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 만에 되찾은 ‘로마의 자존심’ 독수리 깃발
- 고대국가를 관통하는 대표적인 문장 : 리턴드 아퀼라
크라수스 장군, 4만 이끌고 동방원정
카레에서 파르티아 군과 일대 결전
2만 명 전사, 깃발까지 빼앗기며 대패
아우구스투스 황제 즉위
다시 진격한 로마…협상으로 기 찾아
신격화 되며 수많은 동상·흉상 만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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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군을 공략하는 파르티아 기병. |
그리스·로마가 고대 사회를 모두 대변할 수는 없다. 하지만 최소한 중세 문장에 크게 기여한 ‘전문장(前紋章)’의 탄생과 확산에 크게
기여했음은 분명하다. 지금부터는 도시 국가나 거대 제국을 수호하는 방패나 깃발 위에 새겨진 수많은 상징들 가운데 단연 돋보이는 대표적인 문양을
살펴보겠다.
지난주 소개한 토이토부르크 전투는 아우구스투스의 재임 기간 중에 일어난 사건이어서 더 비통했는지도 모른다.
이번에는 선대에 빼앗긴 아퀼라를 찾기 위해 전쟁을 벌였던 사례를 소개해보겠다. 이 사건은 훗날 로마가 황제를 신의 위치에 오르게 하는 계기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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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군의 마지막 항전. |
카레의 악몽
공화정 말기 로마는 카이사르·폼페이우스·크라수스에 의해 통치되고
있었다. 스파르타쿠스의 반란을 진압하기는 했지만 이후 이렇다 할 공적이 없었던 크라수스는 자신을 빛낼 이벤트가 필요했다. 그가 선택한 것은
동방원정이었다.
동방원정은 기원전 66년부터 파르티아를 막기 위해 폼페이우스가 추진했으나 성과는 미미했다. 크라수스는 이를
타개하겠다고 나섰고, 기원전 53년 직접 군대를 이끌고 오늘날 터키로 진군해 들어가 카레(Carrhae)에서 파르티아와 일대 결전을 벌였다.
로마군은 4만여 명(보병 3만5000명, 기병 4000명)을 동원한 반면 파르티아는 수레나스 장군이 이끄는 기병 1만 명(궁기병 9000명,
중기병 1000명)이 고작이었다.
두 군대는 탁 트인 사막에서 조우했다. 로마군은 중앙 보병-측방 기병이란 전통 대형을 버리고
기병을 중앙에 둔 채 외곽에 보병을 배치해 거대한 직사각형 대형을 채택했다. 스스로 기동성과 융통성을 제한한 것이다. 반면 수레나스는 웅크린
로마군의 측방으로 9000명의 궁기병을 진출시켜 넓게 에워싼 뒤 화살 공격을 퍼부었다. 로마군이 피해를 줄이기 위해 방패를 머리 위로 덮는
귀갑대형을 채택하면 중기병이 돌진해 이를 무력화시켰다.
교묘한 원거리·근접 전투에 속수무책으로 당한 로마군은 결국 인근 지역에
피신했고 다음 날 협상을 통해 살아남은 1만여 명을 시리아로 퇴각시켰다. 기록에 따르면 로마군은 크라수스 등 2만 명이 전사했고 1만 명이
포로가 됐다. 반면 파르티아는 고작 100명만이 전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전쟁사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섬멸전인 칸나에 전투(기원전
218년)와 비교해도 결코 손색없었다. 이렇게 일방적으로 당한 국면에서 로마군의 군기라고 별 수 있었을까? 당시 역사는 전투에 참가했던 독수리기
역시 괴멸당한 10군단과 운명을 함께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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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건물 외벽에 새겨진 아우구스투스 업적록. |
리턴드 아퀼라
결론부터 말하면 카레의 아퀼라는 토이토부르크의 아퀼라와 반대의 사례다.
기를 빼앗기고 25년이 지난 기원전 27년 아우구스투스는 카이사르의 뒤를 이어 황제에 올랐다. 로마 대제국의 시대를 연 초대 황제가 당면한
수많은 과제 가운데는 크라수스가 빼앗긴 독수리도 있었다. 하지만 아퀼라를 빼앗길 당시와는 상황이 달랐다. 로마는 과거와 비교도 되지 않는 힘과
위상을 가진 반면 파르티아는 반대였다. 그저 동방으로 세력을 키워 나가기 위해 군대만 진군시켰을 뿐인데 강한 압박을 느낀 파르티아는 협상을
원했다.
파르티아는 기원전 22년 라인강 너머의 영토를 자진 반납했고 티베리우스 장군은 ‘잃어버린 독수리 회수(Returned
Aquila)’에 성공했다. 고작 깃발 하나 찾아오는 데 30년이나 걸렸다니…. 황제는 스스로 이 사건을 자신의 위업으로 꼽았고 “다른 장군들이
적에게 패해 빼앗긴 깃발을 도로 가져와 ‘복수의 신’ 마르스의 신전에 되돌려 놓았다”고 회고했다.
리턴드 아퀼라의 자부심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위대한 업적을 세운 아우구스투스는 사후 원로원의 결정에 따라 신격화됐다. 수많은 동상과 흉상이 제작됐고 심지어 그의 이름을 딴
신앙이 생겨나기도 했을 정도다. 로마인들은 황제의 모습을 그리면서 파르티아로부터 깃발을 회수하는 장면을 새겨 넣었다.
필자는 이
조각상을 볼 때마다 “수많은 업적 가운데 왜 하필….”이란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만큼 독수리기는 모든 것을 걸고서라도 반드시 되찾아
와야 했던 로마의 자존심이다. 로마 최고의 미술작품에도 그 흔적을 남길 정도로 말이다.
사진=필자 제공
<윤동일 육사 총동문회 북극성 안보연구소 책임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