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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역사

726년 동로마황제 레오 3세는 왜 성상 파괴령을 내렸을까?(2)

작성자짜르르|작성시간18.08.21|조회수1,802 목록 댓글 0


726년 동로마황제 레오 3세는 왜 성상 파괴령을 내렸을까?

영향력 강한 교회와 수도원 세력 통제하기 위한 속셈



레오 3세, 영향력 미약하던 서방교회에도 강요… 쌓여온 불만 터져

언어·정치체제·지역적 상황 달랐던 동서 로마의 갈등 보여준 사건

성상 파괴로 문화유산·예술품 사라지고 동·서방교회 대립 더 심해져

 

기사사진과 설명


샤를마뉴 대관식. 필자 제공


 

이슬람 세력의 위협이 상존하는 상황에서 왜 레오 3세는 교회의 반발이 예상됨에도 불구하고 성상 파괴령을 내렸을까? 로마교회와 비잔티움교회(요즘에는 이를 각각 로마가톨릭, 그리스정교회로 칭함)의 공식적인 분열은 1054년이었다. 긴 세월을 두고 갈등관계가 점진적으로 누적돼온 결과였으나, 동서교회가 서로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도록 만든 결정적 계기는 바로 726년 레오 3세의 조치였다.

엄밀한 의미에서 동서교회 분열의 씨앗은 로마제국 통치기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성상 파괴의 동기와 그 결과

하나의 제국 내에서 서방과 동방은 서로 이질적인 문화를 형성해 왔다. 제국이 속주로 삼은 지방들의 문화적 전통이 상이한 점은 차치하고라도 무엇보다도 공식 언어가 달랐다. 로마제국은 오늘날 크로아티아 지역을 경계로 서방에서는 라틴어를, 동방에서는 헬라어(그리스어)를 공식 언어로 사용했다. 게다가 4세기 중반 이후 벌어진 콘스탄티노플로의 수도 이전, 서로마제국의 멸망 등 굵직한 사건들은 양측의 차이를 가속화했다. 6세기 말 이후에는 지중해의 제해권마저 이슬람 해군에게 빼앗기면서, 동서 진영 간 교류는 더욱 줄어들었다.

교회사적인 측면에서도 로마와 콘스탄티노플의 경쟁관계는 점차 심화돼 왔다. 313년 밀라노 칙령으로 그리스도교가 공인된 이래 지중해를 중심으로 한 그리스도교 세계에는 5개의 총대주교 도시들(로마·콘스탄티노플·예루살렘·안티오크·알렉산드리아)이 있었다. 그런데 7세기에 접어들어 이집트와 시리아 지역이 이슬람 세력의 수중으로 떨어지면서 자연스럽게 로마와 콘스탄티노플, 두 도시만 남게 됐다. 이러한 상황에서 로마는 베드로의 순교지이자 교황이 그의 후계자라는 성경상 근거를 내세운 데 반해, 콘스탄티노플은 황제가 거주하고 있는 로마제국의 진정한 수도라는 현실을 강조하면서 그리스도교 세계의 주도권 다툼이 벌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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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성상을 불태우는 그림. 필자 제공




바로 이러한 때 공포된 레오 3세의 성상(聖像) 파괴령은 그나마 남아있던 동류의식을 날려버리고 말았다. 성상 허용 여부를 둘러싼 논쟁은 동서 로마가 정치체제, 지역적 상황, 그리고 언어 등에서 장기간 서로 다른 길을 걸어왔음을 일거에 표출한 사건이었다. 726년 황제 레오 3세는 당시 교회와 수도원에서 통상적으로 이뤄지고 있던 성상 숭배를 성경 말씀에 위배되는 우상 숭배로 간주하고 제국 영내의 모든 성상을 없애라는 명령을 내렸다. 물론 이에 대해 비잔티움제국 내부에서 반발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문맹이 대부분이던 시절에 성상은 일반 대중에게 예수와 그와 관련된 교회의 교리를 교육하고 이해시키는 데 매우 효과적인 도구였기 때문이다. 황제는 자신의 권력이 작동한 동방에서는 이를 관철하는 데 나름대로 성공했다.

하지만 문제는 그가 이를 자신의 영향력이 미약한 서방교회에도 강요한 점이었다. 당시 로마교회의 수장(首長)이던 그레고리우스 2세(Gregorius Ⅱ·재임 715~731) 교황은 종교 문제에 대한 레오 3세의 개입을 부당한 처사라고 항의하면서 성상 파괴 정책을 공식적으로 반대했다. 성상 사용 여부는 교회가 결정할 사안으로 황제는 교회의 일에 간섭할 권한이 없다고 선언했다.

사실상 동방교회에서처럼 서방교회에서도 오래전부터 이교도들에 대한 선교와 교화라는 현실적 목적을 위해 예수·마리아·성인 등을 그린 그림이나 조각상, 십자가상을 교회에 설치·활용해 왔다. 그 결과 6세기경에 이르면 교회에서의 성상 사용은 이미 보편적 현상으로 자리 잡았다. 이러한 실상을 무시한 채 레오 3세가 서방교회에 대해서조차 성상 파괴 조치를 강제하려 하자 그동안 쌓여온 불만이 터지고 말았던 것이다.

그렇다면 레오 3세는 왜 성상 파괴 정책을 밀어붙였을까?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레오 3세는 이슬람 군대의 거센 침략으로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했던 콘스탄티노플을 지켜낸 황제였다. 이슬람 세계와 접촉·투쟁하는 과정에서 원래 신앙심이 돈독했던 그는 모든 종교적 형상을 철저하게 금지하는 이슬람 교리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 결과 황제가 제국의 종교 상태를 성서 기록에 입각해 정화(淨化)할 필요가 있다는 결단에 도달했다는 추론적 주장이 있다. 이러한 종교적 요인에 더해 아마도 급진적인 종교정책을 통해 날로 영향력이 강해지고 있던 교회에 대한 통제권을 재정비하고, 성상 숭배를 빙자한 재산증식으로 국가재정을 좀먹고 있던 수도원 세력을 견제하려는 속셈을 갖고 있었다. 물론 무엇이 진정한 동기였는지는 아마도 레오 3세 자신만이 알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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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서교회의 분열을 상징하는 그림. 필자 제공




사건 이후, 역사적 영향

레오 3세의 성상 파괴령은 이후 역사 전개에 어떠한 영향을 끼쳤을까? 물론 성상 숭배를 둘러싼 논쟁은 726년 이후에도 금지와 허용을 반복하면서 지속됐다. 하지만 이러한 와중에 종교적 관용의 폭은 더욱 좁아졌고, 특히 비잔티움제국의 경우 종교를 통치 이데올로기로 활용하려는 경향이 더욱 노골화됐다. 성상 파괴 정책으로 인해 소중한 문화유산들이 우상이라는 명목으로 대거 파괴됐다. 종교가 중시된 시대인지라 예술품이란 것이 대부분 그리스도교와 관련된 것들이었기에 성상이나 성화 등을 제외할 경우 당대 예술세계는 진공상태나 마찬가지였다. 물론 황제의 권력이 미약했던 제국 변경의 수도원에는 일부 성상들이 보존될 수 있었고, 이것들을 통해 그나마 당대 종교와 문화의 흐름을 엿볼 수 있다.

무엇보다도 이 조치로 인해 서방 라틴어권과 동방 그리스어권 간의 종교적 간극은 더욱 벌어졌다. 서로 다투기는 했으나 그 이전까지 로마교회의 교황은 비잔티움 황제의 권위를 인정하고 가능한 한 황제의 요구에 순응하는 태도를 보였다. 그런데 성상 파괴령 강요로 인해 로마교황은 노골적으로 황제에게 반대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결국, 이는 단기적으로는 800년 프랑크 왕국의 지도자 샤를마뉴가 로마교황으로부터 세례를 받고 로마제국의 정통 후계자로 인침받는 사건으로 표출됐다. 장기적으로는 1054년 동·서방 교회의 공식적인 분열과 대립으로 나타났고, 양자 간의 적개심은 1204년 제4차 서유럽 십자군원정대에 의한 콘스탄티노플 약탈로 더욱 심화됐다. 이처럼 누적돼온 동서교회의 갈등과 반목은 다른 다양한 요인과 결합돼 1453년 이슬람 군대의 콘스탄티노플 공략 때 그리스도교권 전체의 일치된 대응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고립무원에 처한 비잔티움제국의 멸망은 단지 시간문제에 불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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