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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역사

이탈리아 통일 전쟁영웅 가리발디

작성자참으로|작성시간18.08.19|조회수262 목록 댓글 0


이탈리아 통일 전쟁영웅 가리발디

‘붉은 셔츠대’ 이끌고 외침에 저항


“두려움을 떨쳐 버리십시오. 두려움은 후손들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칩니다. 우리는 건방지고 오만한 족속들에게 굽힐 수 없으며 그들에게 자유를 절대로 애걸하지 않을 것입니다. 절대로! 우리 모두 무기를 듭시다. 100만 명이 될 때까지 비겁한 사람이 아니면 모두 다 모입시다.”
이탈리아 통일 전쟁 영웅인 가리발디가 출정을 앞두고 ‘붉은 셔츠대’에 행한 연설의 한 대목이다. 장병들에게 사기를 불어넣은 이 명연설이 의미하는 것은 민족의 자존으로 외부 침략에 저항해야 하며 최소한 비겁하지 않으려면 조국 통일 전선에 동참해야 한다는 것이다.


1860년 5월6일. 붉은 셔츠를 입고 챙이 넓은 모자를 쓴 채 손에는 총과 칼을 든 1000여 명의 사내들이 탄 배가 이탈리아 제노바 항구를 출발했다. 그리고 배가 떠나자마자 중년의 한 남자가 “시칠리아 섬에 있는 동포들의 해방을 위하여, 이탈리아의 통일을 위하여 우리 모두 대동단결합시다”라고 외쳤다. 이 중년의 남자는 ‘붉은 셔츠대’를 이끌고 있는 주세페 가리발디였다. 가리발디는 19세기 사르데냐 왕국을 중심으로 외세를 몰아내고 이탈리아를 통일한 근대 최고의 전쟁 영웅이다.


이탈리아 니스에서 어부의 아들로 태어난 가리발디는 외국 침략자에 대항, 청년 이탈리아당의 혁명 운동에 가담했다가 프랑스로 피신한 뒤 남미로 건너갔다. 남미에서 13년을 보낸 그는 우루과이의 독립 전쟁에 참가해 공을 세웠으며, 1842년에는 우루과이 해군의 지휘를 맡아 아르헨티나의 독재자와 맞선 해방 전쟁에 뛰어들어 공을 세우고 영웅으로 칭송받았다. 이듬해 다시 우루과이군에서 복무하며 새로 구성된 ‘이탈리아 연대’의 사령관이 됐다. 이 부대가 훗날 가리발디의 이름과 함께 널리 알려진 붉은 셔츠대의 모태가 됐다. 

 
1848년 이탈리아 해방 전쟁이 일어나자 조국으로 돌아온 그는 비밀리에 의용군을 조직, 시칠리아 섬을 다스리던 프랑스계 지배자를 몰아내고자 했다.
1859년 해방 전쟁에서는 알프스 의용대를 지휘했다. 이듬해 5월 ‘붉은 셔츠대’를 조직해 남이탈리아 왕국을 점령, 사르데냐 왕에게 바침으로써 이탈리아 통일에 기여했다.
가리발디는 1860년 5월10일 1000여 명의 붉은 셔츠를 입은 비정예 독립군을 이끌고 압도적 병력의 프랑스 정예군을 물리치고 시칠리아를 해방시켰다.


이처럼 가리발디가 이끄는 비정예 요원들은 붉은 셔츠가 상징하듯 순수 열정으로 위기에 처한 조국 이탈리아를 구해 내고자 했으며 시민들의 동참을 유도하기 위해 목이 터져라 단결을 호소하고 살신성인의 자세로 외침에 저항했다. 특히 가리발디의 나라 사랑이 주목받는 것은 개인의 부귀·영달 차원이 아닌 외침으로부터 조국을 지키겠다는 뜨거운 충정에서 비롯됐기 때문이다.
가리발디의 조국에 대한 헌신적 자세는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무엇보다 그는 국민들의 열광적인 지지를 얻었기에 이탈리아 통일을 이룰 수 있었다는 점이다. 가리발디가 시칠리아 섬을 평정한 뒤 여세를 몰아 이탈리아 반도를 통일하기까지는 시민들의 절대적 지지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특히 시칠리아 섬 주민들은 외국 세력인 프랑스군의 지배에 염증을 느끼고 있었기에 붉은 셔츠대의 시칠리아 섬 도착을 열렬히 환영했다.


또 가리발디의 이탈리아 통일을 향한 모든 노력이 정치적 색깔을 띠지 않는 순수한 열정에서 비롯됐다는 점이 그를 진정한 전쟁 영웅으로 칭송받게 했다. 가리발디는 이탈리아 통일을 위해 나폴리에 입성하고 사르데냐 왕국의 수상 카보우나와 협상, 이탈리아 통일 왕국을 건설하고는 어떠한 대가도 바라지 않고 조국을 위해 일하겠다는 발표를 남긴 채 고향으로 홀연히 돌아갔다. 이후 그는 사회 사업을 하면서 여생을 보내 이탈리아의 진정한 국민적 영웅으로 추앙받게 됐다. 비록 그는 군인은 아니지만 살신성인을 추구하려는 군인과 같은 자세로 평생의 삶을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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