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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역사

1066년 노르만 공(公) 윌리엄은 왜 잉글랜드 원정길에 올랐을까?(2)

작성자참으로|작성시간18.08.22|조회수450 목록 댓글 0


1066년 노르만 공(公) 윌리엄은 왜 잉글랜드 원정길에 올랐을까?

후사 없이 왕 죽자 기병대 앞세워 ‘왕위쟁탈전’




노르망디에서 지배권을 확고하게 다진 윌리엄은 영국 왕 에드워드가 후사 없이 죽자 군대를 이끌고 영불해협을 건넜다. 윌리엄은 잉글랜드 남부 헤이스팅스에서 해럴드 군대를 무찌르고 런던으로 진격, 잉글랜드 왕으로 즉위했다. 그림은 헤이스팅스 전투를 묘사한 태피스트리. 사진=필자 제공





왕위 계승자로 해럴드 결정되자 

윌리엄과 노르웨이 왕 강력 반발 


불행하게도 운이 없었던 해럴드 

북부서 연합군대와 일전 벌이고 

남부 헤이스팅스서 윌리엄과 맞붙어 


유럽대륙서 명성 떨쳐온 기병대 

해럴드 군대 무찌르고 런던 진격 

정복왕 윌리엄, 노르만 英 왕조 탄생


윌리엄 승리 일등공신 '군사력' 

심혈 기울여 양성해온 기사들 

기병 시대 도래 만천하에 과시



911년 노르망디에 정착한 노르만족은 점차 주변 지역으로 영토를 넓혀갔다. 일곱 살에 공국을 이어받은 윌리엄은 1066년까지 30여 년을 통치하면서 유능한 영주이자 지략이 탁월한 군인으로 성장했다. 앙주 백작 조프루아 5세와의 다툼에서 승리하면서 노르망디에 대한 자신의 지배권을 확고하게 다진 그는 이제 눈을 해협 너머 영국으로 돌렸다.



결단의 동기와 그 결과

수년간 준비작업을 해온 그에게 드디어 기회가 찾아왔다. 1066년 영국 왕 에드워드(재위 1042~1066)가 후사(後嗣) 없이 죽으면서 왕위 계승 문제가 표면화됐다. 최종적으로 세 명의 유력자가 왕위 계승권자임을 자임했다. 노르웨이 왕 하랄드 하르드라다, 에드워드의 왕비였던 에디스의 아들 해럴드 고드윈선(통상 해럴드로 칭함), 그리고 노르망디 공 윌리엄이 바로 그들이었다. 공교롭게도 세 명 중 누구에게도 잉글랜드 왕실의 피가 흐르지 않고 있었기에 왕위 쟁탈전은 무력으로 결판날 수밖에 없었다.

먼저 유리한 고지를 점한 것은 해럴드(Harold)였다. 죽음 직전에 에드워드와 유력 귀족들이 그를 왕위 계승자로 결정하고, 신속하게 웨스트민스터 수도원에서 즉위식을 거행했다. 당연히 나머지 두 사람이 강력하게 반발했다. 특히 윌리엄은 왕위 계승 서열상으로 자신이 에드워드의 진정한 계승자임을 내세웠다. 게다가 한때 노르망디에 망명해 있던 에드워드가 자신을 후계자로 인정했고, 1064년에는 해럴드마저 자신의 왕위 상속을 지지하기로 서약했음을 내세웠다. 물론 이러한 주장을 인정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으나, 아무튼 그는 이를 명분 삼아 침공계획을 구체화했다.

나름대로 용감하고 능력을 갖춘 해럴드였으나 불행하게도 운(運)이 없었다. 윌리엄이 침공하기 직전에 그는 잉글랜드 북부로 쳐들어온 이복동생 토스티그 및 노르웨이 왕의 연합군대와 일전을 벌여야만 했기 때문이다. 9월 25일, 요크 인근 스탬퍼드 브리지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해럴드는 대승을 거두었다. 하지만 승리의 기쁨도 잠깐, 변덕스러운 날씨로 한동안 노르망디에 발이 묶여 있던 윌리엄의 군대가 9월 28일 잉글랜드 남부에 상륙했다는 급보를 접하게 됐다. 피로가 누적된 상태였으나, 해럴드는 급한 대로 정예병력만이라도 이끌고 400㎞나 떨어진 잉글랜드 남부로 진격하는 수밖에 없었다.

드디어 양군은 10월 14일 영국 남부 헤이스팅스의 완만한 구릉지에서 대치했다. 쌍방 간 약 6000~8000명의 병력을 거느리고 있었으나 주력군의 모습에는 차이가 있었다. 대부분 보병으로 편성된 해럴드의 잉글랜드군은 약 1000명의 왕실 호위대가 주력이었다. 이들은 철제 투구에 칼, 창, 대형 도끼, 원형 방패로 무장하고 있었다. 주력군이 아닌 주로 현지(現地)에서 동원된 다른 병사들의 무장 상태는 매우 허술했다. 일부는 석궁과 활을 가지고 있었으나 대부분은 창, 벌목용 철제 도끼나 심지어 조잡한 돌도끼로 무장하고 있었다. 먼저 도착해 구릉지의 높은 지대를 선점한 것이 그나마 해럴드 군에는 천만다행이었다.

언덕을 올려다보며 공격해야만 하기에 지형적으로 불리했으나 윌리엄의 군대는 편성과 무장 면에서 우위에 있었다. 약 6000~7000명에 달한 전체 병력 중 절반이 기병과 궁수였다. 특히 유럽대륙에서 명성을 떨쳐온 중무장 기병대가 위용을 자랑했다. 윌리엄은 제1 전열에 궁수부대, 제2 전열에 중보병부대, 제3 전열에 기병대를 배치하는 전투대형을 취했다. 공격명령이 떨어지자 맨 먼저 궁수들이 적진을 향해 화살을 날리고, 이어서 보병대가 공격을 가했다. 적군의 방패막이 이를 버텨내자 후방에 있던 노르만 기병대가 돌격을 감행했다. 이후 물밀 듯이 쇄도한 후 치고 빠지는 노르만 기병대의 파상공격으로 해럴드 군의 진용은 점차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드디어 해가 질 무렵, 윌리엄의 군대가 마지막 총공세를 펼쳤다. 이번에는 먼저 궁수들이 잉글랜드군 진영으로 화살을 높이 쏘아 올린 후 방어대형이 흐트러진 틈을 타서 대기하고 있던 기병들이 돌진했다. 궁수와 기병을 동시에 투입하는 혼합형 작전 덕분에 마침내 해럴드 군대를 무찌르고 언덕을 점령할 수 있었다. 격전 중 눈에 화살을 맞고 쓰러진 해럴드는 노르망디 기사들에게 죽임을 당했다. 헤이스팅스 전투에서 승리한 윌리엄은 잉글랜드 남부지방을 유린하면서 런던으로 진격했고, 그해 성탄절에 요크 대주교의 입회 아래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잉글랜드의 왕으로 즉위했다. 영국사에서 앵글로-색슨 왕국이 끝나고 이른바 ‘정복왕 윌리엄’의 노르만 왕조가 탄생하는 순간이었.

기사사진과 설명


사진=필자 제공





사건의 역사적 영향

윌리엄의 잉글랜드 정복은 이후 영국 역사와 유럽사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을까? 우선, 영국에 대륙의 제도인 봉건제를 도입했다. 신제도의 정착을 위해 그는 1086년 각 주에 조사관을 파견해 토지를 축으로 형성된 장원의 실태를 조사하고, 이를 『둠즈데이 북(Domesday Book)』(1086)으로 집대성했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왕권은 약화됐고, 상대적으로 대귀족들의 세력이 강화됐다. 윌리엄 사후 거의 200년 동안 노르만계 왕들의 주된 관심은 브리튼 섬이 아니라 프랑스에 있었다. 국왕을 비롯한 노르만 귀족들은 피통치자인 앵글로-색슨인들과의 의사소통도 원활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이들은 노르망디에 광대한 영지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은 왕권과 귀족 간의 역학관계 형성에 영향을 끼침으로써 영국의 독특한 제도인 의회가 태동할 수 있는 토양을 제공했다.

사실상 윌리엄의 잉글랜드 정복이 가장 큰 영향을 끼친 곳은 군사 분야였다. 승리의 일등공신이 바로 그가 심혈을 기울여 양성해온 기사들이었기 때문이다. 두 지도자의 리더십과 전술상의 차이도 무시할 수 없으나, 헤이스팅스 전투에서 기병이 승패를 가르는 견인차였음은 분명하다. 이날 윌리엄의 기병대는 그리스-로마시대 이래 지속돼온 보병의 주도기가 저물고 기병의 시대가 도래했음을 만천하에 과시했다.

이러한 전장 주역의 변화는 중세사회의 기본모형 형성에 심대한 영향을 끼쳤다. 당시 말[馬]은 물론이고 기사의 무기나 갑옷 등은 매우 비싼 물품이었다. 따라서 중세에 대규모 기병대를 유지할 수 있던 부류는 경제력을 갖춘 국왕이나 대영주로 국한됐다. 이들은 예하 부하들에게 일정량의 토지를 주고 기사로 임명한 후 유사시 기병으로 동원했다. 결국, 정치권력이 중무장 기병의 자격을 갖춘 소수의 지배계급에 집중되고, 그러지 못한 자들은 생산활동에만 종사하는 중세 봉건사회가 출현했다. 봉건제와 장원제라는 두 축을 근간으로 한 중세사회의 형성에 윌리엄의 잉글랜드 원정이 중요한 계기를 제공했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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