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6년 게르만 족장 오도아케르는 왜 서로마제국의 숨통을 끊었을까?
이민족 침략·권력암투… ‘천년의 제국’을 삼키다
3세기경 로마 군인으로 복무하는 게르만족 늘어 ‘로마의 게르만화’ 확산
로마 황제, 훈족에 밀린 게르만족을 이민족 방패막이로 완충지대에 배치
378년 게르만족 불만 폭발… 5세기 초반 갈리아 침략, 476년 황제 폐위
게르만족(고트족)은 410년 1000년 제국의 심장인 로마를 점령함으로써 로마제국을 대혼란에 빠뜨렸다. |
우리는 흔히 서양의 역사를 고대·중세·근대로 나눈다. 이때 고대와 중세를 구분하는 사건으로 통상 476년 서로마제국의 멸망을 꼽는다. 4세기 후반 이래 지속된 이민족들의 잇단 침략으로 1000년 제국 로마도 더 지탱하지 못하고 결국 지도상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물론 제국 동부의 영토 절반은 이후 비잔티움 제국이라 불리면서 또 다른 1000년 동안 유지됐다. 그런데도 후세인들은 476년 서로마제국의 몰락을 일반적으로 로마제국 전체의 종곡(終曲)으로 기억하고 있다.
그만큼 이 사건이 이후 서양과 세계에 미친 영향이 크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렇다면 로마인들로부터 흔히 야만족 취급을 받아온 게르만 족장의 요구에 당시 서로마제국의 황제였던 로물루스 아우구스투스는 왜 아무런 저항도 못 하고 물러났을까? 이 글은 바로 이에 대한 답을 로마제국의 멸망 원인과 연계해 찾으려는 한 시도다.
오도아케르와 그의 시대
오도아케르(Odoacer·435~493)가 활동하던 시대는 로마제국의 말기로 그동안 라인강과 다뉴브강 북쪽에 살던 게르만의 여러 부족이 서로마제국의 영내로 물밀 듯이 이동해온 혼란기였다. 그런데 이러한 게르만족의 이동은 하루아침에 이뤄진 사건이 아니었다. 직접적으로는 378년 고트족에 대한 다뉴브강 안쪽으로의 이동 허가와 뒤이어 벌어진 아드리아노플 전투에서 로마군의 참패, 페르시아 제국의 위협으로 실행된 로마군 정예병력의 동부 배치 등 이미 4세기 말부터 가시적으로 나타난 현상이었다.
원래 로마제국의 자연 국경선이던 라인강과 다뉴브강 북쪽에 살던 통칭 게르만족은 문명화된 로마인들의 눈에는 야만족으로 투영됐다. 이들은 대부분 부족단위로 농업에 종사했고, 세련되지 못한 외모와 거친 행동으로 로마인들을 자극했으며, 무엇보다도 대부분 문맹(文盲)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3세기경부터 게르만족은 변경지대에서 로마인들 및 로마 군인들과의 접촉이 잦아지면서 점차 문명화되기 시작했고, 특히 게르만족의 젊은이 중 로마 군대에서 직업군인으로 복무하는 숫자가 점차 늘어나면서 이들을 매개로 게르만족의 로마화와 반대로 로마의 게르만화가 빠르게 확산됐다. 전반적으로 4세기 중엽까지 로마와 게르만족의 관계는 그런대로 평화롭게 유지됐다고 볼 수 있다.
게르만족의 이동로. |
호전적인 ‘훈족’ 흑해 쪽으로 들어오기 시작
그러나 4세기 중반 이후 점차 상황이 악화되기 시작했다. 첫 방아쇠는 로마제국에서 동쪽으로 멀리 떨어진 중앙아시아에서 당겨졌다. 중원대륙의 힘에 밀려난 호전적인 훈족 무리가 서쪽의 스텝(steppe)으로 이주해 흑해 쪽으로 밀려들어 온 것이었다. 이는 곧 오래전부터 로마제국 국경선 밖 흑해 주변에 흩어져 살고 있던 여타 민족 중 특히 고트족에게 심대한 타격을 주었다. 생존을 위해 고트족은 정든 터전을 버리고 (동)로마지역의 국경지대로 이동할 수밖에 없었다. 진퇴양난에 처한 고트족의 압력이 너무 강하다고 판단한 (동)로마의 발렌스 황제(재위 364~378)는 376년 이들에게 다뉴브강 도하(渡河)와 제국 국경 내 정착을 허용했다. 황제의 자비라기보다는 연거푸 이어질 다른 이민족들의 로마 영내 이주에 대비해 이들을 완충지대에 배치해 막으려는 속셈이었다.
그러나 이후 상황은 황제가 의도한 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자신들에게 식량과 생필품 등을 제공하기로 약속한 로마인들이 이를 거절하고 심지어 악행마저 자행하자 마침내 378년 고트족의 불만이 폭발했다. 설상가상으로 이를 진압하기 위해 직접 출정한 발렌스 황제는 우둔한 작전으로 아드리아노플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로마제국 역사상 최악의 참패를 당하고 말았다. 황제마저 전사할 지경이었는지라 로마제국은 고트족에게 식량과 토지를 제공하는 등 대폭의 유화책을 쓸 수밖에 없었다. 이후 4세기 말에 고트족의 영걸 알라리크가 서로마제국의 이탈리아 반도를 향해 침략군을 몰고 갈 때까지 그런대로 평화가 유지됐다.
흑해 지역에서 고트족을 밀어낸 훈족의 계속된 서진(西進)은 이번엔 더욱 심각한 혼돈을 촉발하고 말았다. 훈족이 비옥한 헝가리 평원지대에 이르면서 이곳에 거주하던 게르만의 여러 부족이 일거에 로마제국의 라인강 변경지대로 이동하는 사태가 벌어진 것이었다. 긴장 상태가 지속돼 오던 상황에서 마침내 5세기 초반(406~407)에 일이 터지고 말았다. 반달족이 중심이 된 게르만족의 연합세력이 라인강을 건너서 로마의 영토인 갈리아로 쳐들어온 것이었다. 이후 여기에 토벌차 출정한 로마군 외에 발칸반도에서 진격해온 알라리크 휘하의 고트족까지 가세하면서 사태는 더욱 복잡하게 전개됐다.
로마인들로부터 선물을 받는 오도아케르 |
410년 게르만족에게 점령된 로마 제국
결국 410년 1000년 제국의 심장인 도시 로마가 게르만족(고트족)에게 점령·약탈당하는 초유의 상황이 벌어졌다. 이는 1000년 제국 수도로서의 위용과 신비성을 일거에 무너뜨리는 상징적 사건으로 그것이 준 심리적 충격은 컸다. 일단 봇물이 터지자 방파제가 속수무책으로 무너져 내리면서 이민족의 침략은 이어졌다. 455년에는 북아프리카에 세력 거점을 확보한 반달족이 로마를 약탈했고, 심지어 아틸라의 명성을 등에 업은 훈족마저 로마를 침공할 정도였다.
이처럼 이민족의 위협과 침략이 이어지는 상황에서도 서로마제국 내부에서는 제위(帝位)를 놓고 서로 죽이고 죽는 권력 암투가 끊임없이 이어졌다. 당연히 황제의 얼굴은 자주 바뀌었고, 그로 인해 이민족의 간섭과 침략에 대해 별다른 방책을 내세울 수도, 시도할 수도 없었다. 황제 자리는 군권을 장악한 이민족 지휘관의 손아귀에 달려 있었다. 이때 등장한 인물 중 하나가 바로 아틸라 충신(忠臣)의 아들로서 아틸라 사후 추종자 무리를 이끌고 다뉴브강 유역에서 서로마제국으로 넘어온 오도아케르였다. 쿠데타를 통해 정치적 권력까지 장악한 그는 476년 허수아비에 지나지 않던 로물루스 황제를 형식상 원로원의 의결을 거쳐서 재위 1년 만에 폐위시키고 말았다. 이 사건은 당시 로물루스 이전 20년 동안 무려 9명의 황제가 연이어 바뀔 정도로 혼란했던 정치사의 연장선에 있는 단막극에 불과했을지 모르나, 이후 역사는 이를 로마제국이 몰락한 분수령적 사건으로 기억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