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는 어떻게 전쟁을 ‘선전’했나
- 미즈노 도시카타 ‘평양전투’·‘성환전투’
1 판화를 정치에 이용 : 대중적인 판화 제작…“동아시아 맹주” 제국주의 옹호
2 日 미화한 역사왜곡 : 청나라군을 약한 군대로 묘사…노골적 선전물로 활용
19세기 유럽에 일본풍 미술 ‘자포니즘’ 유행…고흐·마네 그림에도 영향
일제 정치·전쟁 선전물에 판화 이용…사실묘사 의무 저버리고 과장·왜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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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즈노 도시카타, 평양전투, 189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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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즈노 도시카타, 성환전투, 1894 |
장병 여러분, 지난주 화요일은 3·1절이었습니다. 여러분은 3·1절을 어떤 마음가짐으로 보내셨나요? 3·1 만세운동은 일본의 압제에 맞서
우리 민족의 독립에 대한 열정과 기개를 보여준 중요한 역사적 사건입니다. 오늘은 일제가 우리 땅에서 벌인 전쟁을 주제로 이야기를 풀어갈까
합니다. 상처를 헤집는다고 생각하지 말아주세요. 그림으로 표현된 아픈 과거를 통해 주권을 수호하기 위해 우리는, 장병 여러분은 어떤 노력을 해야
하는지를 생각하는 시간이 됐으면 합니다.
판화 ‘우키요에’와 ‘니시키에’
‘우키요에’나 ‘니시키에’란 단어를
들어보신 적 있나요? 둘 다 일본에서 발전한 판화입니다. 일본의 근대 미술은 우리의 것과 달리 ‘친(親)대중적’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한국
미술이 특정 계층, 특히 지배층 위주로 발전했다면 일본에는 이와 더불어 대중에 의해 발전한 미술도 있었습니다. 목판화인 우키요에는 이런 일본
대중미술의 대표주자 격입니다.
우키요에는 19세기 유럽으로 건너가 ‘자포니즘(Japonism)’이란 일본풍 미술을
유행시키기도 합니다. 당시 유럽에서 자포니즘은 지금의 ‘한류’만큼이나 인기를 끌었습니다. 그 시작은 의외로 ‘포장지’였죠. 우리가 잘 아는
유럽의 유명 작가들은 도자기 포장지로 사용된 구겨진 우키요에를 보고 큰 충격을 받습니다. 이들은 우키요에에 환호하며 일본에 대해 환상을 갖기도
했고 그들의 작품에 우키요에를 적극 활용하기도 했죠. 빈센트 반 고흐(Vincent Willem van Gogh)의 ‘탕기 아저씨의 초상’이나
에두아르 마네(Edouard Manet)의 ‘에밀 졸라의 초상’ 등에서 쉽게 우키요에의 흔적을 엿볼 수 있습니다. 우키요에는 인쇄기술의 발달과
함께 니시키에로 발전하게 됩니다. 바로 다양한 색과 석판기법의 도입이 기존 목판화로는 표현하기 어려웠던 회화적인 표현을 가능하게
했죠.
우키요에와 니시키에는 여러 장을 찍어낼 수 있는 판화라는 점과 주제 면에서 대중적이라는 특징을 갖고 있습니다.
1868년 메이지유신 이후 일본은 우키요에를 ‘역사화’로 부르며 장려했습니다. 당시 미술교육학자인 오카쿠라 덴신은 “역사화는 과거의
우키요에이며, 우키요에는 현재의 역사화다”라고 말하기도 했죠.
이 말은 당시 판화가 일본의 제국주의와 맞물려 정치적인
그림이 됐음을 방증하고 있습니다. 일본은 대중에게 쉽게 유통되는 판화를 통해 “우리는 서구 열강과 동등한 동아시아 맹주”라고 선전했습니다. 이런
의도는 전쟁을 주제로 한 판화 작품에서 노골적으로 드러납니다.
그림에 드러난 노골적
선전
지금부터 전쟁을 묘사한 일본 판화, 특히 우리나라에서 벌어진 청일전쟁을 주제로 한 판화를
살펴보죠. 1894년부터 이듬해까지 청나라와 일본은 조선의 지배권을 놓고 전쟁을 벌였습니다. 근대화에 성공한 뒤 일본은 조선에서의 입지를 더
강화하려고 했죠. 많은 화가가 청일전쟁을 주제로 판화를 제작했고 일본인들은 이를 보며 환호했습니다. 니시키에의 인기는 당시의 신문기사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가게 앞에는 구경꾼이 산처럼 몰려서 혹은 입을 ‘아~’ 벌리고 혹은 발돋움을 하면서 정신을
팔고 있다. 소매치기가 ‘이때다’ 하고 나서서 시계·담뱃갑 등 품속에 든 것을 잃은 자가 많다.”
니시키에는
청일전쟁을 계기로 전성기를 맞았죠. 그 때문에 각종 전투 장면을 그린 작품이 많습니다. 오늘 살펴볼 미즈노 도시카타의 작품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는 성환전투, 또 다른 작품은 평양전투를 묘사하고 있죠. 도시카타는 일본군과 청나라군을 매우 대조적으로 그렸습니다. 근대적 장비를 갖춘
강력한 느낌의 일본군에 비해 청나라의 군사들은 창과 칼을 지닌 빈약한 모습으로 화면에 등장하고 있죠. 의도는 명확합니다. 일본을 미화하고
청나라를 비하하겠다는 것입니다. 일본군은 최신 문명을 받아들인 선진화된 군대로, 청나라군은 구닥다리 무기를 든 약한 군대로 표현한
것이죠.
일본을 선진화된 군대로 왜곡
이런 비교는
계속됩니다. 영웅적인 모습으로 그려진 일본군을 찾아볼까요? ‘평양전투’에서는 중앙에서 약간 오른쪽에 검은 군복 차림으로 군사들을 이끌고
전투지휘를 하는 장교가 보입니다. ‘성환전투’의 중앙에도 칼집에서 칼을 뽑아 들고 몸을 앞으로 뻗어 공격명령을 내리는 장교가 보입니다. 이들
곁에는 일제의 야욕을 상징하는 전범기인 ‘욱일기(旭日旗)’가 힘차게 나부끼고 있습니다. 근대화된, 영웅적인 일본군의 모습을 통해 일본인들에게
자긍심을 심어주고 싶은 것이죠.
‘성환전투’에서는 특이한 장치가 하나 더 있습니다. 오른쪽 하단에는 일본군 뒤쪽에
전투를 지켜보며 이를 기록하는 종군기자와 화가들이 그려져 있습니다. 그들도 일본군처럼 서양식 옷을 쫙 빼입고 있습니다. 전쟁의 ‘객체’인
이들마저 생생한 표정을 짓고 있는 데 비해 왼쪽 하단에 자리 잡은 청나라 군인들은 형태도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대충’ 그린 점 역시 이 그림이
전형적인 ‘선전물’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실적 묘사 의무를 저버린
화가들
전쟁을 그리는 화가들은 그 모습을 정확히, 사실적으로 묘사해야 하는 의무가 있습니다. 미술사에
등장하는 수많은 종군화가들 대부분은 이런 자신의 역할을 잊지 않았죠. 하지만 도시카타와 일본의 화가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일제의 야욕에 맞춰
본연의 의무를 저버린 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림만 보면 마치 청나라군은 게으르고 원시적인 집단으로 느껴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꼭 그런
것은 아니었죠.
장병 여러분은 오늘 이 그림을 보며 어떤 감정을 느끼셨나요? 저는 눈앞의 현실을 항상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고 끊임없이 질문해야 하는 예술가들마저 일제의 광풍에 눈이 멀었다는 사실이 무척 안타까웠답니다. 또 두 번 다시 이런 그림이 그려지지 않기
위해서는 튼튼한 힘이 필요하다는 생각도 하게 됐습니다. 다행히 이제 우리는 과거와는 차원이 다른 막강한 힘을 가지게 됐습니다. 그 튼튼한 힘의
근간이 돼 주는 장병 여러분에게 또 한 번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싶네요.
<김윤애 문화역서울284 주임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