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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역사

영국 장궁부대 佛 기병대를 제압하다

작성자참으로|작성시간16.02.11|조회수640 목록 댓글 0

 

 

영국 장궁부대 佛 기병대를 제압하다

백년전쟁(1337~1453): 크레시 전투(1346)

 

백년전쟁은 1337년부터 1453년까지 100여 년에 걸쳐 영국과 프랑스 간에 프랑스 지역에 있던 영국 왕실의 영토를 둘러싸고 벌어진 전쟁을 말한다. 물론 종국에는 잔 다르크의 활약에 힘입은 프랑스의 승리로 전쟁이 마무리되지만, 전쟁 초기에는 장궁부대를 앞세운 영국군이 기사군 중심의 프랑스군을 연이어 격파하면서 전장의 주도권을 잡았다. 이때 결정적 계기가 된 것이 바로 1346년에 벌어진 크레시 전투였다.

 

 

 

크레시전투 기사군 접전 필자 제공


 

 

영국장궁병


 

 

■역사적 배경
백년전쟁 초기의 중대한 분수령


 중세의 핵심 무장력으로서 사회의 지배계층을 이루고 있던 기사군은 14세기경에 이르면 그 쇠퇴의 징후가 뚜렷하게 나타났다. 이러한 변화는 군사적인 측면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중세사회 자체의 전반적인 쇠락과 병행해 나타났다. 중세의 마지막 두 세기인 14, 15세기는 유럽 사회 전반에 걸쳐서 폭력적 갈등이 절정에 달한 시기였다. 영국과 프랑스 간에 벌어진 백년전쟁, 장미전쟁(1455~1485), 이탈리아 중북부 도시국가 간의 전쟁 등이 연이어 일어났다. 이렇게 가열되는 생존경쟁 속에서 각국은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치게 됐고, 이는 기병을 중심으로 한 기존 무기체계의 변화로 이어졌다. 결과적으로 중세의 핵심적 무장력인 기사계급이 몰락하고 이를 지탱하고 있던 중세적 군사양식이 퇴조했다.

 중세 후반기에 벌어진 제반 충돌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은 백년전쟁이었다. 말 그대로 이는 약 100년에 걸쳐서 영국과 프랑스 간에 산발적으로 벌어진 전쟁이었다. 긴 전쟁을 통해 양국에서는 중세 봉건영주들의 힘이 쇠퇴하고 상대적으로 왕권이 강화됐다. 중세가 끝나고 왕권 중심의 근대국가가 출현할 수 있는 초석이 마련된 것이다. 근본적으로 백년전쟁은 영국에 윌리엄 정복왕의 노르만 왕조가 성립된 이후 잠재돼 왔던 영국과 프랑스 왕실 간의 영토를 둘러싼 오랜 대립에서 비롯됐다. 13세기 말경까지 영국 왕실은 프랑스의 남서지방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는데, 점차로 민족의식이 싹트기 시작한 프랑스 지배층이 외세 축출을 시도하면서 문제가 불거졌다.

 이때 당시 모직물업의 중심지였던 플랑드르 지방(오늘날 벨기에에 속한 북해 연안의 저지대)이 가장 골칫거리로 떠올랐다. 왜냐하면 영국과 지리적으로 가까웠던 이 지방 주민들은 영국과 모직물 교역을 하면서 상당한 이득을 얻고 있었기에 만일의 사태가 벌어질 경우 프랑스보다는 영국 편에 가담할 가능성이 컸기 때문이다. 이렇게 민감한 상황에서 프랑스 왕 필리프 4세의 외손자인 영국의 에드워드 3세(플랜태저넷 왕가)가 후계자가 끊긴 프랑스 카페 왕가(王家)의 왕위계승권을 주장한 것이 불씨가 됐다. 1337년 양국 간에 최초 충돌이 일어난 이후 100년간 지속된 전쟁에서 중반기까지 수세에 몰려 있던 프랑스가 잔 다르크의 출현에 힘입어서 전세(戰勢)를 역전시키면서 마침내 1453년 최종적으로 승리를 거머쥐게 됐다.

■전개 과정
중무장 기병대의 한계


 전쟁 초반에는 영국군의 연전연승이 이어져 한때는 프랑스 땅의 거의 절반을 차지할 정도로 기세가 등등했다. 백년전쟁 동안 벌어진 수많은 대소 충돌을 통해 중세 무기체계상에 중요한 변화가 일어났다. 이들 중 가장 대표적인 전투로 1346년 8월 말경에 영국 원정군과 프랑스군 사이에 벌어진 크레시 전투(Battle of Crecy)를 꼽을 수 있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중세 무장력의 핵심을 이룬 것은 중무장 기병대였다. 전투가 벌어지면 이들은 부대의 후열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공격 명령 하달과 더불어 일제히 적진으로 돌격해 전투의 승패를 결정했다. 중세 초기와는 달리 이 시기에 이르면 기사의 무장은 더욱 안전성을 높이는 방향으로 발전했다. 특히 이들이 착용하고 있던 갑옷은 그 두께가 두꺼워져서 당시 보병의 무기로는 감히 이에 맞설 수 없었다.

 

프랑스군 병력의 압도적인 우세

그런데 이토록 중세에 전성기를 구가하던 중무장 기병대의 한계가 결정적으로 드러나는 계기가 된 사건이 바로 크레시 전투였다. 이 전투는 프랑스 내 영국령 가스코뉴 지방이 공격받고 있다는 소식에 분노한 영국 왕 에드워드 3세가 1346년 도버해협을 건너 프랑스를 침공하면서 벌어졌다. 영국군은 크레시 마을 북쪽에 있는 구릉지에, 그리고 국왕 필리프 6세가 이끈 프랑스군은 마을 서쪽에 있는 구릉지에 부대를 배치했다. 영국 원정군 병력이 약 1만 명인 데 비해 일종의 홈그라운드에 있던 프랑스군은 영국군의 3배 이상인 약 3만5000명의 병력을 갖고 있었다.

 영국 국왕 에드워드 3세는 휘하의 전군(全軍)을 크게 삼분(三分)해 좌익과 우익, 그리고 중앙의 예비대로 배치했다. 갑옷을 착용한 창병과 방패와 창칼로 중무장한 기병이 주력을 이뤘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2000~3000명에 달하는 장궁병(長弓兵: longbowman)을 기병과 창병 부대의 양익(兩翼)에 배치해 놓고 있었다. 물론 전술상 이는 백병전에 취약한 장궁병을 보호하려는 목적이 담겨 있었으나 어찌 됐든 장궁부대는 영국군의 비장의 카드였다. 이에 비해 프랑스군은 용병으로 고용한 이탈리아 도시국가 제노바 출신의 석궁부대를 부대 정면에 길게 포진시켰다. 그 뒤로는 당시 유럽세계에서 최강의 전투력을 자랑하던 중장기병대를 대기시켜 놓고 있었다.



영국 장궁, 제노바 용병 석궁부대 제압

 프랑스군의 전면에서 사격명령을 기다리고 있던 제노바 석궁부대의 선제공격으로 전투가 시작됐다. 석궁부대의 명성은 이미 유럽 내에 널리 퍼져 있었다. 그렇기에 프랑스 왕도 값비싼 대가를 지불하면서 이들을 고용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들의 공격은 기대와는 달리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했다. 직전에 내린 비 때문에 석궁의 성능이 저하된 탓도 있었으나 근본적으로는 관통력이나 사거리, 그리고 발사속도 등에서 석궁은 영국군 장궁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중세 기병의 시대 퇴조

 조바심에다 적군을 얕잡아 본 프랑스의 필리프 6세는 뒤쪽에 대기하고 있던 중무장 기병대에 돌격을 명령했다. 프랑스군의 자랑인 기병대가 모습을 드러내자 영국군 진영에서 대기하고 있던 장궁병들이 이들을 향해 강하고 긴 화살을 쏟아붓기 시작했다. 화살은 기병대의 말은 물론이고 심지어는 기사의 갑옷까지 관통하면서 이들을 땅바닥으로 떨어뜨렸다. 게다가 비좁은 전장 공간은 기병대의 전투력 발휘를 크게 제한했다. 이후 프랑스 기병대는 10여 차례 파상공격을 감행했으나 영국군 진영에 도달해 보지도 못한 채 전체 병력의 절반가량을 잃는 참패를 당하고 말았다. 한마디로 영국군의 완승(完勝)이자 중세 1000년간 지속돼온 기병의 시대가 저물고 있음을 암시하는 전주곡이었다.<육군사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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