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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역사

러시아 로마노프 왕조의 등장

작성자마이피|작성시간16.12.30|조회수238 목록 댓글 0

 

러시아 로마노프 왕조의 등장

 

이반 3세기에 몽골에서 벗어난 후 러시아는 강력한 농노제를 실시하면서 차르(황제)중심의 중앙집권적 전제국가를 성립시켰습니다. 그가 바로 이반 4세입니다. 이반 4세는 비밀경찰제를 실시하여 반항하는 귀족을 탄압합니다. 또 농노제를 강화하여 군사적인 봉사를 제공하는 신하에게 토지를 주어 신흥귀족을 확보하고 구귀족의 권한을 빼았습니다. 물론 신흥귀족은 왕권에 협조하는 귀족입니다. 이런 상황으로 농민들의 이동의 자유는 박탈당하게 되었습니다. 반면, 세금을 걷기 위해 도시와 교역시장, 토착상인들은 꾸준히 성장할 수 있도록 하는데, 이러한 농노제는 서유럽과도 다르고, 동유럽과도 다른 강력한 왕권 유지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반 4세는 그 아들 드미뜨리를 황태자로 책봉하였지만, 어린 나이에 황태자가 죽어 버렸습니다. 류릭이 러시아를 세운 이후 계속 계승되어지던 왕가의 후손이 끊기면서 러시아는 문제가 발생합니다. 왕권에 눌렸던 구귀족이 발호하고, 10세기에 성립되어 강대한 국가를 이루던 폴란드가 침공하면서 국가적인 위기를 맞이하였습니다. 이에 왕권 안에서 성장하던 도시들이 의용군을 조직하여 폴란드와 격전을 치르면서 조금씩 위기를 극복하였고, 새로운 황제로 미하일 로마노프를 선출하면서 러시아의 유명한 왕조인 로마노프 왕조가 탄생하였습니다.

 

러시아 표트르 대제의 개혁

 

표트르 대제는 국민 다수가 문맹인 후진적인 러시아 사회에서, 농노 반란 등의 상황을 겪으면서 발전이 없다는 것을 보고는 서유럽화 정책을 실시하려 하였습니다. 그는 강력한 왕권을 표면적으로 보여주는 왕이었습니다. 예로 서유럽화를 위해 유럽을 시찰하는 도중 스트렐치(친위대)가 반란을 일으켰다는 소식을 듣고는 직접 목을 베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는 아들 알렉세이 황태자도 아버지에게 대항하는 음모를 꾸몄다는 이유로 죽일 정도였으니까요. 구귀족과 황족이라 해도 반대세력은 여지없이 죽이는 왕이었습니다. 그는 전형적인 절대 군주로서 최고 권력의 위신과 권위를 세우고, 그 의지에 반하는 자는 참아주지 않았습니다. 그 의지란, <국가에 대한 헌신>이었습니다.

 

그의 서유럽화 개혁은 전제 러시아 사회를 개혁한다기 보다는 지배층과 문화적인 측면의 개혁이었던 듯 합니다. 우선 생활과 풍습을 서유럽화하려고 하였고, 각종 학교를 설립하여 유럽식 교육을 받아들이려 하였습니다. , 유럽문화를 받아들이기 위한 기본적인 기술을 도입하였고, 성페트로그라드를 건설한 뒤 수도를 그곳으로 옮겼습니다.

 

그는 2차 유럽여행을 다녀와서는 중앙과 지방의 행정, 관료기구를 완전 개편하고, 군사적인 병사구를 마련하여 지방행정구역에 적용하였고, 징병제도를 의무화하였고, 사관학교도 설립합니다. 또한 모든 지주에게 의무적으로 문관으로서 봉사할 것을 강요하는 초강수의 정책도 실시합니다. 반대로 재산과 문벌이 없는자라도 일정 지위에 도달하면 토지를 주고 귀족의 칭호를 부여하여 당시 사회에서는 파격적인 정책을 실시합니다.

 

그는 또 보수파와 교회 관계인사들의 반발이 거세자 아예 수좌대주교제도를 폐지하고, 황제가 직접 지배하는 종교회의로 대체해 버립니다. 또 원로원을 설치하여 <조국의 아버지, 러시아 황제, 표트르 대제> 라는 말을 얻어냅니다. 또 차르라는 말 대신 임페라톨(위대한 대제)이라는 말을 얻어냅니다. 보통 국가주의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는 정치를 러시아어로 에타치즘이라고 하는데, 이는 국가의 관심만을 우선으로 생각하고 개인적 관심에 무심한 정치를 말합니다. 표트르 대제의 정치도 그와 비슷한 면이 있었습니다.

 

그는 해외로 발트해로의 진출을 추진하였습니다. 특히 스웨덴과의 북방전쟁을 통하여 21년간 싸웠고, 결국 나스타드 조약을 체결하여 서방으로의 출구를 확보하였습니다. , 노르만 이래 북방 지배를 해오던 스웨덴과 오랜 기간동안 싸워 표트르 대제 때 스웨덴의 북방 지배를 끝맺음해 버린 것이죠.

 

표트르 대제는 서유럽식 계몽군주를 자청하였습니다. 그런 만큼 경제 정책도 서유럽식 중상주의 정책을 실시합니다. 일단 화폐를 개혁하여 모든 품목에 세금을 부과했고, 세금을 늘리게 되었습니다. 반면, 호구세 대신 인두세를 신설하고 농노제를 강화한 것은 그의 개혁이 농민을 위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또 외국기술자를 초빙하고, 제조업자와 일부 시민들에게 면세와 면역의 특권을 부여하였으며, 중상주의적 보호관세를 적용하여 러시아 자체의 유럽경제 편입을 도모한 것입니다. 이러한 그의 정책의 이후 에카테리나 2세로 이러지게 됩니다.

 

러시아 에카테리나 2(재위 : 1762~1796)

 

에카테리나 2세는 표트르 3세의 부인인데, 표트르 3(1761~1762)는 제위기간이 짧았습니다. 표트를 3세가 추구하였던 것이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그의 무언가가 많은 지배층의 불만을 가져오게 되었고, 결국 표트르 3세는 러시아 장교 그룹에 의해 살해당하였습니다. 또 에카테리나 2세도 남편에 대항하여 직접 음모를 꾸몄다고 합니다.

 

에케테리나 2세는 남편의 죽음으로 왕위에 올랐는데, 그녀는 표트르 1세와 같은 강력한 러시아를 꿈꾸는 여제였습니다. 책을 많이 읽었던 그녀는 마키아벨리즘에 감탄을 받았다고 할 정도였으니까요. 그녀는 장서 12권의 전집을 낼 정도로 글을 좋아했는데, 초기에 그녀는 디드로, 달랑베르, 볼테르 등 계몽사상가들을 후원하기도 하였다고 하니 계몽군주를 꿈꾸었는 듯 싶습니다. 그러나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 왕을 죽이는 사건을 보고는 계몽사상은 금지하였다고 합니다.

 

그녀는 지지자들에게 막대한 국유지를 하사였습니다. 따라서 지주들은 여제를 몹시 좋아하였습니다. 이것을 여제는 시스템으로 만들어 운영하였는데, 즉 귀족은 군사적인 봉사를 여제에게 하는 것이 의무화되어 있었고 의무적으로 문무관직을 가져야 했습니다. 반면 관직은 귀족들도 원하는 것이었고, 특히 이러한 봉사의 대가로 막대한 토지를 하사하는 제도입니다. 요약하자면, 러시아의 전제군주정은 막대한 토지를 하사받은 귀족계층에 의해서 운영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반면 그녀는 농노제는 계속 강화하였습니다. 국유지를 귀족에게 주면서 반면 농노가 증가하였죠. 귀족은 병역과 세금이 면제되면서 농노는 힘들어지고 영주권은 절대적인 권한이 되어갑니다. , 지배층인 귀족과 민중과는 엄청난 간격이 생기게 됩니다. 이것은 하나의 사회적인 모순으로 대두하면서 <푸가초프의 대반란>이라는 사건을 초래하게 됩니다. 여제는 또 통일법전을 만들고, 교육을 보급하였으며, 병원과 고아원을 설립하는 등 러시아 발전을 위한 일이라 생각되는 새로운 일들을 많이 하였습니다.

 

여제의 업적 중 중요한 것은 러시아의 전통적 확장 정책을 계승하고, 그것을 더 강화하였다는 것입니다. 러시아는 동서남북으로 확장정책을 실시하였는데, 17세기 네르친스크 조약으로 우랄산맥을 넘어 흑룡강까지 영토를 확장하다가 청의 제지를 받았습니다. 에카테리나는 이에 방향을 약간 돌려 캄차카 반도와 알레스카까지 진출하게 됩니다. 또 유럽으로 진출을 추진하여 폴란드 분할을하게 됩니다. 폴란드 1차 분할은 에카테리나 여제가 프로이센(프리드리히 대왕), 오스트리아(마리아 테레지아)와 조약을 맺고 나눈 것입니다. 과거 폴란드에 대한 복수였지만, 이 때부터 폴란드는 끝없이 오랜 시달림을 받게 됩니다.

 

남하정책으로는 투르크와의 계속된 전쟁을 들 수 있는데, 1차 러투전쟁(1774)으로 여제는 흑해연안일대와 크리미아 일부를 획득하는 쿠츄크 카이나르지 조약을 맺습니다. 2차 러투전쟁(1791)에는 크리미아 종주권을 확보하고 흑해북부의 투르크령을 병합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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