 대표적인 성()인데, 일본서기에서는 8씨족, 고사기에서는 24씨족이 등장한다. 이는 고사기가 동해도와 동산도의 호족들을 적극적으로 반영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3 일본서기고사기에 보이는 씨족의 수(梅澤伊勢三 정리)

구별/

일본서기

고사기

황계씨족

독립씨족

황계씨족

독립씨족

23

7

44

5

9

14

57

1

4

8

11

7

6

0

24

0

國造

6

2

22

2

0

4

7

0

0

3

0

1

縣主

0

6

1

2

2

6

6

2

0

8

1

3

吉師

0

2

0

1

稻置

0

0

5

0

소계

50

60

177

24

합계

110

201



4 일본서기고사기의 씨족 분류(伊野部重一郞 정리)

 

양쪽 공통씨족

고사기독자

일본서기독자

皇親系 씨족

24

135

21

天神系 씨족

7

23

1

地祇系 씨족

7

0

4

渡來系 씨족

2

0

11

합계

40

158

37



이러한 경향은 임신(壬申)의 난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천무천황(天武天皇)은 미농국(美濃國)을 근거로 하여 동해도와 동산도의 병력을 모아 근강조정(近江朝廷)과 대립하였다. 임신의 난의 참여한 인물들은 사후에는 대체로 본인의 관위를 올려주거나 그 자손까지 배려하고 있는 사례를 일본서기속일본기에서 쉽게 찾을 수 있다. 이름을 확인할 수 있는 경우만 40명에 달하는데, 임신년의 공신(功臣)에 대해서는 나라시대에도 지속적으로 우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4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출자(出自)가 기록된 씨족은 고사기가 많으며(198), 일본서기가 적다(77). 이러한 차이는 고사기가 황친계(皇親系)와 천신계(天神系) 씨족을 많이 기록하고 있기 때문에 비롯된 것이다. 반대로 지기계 및 도래계 씨족은 일본서기와 공통되는 것을 제외하면 고사기에는 독자적인 기록이 없다.


이처럼 고사기일본서기와 비교하면 계보에 대한 관심이 강렬하다. 이는 고사기의 자료가 된 국기·본기의 내용을 상당히 충실하게 채록하고자 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역으로 이들 문헌의 내용이 천황가와 호족들 간의 계보를 중심으로 한 것임을 짐작해 볼 수도 있다. 구체적으로는 호족들의 계보에 관한 기록을 천황가를 중심으로 재구성하려는 작업이었다고 할 수 있다.


고사기에 빈번하게 나타나는 씨족의 출자에 대한 기재는 천무대(天武代)의 씨족 정책에 대한 호족 측의 반응의 산물이라는 견해가 있다. 고사기의 씨족 출자 기재가 천무 9년 이후의 8색성 수여 씨족과 부합·일치되고 있는 점이 근거가 된다. 고사기에 출자가 기재된 총 198씨족 중 신성(新姓) 수여씨족은 74씨족으로, 천무대에 새롭게 씨성이 사여된 171씨족 중 43%에 해당한다.


한편 천무 10년에 사국(史局)을 설치하고, 118월에 관리의 고선법(考選法)에서 족성(族姓)을 중시한다는 조칙을 반포하였다. 또한 고사기에 출자가 보이는 씨족의 성은 단 하나의 사례를 제외하고는 모두 8색성 이전의 것이다. 따라서 씨족의 출자 자료를 제출토록 하고 8색성을 부여하였고, 이때 제출된 자료가 고사기편찬에 반영되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씨족에 관한 기록 중에서도 고사기에는 황별(皇別)과 신별(神別) 씨족에 관한 기재가 많고, 일본서기에는 지기(地祇) 및 번별(蕃別) 씨족이 많다. 특히 고사기에만 독자적으로 전하는 지기 및 번별 씨족은 전혀 없다. 번별 씨족은 바로 한반도와 중국대륙에서 건너간 도래인들을 지칭하므로, 고사기는 도래인에 대해서는 큰 관심이 없었던 셈이다. 이에 대해서 고사기는 황별 씨족에 대한 기록을 중심으로 하고 있는 점에서 일종의 황통보(皇統譜)라고도 할 수 있다.


한편으로 고사기에 보이는 씨족 중에서 임신의 난과 관계가 없거나 사성(賜姓)의 대상이 아니었던 씨족도 적지 않다. 이들 씨족은 기내(畿內)에서는 천성(賤姓)인 자들 혹은 왕권에 예속적인 존재로서, 대화국가(大和國家)의 권력기구 속에서 왕권의 지배와 관련된 전통을 가진 계층이라고 한다,

 

그런 점에서고사기는 천무정권(天武政權)의 지배구조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을 뿐만 아니라, 천무정권의 정치적인 요청 하에 종래의 씨족 계도를 재편성한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 천무 시기의 씨족 정책은 종래의 대호족(大豪族)을 중심으로 한 체제로부터 임신의 난 때 자신에게 협력한 중소호족(中小豪族)을 기반으로 하면서 황실 중심의 정치체제로 이행하고 이를 확립하려는 것이었으며, 그러한 정책에 입각해서 편찬된 문헌이 바로 고사기인 것이다.


10. 일본서기삼국사기 


일본서기가 우리에게 의미를 갖는 것은 삼국사기를 보완할 수 있는 사료이기 때문이다. 아직기(阿直岐왕인(王仁)에 관한 전승, 성왕(聖王)의 불교 전래, 오경박사(五經博士)의 파견 등은 일본서기에만 보이는 내용이다. 또 백제의 가야 지역 진출과 가야의 멸망 등에 대한 기사는 일본서기쪽의 기사가 훨씬 자세하고 관련 내용도 풍부하다. 일본서기의 가치는 한반도 관련기사가 풍부하다는 데 그치지 않는다. 진정한 가치는 일본서기가 고대인에 의해서 편찬된 고대의 사서라는 점에 있다.


삼국사기는 고려시대, 즉 중세인의 시각에서 본 고대의 역사라고 할 수있다. 중세인의 눈에 합리적이지 않은 내용은 기사가 될 수 없었다. 그래서삼국사기에는 시조 신화를 제외한 다른 신화는 실려 있지 않지만, 일본서기1·2권에서 신화를 다루고 있다. 천지의 생성부터 일본열도의 생성, 천손 강림, 신무(神武)의 정벌과 국가 건설 등 실로 다양한 신화가 실려 있다. 나머지 부분에도 신이한 이야기들이 적지 않다. 신의 아내가 된 여자 이야기, 신들이 인간에게 빙의한 이야기, 중애천황(仲哀天皇)이 신탁을 믿지 않아 저주를 받아서 죽은 이야기, 웅략천황(雄略天皇)이 갈성산(葛城山)에서 신을 만난 이야기 등 신과 관련된 이야기로 넘쳐난다. 신을 위대한 인간을 반영한 것으로 보든, 자연의 위력을 나타낸 것이라고 보든 고대적인 사고의 산물인 것은 분명하다.


또한 삼국사기는 정치·군사·외교·내정·자연현상 등에 대한 기사가 중심을 이루고 있고, 사서 편찬의 목적이 감계(鑑戒)에 있다. 이에 비해서 일본서기는 왕족의 연애, 왕위계승을 둘러싼 갈등과 살육, 유력 씨족의 시조 전승, 사건과 관련된 노래 등 무미건조한 역사 기록이 아니라 인간의 삶이 전면에 구체적으로 드러나 있는 이야기들이 많다. 또한 혈연적인 계보가 자세하며 왕위 계승의 원리, 고대인들이 사용한 물품에 관한 기록도 풍부하다. 이런 내용을 통해서 고대인의 삶을 자세히 알 수 있다. 1145년에 완성된 삼국사기720년에 편찬된 일본서기의 차이는 크다. 범위를 넓히면, 일본서기다음에 편찬된 속일본기를 비롯하여 6국사라는 사서가 있어서 삼국사기의 기록보다 훨씬 정밀하다고 할 수 있다. 비유하자면 일본 고대사의 촘촘한 그물망을 통해서 삼국사기의 성근 그물을 보완할 수 있는 것이다.


예를 들면 일본서기를 통해서 지방호족들이 중앙의 대왕에게 여자를 바치는 관행이 광범위하게 존재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를 채녀(采女)라고 하였다. 처음에는 지방호족이 대화정권과 유대관계를 맺기 위하여 여자를 보내 대왕과 혼인을 하여 왕자를 낳기도 하였다. 웅략대(雄略代)에 길비(吉備)의 호족집안 출신인 치희(稚姬)가 반성황자(磐城皇子)와 성천치궁황자(星川稚宮皇子)를 낳은 예를 들 수 있다. 이렇게 지방 호족을 어머니로 둔 왕자들도 왕위계승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지방호족의 위상이 저하되면서 채녀는 궁중에서 시중을 드는 궁녀의 성격으로 변화되어 갔다.


이에 대해서 삼국사기에서도 단편적으로 국가 간의 혼인 혹은 지방호족과 중앙왕실 간의 혼인이 보인다. 백제와 낙랑 간의 혼인, 신라와 가야 간의 혼인, 소지왕과 벽화(碧花)의 혼인 등이 그러한 예이다. 채녀제를 통해서 고대 우리나라의 국가 간, 왕실과 지방호족 간의 혼인을 좀 더 다양하게 파악할 여지가 있다.


다른 예로는 삼국사기에 백제의 관등으로 좌평 이하 16개의 관등이 기록되어 있는 것을 들 수 있다. 그렇지만 관등을 가지고 있는 관인의 이름과 함께 나오는 사례는 제4등인 덕솔(德率)까지다. 그것도 단 한 차례 덕솔 진로(眞老)가 보일 뿐이다. 그 아래 관등을 가진 인물은 삼국사기에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일본서기에는 간솔(杆率나솔(奈率)의 솔위(率位)를 비롯하여 장덕(將德시덕(施德고덕(固德계덕(季德대덕(對德) 등 덕위(德位)를 가진 인물이 보인다. 인명표기에서도 일본서기에는 진모(眞慕사택(沙宅) 등으로 보이는 성들이 기록되어 있는데, 이들 성이 삼국사기에서 진(()로 기록되었을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이처럼 일본서기는 성근 삼국사기를 보완하는 자료로 적극적으로 활용할 필요가 있다.


. 일본서기인용 자료 


일본 고대사 연구에서 가장 기본적인 문헌은 일본서기이다. 일본서기는 천무(天武) 10(681) 제기(帝紀)·상고제사(上古諸事)기정(記定)’사업을 시작으로 사인친왕(舍人親王) 등에 의해 720년에 총 30권으로 완성되기까지 많은 자료가 이용되었다.


일본서기편찬에 이용된 자료는 제기(帝紀)상고제사(上古諸事), 씨족의 가전(家傳), 국가의 단편적 기록, 개인의 수기, 사찰의 연기문(緣起文), 한반도 관련 자료와 중국 측 자료 등이 있다. 이들 자료는 일본서기에 이용될때 서명을 밝히고 있는 것도 있고, 서명은 밝히고 있지 않으나 이용 자료의 확인이나 추정이 가능한 것도 있다. 전자는 백제삼서(百濟三書)’라고 불리는 백제기(百濟記)·백제신찬(百濟新撰)·백제본기(百濟本記)를 비롯하여 위지(魏志)·진기거주(晋起居注)·일본구기(日本舊記)·이길련박덕서(伊吉連博德書)·난파길사남인서(難波吉士男人書)·일본세기(日本世記)가 있다. 이상의 자료는 다음의 표 1로 정리하였다. 후자의 경우에는 사기(史記)이하의 중국자료와 각 씨족의 가기(家記), 사찰의 연기문 등의 일본 국내자료가 있다. 이러한 예들은 일본서기편찬 당시에 다수의 문헌이 존재하였음을 말해준다.


이 가운데 백제삼서와 일본구기·이길련박덕서·난파길사남인서·일본세기일본서기내용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대외관계 서술에서 이용되었다. 모두 백제 관련 기사를 싣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들 자료는 주로 일본서기에 분주의 형태로 인용되고 있고, 본문 작성에도 이용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1 일본서기에 인용된 자료표

인용 서목(引用 書目)

一書

()()

()()

一本

舊本

別本

或本

()()

或所()

魏志

晋起居注

百濟記

百濟新撰

日本舊記

百濟本記

伊吉博德書

難波男人書

日本世記

기명(紀名)

1

神代 上

47

4

17

 

 

 

 

1

 

 

 

 

 

 

 

 

 

 

69

2

神代 下

16

13

 

 

 

 

 

 

 

 

 

 

 

 

 

 

 

 

29

3

神武

 

 

 

 

 

 

1

 

 

 

 

 

 

 

 

 

 

 

1

4

綏靖~開化

4

12

 

 

 

 

 

 

 

 

 

 

 

 

 

 

 

 

16

5

崇神

1

5

 

 

 

 

 

 

 

 

 

 

 

 

 

 

 

 

6

6

垂仁

 

9

 

 

 

 

 

 

 

 

 

 

 

 

 

 

 

 

9

7

景行·成務

1

4

 

 

 

 

 

 

 

 

 

 

 

 

 

 

 

 

5

8

仲哀

 

1

 

 

 

 

 

 

 

 

 

 

 

 

 

 

 

 

1

9

神功

 

6

 

 

 

 

 

 

 

3

1

2

 

 

 

 

 

 

12

10

應神

 

2

 

 

 

 

 

 

 

 

 

2

 

 

 

 

 

 

4

11

仁德

 

 

 

 

 

 

 

 

 

 

 

 

 

 

 

 

 

 

0

12

履中·反正

 

4

 

 

 

 

 

 

 

 

 

 

 

 

 

 

 

 

4

13

允恭·安康

 

2

 

 

 

 

 

 

 

 

 

 

 

 

 

 

 

 

2

14

雄略

 

1

 

10

1

2

3

2

 

 

 

1

2

1

 

 

 

 

23

15

淸寧·仁賢

 

1

 

3

1

 

3

 

 

 

 

 

 

 

 

 

 

 

8

16

武烈

 

 

 

3

 

 

 

 

 

 

 

 

1

 

 

 

 

 

4

17

繼體

 

 

 

7

 

 

1

1

 

 

 

 

 

 

4

 

 

 

13

18

安閑·宣化

 

 

 

1

 

 

 

 

 

 

 

 

 

 

 

 

 

 

1

19

欽明

3

 

1

5

1

 

 

 

 

 

 

 

 

 

14

 

 

 

24

20

敏達

 

 

 

 

1

 

1

 

 

 

 

 

 

 

 

 

 

 

2

21

用明·崇峻

 

 

 

 

 

 

5

1

 

 

 

 

 

 

 

 

 

 

6

22

推古

 

1

 

 

 

 

 

 

 

 

 

 

 

 

 

 

 

 

1

23

舒明

 

 

 

 

 

 

 

 

 

 

 

 

 

 

 

 

 

 

0

24

皇極

 

 

 

 

1

 

5

 

 

 

 

 

 

 

 

 

 

 

6

25

孝德

 

 

 

 

 

 

16

1

 

 

 

 

 

 

 

1

 

 

18

26

齊明

 

 

 

 

 

 

13

 

1

 

 

 

 

 

 

3

1

3

21

27

天智

 

 

 

 

 

 

10

 

 

 

 

 

 

 

 

 

 

2

12

28

天武 上

 

 

 

 

 

 

 

 

 

 

 

 

 

 

 

 

 

 

0

29

天武 下

 

 

 

 

 

 

1

 

 

 

 

 

 

 

 

 

 

 

1

30

持統

 

 

 

 

 

 

 

 

 

 

 

 

 

 

 

 

 

 

0

 

72

65

18

29

5

2

59

6

1

3

1

5

3

1

18

4

1

5

298



위지(魏志)진기거주(晋起居注)는 신공기(神功紀)에만 보이는데 일본서기편찬자가 중국사서와 중국력(中國曆)이라는 권위와 신용을 빌려 일본서기의 편년(編年)을 구성하고자 이용하였다. 이밖에 서명을 밝히지 않고 이용된 중국 문헌은 사기(史記)를 비롯해서 80여 종에 달하며, 일본서기(日本書紀)의 거의 모든 권에 걸쳐 이용되었다(-2 참조). 같은 중국 측 문헌이라도 서명을 밝힐 때와 그렇지 않을 때의 이용 목적 및 방식은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한편 일본서기에는 일서(一書일운(一云혹운(或云), 그리고 일본(一本구본(舊本별본(別本혹본(或本)의 형태로 구체적으로 알 수 없는 자료도 인용되어 있다(-1 참조). 일본서기의 편찬자들은 어느 것이 올바른 전승인지 옳고 그름을 결정하기 어려울 경우에는 그중에서 가장 옳다고 생각되는 전승으로 일단 본문의 체계를 세우고, 그 밖의 여러 설들은 위와 같은 형태의 주()로 망라하고 있다. 일본서기는 천황 중심적 사관에 의해 편찬되었기 때문에 많은 기사가 과장·윤색되었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편찬자가 후세의 판단을 위해 가능한 한 많은 현존자료를 채록하고자 했고, 원자료를 중시하는 편찬자의 태도도 드러난다.


그러나 이 기록물들은 서명이나 작성자가 명기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고찰하는 데 많은 어려움이 따른다. 이 기록물 가운데는 씨족의 가기(家記) 등 일본국내사료로 추정되는 것이 있고, 한반도 관계 기록물로 판단되는 것도 있다. 경우에 따라서는 같은 사건에 대해서 동일 명칭의 분주가 반복해서 인용되고있기 때문에 일서(一書) 또는 일본(一本) 등은 서명을 가지고 있는 기록물처럼 하나의 기록물을 가리키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일본서기에서는 하나의 사건에 대해서 위의 기록물과 서명이 있는 자료가 내용을 다르게 전하고 있는 경우 우선적으로 서명이 있는 자료를 신뢰한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서명이 있는 자료에 대한 일본서기편찬자들의 신뢰는 두터웠으며, 이것은 이들 자료를 작성한 사람들이 일본서기의 편찬에도 참여했음을 시사한다.


이와 같이 인용 문헌에 대한 검토는 일본서기의 사료적 성격 및 편찬 과정을 구체적으로 밝히는 데 매우 중요함을 알 수 있다. 여기서는 일본, 한국, 중국 측 기록으로 나누어 정리해 보기로 한다.

 1. 일본 측 기록 


1) 제기(帝紀)상고제사(上古諸事)
일본서기고사기와 달리 편찬 과정을 말해주는 서문 없이 단지 속일본기에 국사(國史)를 편찬하도록 하였다는 기사와 일본기(日本紀)가 완성되었다는 서술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천무(天武) 10(681)에 제기(帝紀)와 상고제사(上古諸事)기정(記定)’하도록 하였다는 기사가 일본서기에 나와 있다. 일본서기의 편찬에 사용된 자료에 대한 논의에서 항상 먼저 등장하는것이 바로 제기상고제사이다.


제기(帝紀)는 상고(上古)에서 천무에 이르는 왕대기와 같은 것으로, 어명(御名), 황거(皇居), 재위년수(在位年數), 후비(后妃황자(皇子황녀(皇女), 붕년(崩年)에 관한 사항이 기록된 왕력(王曆)과 같은 것이다. 상고제사고사기(古事記)()에 보이는 구사(舊辭)와 같은 것으로 신화나 설화와 같은 이야기풍의 기록으로서 천황의 치적과 씨족이나 지방의 전승을 포함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제기일본서기왕대기 구성의 골격을 이루었을 것이며, 상고제사는 여러 설화의 바탕이 되었을 것이다.


한편 일본서기추고 28(620) 시세조에는 소아씨(蘇我氏)의 주도 아래천황기(天皇記)국기(國記)가 기록되었다고 한다. 이 기사는 역사 편찬에 관한 일본서기최초의 기사로 천황기제기와 비슷하며, 국기는 각 씨족이 가지고 있는 가전을 정리하여 통합한 것으로 상고제사와 같은 것을 모아놓은 책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또한 일본서기황극 4(645) 6월조에는 소아씨가 멸망할 때 소아하이(蘇我蝦夷)가 자살하면서 자신의 집에 불을 질러 진귀한 보물들과 천황기국기가 불에 타게 되었는데, 선사혜척이 타다만 국기를 불 속에서 건져내 중대형황자에게 바쳤다고 한다. 신찬성씨록(新撰姓氏錄)서문(序文)에도 이와 비슷한 내용이 보이는데 이것은 선사혜척이 소아씨의 주도 아래 추고 28천황기국기편찬에 관여하였음을 말해준다. 이러한 사실은 결국 천황기국기가 천무 10기정사업에서 제기상고제사를 정리하는 데 활용되었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을 말해준다.


2) 제왕본기(帝王本紀)


일본서기흠명 2(541) 3월조의 주에 제왕본기에 많은 고자(古字)가 있었는데 찬진하는 사람이 여러 차례 고치고 뒷사람이 또 글을 읽을 때 뜻에 맞춘다고 하여 글자를 고쳐서 옮겨 쓰는 경우가 많아 이미 내용이 뒤섞였다.그래서 전후가 차례를 잃고 형제의 순서가 바뀌었다. 이제 고금의 서적을 살펴서 그 바른 것을 돌아가고자 한다. 일단 알기 어렵게 된 것은 하나의 전거를 기준으로 하고 서로 다른 내용을 가진 것들을 주로써 상세하게 하였다. 다른것도 모두 이에 따랐다.”고 한 기사가 보인다. 이 기사는 일본서기의 자료를 취급한 태도에 대해서 지적하고 있는 것인데, 이는 당() 안사고의 한서(漢書)중에 나오는 서례(敍例) 가운데 두세 개의 자구를 바꾼 것이다. 한서서례의 의미는 한서전반에 걸쳐서 고자가 많고 옮겨 쓰는 과정에서 잘못이 많다는 것을 지적한 것이다.


제왕본기제기와 용어가 유사하므로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제왕본기라고 하는 별도의 책이 있었던가의 여부는 단정할 수 없다. 왜냐하면 한서의 서례에서 한서구문(漢書舊文)’이라고 한 것을 제왕본기라고 바꾸었고, 문장도 그대로가 아니라 적절하게 앞뒤를 바꾸어 쓴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흠명기(欽明紀) 이전에도 천황의 자녀에 대한 이설을 기록하고 있는 경우가 있어서 흠명기에 이르러 비로소 이와 같은 범례를 기록한 이유를 이해하기 어렵다. 이와 같은 예는 인현즉위전기에도 보인다. 천황의 실명[()]을 기록하면서 다른 모든 천황의 경우에는 이름을 언급하지 않았으나 이 천황에 이르러 홀로 이름을 써 넣는 것은 구본(舊本)’에 의한 것이라고 하였지만, 이미 신무천황기에 실명이 기록되어 있는 경우가 있어 모순이 있다.


이러한 사실은 일본서기가 완성된 후에 면밀하게 기사의 일관성을 조사하지 않았다는 점을 반영하는 것이며, 또 한편으로는 편찬 과정의 한 단면을 암시하는 것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한 사람이 일관해서 기록하였다면 이와 같은 일은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 몇 사람이 분담해서 집필하였기 때문에 서로 일치하지 않은 점이 생기게 되었거나, 혹은 집필된 시기가 달라서 이러한 통일성의 결여가 나타나게 된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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