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문화에 동화된 카이펑 유대인
현재 카이펑에 가보면 유대인 후예들이 극소수 남아있지만 유대 문화를 계승, 발전시켜나가지 못했다는 것을 쉽게 목격할 수 있다. 왜 그렇게 된 것일까. 유대인 디아스포라 역사에서 주요한 부분을 차지하던 카이펑 유대인을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지게 한 원인은 어디에 있을까. 고대 중국의 유대인을 연구한 학자들은 카이펑 유대인들이 경전을 전심전력을 다해 읽고 도를 닦으며 율례과 계율, 종교의식을 계속 유지하려고 애쓰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유대 고유의 절기 문화조차 지키지 못한 채 이민족과 결혼을 하고 중국사회에서 입신양명의 길을 걷기 위해 ‘사서오경’ 등을 익히면서 유교화 돼간 게 문제라는 것이다. 이같은 지적을 크게 여섯 가지로 집약할 수 있는데 ‘통혼(通婚)설’ ‘격리설’ ‘과거제도설’ ‘관용설’ ‘반유대주의’ ‘중국과 유대문화의 유사설’ 등이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유학과 통혼, 과거제도가 유대인의 독특성을 와해시키고 중국에 동화되게 했다고 분석한다. 특히 유가사상을 통해 유대교를 해석하고 현지화하려고 한 것이 카이펑 유대인의 전통을 붕괴시켰다고 지적한다. 중국 문화에 착근되는 과정에서 유대인들과 무슬림들의 태도를 비교한다면 이를 쉽게 알 수 있다.
중국에서 유대교와 이슬람교는 비슷한 역사단계를 거치면서 유가사상의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이슬람교는 중국내 광범위하게 교리와 문화가 전파된 것에 비하면 유대교는 지역사회와 문화에 완전히 동화되는 과정을 거쳤다. 이슬람교는 자신의 종교 입장에서 유가사상을 해석한 데 비해 유대교는 유가사상을 통해 유대교를 재해석하려고 했다. 그 결과 유대인의 주체의식이 희박해지면서 유대교의 쇠락을 가져오게 된 것이다. 중국 문헌을 보면 명나라 이전만 해도 유대인이나 무슬림이나 비슷한 경로를 거치면서도 자신들의 종교적 입장이 무시되지 않았건만 전혀 다른 길을 걷게 됐다.
예를 들어 1512년 명나라의 ‘정덕칠년비(正德七年碑)’를 보면 유대교의 역사를 기술하면서 카이펑 유대인이 정치, 경제, 군사, 문화 등 다양한 분야에서 공헌한 것이 서술돼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중에서도 유대교의 ‘정수귀결(精髓歸結)’을 유가의 ‘삼강오상(三綱五常)’과 연관시켜 유가사상을 찬양하면서 유가의 윤리사상과 유대교의 일치성을 매우 강조한 것을 알 수 있다. 이때까지만 해도 카이펑 유대인은 유가사상에 크게 영향을 받았던 것은 사실이지만 유대교의 정신만은 결코 포기하지 않았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청조 강희(康熙) 황제 시절 상황이 크게 변했음을 알 수 있다. 1663년 청나라의 ‘강희이년비(康熙二年碑)’에서는 유대교 교의, 규범의 존수를 강조하고 있지 않고 역사의 기억만을 기록하고 보존하는 데 맞춰져있음을 알 수 있다.
‘정덕칠년비’에서는 기록자로 ‘유대유생(猶太儒生)’인 진사(進士)출신 줘탕(左唐)으로 돼있지만 ‘강희이년비’에서는 기록자로 ‘전 형부(刑部) 상서(尙書) 현 공부(工部) 상서’ 류창(劉昌)으로 돼있다. 유대인이라는 종교적 의식이 매우 희박해진 것을 보여준다. 명나라와 달리 청나라에 이르러 카이펑 유대인의 유가사상에 대한 흡입력이 매우 높았을 뿐 아니라 가치관에 있어서도 유교화 됐다는 의미인 셈이다. 카이펑 유대인은 무슬림과 달리 중국문화에 대해 적응력을 높여가는 데는 어느 정도 성공했지만 본래의 민족문화를 계승하는 데는 실패한 것이다.
마테오 리치를 통해 존재 사실이 전해진 카이펑 유대인들은 처음엔 철저하게 유대교 전통을 고수하고 있었다. 천창치(陳長琦), 웨이첸즈(魏千志) 등 두 중국학자는 카이펑에서 유대인이 거주하게 된 시기를 A.D. 998년으로 잡고 있다. 이들은 이후 165년간 유대교의 전통을 이어오면서 유대회당을 정식으로 세우고 종교활동을 규격화시켰다고 추정했다.
앞에서 서술했듯이 카이펑 유대인들은 비석을 세워 유대교 전통 의식을 새겨놓았다. 1489년 명나라의 ‘홍치이년비(弘治二年碑)’와 ‘정덕칠년비’ 등에는 이스라엘 선조와 관련된 구절이 새겨져있다. “이스라엘의 조상 아브라함은 아담의 19대 손이다” “토라는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받았다” “우상을 숭배하지 않고 귀신을 경배하지 않으며 하나님만을 섬긴다” 등등. 뿐만 아니라 구약성경에 언급돼있는 노아, 이삭, 야곱, 아론 등의 이름도 찾아볼 수 있다.
▲ 1489년 '명 홍치이년비'. 카이펑회당의 중건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원래 카이펑 유대인은 자신들만의 예배 의식을 고수해왔다. ‘홍치이년비’와 ‘강희이년비’에도 예배의식이 비교적 소상히 언급돼있는데 유대인들은 매일 인시(寅時), 오시(午時), 술시(戌時) 등에 3차례 예배를 드리고 예배 전 반드시 목욕재계를 하고 모든 욕구를 억제하며 의관을 바르게 한 뒤 신발을 벗고 남색 모자를 덮어썼다.
예배 순서는 다음과 같았다. “절한다-바로 선다-침묵으로 찬양한다-우는 듯 찬미한다-뒤로 3보 이동한다-앞으로 5보 이동한다-왼쪽을 향한다-오른쪽을 향한다-조심스럽게 머리를 쳐든다-머리를 조아린다-다시 절한다.” 경외와 겸비를 드러내는 게 그 목적이었다.
안식일은 유대인들에게 매우 중요한 날이다. 초창기 카이펑 유대인은 안식일을 도(道)에 입문하는 길, 선에 이르는 기초라고 여겼다. 안식일에는 불을 피워 음식을 만들어 먹지도 않았다. 1613년부터 1770년 약 150년간 허난성을 방문한 30여명의 예수회 신부들은 카이펑 유대인들이 안식일을 분별해 지키는 모습을 목격했다. 폴 고자니 신부는 1772년 8월 25일에 쓴 편지에서 카이펑 유대인이 안식일을 매우 정성스럽게 지키고 있다면서 불을 피워 밥을 짓지 않고 안식일 전날 모든 음식을 미리 만들어서 먹는다고 적었다. 1810년 개신교의 첫 중국 선교사인 로버트 모리슨(Robert Morrison)도 카이펑 유대인들이 안식일을 매우 철저하게 지키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카이펑 유대인들은 할례도 거행해왔다. 1851년 '런던유대인전도회'는 카이펑 유대인 자오진청(趙金誠)과 자오원쿠이(趙文魁)를 상하이로 데려와 히브리어 배울 수 있도록 배려했다. 이들에 대한 소식은 당시 상하이에서 발행하던 ‘북화첩보(北華捷報)’에 언급돼있다. “상하이로 온 2명의 카이펑 유대인 모두가 할례를 받았다. 할례는 모든 남자아이에게 시행됐고 시술은 태어난 지 1개월 내에 한다.”
카이펑 유대인들의 식습관도 독특했다. 돼지고기를 먹지 않았으며 소와 양을 죽일 때 힘줄을 골라내 먹지 않도록 했기 때문에 카이펑 유대교는 ‘도근교(挑筋敎, 힘줄을 골라내는 종교)’라고도 불리기도 했다. 이는 당시 카이펑 유대인들이 살고 있는 지역이 ‘도근골목’(挑筋胡同, 국민당 정부 시절 교경골목, 敎經胡同)‘이라는 별칭을 갖게 된 이유이기도 하다. 유대인들은 중요한 유대교 절기를 시켰다. 이들은 종교절기일을 ‘계(戒)’라고 하며 1년에 유월절, 초막절, 부림절 등 7번 절기일을 지켰다. ‘강희이년비’에는 특히 속죄절이 기술돼있다. 속죄절은 유대교의 연례 금식일로 지난날 사욕으로 인한 하나님의 진노를 피하기 위해 지켜진 절기다. 속죄절은 ‘안식일 중 안식일’, ‘큰 안식일’(레위기 16장 23절, 31-32절)로 표현되며 상거래, 여행, 농사 등 어떠한 노동도 허용되지 않았다. 진 도멘게 신부가 1722년 카이펑을 방문했을 때 초막절을 지키는 유대인을 목격했다. 그에 따르면 유대인들은 토라를 어깨에 짊어지고 오른쪽 어깨에는 빨간 끈이 둘러져있었다. 카이펑 유대인은 자선을 선택사항이 아니라 책임과 의무로 여겼고 일종의 성스러운 일로 간주했다. ‘정덕칠년비’에는 ‘과부와 고아, 병든 자 등을 도와야한다’는 유대인의 전통이 기록돼있었다.
카이펑 유대인들은 토라를 ‘대경(大經)’ ‘도경(道經)’ ‘정경(正經)’이라고 부르면서 소중하게 간수했다. 하지만 황하(黃河)가 범람하면서 카이펑의 유대회당 내부에 있던 토라가 유실되기도 했다. 유대인 가오쉔(高選) 등이 위험을 무릅쓰고 회당에 들어가서 ‘도경’ 10권을 무사히 건져내기도 했다. 명말청초(明末淸初) 예수회 신부들이 카이펑을 방문했을 때 카이펑 유대인 사이에서 경전을 파는 사람은 하나님을 파는 것과 같다는 관념이 두루 퍼져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1867년 3월 사무엘 아이작 조세프 쉐레세위스키(Samuel Isaac Joseph Schereschewsky, 1831-1906)가 베이징에서 선교활동을 하고 있을 때 카이펑에서 온 유대인 3명이 베이징을 방문, 교회의 큰 관심을 받자 쉐레세위스키는 카이펑으로 조사를 떠났다. 그는 카이펑에서 유대인이 300호 정도 있는 것을 목격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유대교를 더 이상 믿지 않고 있었으며 현지 주민들과 통혼하고 있었다. 그가 25일간 있을 때 소요가 발생해 더 이상 체류할 수가 없었다. 이에 앞서 1864년 영국 런던에서 카이펑 유대인 전도회가 세워졌는데 이 단체는 데이비드 사순가의 도움을 받고 있었다.
카이펑 유대인들의 중국 유대회당은?
카이펑 유대인은 중국내 주요 이슬람세력인 회족과 마찬가지로 중국의 장구한 문화, 특히 유교에 직면해 개방적인 태도를 보이고 부단히 자신의 정체성을 조정하는 반면 자신만의 전통과 종교성을 잃어 결국 빈껍데기만 남게 됐다.
카이펑의 유대회당 건축양식은 유학의 영향이 농후했음을 보여준다. 기록에 의하면 카이펑 유대회당의 규모는 컸고 금빛 휘황찬란했다고 한다. 1772년 카이펑 유대회당을 직접 방문했던 프랑스 신부 도멘게가 남긴 도면을 보면 어림짐작할 수 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아직까지 강희황제 시절의 평면도가 남아있다는 것이다. 카이펑의 유대회당은 서방에 있는 유대회당과는 달랐다. 정원, 정자, 전당, 문정 등으로 이뤄지는 전형적인 중국의 사당 건축양식을 따르고 있었다. 직사각형 전체 건축물이 정원을 향하고 있었다. 중간 사당은 남북을 향하고 있었다. 동서길이는 107m, 남북넓이는 76.6m, 면적인 약 8196m²였다. 원문(院門)은 동쪽(東)을 향해있고 정문을 거쳐 두 번째 문을 지나면 첫 번째 내실이 보이고 대문 좌우에 화장(花墻), 즉 중국 전통건축물의 윗부분에 무늬 모양의 구멍을 내어 쌓은 담이 쳐 있고 영접 대문(迎門)에는 아치가 있고 남북으로 사랑채가 있었다. 두 번째 문 서쪽은 제2의 내실이고 영접 대전(大殿)은 전전(前殿)이 되고 원 중앙에는 패방(牌坊, 위에 망대가 있고 문짝이 없는 중국 특유의 건축물)이 있고 남북으로 두개의 비각에 세워져있고 정자에 명(明) 청(淸)의 3개비가 세워져있다. 전전 옆에는 독경당(토라를 낭송하는 곳), 아브라함전, 모세전이 있고 복도를 따라 가면 넓은 후전(後殿, 後庭)이 나온다.
여기서 간과해서는 안 되는 것은 카이펑 유대회당의 설치 방식에도 도교와 뷸교 등의 영향이 매우 컸다는 점이다. 도, 천진, 유현, 지묘 등 도교의 용어가 보이고 무상, 정법, 고사 등 전형적인 불교용어도 눈에 띄었다.
카이펑 유대인들은 북송 황조의 도움으로 1163년 첫 번째 유대회당을 세운 이래 수차례 보수하고 새롭게 건축했다. 1605년 아이톈이 마테오 리치를 만났을 때에 고향에 유대회당이 있고 최근 1만여 금자(金子)를 들여 완전히 새롭게 수리했다고 소개하면서 회당 안에 500-600년전부터 내려오는 모세의 토라를 보관하고 있다고 밝혔다. 카이펑 유대인이 남긴 비문의 기록을 보면 1163년부터 1688년까지 카이펑 유대인들은 12차례 회당을 수리하고 중건했다. 특히 1653년부터 1688년까지 35년간 4차례나 회당을 중건했다. 그러나 1688년, 강희 황제 치세 27년 이후 회당을 수리할 능력이 없어 손을 댈 수 없었다. 그 결과 가경(嘉慶)과 도광(道光)황제 치세기간(1796~1851)엔 유대회당의 벽까지 심각하게 훼손됐지만 보수가 이뤄지지 않았다. 결국 1854년 함풍(咸豊)황제 4년, 회당은 훼파되고 카이펑 유대인들은 마침내 정신적 지주를 잃어버리게 되고 말았다. 일부는 심지어 이슬람교로 개종하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 1722년 진 도멘게 신부가 그린 카이펑 유대회당 내부 평면도.
최근 연구에 따르면 송나라 때 전 세계 최초의 지폐인 ‘교자(交子)’를 만드는 데 유대인들이 공헌했을 거라고 추정되고 있다. 교자는 ‘관자(關子)’라고도 불렸는데 쓰촨(四川) 지방에서 발행된 어음에서 발달한 지폐다. 1161년 금나라 황제는 카이펑에 중국 최초의 유대회당을 세우게 했을 뿐 아니라 ‘일사락업교(一賜樂業敎, 이스라엘교)’라는 이름까지 하사했다. 금나라를 멸망시킨 원나라의 초기 관방 문건을 보면 금나라에서 세수, 금융, 무역 등 주요 업무의 책임자가 유대인인 것을 알 수 있다. 중국학자들은 “그들은 불가능이 없다. 유대인은 금나라의 경제발전에 중요한 공헌했을 뿐 아니라 상당한 명예도 획득했다”고 평가했다. 원나라 시절 유대인은 색목인(色目人, 원나라 통치자들이 서역(西域) 각 민족과 서하(西夏) 사람들을 통털어 일컫던 명칭)으로서 통치계급에 속했다.
그러나 한족이 중원을 다시 장악하면서 엄격한 법률 잣대로 유대인의 행동을 제한했다. ‘대명률(大明律) 몽고 색목인 혼인조례’에 따르면 몽고인과 유대인은 서로 혼인을 수 없었고 유대인은 중국어와 중국문화를 반드시 익혀야 했다. 이때 한족 자녀와의 결혼이 급증하게 됐다. 또 유대인의 성이 한족 성으로 본격적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례웨이(列維)’는 ‘리(李)’, ‘스바(示巴)’는 '스(石)‘, 아당(亞當)’은 ‘아이(艾)’로 바꿨다. 그중 ‘옌산(俺三)’이라고 불린 금의위(錦衣衛) 소속 유대인이 있었는데 그는 모반을 막은 공을 인정받아 카이펑을 수도로 삼은 송 황조의 성씨인 ‘자오(趙)’를 받게 됐다. 명 태조 주원장(朱元璋)은 새로운 민족정책을 제정할 때 특별히 카이펑 유대인들에게 ‘조상의 습관을 좇아 볜량(汴梁, 현재 開封)에서 머물라’는 성지(聖旨)를 내렸다. 이 같은 평등과 관용정책이 오히려 민족성과 커뮤니티의 응집력을 약화시켰다. 명나라가 쇄국정책을 펼쳤기 때문에 서북 변경과 해로가 막혀 명나라 백성들과 타민족과의 관계 또한 멀어지게 됐다. 아울러 혈통의식이 점차 둔화되면서 카이펑 유대인은 한족과 별 구별이 되지 않았다. 히브리어는 물론 페르시아어를 완전히 잊어버리게 됐다.
카이펑 유대인이 자신들이 믿고 있는 유대교에 대해 언급하고 비석을 자세히 살펴보면 유교와의 동화가 점진적으로 이뤄졌음을 확인하게 된다. ‘홍치이년비’는 이스라엘교(유대교)의 기원과 취지, 하늘에 대한 예배와 조상숭배, 카이펑 유대인 커뮤니티의 내력과 발전 역사, 이스라엘교(유대교)와 유교와 대동소이 내용 등을 기록하고 있다. ‘정덕칠년비’는 유대교의 역사를 다시 한번 서술하고 정치, 경제, 군사, 문화 등에 대한 카이펑 유대인의 공헌을 기록하면서도 유가사상과 유대교의 일치성을 강조하고 있어 상당히 동화가 진행된 것을 엿볼 수 있다. 청나라의 ‘강희이년비’는 유대교의 계율을 더 이상 강조하고 있지 않는 것을 분명히 알게 된다.
카이펑 유대인 문화의 쇠락에는 유대인 지식인들이 과거제도를 통해 출세의 길을 걸은 것이 적잖게 영향을 미쳤다. 카이펑 유대인이 언제부터 과거시험을 응시했는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다. 하지만 명나라 때 유대인들이 관료로 진출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는 점에서 카이펑 유대인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철저하게 중국화 됐음을 추정할 수 있다.
명나라에서 과거를 통해 진사가 된 유대인이 20여명이나 됐고 카이펑 현지 주요 비즈니스를 유대인이 장악하고 있었다. 유대인 73개 성씨, 500여 가족, 5000명이 카이펑에서 거주했던 기록이 있을 정도다. 과거시험을 치르기 위해선 유대인들도 어려서부터 공맹(孔孟)사상과 중국문화, 사서오경 등을 기본적으로 숙지해야 했다. 청조에서 카이펑 유대인들은 유가문화에 완전히 젖어 유대교 본래의 이념과 의식은 매우 희박하게 됐다. 특히 과거에 응시하면서 중국 전통사상과 유교의 영향을 피할 수 없었고 봉건제도의 환경과 각 민족의 관리 교류를 통해 유대인 특유의 민족의식이 희박해졌다. 유대인들의 동화는 그들 자녀들의 이름을 짓는데도 영향을 미치게 됐다. 문화의 동화는 민족 내 커뮤니티의 동화를 넘어 결혼과 신분의 동화에 이르러 결국 히브리 문자까지 포기하는 지경에 이르게 한다. 유대인들이 카이펑에서 처음 거주할 때는 히브리 이름을 사용했으나 갈수록 중국인 성씨를 사용하게 됐다. 결국 명나라 시절 카이펑 유대인들의 이름은 유가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게 농후해 보였다. 가장 전형적인 명말청초 장씨 가족의 6명의 아들은 싼더(三德), 시자오(希召), 시쿵(希孔), 시리(希禮), 시멍(希孟), 지우더(九德) 등 공맹과 유가경전에 영향을 받은 듯한 이름을 가졌다.
과거에 급제한 유대인 지식인들은 유대인간의 결혼제도를 솔선수범해서 깨고 혼인 자체가 사회적 신분과 선비의 상징이 되게 했다. 명조 말에 유대인 장메이(張美)는 6명의 처를 두었는데 그중 4명이 유대인 여성이 아니었다. 명말청초(明末淸初) 카이펑 유대인의 7대 성씨 등기책을 보면 카이펑 유대인은 쑤(蘇), 궈(郭), 천(陳), 쉬(徐), 꾸(顧), 우(吳), 자(賈), 린(林), 니우(牛), 뤼(呂), 후(胡), 저우(周), 쑹(宋), 왕(王), 둥(董), 쿵(孔), 정(鄭), 덩(鄧), 쉬(許) 등 40여개 성씨의 외족부녀를 부인으로 두었음을 알 수 있다. 현재 유대인 후예가 갖고 있는 성씨는 스(石), 카오(高), 아이(艾), 리(李), 장(張), 자오(趙), 진(金) 등 7개다. 유대인 유생들이 정부의 관리가 된 뒤 임지를 옮겨 다니면서 고유의 민족 커뮤니티를 벗어났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타민족과의 통혼이 이뤄졌다. 정부 관리가 된다는 것은 자신의 통혼은 물론 자녀들까지 이민족과 통혼하는 걸 허용하는 문화가 보편화됐음을 의미하게 됐다. 유대인 커뮤니티 내 사람들이 갈수록 줄어드니 유대인간 결혼은 더욱 어렵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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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기 | 이름 | 학위 | 관직 | 부임지 | 비고 |
명대 | 안청(俺誠) |
| 금의위(金衣衛)지휘, 도(都)지휘 첨사(僉事) | 저장(浙江)성 | 영락황제가 조(趙)씨성을 내림 |
명대 | 가오녠(高年) | 공사(貢士) | 지현(知縣) | 난징(南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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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대 | 아이쥔(艾俊) | 거인(擧人) | 덕왕부(德王府) 장사(張史) | 더저우(德州)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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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대 | 진커우(金口) |
| 광록사경(光祿寺卿) | 베이징(北京) | 닝샤(寧夏) 거주 |
명대 | 진성(金勝) |
| 금오위천병(金吾衛千兵) | 미상(未詳) | 닝샤(寧夏) 거주 |
명대 | 진중(金鐘) | 생원(生員) | 미상(未詳) |
| ‘홍치비(弘治碑)’ 기록자 |
명대 | 줘탕(左唐) | 진사(進士) | 시정사사참의(市政使司參議),참정(參政) | 광둥(廣東) | ‘정덕칠년비(正德七年碑)’ 기록자 |
명대 | 아이톈(艾田) | 거인(擧人) | 학관(學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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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대 | 아이잉쿠이 (艾應奎) |
| 주왕부(周王府)의관(醫官) | 카이펑(開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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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대 | 장메이(張美) |
| 핑위엔(平垣영)영유격(營游擊) | 산시(山西)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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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1:명나라 시절 유대인 사대부(士大夫) 제명표(題名表)
결론적으로 유대인 지식인들의 유대교 신앙이 약화되고 행위 또한 자민족 전통에서 벗어나면서 본래의 신앙과 전통은 희박해졌다. 유대인이면 가질 수밖에 없는 메시아 갈망 사상도 전혀 없게 됐다. 1850년 런던유대인전도회가 파견한 사람이 카이펑에 왔을 때는 히브리어를 읽을 수 있는 유대인이 한명도 없었다는 것과 50여년 간 랍비가 없었다는 것을 목격했다고 절망했다. 이는 유대인 고유의 메시아사상도 없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과거 예수회 신부들이 확인했던 카이펑 유대인의 할례의식도 더 이상 이뤄지지 않고 있었다. 1867년 영국 성공회 주교가 카이펑을 방문했을 때, 유대인들이 그들의 종교를 잃어버리고 중국인과는 근본적으로 구분되지 않고 확실한 중국인이 됐다고 고백했을 정도였다.
여기서 이슬람교와 유대교의 중국화과정을 살펴보면 매우 흥미로운 사실을 알 수 있다. 명조중엽 해금(海禁)정책(해상 교통, 무역, 어업 등에 대한 제한 정책) 실시 이후 중국에서 활동하던 무슬림 학자들은 갈수록 적었다. 중국 무슬림가운데 아랍어와 페르시아어를 구사할 수 있는 이들도 눈에 띄게 줄어들었고 이슬람 교리에 정통한 사람들이 매우 적었다. 이에 무슬림 지식인 사이에서 스스로 이슬람 교리를 지켜야 한다는 운동이 일어나게 했고 민족전통과 종교이데올로기가 모든 운동의 핵심이 됐다. 무슬림들이 2가지 방식을 택했다. 하나는 모스크교육이 종교교육제도의 핵심과 이슬람 인재를 양성하는 기반이 됐다. 모스크교육은 중세 이슬람국가의 모스크교육제도와 중국 전통의 사숙교육제도을 결합하는 형식이었고 훗날 중국 특색의 교육제도의 기초가 됐다. 모스크교육은 무슬림 지도자들을 배출하는 통로가 됐을 뿐 아니라 일반 무슬림들의 이슬람교 의식을 강화시키는 기초가 됐다. 다른 하나는 이슬람 경전의 활발한 한역(漢譯)운동이다. 이는 많은 중국 무슬림들이 경전을 학습하고 이슬람교에 대해 매우 익숙해질 수 있게 했고 유가와의 관계에서도 서로 협조할 수 있게 했다. 무슬림 학자들의 중국어 저작운동은 청나라 말까지 이어져 300여년 다져진 유학의 정수를 받아들이는 한편 민족문화를 계승하도록 해 중국문화로의 동화를 막는 순기능 역할을 감당했다.
무슬림들의 이 같은 활동과는 달리 카이펑 유대인들은 일종의 고립된 상태에서 지냈다. 16세기 전에는 페르시아의 유대인 공동체와 매우 친밀한 관계를 유지해왔으나 점차적으로 외부와의 교류가 줄어들었다. 특히 중국사회에서 폐쇄정책이 기승을 부리면서 카이펑 유대인 커뮤니티는 다른 나라에서 거주하는 유대인과의 연결고리를 잃어버렸다. 1605년 마테오 리치는 카이펑 유대인 아이톈을 만난 뒤 카이펑으로 사람을 급파해 카이펑 회당 책임자에게 편지를 보냈고 편지를 받은 책임자는 리치에게 회당의 관리를 맡길 수 있다고 회신했다. 회당 책임자가 리치에게 이같이 제안한 이유는 카이펑 유대인 커뮤니티내에서는 회당을 책임질 수 있는 사람을 찾기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후에 3명의 카이펑 유대인이 베이징으로 와 리치를 만났을 때 회당 책임자가 죽은 뒤 카이펑 유대인들 가운데 히브리어를 알고 있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고 밝히기도 했다.
1723년 8월 18일 아노이니 고빌(Anoine Gaubil)은 “나는 직접 그들(카이펑 유대인)이 히브리어를 이해하지 못하는지 직접 확인하고 싶었다. 이들은 오랫동안 서구의 사부(師父, 스승)를 만나지 못했다고 말했다. 아울러 히브리어 어법과 성경을 모른다고 인정했다. 더욱이 미쉬나는 물론 성경의 역사도 몰랐다”고 밝혔다. 카이펑에서 유대인 회당이 건립돼있을 때 마침 유학의 대가인 주희(朱熹)가 활발하게 활동했던 터라 카이펑에서도 유학이 강세를 보였다. 카이펑 유대인들은 유학이 자신의 전통문화와 교육을 대체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지만 점차적으로 유대인의 정체성이 무너지면서 중국으로의 동화를 피할 수 없게 됐다. 1850년 유대인의 후예가 이 같은 편지를 썼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우리들은 향을 피우고 눈물을 흘리면서 간절히 기도한다. 우리의 종교가 다시 흥왕하기를 바란다. 그러나 빈약한 상황이 우리의 기대를 무력화시킬 수 있을 것이다.” 카이펑 유대인은 외부역량을 통해 신앙을 회복하고 커뮤니티를 복원하고 싶었지만 이미 때를 놓쳤다.
카이펑 유대인 동화 정도를 10여년 전 사망한 자오핑위(趙平宇) 이야기에서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자오는 하사받은 성씨이다(자오핑위는 죽기 전까지 자오라는 성을 갖게 된 이유를 알지 못했다. 이는 앞서 언급했듯이 명나라 특무로 공을 세워 얻은 것이었다). 자오의 유대인 조상은 청나라 관리로 일했지만 무슨 이유인지 모르지만 훗날 가세가 기울어졌다. 이 때문인지 그의 할아버지는 미장이로 일했다. 자오핑위는 운 좋게 공부를 한 뒤 중국 공산당 의 통치하에서 세무국에서 근무했다. 그의 어머니는 한족이었다. 유대교 종교의식과는 자연스럽게 멀어졌다. 그가 유대인 후예라는 걸 알 수 있는 것은 돼지고기를 안 먹고 가끔 발효되지 않은 빵(무교병)을 먹는다는 정도에 불과했다. 문화대혁명 기간에는 우파(右派)로 몰려 고깔모자를 쓰는 등 갖은 수모를 겪어야 했다. 부인과 함께 허난성 신정(新正)으로 쫓겨 가서 5명의 자녀와 함께 지냈다. 그리고 유대인 후예라는 걸 인정해서는 안 되는 삶을 살아야 했다. 그는 20년만에 복권된 뒤 세무국으로 다시 돌아갈 수 있었다. 그는 죽기 전에 과거 카이펑에 있었던 유대회당 모형을 제작하겠다는 꿈을 안고 살았다고 그의 부인인 추이수핑(崔淑萍)이 회고했다. 둘째 딸 자오쉐팅(趙雪婷)은 자신의 성이 황제가 하사했다는 걸 아버지로부터 들어 알 뿐 유대교 신앙과 유대인 습관 등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었다. 결국 유대인 후예라는 걸 인식할 뿐 완전한 정체성을 갖고 있지 못한 것이다.
▲ 1932년 미국 실업가이자 뉴욕의 주간지 '미국의 유대인' 발행인인 데이비드 브라운(오른쪽 첫번째 선글라스 쓴 사람)이 카이펑 유대인인 자오주팡 집안을 방문한 뒤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카이펑 유대인 후예는 ‘도경골목’에서 주로 살았는데 1958년 이후 우루무치(烏魯木齊), 란저우(蘭州), 시안(西安), 청두(成都), 상하이(上 海), 난징(南京), 선전(深圳) 등지로 이주하기 시작돼 현재는 자오 성씨 일가만이 고향인 카이펑을 지키고 있다. 1980년대 허난성 인민병원과 카이펑시 위생방역센터에서 유대인의 DNA를 분석한 결과 카이펑 유대인 후예와 이라크 유대인과 아랍유대인이 비슷한 인자를 갖고 있는 것으로 판명이 났다.
한 사료에 따르면 카이펑 유대인은 명말 예수회 신부가 카이펑을 방문하기 전에는 ‘유대’라는 단어를 모르고 ‘이사락업(一賜樂業, 발음이 ’이츠러예‘로 이스라엘을 음역한 것)’이라는 단어로 자신의 정체성을 이해했다. 아울러 유대인의 주요 절기인 ‘성전설(수전절, 광명절)’도 몰라 지키지 않고 있었다. 성전설은 B.C 2세기 시리아왕에 의해 더렵혀진 예루살렘 성전을 다시 되찾아 성전을 청소하고 다시 봉헌한 것을 기념해 8일간 이어지는 절기다. 신약성경에는 단 1차례, 요한복음 10장 22절(“예루살렘에 수전절이 이르니 때는 겨울이라")에 나온다. 봉헌절 또는 하누카(Hanukkah), 등화의 절기(빛의 절기, the Feast of Lights)라고도 불린다.
카이펑 유대인들은 현지 문화에 서서히 동화되면서 마침내 민족문화까지 상실한 채 중국인으로 살아가게 됐다. 카이펑에서 유대인 후예가 아직 살아가고 있지만 완전히 민족 종교를 회복하기에는 시간이 상당이 걸리거나 특별한 외부적인 도움이 없다면 불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유대인 이름 ‘모세’를 갖고 있는 장싱왕(張興旺)의 카이펑 집에는 성경과 일곱촛대, 다윗의 육각별, 역대 재중 이스라엘 대사와 함께 찍은 사진 등 유대인의 후예임을 보여주는 것들이 있다. 그의 아들은 영어와 히브리어를 공부했지만 학교에서 자신을 유대인이라고 말한 적은 없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유대인의 후예임을 부인하지는 않는다.
다른 나라에서는 유대인이 엄청난 핍박 속에서도 자신들의 정체성을 잃지 않고 전통을 이어갈 뿐 아니라 결국 주류사회를 형성했던 것과는 달리 중국에서는 매우 상이한 결과가 드러났다. 이것이 카이펑 유대인의 현주소이자 미래의 바로미터인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