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2년 프랑크 왕국의 카를 마르텔은 왜 프랑스 남서부로 출동했을까?
‘망치’<카를 마르텔 별명>, 이슬람 2만여 軍 ‘쾅쾅’… 중세유럽 영웅 우뚝
이슬람군 파죽지세에 놀란 오도 大公
프랑크 왕국 카를 마르텔에게 도움 요청
프랑스 남서부서 벌어진 ‘투르 전투’
‘얼음벽’ 대형으로 기념비적 승리 일궈
유럽 군대, ‘재정복’ 반격 불씨 마련
732년 10월 카를 마르텔은 오늘날 프랑스 남서부 투르에서 벌어진 충돌(Battle of Tours)에서 이슬람 군대를 물리치고 승리했다. 이전에 벌어진 다른 유명 전투들과 비교해 실제로 동원된 병력의 규모는 크지 않았다. 하지만 이 전투가 지닌 역사적 의미는 매우 컸다.
● 결단의 동기와 그 결과
일찍이 역사가 에드워드 기번이 “전 세계의 역사를 바꿔놓은 적과의 조우”라고 평가한 것처럼, 이날의 승리로 유럽 그리스도교 세계는 지속돼온 이슬람 세력의 위협으로부터 한시름 놓을 수 있었다. 전장인 투르로부터 당대 유럽의 중심도시 파리까지의 거리는 200여 마일에 불과했다. 따라서 이 전투에서 패했을 경우 이슬람 군대가 곧장 파리로 진격했을 것이라는 주장은 상당한 설득력을 갖고 있다.
이슬람 정복자들이 노리고 있을 당시 갈리아 지방은 통합된 국가권력이 부재한 채 군소 왕국들이 난립하고 있었다. 일찍이 로마를 쳐부수고 갈리아에 터전을 마련했던 서고트족은 프랑크족에게 패해 이베리아반도로 쫓겨난 상태였다. 서고트족은 새로운 땅에서조차 힘센 귀족들 간의 알력으로 7세기 이후 왕권이 유명무실해졌다. 이전투구의 와중에 외세를 끌어들여서라도 권력을 차지하려는 자들이 나타났다. 급기야 지브롤터 해협 너머에서 침략의 기회를 엿보고 있던 이슬람 세력에게 손을 내밀고 말았다.
711년 타리크가 이끄는 이슬람 군대가 해협을 건너서 이베리아반도에 상륙했다. 이들의 침공에 맞선 서고트족 로데릭 왕의 군대는 별다른 저항도 못 한 채 무너지고 말았다. 서고트 왕국을 정복한 이슬람군은 파죽지세로 북상해 718년경 이베리아반도 전체를 장악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이슬람 군대의 진격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반도를 평정한 이슬람 기병대의 일부 병력이 피레네 산맥을 넘어 갈리아 남서부 아키텐 공작령에 출몰했다. 이후로도 약탈 성격의 기습공격이 지속적으로 이어졌다. 마침내 732년 여름 코르도바의 이슬람 통치자 압둘 알 라흐만이 지휘하는 2만여 명의 기병대가 피레네 산맥을 넘어와 갈리아 남부를 휩쓸기 시작했다.
이에 다급해진 아키텐 공국의 오도 대공(大公)이 프랑크 왕국의 실권자였던 카를 마르텔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원래 로마 시대에 세도가 집안 노예들의 우두머리를 지칭한 용어였던 궁재(宮宰)는 이때에 오면 왕궁의 귀족 신하 중 가장 유능하고 신임받는 인물에게 부여한 직책으로 변했다. 메로빙거 왕들의 왕권이 약해지면서 상대적으로 귀족집단의 대표 격이던 궁재가 실질적 권력자로 부상했던 것이다. 최초의 궁재였던 피핀이 사망한 717년 새로 궁재가 된 인물이 바로 피핀의 서자(庶子)로서 뛰어난 군사적 능력을 발휘한 카를 마르텔이었다. 그는 오도 대공의 지원 요청에 신속하게 응했다. 이슬람 군대가 빠르게 갈리아의 중심부로 접근하고 있다는 첩보를 접하면서 나름대로 고심해 왔기 때문이다.
732년 늦여름, 카를 마르텔은 약 1만5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출정했다. 주력군은 쇠미늘 갑옷을 입고 대형 방패와 창칼을 든 중무장 보병이었다. 서둘러 갈리아 남부를 향해 이동한 이들은 732년 10월, 북상하고 있던 이슬람 군대와 맞서기 위해 투르 부근에 진을 쳤다. 특히 투르는 프랑크족의 국가적 성소(聖所)인 생 마르탱 성당의 소재지로서 이교도의 공격으로부터 반드시 수호해야만 하는 성스러운 장소였다. 바로 이곳에서 프랑크 왕국의 궁재 카를 마르텔과 이슬람군의 알 라흐만 장군이 역사에 회자될 만한 일전(一戰)을 벌일 참이었다.
처음에 양군은 진을 친 채 약 일주일 동안 간헐적인 소규모 탐색전으로 일관했다. 그러다가 8일째 되는 날 드디어 기병대를 앞세운 이슬람군이 본격적인 공격을 감행했다. 청년 시절부터 전장에서 잔뼈가 굵은 카를 마르텔은 영리했다. 그는 주로 기병으로 구성된 이슬람군에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장소와 전투방식을 택했다. 즉 병사들을 언덕배기 상단부에 그것도 과거 로마군의 방진(方陣) 대형으로 배치했다. 방패가 서로 맞물릴 정도로 밀착한 병사들은 창과 칼을 앞으로 내밀어서 기병의 돌격에 맞섰다. 이슬람 기병대의 파상공격에도 프랑크족 군사들은 필사적으로 방진 대형을 유지했다. 당대 한 목격자의 기록처럼 마치 ‘얼음벽’처럼 꿈쩍도 하지 않았던 것이다.
온종일 접전을 벌인 양측은 승패를 가리지 못한 채 야영에 들어갔다. 이튿날 날이 밝으면서 곧 닥쳐올 이슬람 기병대의 거센 공격에 대비하고 있던 프랑크족 병사들은 이상한 낌새를 느꼈다. 시간이 한참 지났는데도 이슬람군 진영에서 아무런 기미가 없었기 때문이다. 곧 이슬람 군대가 밤사이에 감쪽같이 사라졌다는 정찰대의 보고가 들어왔다. 이후 알려진 바에 따르면, 전날 전투 중 이슬람군의 총사령관 압둘 알 라흐만 장군이 전사하면서 전의를 상실한 부대원들이 일부 전리품만 챙긴 채 황급히 퇴각한 것이었다. 그동안 유럽 내에서 실전을 겪으면서 전술·전기를 연마해온 카를 마르텔이 서유럽의 병사들을 이끌고 이슬람 기병대에 맞서 승리했던 것이다. 이로써 유럽에서 거의 한 세기 이상 지속돼온 이슬람 세력의 위세는 그 동력을 잃고 말았다.
● 사건의 역사적 영향
투르 전투의 의미를 둘러싼 후대의 갑론을박이 어떻든 간에 이는 기념비적인 승리임이 분명하다. 이슬람 세력의 공세로부터 그리스도교 유럽을 구했음은 물론, 이날의 승전을 계기로 ‘무서운 악마의 군대’로 각인된 이슬람군에 대한 두려움을 떨쳐버릴 수 있었다. 더욱이 유럽의 군대는 이후 700여 년에 걸친 ‘재정복운동’이라는 반격의 불씨를 마련할 수 있었다.
투르 전투 승리 후 프랑크인들은 카를에게 마르텔, 즉 ‘망치’라는 별명을 붙여주었고 이후 그는 ‘카를 마르텔’로 불렸다. 더구나 그의 아들이 개창한 카롤링거 왕조에서 서로마제국 몰락 후 유럽을 재통일한 카를 대제(재위 768~814·라틴어 원명은 카롤루스 마그누스)가 등장해 오늘날 유럽 문명의 정치적 초석을 놓았다.
투르 전투는 군사적인 면에도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이슬람군과의 실전을 경험한 카를 마르텔은 기동의 중요성을 간파하고 기병을 양성하는 방향으로 군 개혁을 추진했다. 승리의 일등공신이 중무장 보병대임은 분명하나 개활지라는 갈리아 지방의 지리적 특성상 기동성이 결여된 보병부대로는 외적의 침입에 효과적으로 대처하기가 힘들다고 판단한 것이었다.
그가 물꼬를 튼 변화의 물결은 점차 확산해 화약무기의 시대가 본격화되는 15세기 이전까지 거의 700년 동안 기병 우위의 시대를 열었다
● 결단의 동기와 그 결과
일찍이 역사가 에드워드 기번이 “전 세계의 역사를 바꿔놓은 적과의 조우”라고 평가한 것처럼, 이날의 승리로 유럽 그리스도교 세계는 지속돼온 이슬람 세력의 위협으로부터 한시름 놓을 수 있었다. 전장인 투르로부터 당대 유럽의 중심도시 파리까지의 거리는 200여 마일에 불과했다. 따라서 이 전투에서 패했을 경우 이슬람 군대가 곧장 파리로 진격했을 것이라는 주장은 상당한 설득력을 갖고 있다.
이슬람 정복자들이 노리고 있을 당시 갈리아 지방은 통합된 국가권력이 부재한 채 군소 왕국들이 난립하고 있었다. 일찍이 로마를 쳐부수고 갈리아에 터전을 마련했던 서고트족은 프랑크족에게 패해 이베리아반도로 쫓겨난 상태였다. 서고트족은 새로운 땅에서조차 힘센 귀족들 간의 알력으로 7세기 이후 왕권이 유명무실해졌다. 이전투구의 와중에 외세를 끌어들여서라도 권력을 차지하려는 자들이 나타났다. 급기야 지브롤터 해협 너머에서 침략의 기회를 엿보고 있던 이슬람 세력에게 손을 내밀고 말았다.
711년 타리크가 이끄는 이슬람 군대가 해협을 건너서 이베리아반도에 상륙했다. 이들의 침공에 맞선 서고트족 로데릭 왕의 군대는 별다른 저항도 못 한 채 무너지고 말았다. 서고트 왕국을 정복한 이슬람군은 파죽지세로 북상해 718년경 이베리아반도 전체를 장악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이슬람 군대의 진격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반도를 평정한 이슬람 기병대의 일부 병력이 피레네 산맥을 넘어 갈리아 남서부 아키텐 공작령에 출몰했다. 이후로도 약탈 성격의 기습공격이 지속적으로 이어졌다. 마침내 732년 여름 코르도바의 이슬람 통치자 압둘 알 라흐만이 지휘하는 2만여 명의 기병대가 피레네 산맥을 넘어와 갈리아 남부를 휩쓸기 시작했다.
이에 다급해진 아키텐 공국의 오도 대공(大公)이 프랑크 왕국의 실권자였던 카를 마르텔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원래 로마 시대에 세도가 집안 노예들의 우두머리를 지칭한 용어였던 궁재(宮宰)는 이때에 오면 왕궁의 귀족 신하 중 가장 유능하고 신임받는 인물에게 부여한 직책으로 변했다. 메로빙거 왕들의 왕권이 약해지면서 상대적으로 귀족집단의 대표 격이던 궁재가 실질적 권력자로 부상했던 것이다. 최초의 궁재였던 피핀이 사망한 717년 새로 궁재가 된 인물이 바로 피핀의 서자(庶子)로서 뛰어난 군사적 능력을 발휘한 카를 마르텔이었다. 그는 오도 대공의 지원 요청에 신속하게 응했다. 이슬람 군대가 빠르게 갈리아의 중심부로 접근하고 있다는 첩보를 접하면서 나름대로 고심해 왔기 때문이다.
732년 늦여름, 카를 마르텔은 약 1만5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출정했다. 주력군은 쇠미늘 갑옷을 입고 대형 방패와 창칼을 든 중무장 보병이었다. 서둘러 갈리아 남부를 향해 이동한 이들은 732년 10월, 북상하고 있던 이슬람 군대와 맞서기 위해 투르 부근에 진을 쳤다. 특히 투르는 프랑크족의 국가적 성소(聖所)인 생 마르탱 성당의 소재지로서 이교도의 공격으로부터 반드시 수호해야만 하는 성스러운 장소였다. 바로 이곳에서 프랑크 왕국의 궁재 카를 마르텔과 이슬람군의 알 라흐만 장군이 역사에 회자될 만한 일전(一戰)을 벌일 참이었다.
처음에 양군은 진을 친 채 약 일주일 동안 간헐적인 소규모 탐색전으로 일관했다. 그러다가 8일째 되는 날 드디어 기병대를 앞세운 이슬람군이 본격적인 공격을 감행했다. 청년 시절부터 전장에서 잔뼈가 굵은 카를 마르텔은 영리했다. 그는 주로 기병으로 구성된 이슬람군에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장소와 전투방식을 택했다. 즉 병사들을 언덕배기 상단부에 그것도 과거 로마군의 방진(方陣) 대형으로 배치했다. 방패가 서로 맞물릴 정도로 밀착한 병사들은 창과 칼을 앞으로 내밀어서 기병의 돌격에 맞섰다. 이슬람 기병대의 파상공격에도 프랑크족 군사들은 필사적으로 방진 대형을 유지했다. 당대 한 목격자의 기록처럼 마치 ‘얼음벽’처럼 꿈쩍도 하지 않았던 것이다.
온종일 접전을 벌인 양측은 승패를 가리지 못한 채 야영에 들어갔다. 이튿날 날이 밝으면서 곧 닥쳐올 이슬람 기병대의 거센 공격에 대비하고 있던 프랑크족 병사들은 이상한 낌새를 느꼈다. 시간이 한참 지났는데도 이슬람군 진영에서 아무런 기미가 없었기 때문이다. 곧 이슬람 군대가 밤사이에 감쪽같이 사라졌다는 정찰대의 보고가 들어왔다. 이후 알려진 바에 따르면, 전날 전투 중 이슬람군의 총사령관 압둘 알 라흐만 장군이 전사하면서 전의를 상실한 부대원들이 일부 전리품만 챙긴 채 황급히 퇴각한 것이었다. 그동안 유럽 내에서 실전을 겪으면서 전술·전기를 연마해온 카를 마르텔이 서유럽의 병사들을 이끌고 이슬람 기병대에 맞서 승리했던 것이다. 이로써 유럽에서 거의 한 세기 이상 지속돼온 이슬람 세력의 위세는 그 동력을 잃고 말았다.
● 사건의 역사적 영향
투르 전투의 의미를 둘러싼 후대의 갑론을박이 어떻든 간에 이는 기념비적인 승리임이 분명하다. 이슬람 세력의 공세로부터 그리스도교 유럽을 구했음은 물론, 이날의 승전을 계기로 ‘무서운 악마의 군대’로 각인된 이슬람군에 대한 두려움을 떨쳐버릴 수 있었다. 더욱이 유럽의 군대는 이후 700여 년에 걸친 ‘재정복운동’이라는 반격의 불씨를 마련할 수 있었다.
투르 전투 승리 후 프랑크인들은 카를에게 마르텔, 즉 ‘망치’라는 별명을 붙여주었고 이후 그는 ‘카를 마르텔’로 불렸다. 더구나 그의 아들이 개창한 카롤링거 왕조에서 서로마제국 몰락 후 유럽을 재통일한 카를 대제(재위 768~814·라틴어 원명은 카롤루스 마그누스)가 등장해 오늘날 유럽 문명의 정치적 초석을 놓았다.
투르 전투는 군사적인 면에도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이슬람군과의 실전을 경험한 카를 마르텔은 기동의 중요성을 간파하고 기병을 양성하는 방향으로 군 개혁을 추진했다. 승리의 일등공신이 중무장 보병대임은 분명하나 개활지라는 갈리아 지방의 지리적 특성상 기동성이 결여된 보병부대로는 외적의 침입에 효과적으로 대처하기가 힘들다고 판단한 것이었다.
그가 물꼬를 튼 변화의 물결은 점차 확산해 화약무기의 시대가 본격화되는 15세기 이전까지 거의 700년 동안 기병 우위의 시대를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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