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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역사

소총에 자리 내줄 때까지 중세 전쟁은 장궁이 호령

작성자신으로|작성시간16.02.11|조회수937 목록 댓글 0

 

소총에 자리 내줄 때까지 중세 백년전쟁은 장궁이 호령

백년전쟁(1337~1453): 크레시 전투(1346)

 

판금 갑옷 관통·긴 사정거리·빠른 발사…석궁보다 장궁 장점 많아

전장 환경 파악·시대 변화 따라잡는 무기 사용…‘크레시 전투의 교훈’

 

 

 

중세 장궁병.


 

 

 

중세 석궁병.


 

 

 

 

중무장한 중세 기사의 모습.


 

 

 

 ■무기와 무기체계

 당시 유럽 대륙에서 무적을 자랑하던 프랑스 중무장 기병대를 격파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것은 영국군의 장궁부대였다. 전통적으로 기병은 빠르게 적진으로 돌진해 적 진영을 교란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하지만 장궁의 출현으로 프랑스 기병대는 돌격은 고사하고 영국군 주력과 접전하기도 전에 궤멸되고 말았다. 크레시 전투에서 프랑스군은 무려 1500여 명의 정예 기병을 상실했다. 한 명의 기병을 양성하는 데 소요되는 시간과 비용, 그리고 그가 구비한 장비들을 감안할 때 그 손실은 엄청났다. 멀리에서도 기병의 갑옷을 관통할 수 있는 장궁의 위력은 중세 전장의 균형을 뒤흔들기에 충분했다.

 이 시기에 중세 기사의 방호력은 크게 높아졌다. 10세기경부터 개선돼 온 쇠사슬 갑옷으로 거의 온몸을 감싸고 있었다. 방어구 제작 기술의 발전 덕분에 13세기경에 이르면 여러 개의 철제 금속판을 가죽으로 연결한 판금 갑옷이 유행하게 됐다. 더 뾰족해진 기병용 창끝과 래피어 검의 공격을 막기 위한 필요성에서 기술 개발이 이뤄진 것이다. 판금 갑옷은 처음에는 기존의 쇠사슬 갑옷과 함께 사용됐다. 즉 어깨나 넓적다리처럼 부상당하기 쉬운 신체 부위를 보호하기 위해 쇠사슬 갑옷 안쪽에 착용했다. 야금술 및 판금 제작 기술의 발전과 더불어 13세기 말 이후에는 아예 한 벌 전체를 판금으로만 제작한 갑옷이 등장했다. 이처럼 꾸준히 방호 능력이 향상되면서 기병은 가히 천하무적의 존재라도 되는 듯 중세의 전장을 휩쓸었다.

 그런데 이때 이러한 기병의 위세를 일거에 무너뜨리는 신무기가 등장했다. 바로 장궁이었다. 원래 장궁은 영국 웨일스 지방에서 평민들이 사냥용으로 사용하던 무기였다. 점차 그 위력이 입증되면서 하층계급 출신 병사들의 무기로 정착됐다. 13세기 후반, 장궁의 위력을 간파한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1세가 아이러니하게도 웨일스 지방을 평정할 때 이를 영국군 무기로 채택해 효과를 보았다. 영국산 주목(朱木)이나 느릅나무로 제작된 장궁은 활의 몸체가 거의 1.9m에 달할 정도로 길었고, 화살의 길이도 1m에 육박했다. 활 무게 0.6~0.8㎏에 화살의 무게도 이에 버금갈 정도였기에 활시위를 당기기 위해서는 45㎏ 이상의 완력(腕力)이 필요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석궁에 비해 제작 과정이 단순하고 큰 활에서 나오는 관통력이 뛰어나서 프랑스 기병대의 갑옷을 무용지물로 만들었다. 소켓 모양의 철제 화살촉이 무적을 자랑하던 기병의 판금 갑옷을 관통해 치명상을 입혔다.

 중세에 장궁과 위력을 겨룬 무기로는 가장 강력한 대인용(對人用) 투사무기였던 석궁(石弓: crossbow)을 꼽을 수 있다. 석궁은 관통력이 커서 상대방에게 치명상을 입힐 수 있었기에 교황청에서 이의 사용을 엄격하게 제한할 정도였다. 실제로 1139년 교황청은 제2차 라테란 공의회 결정에 따라 포고령을 내려 기독교도 간의 전쟁 때 석궁의 사용을 금지했다. 세로 0.6~1m, 가로 0.5~0.7m, 무게 3~10㎏ 정도인 석궁은 대목(臺木)의 끝에 십자형으로 고정시키는 탄력성이 우수한 기계식 활로서 빠른 속도로 방전촉(quarrel)을 발사했다. 석궁은 장궁에 비해 명중률과 관통력은 높았으나 복잡한 사용법, 느린 사격속도, 무거움, 상대적으로 짧은 사거리 등과 같은 약점 때문에 보편적으로 사용되지 못했다.

 장궁이 가진 최대의 장점은 긴 사정거리와 빠른 발사 속도였다. 장궁은 최대사거리가 350m, 유효사거리가 230m로서 석궁의 두 배에 달했다. 특히 장궁의 발사 속도는 석궁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빨랐다. 석궁은 숙달된 전문 궁수가 분당 2발을 발사할 수 있었지만 장궁은 그 5~6배인 분당 10~12발을 쏠 수 있었다. 숙달된 장궁병은 거의 연속 동작으로 활시위를 턱뼈에 닿을 때까지 끌어당긴 후 표적을 조준해 발사했다. 이때 양손에는 가죽으로 만든 보호대를 착용해 부상을 방지했다.

 물론 장궁이라고 장점만 갖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가장 큰 한계점으로 장궁병 양성에 소요되는 긴 훈련 기간을 꼽을 수 있다. 즉 활쏘기에 필요한 힘과 조정기술의 습득을 위해서는 수년에 걸친 훈련과 반복적인 연습이 불가피했다. 고로 소집 동원 기간이 평균 40일에 불과했던 중세 봉건군 체제로는 장궁병 양성이 불가능했다. 국왕이 급료를 지불하면서 지속적으로 유지할 수 있는 병력, 즉 상비군적 성격의 직속부대가 필요했던 것이다. 상대적으로 봉건제적 전통이 약했던 영국의 왕실에서는 바로 지속적 반복 훈련이 요구되는 장궁부대를 유지할 수 있었다.

 크레시 전투를 비롯해 푸아티에 전투(1356), 아쟁쿠르 전투(1415)에서 그 진가를 발휘한 영국군 장궁부대는 15세기 말에 이르면 그 효용성이 급격하게 퇴색했다. 표면적으로는 백년전쟁 종전 직후 영국 내에서 벌어진 장미전쟁(1455~1485)으로 우수한 장궁병이 대거 손실된 점을 지적할 수 있다. 하지만 가장 근본적인 요인은 개인화기의 발달과 이의 빠른 확산이었다. 장기간의 훈련이 필요했던 장궁병에 비해 소총병은 길어도 한 달이면 양성할 수 있었다. 더구나 소총의 성능이 향상되면서 장궁 이상의 사거리와 관통력을 얻을 수 있었다. 급기야는 엘리자베스 1세 여왕 통치 말기인 1595년에 추밀원은 장궁을 영국군의 공식 무기 목록에서 제외했다.

 

 ■의미와 교훈

 장궁과 같은 신무기의 출현으로 중세 이후 기병대가 전장에서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비록 그 임무와 역할이 축소되기는 했으나 19세기 후반에 내연기관과 같은 새로운 기동수단이 전장에 도입되기 이전까지 기병은 여전히 필요한 존재였다. 중세의 전장에서는 방어가 중시됨에 따라 갑옷과 같은 방어구가 발달했다. 혹자는 무기발달의 역사에서 중세의 역할을 무시하기도 하는데, 이는 중세의 위상을 과소평가하는 선입견에 기인한다. 어느 시대든 시대의 필요에 걸맞게 무기가 발달돼 왔다. 중세도 예외일 수 없었다.

 크레시 전투에서 영국군은 현지 지형에 어두운 원정군이라는 약점을 극복하고 대승을 거뒀다. 물론 에드워드 3세의 영국군에는 장궁이라는 비밀 병기가 있었다고 하더라도 이의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는 전투 여건이 마련되지 못했다면, 3배 이상 차이가 나는 병력의 열세를 극복하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그런데 운 좋게도 프랑스의 필리프 6세가 전장 환경을 제대로 파악하지 않은 채 좁은 공간으로 병력을 집중 투입, 결과적으로 자국군 기병대의 기동성을 마비시키는 우(愚)를 범했다. 근본적으로 이는 영국군을 얕잡아 본 필리프 6세의 자만심에서 배태된 것으로 후세의 지도자들이 유념해야 할 교훈임이 분명하다. 더불어 시대 변화에 적절하게 부응하지 못하는 무기체계는 언제든지 무용지물이 될 수 있음을 명심해야겠다.

육군사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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