獨, 치명적 ‘毒가스’ 살포 영불연합군 방어선 뚫다
- 제1차 세계대전: 이프르 전투(1915. 5)
獨, 1915년 4월 22일 대공세 / 역사상 최초의 독가스 등장
가스통 6000개 염소가스 살포 / 영불연합군 7만 명 인명 피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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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세계대전 당시 역사상 최초로 독가스가 등장하자 이에 대비해 군인들이 방독면을 쓰고 전투에 임하게 됐다. 필자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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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상 처음으로 등장한 독가스는 엄청난 위력을 발휘했다. 독가스로 피해를 입은 군인들의 모습. |
1914년 9월 초 마른 전투를 통해 독일군의
진격을 격퇴하는 데 성공한 영국-프랑스 연합군(이하 영불연합군)은 전선을 더 이상 확대하지 못했다. 10월에 접어들면서 전쟁은 기동전이 아니라
진지전 양상으로 변했다. 알프스 산맥의 북쪽 끝단에서 북해까지 철조망이 설치되고 참호가 구축됐다. 이제 승전의 길은 우회기동과 정면돌파 중
하나뿐이었다. 이때 양측이 택한 방식은 후자였다. 당시 양측 모두 방어선을 우회할 만한 기동수단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양측은
적진을 돌파할 수 있는 신무기 개발에 매진했다. 이때 등장한 대표적 신무기 중 하나가 바로 독(毒)가스였다. 독일군은 이프르 전투(Battle
of Ypres)에서 역사상 최초로 염소가스를 살포해 영불연합군 방어선 돌파를 시도했다.
역사적
배경
전투 중 자세를 낮출수록 생존 가능성이 커짐을 처음으로 분명히 보여준 사례는 미국 남북전쟁이었다. 미니에 탄환
사용으로 사거리가 크게 늘어나고 정확도가 향상됐기에 나타난 현상이었다. 물론 비슷한 시기에 유럽에서 벌어진 전쟁에서는 프러시아의 철도망 활용으로
전쟁이 기동전화됨에 따라 야전 축성 시도는 드물었다. 하지만 이후 특히 서유럽 이외 지역에서 벌어진 전쟁에서 그 중요성은 크게
부각됐다.
이 시기에 개발된 가장 효과적인 요새는 재래식 성채가 아닌 야전용 참호였다. 이는 1877년 러시아와 터키
간 전쟁에서 그 위력을 십분 발휘했다. 약 6만 명의 대병력으로 불가리아의 플레브나 지방으로 침략한 러시아군에 터키군은 단지 참호에 의지한 채
거의 5개월간 버틸 수 있었다. 이후로 전쟁에 참전하는 모든 병사는 개인장비 목록에 야전삽을 추가해야만 했다. 세기말에 벌어진 보어 전쟁은
물론이고 특히 러일전쟁에서 야전 축성의 중요성은 분명하게 과시됐다. 여순 요새의 깊은 참호에서 방어하는 러시아군을 제압하기 위해 일본군은 엄청난
수의 병사들을 사지(死地)로 몰아넣어야만 했다.
일반적 의미에서 야전 축성, 즉 참호는 옛날부터 시작된
축성(築城)에서 그 연원을 찾을 수 있다. 인간은 오랜 세월 수렵 채집의 생활을 끝내고 기원전 1만 년경부터 농경정착생활을 시작하면서 자체
보호의 필요성을 실감했다. 더구나 정착생활이 장기화되면서 공동체 구성원 수가 늘어나고 계층분화로 분쟁이 잦아지게 됐다. 이제 충돌은 단순히
생존만의 문제가 아니라 세력을 확장하는 수단으로 변했다. 그러다 보니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는 대책을 강구하게 됐고, 이는 조야한 나무울타리에서
토성의 형태로 이어져 석성(石城)으로 발전하게 됐다. 문명의 발전과 더불어 요새의 형태나 축성방식도
진화했다.
역사적으로 축성방식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요인은 화약무기의 등장이었다. 특히 대포의 출현은 중세의 높은
성곽을 무용지물로 만들었다. 이전의 공성 무기들은 적의 성을 무력화하지 못했으나, 대포는 성벽을 쉽게 무너뜨렸다. 15세기경에 서양의 성들은
높이가 낮아지고 성벽은 두꺼워졌다. 축성술에 일대 변혁이 일어난 것이었다. 견고하게 요새화된 일명 '이탈리아식 성채(城砦)'가 출현해 널리
유행했다. 19세기에 이르러 전쟁이 산업화되면서 큰 비용이 드는 요새식 성곽의 효용성은 크게 떨어졌다. 이에 더해 화기의 성능마저 향상되면서
전통적 성과 성채는 전장에서 구덩이를 파고 흙을 쌓는 야전 축성으로 바뀌었다.
이프르 전투의 전개
과정
1914년 대전 첫해 겨울에 이르러 서부전선은 교착상태에 빠졌다. 스위스 국경에서 벨기에 해안지대에 이르기까지
호가 구축됐다. 물론 초기의 참호는 대전 중반에 선보인 반영구적인 참호방어 시스템에 비하면 단지 땅을 판 정도에 불과했다. 전선의 대치상태가
길어지면서 양측은 본격적으로 참호망을 구축하기 시작했다. 겨울 동안에 독일군은 전선을 따라서 콘크리트 기관총 진지를 설치해 방어력을 높였다.
프랑스군은 벨기에와 북프랑스의 자국 영토를 점령하고 있는 독일군을 하루라도 빨리 원래 국경선 밖으로 몰아내기 위해 적극적인 공세를 펼치고자
했다.
실지(失地) 회복을 열망한 프랑스군은 1915년 2월 중순경부터 샹파뉴 지방에 대한 공격을 시도했다. 하지만
무려 24만 명의 병력손실만 입은 채 별다른 성과를 얻지 못했다. 영국군 역시 3월 초에 시도한 기습공격이 초반에는 성공하는 듯했으나 독일군의
격렬한 저항에 부딪혀 좌절되고 말았다. 이제 전쟁은 점점 더 교착상태로 빠졌다. 이러한 상황에서 방어선 돌파용으로 독일군이 도입한 신무기가 바로
'독가스'였다. 현대판 화학전이 전장을 휩쓸면서 이제 '신사적인' 전쟁을 꿈꿔온 서양의 기사도 전통은 완전히 자취를 감추게
됐다.
신무기 독가스의 등장
영불연합군의 공격이 잠시 주춤한 틈을 타서 독일군은 1915년
4월 22일 벨기에 남쪽에 형성된 영불연합군 돌출부의 이프르를 향해 대공세를 개시했다. 바로 여기에서 근대 전쟁역사상 최초로 독일군의 독가스가
등장했다. 당일 늦은 오후에 독일군은 연합군 진지를 향해 집중포격을 가한 뒤 거의 6000개에 달하는 가스통을 열고 염소가스를 흘려보냈다. 이
신무기는 프랑스군 및 영국군, 캐나다 사단의 참호를 가로질러 빠르게 퍼져 나갔다. 독가스 공격에 대한 대비책이 전혀 없었던 프랑스군 병사들이
공포에 질려 퇴각한 탓에 인접한 캐나다 사단 좌측으로 폭 5마일 정도의 빈틈이 생기고 말았다. 바로 이곳으로 돌진한 독일군은 당일 저녁에 이프르
전방 2마일 지점까지 진격할 수 있었다.
영불연합군에게는 다행스럽게도 독일군의 전진은 여기까지였다. 독일군도 독가스로
인해 이처럼 돌파 공간이 생기리란 점을 예상치 못했고, 더구나 당시 독일군은 동부전선에서도 작전을 수행해야만 했기에 동원할 만한 예비대가
없었다. 독일군이 머뭇거리는 사이 프랑스군은 재집결해 최초 전선에서 약 2∼3마일 후방에 새로운 방어선을 구축할 수 있었다. 캐나다군도 전열을
정비한 후 독일군 공격에 대비했다. 이후 5월 25일까지 양측 간에 공방전이 지속됐으나, 최초 접전에서 형성된 전황에는 큰 변동이 없었다.
이프르 전투에서 독일군은 약 3만5000명, 영불연합군은 거의 배가 되는 7만 명(이 중 영국군 5만8000명)의 인명피해를 입었다.
과학자의 총칼 없는 반인륜성 전투 화학무기, 그 추악한 모습을 드러내다
국제적으로는 사용금지 무기 / 화학자 각종 독가스 주도적 개발
제2차세계대전엔 나치도 활용 / 적·아군 모두 살육 공포 ‘벌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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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세계대전 전쟁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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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희생자를 낸 전쟁의 참상을 보여주는 묘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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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가스 살포 장면. |
● 무기와 무기체계
1914년 말경부터 서부전선에는 가시철조망과 기관총이
전선 풍경을 압도했다. 양측은 참호를 판 뒤 그 앞에 철조망을 설치해 적의 침투를 막았다. 방어망을 통과하려는 적군의 시도는 참호 속에 웅크리고
있던 기관총 사수에 의해 여지없이 분쇄됐다. 엄청난 사격능력을 자랑하던 맥심 기관총의 출현은 참호와 앙상블을 이루며 방자(防者)에게 결정적인
이점을 제공했다. 특히 정면 돌격하는 병사들에게 기관총은 ‘악마의 울림 틀’ 그 자체였다. 이처럼 전쟁 양상이 참호전으로 전개된 데는 과학기술의
진보에 따른 방어용 무기의 발전이 큰 영향을 미쳤다.
따라서 제1차 세계대전 때 등장한 공격용 무기들은 바로 이러한
교착상태를 타개하려는 목적을 갖고 있었다. 양측이 복잡한 참호망을 구축한 채 상대방 방어선을 돌파하기 위해 일진일퇴의 공방전을 펼치다 보니
인명피해만 늘어났다. 적의 철조망을 파괴하고 기관총 진지를 제압한 후 적군의 방어선을 돌파할 수 있는 새로운 수단이 절실하게 요구됐다. 이때
독일군이 첫선을 보인 신무기가 바로 ‘독가스(poison gas)’였다.
이제 바야흐로 핵무기와 더불어 20세기를
공포로 몰아넣게 되는 화학무기가 그 추악한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1915년 4월 독일군은 프랑스와 벨기에 국경지대인 이프르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최초로 유독성 염소가스(chlorine gas)를 살포했다.
영국 해군의 해상봉쇄로 원자재 및 생필품 부족에 시달리고
있던 독일이 전선에서 무엇인가 돌파구를 마련할 심산으로 독가스를 개발했던 것이다. 이 독가스는 흡입하는 순간 호흡기와 소화기에 심각한 손상을
입혔고, 많이 노출되면 사망할 정도로 강한 독성을 갖고 있었다. 관을 이용해 살포하는 원시적 방법으로 인해 살상력은 화약무기에 미치지 못했으나
그 심리적 효과는 기대 이상이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독가스에 힘입어 독일군은 영불연합군의 방어선에 약 5마일의 공간을 형성하는 데 성공했던
것이다.
사실상 독가스는 1899년 헤이그 평화회의 선언과 1902년 헤이그협약을 통해 국제적으로 사용이 금지된
무기였다. 독일의 행동은 국제적으로 강한 비난을 받았으나, 독가스가 병사들에게 주는 공포감은 당시 다른 무기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살상 능력은
화약무기보다 낮았으나 전투수행 능력을 마비시키는 측면에서는 상당한 효과가 있었다. 그러다 보니 일부 찬반논쟁은 있었으나, 곧 영국과 프랑스
진영도 독가스를 도입했다.
그 살육의 현장이 얼마나 비참했을지는 참전용사 출신인 폴 내시의 그림이나 레마르크의 소설
등을 통해 충분히 엿볼 수 있다. 이후 독일은 독가스 개발에 박차를 가해 호흡기를 심각하게 손상하는 포스겐 가스와 겨자 가스를 생산해 사용했다.
독일군의 가장 악명 높은 독가스였던 겨자 가스는 일단 사람이 접촉하면 피부에 흉측한 수포를 발생시키는 것은 기본이고 시력 상실과 심각한 기관지
폐렴까지 일으킬 정도로 그 위력이 강했다. 이처럼 끔찍한 피해를 신체에 입힐진대 독가스에 노출될 경우 병사들의 사기저하는 불가피했다. 양측 모두
대전 내내 독가스의 공포로부터 벗어날 수 없었다.
독가스의 위력을 실감한 양측은 자국의 화학자 및 관련 산업계를
총동원해 더 독성이 강한 독가스를 개발·생산하기 위해 노력했다. 이제 과학이라는 학문도 전쟁에서 자유로울 수 없게 됐다. 1909년에 대기 중의
질소를 고정시켜서 암모니아를 합성하는 법을 발견해 일약 국제적 명사가 된 독일의 유대계 화학자 프리츠 하버(Fritz Haber)야말로 이
분야의 대표적 인물이었다. 독일국가에 대한 애국심이 투철했던 하버는 독일군 수뇌부로부터 교착상태 타개 수단을 강구해 달라는 부탁을 받고
화학교수로서 전공지식을 활용해 각종 독가스를 주도적으로 합성해냈다. 독가스 개발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커지자 그는 현대의 총력전에서 과학은 한
국가의 운명을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이며, 같은 맥락에서 과학자는 최전방에서 총을 들고 전투에 임하고 있는 군인과 다를 바 없는 존재라고
역설했다.
독가스의 살상력 향상과 비례해 살포 수단도 개선됐다. 초기에는 강철제 관에 채운 독극물을 가스 형태로
분사(噴射)하는 방식을 사용했다. 그러다 보니 살포 준비에 장시간이 소요되고 무엇보다도 결정적으로 외부 기상조건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예컨대,
적진으로 독가스를 살포하는 도중에 예기치 않게 바람의 방향이 바뀔 경우, 오히려 아군이 독가스의 피해를 볼 확률이 높았다. 이에 개선책이
여러모로 모색됐고, 덕분에 1916년경부터는 독가스를 포탄에 넣어서 살포하는 투발방식이 등장했다. 이와 더불어 화학전만을 전담하는 특수부대를
창설해 임무수행을 체계화했다.
● 의미와 교훈
北 생화학무기에 경각심 가져야
마른 전투 이후 양측은 우회로를 찾기 위해 일명 ‘바다로의 경주(Race to the Sea)’를 벌였다. 하지만
1914년 10월 말경 서부전선 전체는 교착상태에 빠졌다. 현대판 무기인 후장식 라이플, 기관총, 대포 등은 정면 돌격하는 보병들의 공격정신을
피도 눈물도 없이 분쇄했다. 당연히 전장은 인간의 시체들로 뒤덮였다. 숨이 붙어 있는 자들은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땅을 팔 수밖에 없었다.
이후로 약 4년, 더 정확히는 1460일 동안 수백만 명의 양측 장병들이 좁고 길게 형성된 참호망에서 매일
생사(生死)를 가르는 삶을 이어가야만 했다. 이러한 황량한 풍경을 더욱 살벌하게 만든 것은 갑자기 출현하는 신무기였다. 대비책이 전혀 없이 이를
맞이해야 한다는 공포감이 병사들을 짓눌렀다. 바로 독가스가 그러했다.
일단 봇물이 터진 반(反)인륜성은 이후에도
이어져서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나치의 인종 말살 도구로 활용됐다.
바로 이프르 전투는 과연 인간성이란 무엇이며
전쟁이란 무엇인가를 재삼 성찰케 하는, 그리고 현실적으로 다량의 생화학무기를 보유한 것으로 추정되는 북한군에 대해 우리의 경각심을 촉구하는
역사적 사건으로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내주 육군사관학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