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세계역사

무선황후 변씨

작성자참으로|작성시간16.09.19|조회수300 목록 댓글 0

 

무선황후 변씨

 

 

조조가 동탁을 피해 달아나다 죽었다는 소문이 났다. 다른 첩들은 모두 고향으로 돌아가려 했으나 변씨는 그녀들을 저지하며 군왕의 생사 여부를 아직 확실히 알지도 못하면서 여러분이 오늘 집으로 달아나버리고 내일 군왕이 여기에 있다면, 우리는 무슨 낯으로 군왕을 바라볼 수 있겠소. 설령 화가 눈앞에 닥치더라도 함께 죽는다면 무슨 두려움이 있겠소.”라고 하자 모두들 변씨의 말을 듣고 따랐다.


무선황후 변씨(武宣皇后 卞氏, 159 ~ 230)는 중국 후한 말기의 위왕(魏王) 조조의 정비로, 조조 사후 조위에서 태황태후까지 높여졌다. 성은 변()이며, 서주(徐州) 낭야군(琅邪郡) 개양현(開陽縣),즉 지금의 린이시 란산구 사람이다. 본디 가기(歌妓) 출신으로, 스무 살 때 조조의 첩이 되었다. 건안 (196), 조조는 정부인(丁夫人)을 폐하고 변씨로 계실을 삼았다. 조비 · 조창 · 조식 · 조웅 등 네 아들을 낳았으며 조조의 명령에 따라 어머니 없이 남겨진 조조의 자식들을 길렀다.


아울러 조조의 사후에도 엄격한 모의(母儀)를 지니고 궁내의 중심으로서 그 역할을 다 하였다. 조조는 생전에 스물다섯의 아들을 보았는데, 그들을 낳은 15명의 부인들만이 정사에 기록되어 있지만, 실제로 딸만을 낳거나 자식이 없는 부인들을 합친다면 그 수가 실로 대단했을 것이라 추정된다. 허나 변씨는 이들을 잘 단속하여 오로지 조조를 섬김에 있어 정성을 다 했기에 훗날 위() 문제(文帝)와 명제(明帝) 대에 보였던, 후궁들 사이의 모함, 모략 등의 폐단이 없었던 것이다. 아울러 조조 사후에도 조비, 조창, 조식, 조웅 네 아들 외에도 조조의 자녀들 중 일찍 어미를 잃은 아이들을 도맡아 길렀다고 한다.


또한 변씨는 출신답지 않게 정숙한 면도 높이 평가받고 있다. 문제와 명제는 후궁들의 모략에 넘어가 사사로이 황후를 내치고 후궁을 내세워 분란을 초래하였지만, 그녀의 경우는 그러한 것이 없었다. 실제로 정부인은 스스로 조조와 의절하였으며, 훗날 조조의 간곡한 부탁에도 조조에게로 돌아오지 않았다. 그런데 변씨는 조조가 없는 틈을 이용하여 철마다 정부인에게 음식을 보냈다고 한다. 때로는 정부인을 초청하여 아랫자리에 앉아 존경을 다 했다고 한다. 아울러 정부인이 죽었을 때는 조조에게 간청하여 친히 장례를 주관하였다고 한다.


변씨는 또한 천성이 검약하여 화려한 것을 숭상하지 않아 옷에 문채와 주옥이 없었으며 그릇은 모두 검은 빛의 옻이었다. 조조가 일찍이 귀고리를 몇 개 얻었는데 변씨에게 하나를 선택하도록 했다. 그녀가 중등의 물건을 취하니 조조가 그 이유를 묻자 상등품을 취하는 것은 탐욕스러운 것이고, 하등품을 취하는 것은 위선이므로, 중등품을 취한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변씨는 지나침도 아니고 모자람도 아닌 중용의 이치를 깨닫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보통 여인의 지위가 귀하게 되면, 친정은 그 덕을 보게 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특히 변씨는 천민 출신이었기 때문에, 천하의 패권을 잡게 된 조조의 본처가 되었으니, 그녀의 친정은 말할 수 없이 귀하게 되었을 것이다. 게다가 변씨의 장남인 조비가 황제(문제)가 되었으니, 그녀의 친정은 자연 외척이 되어 국정을 주관할 수 있게 된다. 실제로 후한 시대가 외척에 의해 멸망을 앞당겼고, 문제와 명제 대에 짧은 기간 외척에 의해 조정이 혼란스러워지기도 했다. 하지만 그녀는 친족을 엄히 다스려 애초에 혼란을 초래할 여지를 없앴다.


삼국지의 저자 진수(陳壽)는 위 왕조의 후비들은 부귀를 얻었지만 쇠망한 한 왕조의 외척과 달리 고위관직에 있으면서 조정의 정치에 관여하지는 않았다. 위나라는 지난 일을 경계삼아 방법을 바꾼 것이며, 이 점에 있어서는 잘못을 저지르지 않은 것이라고 평가 하였다. 그리고 변씨는 비록 창기 출신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사를 신중히 주관하였으며, 법도를 소홀히 하지 않았고, 검약하는 정신을 몸소 실천하여 후대의 모범이 되었다.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