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로시마·나가사키에 원폭 투하 일, 결사항전 외치다 무조건 항복
- 제2차 세계대전: 원자폭탄 투하와 일본의 항복(1945.8)
美, 도쿄 등 대도시 무차별 폭격
日 정부 아비규환에도 항전 외쳐
1945년 8월 등장 신무기 원자폭탄
조속한 종전·미래의 공포 동시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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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8월 6일과 9일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투하된 원자폭탄 ‘리틀보이’(little boy·왼쪽 사진)와 ‘팻맨’(fat man). 가공할 신무기의 등장은 일본이 항복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필자 제공 |
1945년 8월 6일과 9일은 인류 역사에서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시간이 됐다. 바로 이날 일본의 군수공업 도시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Atomic Bomb)이 투하된 것이었다. 이로 인한 피해와 참상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지만, 어찌 됐든 ‘가미카제’라는
자살특공대까지 동원하면서 결사항전을 외쳐온 일본은 곧바로 ‘무조건 항복’을 선언했다. 종전 후 미국의 원자폭탄 투하를 둘러싸고 다양한 논의들이
이어져 왔다. 하지만 어떠한 요인을 지지하든 간에 두 차례에 걸친 원자폭탄 공격이 일본 정부가 패배를 최종 자인(自認)하는 데 가장 큰 영향을
미쳤음은 부인할 수 없다. 이러한 측면에서 1945년 8월, 가공할 신무기의 등장은 조속한 종전과 미래의 공포를 동시에 가져다준 ‘야누스의
얼굴’과 같은 사건이었다.
역사적 배경
미드웨이 해전(1942.6)의 패배
이후 일본 해군은 전투력을 상실해 갔다. 태평양의 제해권을 되찾은 미군은 이제 일본 본토로 진격하려는 대장정에 즉각 돌입했다. 이를 위해서는
우선 일본군이 장악하고 있던 남태평양의 섬들을 재탈환해야만 했다. 1943년에 접어들면서 미군의 공세가 본격화됐다. 남태평양의 수많은 섬 중
일본군의 중요 군사기지와 특히 비행장이 있던 섬들을 집중적으로 공략했다. 일본군 수중에 있던 도서(島嶼) 간의 연결망을 끊기 위한 미군의 시도는
일명 ‘개구리 뜀뛰기’ 작전이라 불렸다.
그러나 엄청난 물량작전에도 불구하고 미군의 진격은 매번 혈전의 연속이었다. 일본군은 항복을
최고의 수치로 여기면서 끝까지 저항했고, 심지어는 ‘옥쇄(玉碎)’라는 미명 아래 집단자살도 불사했기 때문이다. 과달카날 전투의 경우, 미군은
힘겹게 섬을 점령한 이후에도 무려 7차례나 이어진 일본군의 결사적인 재탈환 공격에 시달려야만 했다. 전투가 끝난 후 과달카날 만(灣)은 일본군의
시체로 뒤덮일 정도였다. 미군의 제해권 장악으로 군수물자 보급에 심각한 차질이 생기면서 일본군의 전투력은 크게 떨어졌다. 미군은 1943년
말경에는 길버트 제도를, 그리고 이듬해 전반기에는 마리아나 군도(群島) 및 괌 등을 수복하는 등 점차 일본 본토를 향해
나아갔다.
무엇보다도 양측 간에 가장 치열한 공방전은 이오(유황도) 섬(1945.2~3월)과 오키나와 섬(1945.4~6월)에서
벌어졌다. 일본의 저항 의지를 꺾을 의도로 1944년 말부터 직접 일본 본토에 대한 공습을 감행해온 미군으로서는 효과적인 작전수행을 위해서
본토에 근접한 두 섬을 확보하는 것이 절실했기 때문이다. 일본군의 입장에서도 미군 B-29 폭격기의 이착륙이 가능한 이 섬들을 빼앗길 경우,
본토마저 치명타를 입을 수 있었기에 사력을 다해 방어했던 것이다. 미군은 1만8000명의 전사자와 5만4000명의 부상자라는 실로 엄청난 희생을
감수해야만 했다. 당연히 일본 측의 인명손실은 미군의 몇 곱절에 달했다.
무엇인가 해결 방법을 찾아야만 했는데, 이는 크게 두
방향으로 추진됐다. 대외적으로는 소련을 대일전(對日戰)에 끌어들이는 것이었고, 대내적으로는 신무기 개발에 박차를 가하는 것이었다. 전자는
얄타회담(1945.2)에서 스탈린으로부터 참전 약속을 받아내는 데 성공했으나, 후자의 달성 여부는 여전히 장담할 수
없었다.
전개 과정
1945년 8월 6일(히로시마)과 9일(나가사키)에 두
발의 원자폭탄이 투하돼 순식간에 도시를 폐허로 만들었다. 본토 방어 결사항전을 외치던 일본 정부는 이로부터 1주일 후 무조건 항복했다. 물론
8월 8일 소련이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고 북만주로부터 파죽지세로 밀고 내려온 압박도 무시할 수 없으나, 무엇보다도 일본에 무조건 항복을 강요한
것은 전율할 신무기, 원자폭탄이었다.
당시 보통 일본인의 입장에서 볼 때, 원자폭탄 투하는 어느 면에서는 새삼스러운 사건이
아니었다. 1943년 후반기 이래 특히 대도시에 거주하던 일본인들은 미군 폭격기의 공습과 그로 인한 등화관제 훈련에 익숙해져 왔기 때문이다.
1942년 4월 18일, 일본 도쿄에 대한 기습적인 공습으로 결과적으로는 미드웨이 해전 승리라는 성과를 맛본 미군은 이후에도 기회 있을 때마다
일본 본토에 대한 직접 공습을 시도했다.
실제적으로 일본 본토 도시들에 대한 미 공군의 공습작전은 1944년 말에 이르러 본격화될
수 있었다. 1944년 8월 미 해군의 마리아나 군도 점령 성공이 결정적 계기가 됐다. 이곳은 도쿄로부터 무려 2000㎞나 떨어져 있었으나,
이는 신형 B-29 폭격기가 공습할 수 있는 항속거리였다. 11월에 섬 내에 비행장이 완공되면서 일본 본토까지 한 번에 공습이 가능하게 됐다.
사실상 그 이전에 일본 본토에 대한 공습작전은 미군 폭격기 조종사들에게 목숨을 담보한 도박이나 다름없었다. 1944년에 실전 배치된 미 공군의
B-29 슈퍼포트리스 폭격기는 항속거리도 길고 폭탄을 다량 적재할 수 있었으나, 일본 본토 폭격을 위해서는 멀리 인도에 있는 기지에서 출발해야만
하는 심각한 약점을 갖고 있었다.
1944년 11월 말, 도쿄 인근의 한 항공기 제작공장 공습을 시발로 일본 본토의 대도시들에 대한
야간 무차별 폭격이 본격화됐다. 이들 중 일본인들에게 끔찍한 충격을 준 사건은 1945년 3월 9일 밤에 감행된 수도 도쿄에 대한 대규모
공습이었다. 약 300대의 B-29 폭격기가 출격, 3시간에 걸쳐 무려 50만 개에 달하는 소이탄을 목조건물로 빼곡한 도쿄 시내에 무차별적으로
투하했다. 결과는 한마디로 아비규환이었다. 도쿄 전체 면적의 4분의 1에 달하는 총 41㎢ 지역이 불타고 8만 명 이상의 민간인이 사망했다.
이후로도 미군 폭격기의 공습은 도쿄는 물론 나고야·고베·오사카 등 다른 도시들로 확대됐다. 이러한 지속적인 타격의 결과 1945년 7월경에
이르러 일본의 패배는 명백해졌다. 그런데 문제는 거의 사망한 거나 진배없는 일본 정부가 계속하여 관 속에 드러눕기를 거부하고 결사항전을 부르짖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상황에서 조속한 종전을 위해 미군이 취할 수 있는 대책은 무엇일까? 우선, 일본 정부가 진정으로
굴복할 때까지 공습을 강화하고 해상봉쇄를 지속하는 것이었다. 문제는 언제까지 그렇게 해야 할지 장담할 수 없다는 점이었다. 다음으로, 일본
본토에 대한 상륙작전을 감행하는 것이었다. 물론 치밀하게 수립된 침공계획도 마련돼 있었다. 최소한 100만 명으로 예상되는 미군의 인명피해를
과연 감내할 수 있을지가 관건이었다. 이러한 진퇴양난의 상황에서 (미리 예견된 것이기는 하지만) 혜성처럼 등장한 해결책이 바로
경천동지(驚天動地)할 신무기였던 원자폭탄의 사용이었다. 마침내 일본 정부는 두 발의 원자폭탄 세례를 받고서야 두 손을 바짝 들고
말았다.
3일 간격 두 차례 ‘흰 버섯구름’… 2차 세계대전 종결
원폭 개발 연구 중이던 영국 연구 결과 美에 일괄 이관
美 과학자 개발 연구 박차
1942년 9월 美 원폭 개발계획 기구 ‘맨해튼 프로젝트’ 출범
1945년 7월 성능 폭발 실험 대성공
1945년 8월 인류 상대 최초 日 투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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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2년 9월 일명 ‘맨해튼 프로젝트(Manhattan Project)’로 알려진 미국의 원자폭탄 개발계획 기구가 출범했다. 사진은 워싱턴주 핸퍼드의 원자로. 필자 제공 |
● 무기와 무기체계
1945년 8월 6일 ‘에놀라 게이’라는 애칭(愛稱)으로 불린 B-29
폭격기 1대가 폴 티베츠 대령의 지휘하에 폭발 실험에 갓 성공한 신무기 원자폭탄을 싣고 일본 본토로 날아갔다. 화창한 여름 아침 8시경,
B-29 폭격기 조준병은 4500㎏이나 되는 비대한 어뢰 모양의 폭탄을 눈 아래 펼쳐진 일본의 공업도시 히로시마의 상공에 떨어뜨렸다. 이로부터
채 1분도 안 돼 인류 역사상 최초로 원자폭탄이 인류를 상대로 폭발했다. 한순간의 강력한 섬광이 뻗친 후 히로시마는 흡사 지구 상에서 갑자기
사라진 유령도시로 변했다. 극심한 열기와 시속 800㎞의 엄청난 강풍에 사람은 물론이고 건물을 비롯한 모든 물체가 바스러졌다. 이후 전
세계인들에게 공포의 상징처럼 각인된 흰 버섯구름이 지상 1200m 높이로 치솟았다. 이날의 전율이 채 가시기도 전에 3일 후 또 다른 원자폭탄이
나가사키에 투하됐다. 불과 사흘 사이에 거의 20만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현장에서 즉사했다. 원폭 투하 직후 두 도시의 모습은 한마디로
‘지옥도(地獄圖)’ 그 자체였다.
원자폭탄 개발 배경
이처럼 가공할 위력을
지닌 무기가 어떻게 이 세상에 나오게 된 것일까? 흔히 원자폭탄 개발 과업은 1939년 8월 아인슈타인을 비롯한 일군의 미국 과학자들이 독일의
원자폭탄 개발 가능성을 경고하는 내용이 담긴 서한을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전달하면서 시작된 것으로 소문나 있다. 하지만 원자폭탄 개발의 역사는
알려진 것보다 오래됐다. 원리적으로 원폭 개발의 단초를 제공한 것은 1938년 독일 과학자 오토 한과 프리츠 슈트라스만에 의한 우라늄235의
연쇄 핵반응 실험 성공이었다. 이 소식을 접한 물리학자들 중 나치의 유대인 박해를 피해 영국으로 망명한 유진 위그너와 레오 질라르드가 독일의
원폭 선(先)개발 가능성을 민감하게 인식하고, 아인슈타인의 세계적 명성을 등에 업고서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편지를 보냈던 것이다.
이
서한이 계기가 돼 1939년 우라늄위원회가 설치됐다. 하지만 1941년에 이르기까지 원폭 개발 이슈는 거의 주목받지 못하고 유명무실한 상태에
있었다. 1941년 12월 7일 일본의 진주만 기습을 계기로 미국이 전쟁에 뛰어들고 같은 달 독일마저 미국에 선전포고하면서 상황이 급속도로
호전(好轉)됐다. 이러한 외적 환경변화에 더해 무엇보다도 원폭 개발 연구에 먼저 착수했던 영국 정부가 그동안 자국 과학자들이 이룩한 연구 결과를
미국 측에 일괄 이관해준 게 커다란 도움이 됐다. 여기에는 우라늄뿐만 아니라 플루토늄도 원자폭탄의 원료가 될 수 있다는 최고급 정보도 포함돼
있었다.
귀중한 자료들을 넘겨받은 미국의 과학자들은 원자폭탄 개발 연구에 박차를 가했다. 우선,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 콤프턴이 있던
시카고대학교를 중심으로 원자폭탄 제조에 필요한 이론적·실험적 연구를 수행해 개발 가능성을 타진했다. 이때 유럽에서 미국으로 망명한 엔리코
페르미와 질라르드를 비롯한 저명한 핵물리학자들이 연구팀에 합류했다. 이러한 준비과정을 거쳐 마침내 1942년 9월 일명 ‘맨해튼
프로젝트(Manhattan Project)’로 알려진 미국의 원자폭탄 개발계획 기구가 출범했다. 처음에 준비위원회가 뉴욕의 맨해튼에 있었기에
그렇게 알려지기는 했으나, 이후 실제 주요 관련 시설들은 테네시주의 오크리지, 워싱턴주의 핸퍼드, 그리고 뉴멕시코주의 로스앨러모스에 위치했다.
‘기술과 과학의 서커스’라는 당대의 평가처럼, 맨해튼 프로젝트 수행을 위한 조직은 크게 둘로 구분됐다. 미 육군의 레슬리 그로브스
장군이 재정을 비롯한 개발과정 전체를 총괄적으로 책임졌고, 개발 관련 과학기술 분야는 시카고대학교의 콤프턴과 그의 동료 과학자들이 담당했다.
이후 연구가 진행되면서 두 실력자 간에 연구방향을 둘러싸고 이견과 갈등이 발생했다. 무엇보다도 원폭 제조에 필요한 원료인 우라늄과 플루토늄을
정제(精製)하기 위한 핵연료 생산공장 건설을 위해 듀폰, 웨스팅하우스, GE 등 민간 기업체들이 참여하게 됐다. 이렇게 점차 규모가 확대되면서
맨해튼 프로젝트는 한창 절정기에는 20억 달러 이상의 국가 예산과 60만 명 이상의 인력을 고용한 거대 조직으로 발전했다. 개발과정에서 수많은
어려움에 직면했으나 1944년 여름에 이르러 이러한 난제들을 대부분 해결할 수 있었다. 그해 가을부터는 뉴멕시코주의 외딴 도시 로스앨러모스에
비밀리에 건설된 공장에서 원자폭탄 제조 공정에 착수할 수 있었다.
1942년 가을에 출범한 이래 맨해튼 프로젝트는 원칙적으로 미국
부통령과 영국 부총리에게도 기밀로 할 정도로 철저한 보안조치하에서 진행됐다. 1945년 4월 루스벨트 대통령이 급서(急逝)하면서 대통령직을
승계한 트루먼은 그때야 맨해튼 프로젝트라는 엄청난 비밀 과업에 대해 알게 됐다. 마침내 1945년 7월 16일, 로스앨러모스의 외딴 사막에서
원자폭탄 성능 폭발 실험이 실시됐다. 결과는 대만족이었다. 폭탄을 지탱한 철탑이 송두리째 녹아 없어질 정도로 폭탄의 위력은 강력했다. 이제 남은
과제는 이 가공할 괴물을 과연 실전에서 사용할 것인가였다.
숙고 끝에 미국 정부는 일본 본토 상륙작전 시 희생될 엄청난 인명을
구제하고 전쟁을 조기에 끝낸다는 명분 아래 원자폭탄을 투하하기로 결정했다. 폭탄의 엄청난 위력에 충격을 받은 일부 과학자들의 반대가 있었으나
애초 개발 목적에 따라 1945년 8월 6일과 9일에 일본의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폭을 떨어뜨렸다. ‘무조건 항복’을 선언한 일왕(日王)의
육성 방송에 이어 1945년 9월 2일 일본 대표단이 도쿄만에 정박 중이던 미 항공모함 미주리 함상에서 항복문서에 정식 서명했다. 이로써 5년
이상이나 끌어온 제2차 세계대전은 종결됐다.
● 의미와 교훈
제2차
세계대전은 인류 역사상 가장 큰 규모로 인적·물적 자원이 동원된 총력전이었다. 약 5000만 명에 달하는 인명이 희생됐고, 물적 손실은 계산할
수 없을 정도로 심대했다. 전쟁의 결과 19세기 말 이래 약소민족들을 지배해 왔던 서양 제국주의가 종식을 고하고 식민지들이 압제의 질곡에서
벗어났다. 세계인들은 유엔을 창설해 국제적 차원의 안전보장 및 평화유지 체제를 마련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대전 후의 세계는
기대처럼 장밋빛이 아니었다. 전쟁을 통해 새로운 세계 강국으로 부상한 미국과 소련이 대전 중의 협력 분위기에서 벗어나 본격적으로 대립각을 세우기
시작했다. 이른바 ‘냉전(冷戰)’ 시대가 개막됐다. 그런데 문제는 제2차 대전의 종식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원자폭탄이 종전과 함께 사라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오히려 전후 미·소(美·蘇)의 경쟁적 대립 구도하에서 더욱 강력해져 인류 전체를 파멸로 이끌 수도 있는 ‘공포의 무기’로
군림했다. 더구나 오늘날에는 우리와 총부리를 맞대고 있는 북한의 김정은 독재정권마저 핵무기 개발에 매진하고 있는바 각별한 관심과 대응이
요구된다.
<이내주 육군사관학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