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맹한 군주 상징…17~18세기 ‘포효’ 러시
- 사자와 17세기·18세기 유럽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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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와 18세기 유럽은 주도권 쟁탈을 위한 사자들의 전쟁이었다. 이를 통해 근대 국가를 형성하는 틀이 마련됐다. 일러스트=강지인 |
지난 3월 타계한 리콴유(李光耀) 전 싱가포르 총리를 ‘리더 가운데서도 사자와
같은 사람’이라고 했다. 그는 동양의 사자였다. 사자는 영리한 동물로 주로 용맹한 군주들에 비유돼 왔다. 사자왕 원조는 십자군 전쟁 당시
용맹스런 전사이자 지휘관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 영국 국왕 리처드 1세다. 그는 십자군 측의 전설적 영웅으로 오랜 세월 회자돼 왔다. 유럽 패권을
놓고 17세기에는 구스타프와 크롬웰, 18세기에는 말버러와 프리드리히 등 사자 무리들이
으르렁거렸다.
” 17세기 사자들의 전쟁
바실 헨리 리델하트의 전략론
제1부 6장은 17세기 전쟁을 주도했던 구스타프와 크롬웰, 튀렌의 전략을 다루고 있다. 먼저 북방의 사자왕으로 일컫던 스웨덴의 왕 구스타프
아돌프(1594∼1632) 전략을 소개한다. 그는 네덜란드 마우리츠가 창병(槍兵)을 줄이고 머스킷 소총부대를 운용하는 전술을 본떠 독특한 여단
단위 전술을 개발했다. 4개 보병대대와 1개 예비대대에 9문의 포병부대가 후속하도록 했다. 그리고 말을 타고 머스킷을 발포하며 적진에 접근한 후
말에서 내려 칼을 휘두르는 기동예비대인 드라군(용기병: 龍騎兵)을 운용했다. 이렇게 군사력을 증강한 그는 36세였던 1630년, 30년
전쟁(1618∼1648) 속에 뛰어들었다. 신교도와 가톨릭의 종교전쟁 성격을 띤 이 전쟁은 1618년부터 계속되고 있었다. 북방의 사자왕 포효는
로베르강 남쪽 브라이텐펠트 전투에서 빛을 발했다. 프로이센 틸리군 좌익을 먼저 화력으로 제압한 후 우익에 드라군을 집중해 격멸시켰다.
잉글랜드 크롬웰 또한 간접 접근으로 자신의 두 배나 되는 적을 격멸할 수 있었다. 1651년 영국 서해안도로를 따라 남쪽으로
이동하던 국왕군을 런던 서북쪽 우스터에서 격파해 청교도혁명을 완성시켰다.
프랑스 튀렌은 프로이센과의 전쟁에서 적을 직접 공격하지
않고 측면 공격으로 적의 강력한 저항을 약화시켰다. 1675년 초 프로이센군을 알자스 지역의 투르크하임 전투에서 산악지역과 눈보라를 뚫고
우회기동해 심각한 피해를 줬다. 리델하트는 튀렌의 간접 접근 전략을 “당시 모든 기동은 야전군 보급품 저장고인 요새 중심에서 벗어나 치밀한
전략으로 기동과 기습을 결합했다”고 했다. 이른바 이 사자들의 포효가 17세기 유럽을 뒤흔들었다.
” 사자는 용맹과 진리의 상징
사자는 아시아의 호랑이와 함께 대형
고양이족 가운데 최대의 맹수다. 예로부터 고상하고 용기 있고 싸움 또한 잘해 사람들로부터 ‘백수(百獸)의 왕’으로 불렸다. 고대 이집트 사람들은
사자를 신의 불가사의한 힘과 왕의 위엄을 상징하는 동물로 생각했으며, 아시리아나 그리스 사람들은 여신 옆에 사자를 그려 넣기도 했다. 초기
그리스도교에서도 예수나 성인을 나타낼 때 사자가 함께 등장했다.
또한 불교에서도 사자를 불법과 진리를 수호하는 신비스런 동물로
인식돼 여러 상징물로 활용됐다. 사자후(獅子吼)는 ‘사자의 울부짖음’이라는 뜻으로 크게 열변을 토할 때 쓰인다.
보통 사자는
10∼20마리가 무리를 지어 사는데 사냥은 주로 암컷들이 하고 수컷은 자기 세력권을 지킨다. 수사자는 워낙 눈에 잘 띄기 때문에 사냥 시
짐승들이 눈치를 채고 달아나므로 직접 먹이 사냥을 하지 않는다. 대신 암컷이 사냥을 할 때 시속 64km의 속도로 달리며 먹이를 몰아주는 구실을
한다. 그리고 공동작전으로 무리 일부가 사냥감을 추적하고, 나머지는 잠복 대기하였다가 덤벼들어 잡는 경우가 많다. 사자 울음소리는 18세기에도
유럽대륙을 뒤흔들었다. 왼쪽의 프랑스와 에스파니아 사자무리와 오른쪽 네덜란드와 잉글랜드 사자무리의 대결이었다.
” 18세기 말버러와 프리드리히의 전쟁
이어지는 전략론 제1부
7장은 18세기 전장을 주도했던 말버러와 프리드리히를 다루고 있다. 18세기 초는 프랑스 루이 14세의 유럽 정복욕이 최고조에 달했다. 이에
맞선 잉글랜드 말버러는 네덜란드와 오스트리아 등 다국적군을 지휘했다. 그는 한때 프랑스군 튀렌 휘하에서 보병 연대장으로 복무한 적이 있었다.
리델하트는 말버러의 전략적 기동을 높이 평가했다. 말버러는 프랑스군을 기만하기 위해 라인강과 모젤강이 합류하는 코블렌츠에서 서쪽 모젤강 방향으로
진출하는 것처럼 행동했다. 그리고 만하임 남쪽 필립스부르크에 라인강 도하를 위한 교각을 설치했다. 그런 다음 말버러군은 네카어강을 건너 협곡과
억수 같은 비를 극복하며 도나우강으로 전진했다.
반면 프랑스군은 말버러군이 알자스 방향으로 공격해 올 것으로 판단하고 안일하게
대처했다. 더구나 말버러군이 네벨강 습지를 건너 공격할 징후를 알고서도 대비를 소홀히 했다. 결국 프랑스군은 1704년 8월 13일 블렌하임에서
단 하루 전투 패배로 1세기 동안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이어서 프로이센 사자 프리드리히 2세가 등장했다. 그는 간접 접근
전략을 통해 1757년 로스바흐전투와 로이텐전투 등 여러 전투의 승리를 구가했다. 리델하트는 “프리드리히 2세는 자신의 주위에 있는 적을 중앙
지탱점으로부터 밖으로 공격해 내선의 짧은 거리로 적 증원부대가 오기 전에 아군 부대를 집중할 수 있었다”고 했다.
17세기와
18세기 유럽 사자들의 울음소리는 이어지는 8장의 나폴레옹의 등장으로 숨죽이고 말았다.
오홍국 전쟁과평화연구소·연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