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세계역사

세계냉전시대의 스파이사 : 2

작성자통섭인|작성시간16.05.02|조회수1,013 목록 댓글 0

 

세계냉전시대의 스파이사

 

냉전 시대의 스파이 - 1. 캔디 작전(1)

 

19451월의 상쾌한 어느 날, 뉴멕시코의 앨버커키의 기차역 플랫폼에 서 있는 여자는 기다리는 승객을 의심의 곁눈질하는 남자들을 쳐다보지 않으려고 애썼다. 그리고 이따금씩 제제를 받고는 여권을 보여주고 자신의 가방이나 핸드백이 수색되는 동안 꾹 참고 기다리는 승객들에게도 애써 눈길을 주지 않았다.

 

그녀는 줄타기 곡예와 다를 바 없다고 생각했다. 한 발짝만 헛디디면 끝장이었다. 그녀는 어떤 일이 있어도 도처에 잠복한 수십 명의 FBI 요원과 군 감시요원의 의심을 받지 않아야 했다. 아주 작은 실수도 주의를 끌 수 있으며, 핸드백이라도 보자고 한다면 4개의 기다란 마이크로필름이 곧 들통날 터였다. 그렇게 되면 캔디(Candy)'라는 이름의 작전은 끝장이라는 것을 그녀도 잘 알고 있었다. 소련의 미래가 걸린 일이었다.

 

열렬한 공산주의자이자 KGB 첩보원인 로나 코헨(Lona Cohen)은 자신이 지금 호랑이 굴 안에 있다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았다.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 로스 알라모스라는 눈에 잘 띄지 않는 황량한 마을이 있고, 그곳에서는 역사상 최대의 비밀 프로젝트가 하루 24시간 바쁘게 진행되고 있었다. 일급비밀 중에서도 일급에 속하는 이 프로젝트를 보호하기 위해 대규모 보안 병력이 배치되었다. 그 어떤 의심스러운 움직임이나 수상쩍은 사람, 보안을 위태롭게 할 수 있는 사소한 낌새라도 포착되면 과거에는 볼 수 없었던, 전시를 방불케 하는 대대적인 보안체제 아래 엄격한 감시가 시작되었다. 군부대가 대단한 위용을 과시하는 앨버커키 같은 곳에서는 감시를 받지 않고는 개미 한 마리도 출입할 수 없었다.

 

그러나 KGB가 포섭한 수많은 정보요원이 그곳의 중요한 기밀을 유출했다는 사실을 로나 코헨은 잘 알고 있었다. 그 중 가장 뛰어난 정보원은 페르세우스(PERSEUS)'라는 코드명의 남자였다. 코엔은 그의 코드명만을 알고 있을 뿐이었다. 코엔은 역시 열렬한 공산주의자인 남편 모리스와 함께 10년 전에 미국 내 첩보활동을 목적으로 KGB에 포섭되었고, 코엔에게 주어진 임무는 페르세우스가 앨버커키의 투하지점에 내려놓은 자료를 가져와 뉴욕에 있는 KGB 감독요원에게 넘기는 일이었다. 완벽한 작전은 아니었지만 어쨌거나 페르세우스는 자신이 건네는 자료가 워낙 중요한 자료이므로 코엔이 부근의 삼엄한 경비를 뚫어야 하는 모험을 감행해야 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코엔의 위장은 허술했다. 코엔은 메리 K. 존슨이라는 이름으로 사회보장카드와 운전면허증, 그리고 뉴멕시코까지 여행하는 목적을 보여주는 서류를 가지고 있었다. 서류는 코엔이 결핵을 앓고 있으며 치료를 받으러 뉴멕시코의 요양소를 정기적으로 들른다는 사실을 보여 주었다. 하지만 간단한 조사만 해봐도 메리 K. 존슨이라는 사람은 없으며, 그녀는 결핵환자도 아닐뿐더러 요양소라는 곳도 사실은 미국의 공산주의자가 기만작전을 돕기 위해 운영하는 보잘것없는 사무실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금방 알 수 있었다.

 

뉴욕행 기차가 도착할 즈음 코엔은 핸드백에 든 마이크로필름을 어떻게 조치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작은 상자에 담긴 휴지를 하나 사서 기차역 화장실에 들어가 마이크로필름을 휴지 사이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기차가 역에 도착하자 그녀는 휴지 한 장을 꺼내 입을 막고는 결핵환자인 양 이따금씩 기침을 했다.

 

기차에 오를 준비를 하는 동안 코엔은 플랫폼에서 승객의 탑승을 돕는 역무원에게 휴지 상자를 건넸다. 그리고 애써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좀 도와주시겠어요?” 그녀는 몇몇 보안요원이 자신을 쳐다보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역무원은 코엔이 계단을 오르도록 도와주었고, 그녀는 이때 작전을 실행했다. 코엔은 기차에 오르면서 일부러 휴지 상자를 챙기지 않았다. 예상대로 역무원은 코엔이 휴지를 잊었다고 생각하고는 계단으로 뛰어올랐다. 역무원은 휴지상자를 건넸고, 코엔은 보안요원이 더 이상 자기를 쳐다보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코엔은 안도의 한숨을 깊이 내쉬면서 고마움을 표시했다.

 

이로써 사상 초유의 엄격한 보안이 유진된 기밀이 모스크바를 행한 여정에 올랐다. 며칠 뒤 뉴욕 주재 소련 영사관에 있는 무선통신기는 수 시간에 걸친 전송을 시작했다. 다섯 자리 숫자로 된 코드문에는 특별한 메시지가 숨겨져 있었다. 맨해튼 프로젝트에 따라 세계 최초로 핵무기를 제조하면서 부딪히는 과학적, 기술적 장애와 이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이룬 성과를 상세히 기록한 일급기밀 보고서를 번역한 메시지였다. 얼마 후 소련 과학자들에게 건네진 이 보고서는 모든 의문과 장애를 해결해주었다. 소련의 과학자들은 스탈린에게도 보고했듯이 앞으로 약 4년 안에 소련도 원자폭탄을 제조할 수 있다고 확신했고, 이는 20년에서 30년이 걸리리라는 당초의 예상보다 훨씬 짧은 기간이었다. 소련은 경이로운 무기를 자체적으로 보유함으로써 강대국 대열에 오를 수 있었다.

 

세계 정치에 이처럼 극적인 영향을 끼친 첩보활동은 역사상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다. 코드명 캔디의 원자폭탄 관련 첩보작전은 이후 눈부신 성과를 거두는데, 과거에도 그리고 이후로도 이에 견줄 만한 첩보작전은 없었다. 작전이 성공할 수 있었던 원인은 전적으로 소련 정보기관 소속 전문 첩보요원의 눈부신 활약 덕분이었다. 특히 배반을 유도하는 이들의 능력은 탁월했다. 소련이 누구보다도 먼저 인정했듯이 캔디 작전은 높은 정치적 이상이라는 명분 아래 주저없이 조국을 배반한 수많은 반역자가 없었다면 성공할 수 없었던 작전이었다.

 

그리고 조국을 배반한 이들은 자신의 정치적 이상에 댓가를 톡톡히 치러야 했다.

 

 

냉전 시대의 스파이 - 2. 캔디 작전(2)

 

캔디 작전은 1938년에 시작되었다. 그해는 두 명의 독일 과학자가 실험실에서 원자를 분열시키면서 20세기 과학을 완전히 뒤집어놓은 해였다. 세계의 모든 과학자와 마찬가지로 소련의 과학자들 역시 독일의 실험이 중대한 의미를 가진다고 생각했다. 전에 없는 위력을 지닌 도시 하나를 한 방에 완전히 날려버릴 수도 있는 경이적인 무기인 핵무기가 이론상으로 가능해진 것이었다. 세계의 정치권도 그 파장을 인식했고, 소련을 포함한 많은 나라에서 원자폭탄을 비밀리에 연구하기 시작했다.

 

소련의 주요 정보기관인 GRUNKVD도 핵무기 개발과 관련된 과학적인 어려움을 알고 있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뛰어난 정보기관이라면 어려운 일이라고 해서 쉽게 포기하지는 않는다고도 생각했다. 이들은 서구의 적국 가운데 어떤 나라가 이 높은 장벽을 극복할 수 있는지 찾아보기로 했다. 19416, 독일이 소련을 침공하자 소련 정보기관은 그 어느 때보다 다급해졌다. 스탈린은 히틀러가 소련의 방어능력을 벗어나는 무기로 무장하지는 않았는지, 그 상황 파악에 총력을 다하라고 지시했다. 스탈린의 정보기관은 그에게 해결책을 제시했는데, 그 해결책은 예상하지도 못한 정보원에게서 나왔다. 바로 영국이었다.

 

영국과 그 동맹국인 미국은 소련과 마찬가지로 독일이 원자폭탄을 개발하지 않을까 노심초사했다. 영국은 튜브 앨로이스 프로젝트(Tube Alloys Project)라는 코드명의 프로그램을 자체적으로 진행했다. 이는 독일의 많은 과학자가 원자폭탄을 준비 중이라는 망명 독일 과학자들의 경고에 따른 것이었다. 미국에서도 맨해튼 프로젝트라는 코드명 아래 비슷한 프로그램이 진행되었다. 맨해튼 프로젝트는 앨버트 아인슈타인이 미국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독일의 원자폭탄 개발을 우려하는 편지를 쓴 이후 시작되었다.

 

영국 정보기관은 이 게임 초반에 독일이 원자폭탄을 개발하지 못할 것이라고 결론을 내렸지만, 영국과 미국은 이에 상관없이 원자폭탄 합동개발계획의 실현을 최우선 과제로 삼았다. 미국은 영국이 독일의 핵 개발 프로그램을 속속들이 알고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그러나 미국이 정보의 확실성을 위해 정보원을 추궁해도 영국은 이를 밝히지 않았다. 독일 내에 있는 자국의 정보원을 보호하기 위해, 영국 정보기관은 이 모든 상세한 정보를 어떻게 입수했는지 절대 밝히지 않았다. 이 때문에 영국이 미국에게 독일은 전쟁이 끝나기 전에 원자폭탄을 개발할 가능성은 없다고 자신 있게 말할 때도 미국은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가장 회의적인 반응을 보인 사람은 레슬리 그로브스(Leslie Groves) 장군이었다. 그는 맨해튼 프로젝트의 총책임자였으며 동시에 부속 정보부대의 지휘자였다. 이 정보부대의 유일한 기능은 독일 핵 개발 프로그램의 규모를 점치는 것이었다. 독일에 정보원이 없었던 정보부대는 독일의 핵 개발 프로그램에 대한 간접적인 단서를 추렸고, 그 결과 독일은 핵 개발을 한창 진행 중이며 조만간 핵무기를 제조하리라는 확신에 찬 결론을 내렸다. 독일 정보원이 없었던 전략 사무국(OSS) 역시 같은 결론에 도달했다.

 

영국은 그로브스에게 독일의 원자폭탄 개발이 임박했다는 그의 확신을 뒷받침할 만한 분명한 증거를 조금이라도 대보라고 했다. 그로브스는 증거는 없다고 시인했지만, 계속해서 재미있는 결론을 내놓았다. 증거가 없는 바로 그 점이 독일이 원자폭탄을 개발했다는 뜻이라고 했다. 증거 부족은 비밀이 새나가지 않도록 물샐 틈 없는 보안을 하기 때문이라는 이야기였다.

 

영국과 설전을 벌이는 동안 그로브스는 그저 글쎄요, 영국도 확신할 수 없잖습니까?”라는 말만 되풀이했다. 물론 정보원을 가지고 있던 영국은 확신할 수 있었다. 하지만 완벽을 기하기 위해 튜브 앨로이스 프로젝트에 참여한 물리학자 중 젊고 영리한 학자 한 사람을 불러, 독일 내 정보원이 제공한 자료를 과학적으로 분석해 자료가 100% 신뢰할 만한지 검토하라고 했다. 이때 선택된 사람은 앨런 넌 메이(Alan Nunn May)였다. 그는 사실 KGB 요원이었으며, 튜브 앨로이스에 관한 정보를 이미 모스크바에 낱낱이 제공한 상태였다. 그런 그가 이제 보너스 선물까지 제공할 수 있게 된 것이었다. 소련은 독일이 원자폭탄을 제조할 가능성이 없다는 사실을 눈치챘을 뿐 아니라, 독일의 원자폭탄 위협을 확신한 미국이 자체적으로 원자폭탄 개발에 본격적으로 착수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이때 소련 정보기관은 한 가지 극적인 결론을 내렸다. 독일이 원자폭탄을 개발할 가망이 없는 상태에서 원자폭탄을 개발할 수 있는 유일한 곳은 바로 영국과 미국이었다. 이 두 나라만이 원자폭탄을 제조하는 데 필요한 정보를 가지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따라서 소련 정보기관은 독일의 프로그램은 제쳐두고, 영국과 미국의 합동계획에 관심을 집중하기로 했다. 간단히 말해, 미국의 원자폭탄 개발 위협은, 그리고 원자폭탄으로 인해 소련의 적들이 행사할 전후의 권력지배는 그 가능성이 훨씬 심각했다. 총력을 다하라는 지시가 떨어졌고, 소련은 연합국의 원자폭탄 기밀을 빼내 이를 따라잡아야 했다. 코드명 캔디 작전의 시작이었다.

 

 

냉전 시대의 스파이 - 3. 캔디 작전(3)

 

육중한 기계가 철커덩 돌아가듯 소련의 첩보조직이 가동되기 시작했다. 영국에 있는 KGB의 뛰어난 두더지 첩보원 도널드 매클린에 명령이 떨어졌다. 영국과 미국이 합동으로 논의 중인 원자폭탄 개발에 관해 가능한 모든 정보를 입수하라는 내용이었다. 그는 알짜 정보를 입수했는데, 바로 영국과 미국이 합동으로 작성한 60쪽 분량의 일급비밀 보고서였다. KGB는 미국으로 망명한 이탈리아 공산주의자이자 물리학자인 브루노 폰테르코보(Bruno Pontercorvo)도 포섭했다. 그가 지닌 최고의 가치는 미국으로 망명한 과학자 엔리코 페르미와 절친한 사이라는 점이었다. 그가 1942년 페르미의 성공적인 핵반응 실험에 관한 중요한 정보를 소련에 제공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러한 관계 덕분이었다.

 

한편 캐나다에서도 원자폭탄과 관련해 많은 부수적인 연구가 이루어졌고, 이곳에 근거지를 둔 KGBGRU의 첩보원들은 10여 명의 캐나다 공산주의자들을 신속히 움직이게 했다. 이들은 무기제조용 플루토늄 생산에 사용되는 기체확산 과정과 같은 중요한 기술기밀을 샅샅이 뒤졌다. 앨런 넌 메이가 원자폭탄 프로그램과 관련해 캐나다로 파견되었을 때 소련은 보너스를 얻은 셈이었다. 그곳에서 그는 가공한 우라늄의 실제 샘플을 소련에 넘겼다.

그러나 캔디 작전이 최대의 성공을 거둔 곳은 바로 미국이었고, 이는 다음 다섯 명의 매우 유능한 첩보원 덕분이었다.

 

그레고리 하이페츠(Gregory Kheifetz)

 

샌프란시스코에 파견된 기지감독관인 하이페츠는 메사추세츠 공과대학(MIT) 학생이던 1939년에 그곳에서 핵물리학에 관한 해박한 지식을 습득했다. 그는 미국 과학계에서 공산주의에 동조하는 사람들과 조심스레 광범위한 인맥을 형성해나갔다. 이 같은 접촉의 결실로 하이페츠는 버클리에 있는 방사실험실 잠입에 성공했다. 이곳은 미국 원자에너지 연구의 중심지이면서 맨해튼 프로젝트에 핵심 인력을 공급한 곳이었다. 실험실 실장인 로버트 오펜하이머가 프로젝트의 총책임자였다. 1941년 후반 하이페츠는 실험실에서 연구하는 정보요원 세 명의 도움으로 미국 원자폭탄 프로젝트 전반에 걸친 정보를 모스크바에 넘겨줄 수 있었다. 그는 연구원들이 워낙 열심히 연구에 몰두했기 때문에 미국은 이들이 원자폭탄 개발에 성공할 것으로 확신한다고 전했다.

 

바실리 자루빈(Vassili)과 엘리자베스 자루빈(Elizabeth Zarubin)

 

외교관 신분으로 위장해 워싱턴 D.C.에 거주한 바실리 자루빈은 미국 내 캔디 작전의 총책임자였다. 그의 아내 엘리자베스는 5개 국어에 능통하고 미국 공산주의자들과 광범위한 인맥을 형성한 KGB 최고의 첩보원으로, 연합국인 소련도 원자폭탄을 공유할 자격이 있다는 자신의 주장에 동조하는 과학자들을 포섭했다. 그 가운데에는 맨해튼 프로젝트의 핵심인물인, 그리고 KGB가 그의 정체를 끝까지 밝히지 않은 페르세우스도 있었다. 그 외에도 망명한 독일 과학자이자 공산주의자인 클라우스 푹스(Klaus Fuchs)와도 교류했는데, 푹스는 영국에서 튜브 앨로이스에 참가하면서 동시에 KGB의 첩보원으로 활동했던 사람이다. 그 뒤 로스 앨러모스로 옮겨간 그는 그곳에서 자루빈 부부에게 원자폭탄 제조에 관한 상세한 기술 관련 첩보를 제공했으며, 이로써 소련 최초의 원자폭탄 제조에 결정적인 도움을 주었다.

 

가이크 오바키미안(Gaik Ovakimian)

 

뉴욕에서 소련의 무역기관인 암토그(AMTORG)의 대표로 행세한 KGB의 일급 공작원 오바키미안은 포섭의 귀재로 알려져 있다. 1930년대 미국의 기술을 훔치기 위해 그가 포섭한 미국 공산주의자는 한둘이 아니었다. 그는 이들을 원자 기술 관련 첩보활동에 투입했다. 그가 포섭한 사람 가운데는 줄리어스 로젠버그(Julius Rosenberg)와 에설 로젠버그(Ethel Rosenberg) 부부도 있었는데, 에설의 동생인 데이비드 그린글래스(David Greenglass)는 로스앨러모스에서 일했다. 그린글래스가 맡은 일은 비록 낮은 기술직이었지만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원자폭탄에 들어가는 내파장치의 틀을 만드는 일이었는데, 이 장치는 맨해튼 프로젝트에서 가장 엄격하게 보안이 유지되는 부분이기도 했다

 

아나톨리 야츠코프(Anatoli Yatskov)

 

뉴욕에 근거지를 두고 활동하는 KGB의 또다른 일급 공작원 야츠코프 역시 미국 내 공산주의자를 광범위하게 포섭한 사람으로, 이 중에는 미국 정부의 공직자도 여러 명 포함되어 있었다. 야츠코프는 맨해튼 프로젝트 전반에 관한 중요한 첩보를 KGB에 제공했고, 여기에는 우랴늄 생산시설에 대한 첩보도 들어 있었다. 이 첩보로 소련은 미국이 얼마나 많은 원자폭탄을 제조할 수 있는지 예측할 수 있었다.

 

1944년까지 캔디 작전은 맨해튼 프로젝트 구석구석 파고들지 않은 부분이 없었고, 소련이 모르는 부분도 거의 없었다. 소련은 프로젝트의 심장부에서 직접 훔쳐낸 286개의 일급비밀 문서를 확보했다. 뿐만 아니라 약 200명에 달하는 정보요원이 정보를 제공하는 등 캔디 작전의 위장전술은 완벽했다.

그러나 작전이 절정에 달하는 순간 재앙이 들이닥쳤다. 사태는 소련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터졌다. 바로 무선통신이었다. 워낙 방대한 자료를 모스크바로 송신하다본 암호를 송신하는 직원들이 지나치게 혹사되었고, 중요한 정보를 빨리 보내라고 다그치는 통에 직원들은 몇 가지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때로는 같은 일회용 난수표를 두 번이나 사용하는 실수를 저질렀고, 어떤 때는 자료를 좀더 빨리 전송하기 위해 단순한 암호를 사용하는가 하면, 또 어떤 경우에는 조심성 없이 여러 첩보원과 정보요원에 대해 지나치게 상세한 내용을 전송했다. 1945년 소련을 새로운 표적으로 삼은 미국과 영국의 통신 정보기관은 소련 정보기관의 방대한 전시 교신 내용을 해독하기 시작했다.

 

곧이어 캔디 작전의 전모가 드러났다. 푹스가 체포되었고 자루빈의 주요 연락원이었던 해리 골드(Harry Gold)도 붙잡혔다. 가능한 많은 정보요원을 대피시키려 했던 KGB는 로나 코헨과 그 남편을 빼내는 데는 성공했지만, 로젠버그 부부는 위조 여권을 손에 넣기 전에 붙잡히고 말았다. 브루노 폰테코르보는 달아났지만 푹스와 앨런 넌 메이가 체포되었고, 푹스는 사실을 자백했다.

 

설상가상으로 이고르 고우첸코(Igor Gouzenko)라는 GRU 암호 송신 직원이 캐나다 오타와로 망명했다. 이때 그는 110개의 암호 송신문을 가지고 갔으므로 캔디 작전의 교신 내용은 더욱 많은 부분이 해독되었다. 이로써 캐나다에서의 캔디 작전은 그 전모가 드러났고, 미국에서 활동하던 정보요원들도 꼬리가 잡혔다.

 

캔디 작전이 괴멸하는 와중에서도 외교관의 면책특권 덕에 자루빈 부부와 그 외 소련 정보기관의 일급 첩보원들은 모스크바로 돌아갈 수 있었다. 모스크바 센터라고 알려진 KGB 본부는 이들을 냉담하게 맞이하면서 이번 사태를 그들의 부실한 암호보안 탓으로 돌렸다. KGBGRU의 고위 관리들이 이들에게 줄기차게 상기시킨 대로, 소련 정보기관이 원자폭탄을 훔치기 위해 만든 거대한 조직망은 앞으로도 계속해서 이용할 수 있겠지만 어쨌거나 지금은 끝장나버렸다. 비슷한 조직을 다시 만들기까지는 앞으로 수년이 걸릴 터였다.

 

그러나 캔디 작전이 무너지면서 가장 큰 부담을 느낀 쪽은 가장 절박한 순간에 소련 정보기관을 위해 열정적으로 봉사한 사람들이었다. 이들의 배반이 세상에 폭로됨으로써 이들에 대한 정치적 신뢰는 땅에 떨어지고 말았다. 이들은 미국 내 공산주의와 그보다 정도는 덜하지만 영국과 캐나다의 공산주의까지 영원히 괴멸시킨 냉전시대 마녀사냥의 소용돌이 속에서 희생되었다.

 

 

냉전 시대의 스파이 - 4. 포틀랜드 스파이 링

 

1950년대 KGB의 가장 대표적인 스파이망은 포틀랜드 스파이 링(Portland Spy Ring)이다. 이 조직의 우두머리는 고든 론즈데일(Gordon Lonsdale)1961년에 런던에서 포틀랜드 스파이 링이 적발되었고 재판에 회부되었는데 그 재판은 큰 화제가 되었다.

 

196117, 런던의 워털루 역 근처 극장 옆에서 한 남자가 두 남녀와 만났다. 먼저 온 남자가 여자에게서 쇼핑백을 건네받았는데 그 순간 경찰 40명이 사방에서 튀어나와 그들을 포위한 후 체포해갔다. 한 남자의 이름은 고든 론즈데일이고 두 남녀는 해리 호튼(Harry Horton)과 에델 엘리자베스(Ethel Elizabeth)였다.

 

그리고 런던 교외에 살고 있는 크뢰거(Kroeger) 부부가 체포되었다. 고든 론즈데일, 해리 호튼, 에델 엘리자베스, 크뢰거 부부는 포틀랜드 스파이 링을 구성하는 조직원이었는데 이 조직의 우두머리는 소련의 스파이 고든 론즈데일이었으며 그가 다른 4명을 조종했다. 고든 론즈데일이라는 이름도 사실은 가명이었는데 그는 회상록에서조차 자신이 캐나다 출신의 고든 론즈데일이라고 거짓말을 했다. 그가 모스크바 출신의 코논 트로피모비치라는 사실이 밝혀진 것은 훨씬 나중의 일이었다.

 

고든 론즈데일이라고 불리었던 그는 1922, 모스크바에서 과학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소년 시절에는 숙모가 있었던 캘리포니아 버클리에서 공부했고 1938년 다시 소련으로 돌아갔다. 그 후 소련에서 해군에 입대했고 이윽고 정보부에 채용되어 1945년 무렵 캐나다에 잠입했다. 그는 사망한 진짜 고든 론즈데일의 여권을 손에 넣었고 그때부터 고든 론즈데일 행세를 했다. 1955년에는 캐나다에서 미국을 거쳐 영국으로 들어갔고 런던 화이트하우스에서 살았다. 그는 런던 대학에서 중국어를 공부하면서 주크박스 임대업을 시작했고 졸업 후 중국에 가서 사업할 계획을 세웠다.

 

고든 론즈데일은 스파이 활동을 숨기기 위해서 런던에서 풍선껌 회사와 자동판매기 회사를 차렸는데 과학자인 아버지의 재능을 물려받았는지 이런 저런 기계를 발명해서 특허를 따기도 했다. 그리고 그는 런던의 비즈니스계와 문화계 인사와 친분을 쌓았다.

 

고든 론즈데일은 해군 잠수함 기지 포틀랜드에서 일하는 해리 호튼과 접촉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해리 호튼은 포틀랜드 기지에서 근무하다 1951년 바르샤바로 파견되었다. 그는 바르샤바 암시장에서 돈을 벌어들여 흥청망청 돈을 쓰고 돌아다니다가 폴란드 정보부에 발각되었다. 1959년 영국으로 돌아간 해리 호튼은 해군 잠수함 기지 포틀랜드에 있는 무기 공장에서 일했고, 여기서 물품 정리 담당인 반디라고 불리는 에델 엘리자베스와 가까워졌다. 그녀는 무기 공장에서 영국이 개발한 최신 대형 잠수함 드레드노트(Dreadnought)'의 기밀서류를 취급하고 있었다.

 

KGB의 스파이인 고든 론즈데일은 해리 호튼과 에델 엘리자베스에게 해군 기밀정보를 입수했는데 그들은 항상 런던의 워털루 역 근처에서 접선했다.

 

한편 포틀랜드 스파이 링의 조직원인 크뢰거의 진짜 이름이 모르스 코헨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리고 거물 스파이였던 모르스 코헨을 체포한 영국 정보부 MI5는 매우 기뻐했다. 그는 러시아 이민자의 아들로 뉴욕에서 태어나 1935년에 공산당에 입당했다. 그 후 소련 정보부에 채용되었고 레온티나와 결혼한 후 그는 미국 해군에서 아내는 군수공장에서 근무했는데 두 사람은 원자폭탄 스파이 조직에 속했고 로젠버그 부부와도 친분이 있었다.

 

그러다 1950, 로젠버그 부부가 체포되자 모리스 코헨 부부는 도망쳤고 세계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그리고 1954, 모리스 코헨 부부는 크뢰거 부부로 가장해서 영국으로 들어갔고 런던 스트랜드 거리에 작은 서점을 열었다.

고든 론즈데일은 런던에 도착한 즉시 크뢰거 부부에게 연락을 취했고 자주 만났다고 한다. 크뢰거는 사진과 통신 기기를 구비해 두고 고든 론즈데일이 갖고 온 정보를 마이크로필름으로 만들어서 소련으로 보냈다.

 

그런데 왜 고든 론즈데일이 이끄는 포틀랜드 스파이 링이 발각되었을까? 이 사건 직후 출간된 책에 의하면 돈을 물 쓰듯 하는 해리 호튼에 대한 소문을 접한 경찰이 그가 버는 것에 비해 씀씀이가 헤픈 것을 보고 스파이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한 후 계속 감시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 결과 고든 론즈데일과 크뢰거 부부의 정체까지 드러나게 된 것이다.

 

하지만 다른 보고서에는 폴란드 UB(보안경찰)에 있었던 미하일이라는 CIA의 두더지가 해리 호튼이 스파이라는 사실을 영국에 밀고했다고 되어 있다. 미하일은 편집증 성향이 있는 남자로 늘 터무니없는 소리를 하고 다녔는데 자신을 러시아 황제의 친척이라고 했다. 게다가 1963, 미하일은 미 국무장관 키신저가 암호명 폴이라는 KGB 스파이라는 말까지 했다. 그리고 그는 훗날 MI5의 국장이 된 마이클 헨리(Michael Henley)KGB의 스파이라는 말을 했다. 그러자 CIA 국장 제임스 앵글턴(James Angleton) 등은 미하일의 머리가 조금 이상하다고 생각했고, KGB가 일부러 그를 망명시킨 것이 아닌지 의심했다. 그런데 사실 제임스 앵글턴도 편집증 성향이 있는 남자로 미하일이 해리 호튼의 이름을 흘린 것이 그들이 스파이로서 이용가치가 떨어졌기 때문으로 그들을 팔아 거물을 숨겼다고 의심했다.

 

포틀랜드 스파이 링사건으로 해리 호튼과 에델 엘리자베스는 15, 고든 론즈데일은 25, 크뢰거 부부는 20년 형을 선고받았다. 그후 고든 론즈데일은 1964년에 영국의 스파이와 맞교환되어 소련으로 돌아갔고 크뢰거 부부 역시 1969년에 스파이 맞교환으로 소련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해리 호튼과 에델 엘리자베스는 1970년에 석방된 후 영국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포틀랜드 스파이 링의 조직원 5명 가운데 고든 론즈데일과 크뢰거 부부는 공산주의 이상을 확신한 스파이였다. 반면 늘 돈이 부족해서 암시장에 손을 뻗친 해리 호튼과 결혼 적령기를 놓치고 한심한 남자에게 빠져버린 에델 엘리자베스 두 사람은 풍족하게 살고 싶다는 욕망이 만들어 낸 스파이였다.

 

 

냉전 시대의 스파이 - 5. 톱해트 작전(1959~1985)(1)

 

스파이들의 춤은 18세기의 미뉴에트처럼 느리고 고도로 의식적이다. FBI는 이를 곧잘 손수건 떨어뜨리기라고 불렀는데, 즉 소련 첩보원에게 관심을 내비치는 과정이다. 신호는 알 듯 말 듯하게 보낸다. “당신이 스파이라는 것을 다 안다. 만약 당신의 운명이 만족스럽지 못하다면 우리가 기꺼이 당신을 돕겠다.” 스파이는 손수건을 집어들거나 아니면 그대로 내버려둔 채 못 본 척 지나친다.

 

FBI톱해트(Top Hat)'라 부르는 남자가 연루된 춤은 195910월 뉴욕 유엔본부에서 시작되었다. 소련대표부는 처음으로 해외에 파견된 젊고 진취적인 KGBGRU의 첩보원들로 가득했다. 유엔 주변에서 그럴듯한 정보가 발견되는 경우는 많지 않았지만, 훗날 더욱 복잡하고 위험한 임무를 맡을 첩보원에게는 유엔이 훌륭한 훈련장소였다.

 

톱해트는 드미트리 F. 폴랴코프(Dmitri F. Polyakov), 그를 표적으로 삼은 FBI는 미끼로 쓸 아주 큰 고기를 물색했다. 그는 분명 떠오르는 별이었다. 195130세의 GRU 공작원 폴랴코프는 외교관 신분으로 위장해 뉴욕에 있는 유엔 소련대표부에 유엔 직원으로 파견되었다. 젊은 사람이 해외 요직에, 그것도 미국의 기술기밀을 입수하는 막중한 임무를 띠고 파견되었다는 것은 GRU가 그를 큰 인물로 키운다는 뜻이었다. 폴랴코프가 유엔에서의 임무를 마치고 모스크바로 돌아가던 1956, 유엔 소련 정보기지를 속속들이 감시하던 FBI는 그를 특별히 감시해야 할 GRU 스타 중 한 사람으로 지목했다.

 

3년 폴랴코프가 또 다른 임무를 띠고 유엔에 돌아왔을 때, 그를 철저히 감시하던 FBI는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했다. 그가 소련의 체제에 점점 환멸을 느끼기 시작했다는 것이었다. FBI가 알아낸 바로는 그의 환멸은 주로 돈과 얽혀 있었다. 그는 승진을 거듭해 대령의 지위까지 올랐고 GRU에서는 초고속 승진을 했지만 그가 받는 봉급은 1년에 고작 1만 달러에 불과했을 뿐 아니라 그나마 봉급의 대부분은 다시 소련 당국에 반환해야 했다. 소련에서는 당연한 관례였지만 이 때문에 폴랴코프는 궁핍하게 살아야 했고 모스크바에 사는 아내와 세 아이들에게 줄 선물조차 살 수가 없었다.

 

게다가 날마다 뉴욕 거리를 지나다니다보니 불공평함은 더욱 뼈저리게 다가왔다. 미국에서는 봉급이 넉넉지 않은 사람도 가족과 생계를 꾸리고 있었고 미국의 풍요로운 소비문화를 즐기기에 어려움이 없지만, 폴랴코프의 아내는 아침마다 긴 줄을 서서 빵을 사야 했다. 하지만 소련 공산당원이나 정부의 고위 관료는 줄을 서지 않았다. 그들은 국가가 운영하는 특별한 상점에서 엘리트 신분에게만 지급되는, 소련 서민들이 쓰는 가치없는 루블 지폐와는 다른 특별한 금 루블을 가지고 어떤 물건이든 살 수 있었다.

 

상류 엘리트층에 들어가 금 루블을 받으며 호화로운 생활을 누리기까지 폴랴코프와 같은 공작원은 궁핍한 생활을 견뎌내야만 했다. 하지만 폴랴코프는 그들처럼 전형적인 경로를 밟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그가 보기에 소련을 망치는 이 같은 체제는 사라져야 했다. 그리고 그는 그런 체제를 파괴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1960년 초, FBI 방첩요원 두 사람이 그에게 의도적으로 접근했을 때 폴랴코프는 자신의 생각을 털어놓았다. 이들은 폴랴코프가 산책을 하러 바깥으로 나온 어느 날 아침에 거리에서 만났는데 이때 첩보활동에 관한 이야기는 한 마디도 오가지 않았다. 두 사람은 여러 해 만에 만난 오랜 대학 친구처럼 즐거운 대화를 나누고 자신들의 가족에 대해서도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폴랴코프에게 서로 의논하고 싶은 문제가 생기면 언제든 다시 만나 이야기하자고 했다. 폴랴코프는 애매하지만 의미심장하게 이들의 접근을 내치지는 않겠다는 투로 대답했다. 하지만 실은 소련 정보기관의 규칙에 따라 사형을 당하지 않으려면 이 사실을 상부에 보고해야 했다.

 

결국 FBI는 손수건을 떨어뜨렸고 폴랴코프는 이를 주워든 셈이었다. 얼마 후 폴랴코프가 움직였다. 그는 외교관들이 모인 어느 연회장에서 미국 외교관에게 다가가 FBI를 만나고 싶다고 했다.

 

냉전시대 첩보전 역사상 매우 의미심장한 페이지이자 이후 25년간이나 지속될 이야기가 이제 막 시작되는 순간이며, 소련과 미국 정보기관 사이에 벌어지는 대대적인 물밑 전쟁의 중심지가 형성되는 순간이었다. 이는 근본적으로 반역전쟁이었고, 양측은 상대국에서 반역자를 만들기에 혈안이 되었다. 역사상 그 어느 때도 반역을 이토록 대대적인 작전으로 사용했던 적은 없었다. 반역자는 다른 반역자를 배반했고, 진짜 반역자를 잡기 위해 가짜 반역자를 이용한 덫을 놓는가 하면, ‘반역이라는 말이 상대측이 포섭한 사람에게만 적용되고 내가 포섭한 사람은 애국자가 되는 정치적 냉소주의가 팽배했다.

 

이 전쟁은 소련의 몰락과 함께 끝이 날 것이었지만, 이 과정에서 많은 피해자가 발생했다. 톱해트도 그 중 한 사람으로, 참으로 아이러니컬하게도 그 역시 다른 반역자에 의해 배반을 당하고 말았다.

 

폴랴코프는 몹시 고통스러운 기색이었다. 그는 결코 돈을 위해서가 아니라고 FBI 요원에게 냉정히 말했다. “나는 당신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내 조국을 위해서 이러는 거요.” 폴랴코프는 서둘러 한 마디를 덧붙였다. FBI가 감사의 표시로 준다면 기꺼이 받을 만한 것이 하나 있다고. 그는 주문제작한 골동품 총을 모드는 수집광이었다. 전에 그는 5번가의 근사한 상점에 진열된 멋진 주문제작 권총을 보았다. 변변치 않은 그의 수입으로는 엄두도 못 낼 가격이었지만 그는 이따금 상점에 들러 그 멋진 작품을 오랫동안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FBI가 그 권총을 선물해준다면 무척 기쁠 것 같았다. 미국은 시민이 낸 세금 6,000달러를 들여 이내 감사의 표시를 했다. 감동한 폴랴코프는 이 돈이 첩보 역사상 가장 현명한 투자였음을 지체없이 증명해 보였다.

 

뉴욕 부근의 안전한 장소에서 톱해트를 만나면서 FBI는 월척을 낚았다고 생각했다. 폴랴코프의 이력이 그 사실을 증명해주었다. 경리원으로 일하는 우크라이나 태생의 부모에게서 태어난 그는 제2차 세계대전에서 포병장교를 지냈고, 당시 용맹함과 지도력을 인정받아 전쟁이 끝난 후에는 소련의 웨스트포인트라 할 수 있는 명문 프룬제 군사 아카데미에 들어갈 수 있었다. 그곳에서 두각을 나타낸 그는 당시 GRU에 발탁되었다. GRU는 프룬제 군사 아카데미에서 가장 우수한 학생을 발탁해 정보기관의 인재로 채용하곤 했다. 그는 1951년 유엔으로 처음 해외 근무를 나갔고, 그 뒤에는 곧바로 소련 정보기관에서 가장 중요시하는 베를린으로 파견되었다. 이곳에서 그는 서독으로 잠입할 스파이 조직을 운영했다. 작전은 대단히 성공적이었고, 덕분에 그는 1959년에 대령으로 진급하면서 GRU를 이끌 차세대 지도자로 부상했다.

 

폴랴코프는 본격적으로 일에 착수하면서 FBI를 몹시 당황하게 만드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우리는 당신네 군사조직을 꿰고 있습니다. 모든 게 우리 손바닥 위에 있단 얘깁니다. 당신네 나라를 배반하고 우리를 돕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폴랴코프는 GRU가 미군에 심어놓은 최정예 정보요원을 모두 불었다. 그중 대표적인 인물들은 다음과 같다.

 

E. 던랩(Jack E. Dunlap)

 

술을 좋아하고 오직 돈 때문에 스파이 노릇을 하는 육군 하사관 던랩은 국가안전보장국(NSA)의 극비문서를 나르는 연락병이었다. 그는 NSA의 문서를 GRU에 제공했고, GRU는 이 문서를 고해상도 특수 카메라에 담은 뒤 던랩의 일정에 차질이 없도록 즉각 돌려보냈다. 던랩은 전혀 의심을 받지 않고 수년간 NSA의 문서를 소련에 제공했고, 그 대가로 상당한 돈을 받아 모터보트, 고속 자가용, 비싼 여자를 사면서 호화로운 생활을 즐겼다.

 

윌리엄 H. 훼일런(William H. Whalen)

 

육군 중령 훼일런은 소련 정보기관이 미국에 심어놓은 매우 값진 정보원이었다. 1959년에 미국 합동참모본부 자문관을 지낸 그의 경력은 정보 제공에 더없이 귀중한 원천이 되었다. 훼일런도 던랩처럼 순전히 돈 때문에 조국을 배반한 사람이었다. 그는 약 40만 달러에 가까운 돈을 받고 미국의 핵무기, 전시의 미군 작전계획, 미국 정보기관이 추정하는 소련 군사력, 그 외에 자신의 책상을 거쳐가는 모든 유용한 정보를 그대로 GRU에게 넘겼다.

 

넬슨 드러먼드(Nelson Drummond)

 

던랩과 마찬가지로 드러먼드 역시 군에서의 계급은 실제 그의 가치에 비해 낮았다. 그는 해군에서 단순한 서무를 맡았지만 그러면서도 일급비밀에 해당하는 통신과 관련된 일을 했다. 그는 런던에 있는 해군 통신센터에 근무하면서, 해군 배치상황이며 무기체계와 암호 체계에 과한 상세한 내용 등 일급비밀을 광범위하게 다루었다. 그리고 이 모두를 돈과 바꾸었다. 폴랴코프가 그를 폭로한 뒤, 미국 국방부는 드러먼드가 팔아넘긴 것들을 수정하기 위해 수억 달러를 투자해야 했다.

 

허버트 W. 보켄하웁트(Herbert W. Boeckenhaupt)

 

공군 병장 보켄하웁트 역시 계급은 낮았지만 일급비밀에 해당하는 매우 귀중한 통신을 다루었다. 금전적인 목적 때문에 배반을 택한 그는 공군의 상세한 코드와 신호체계 그리고 무엇보다고 세계대전이 일어날 경우에 사용될 미국 전략공군사령부의 특수 암호체계를 팔아넘겼다.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