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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역사

1095년 교황 우르바누스 2세는 왜 십자군 전쟁에 불을 붙였을까?(1)

작성자마이피|작성시간18.08.24|조회수1,022 목록 댓글 0


1095년 교황 우르바누스 2세는 왜 십자군 전쟁에 불을 붙였을까?

“이슬람 교도로부터 성지 예루살렘을 되찾자”


이슬람 수니파에 의해 예루살렘 함락

비잔티움 황제, 서유럽에 지원 요청

교황, 클레르몽 공의회서 파병 역설

“이것은 신의 뜻” 대규모 십자군 원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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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95년 11월 말에 열린 클레르몽 공의회 장면. 필자 제공



1095년 11월 말 쌀쌀한 날씨 속에서도 수많은 인파가 프랑스 클레르몽의 주교좌 성당에 운집했다. 몰려든 인파로 인해 성당 안은 물론 건물 밖까지 북적댔다. 이들은 이곳에서 종교회의를 주재하고 있던 교황 우르바누스 2세의 연설을 듣기 위해 모여든 성직자와 다양한 신분의 평신도들이었다.

모두의 시선이 쏠린 가운데 등단한 교황은 이교도 이슬람의 수중에 놓인 성지 예루살렘을 수복하고 위기에 처한 ‘그리스도교 세계의 방파제’ 비잔티움 제국을 수호해야 한다고 열변을 토했다. 이러한 교황의 호소에 참석자들은 “신이 원하신다”는 우렁찬 함성으로 답했다. 이후 거의 2세기 동안 이어질 십자군 운동이 시작됐다. 그렇다면 교황은 하필 이 시기에 이러한 연설을 했을까? 이러한 유럽 세계의 움직임에 이슬람 세계는 어떻게 대응했을까? 이는 이후 세계사 전개에 어떠한 영향을 끼쳤을까? 이 글은 이에 대한 답을 찾아보려는 한 시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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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 우르바누스 2세.




교황 우르바누스 2세와 그의 시대

우선 우르바누스가 어떤 인물인지 살펴보자. 본명이 ‘오동 드 라주리’인 우르바누스 교황은 프랑스 귀족 가문 태생으로 원래는 그 자신이 기사였다. 1064년 당시 서유럽 수도원 운동의 중심지였던 클뤼니 수도원의 수사가 되면서 성직자 생활을 시작했다. 이후 그는 수도원에서 두각을 보이며 출세를 거듭해 수도원장이 됐고, 1080년경 개혁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에 의해 오스티아의 주교급 추기경으로 서임됐다. 그는 그레고리우스 교황이 추진한 교회 개혁의 적극적인 지지자이자 핵심적인 활동가로 명성을 얻었다. 그 덕분에 1084년에는 교황의 특사 자격으로 독일 지역으로 파견돼 교황의 개혁작업에 반대하는 자들을 단죄했다. 이후 그레고리우스 7세를 계승할 가장 적합한 교황 후보자라는 명성을 얻기 시작한 그는 마침내 단임(短任)했던 교황 빅토르 3세의 후임으로 1088년 3월 드물게도 프랑스 출신 교황으로 선출되기에 이르렀다.

우르바누스 2세는 즉위하자마자 독일과의 전쟁, 교회 내부의 갈등 등 복잡한 현안들에 직면했다. 하지만 당시 가장 시급하고 심각한 문제는 비잔티움 제국의 처지였다. 11세기 초 황제 바실리우스 2세 치세(재위 976~1025) 아래서 잠시나마 과거의 영광을 회복하는 듯하던 비잔티움 제국은 그의 죽음과 더불어 쇠퇴하기 시작했다. 특히 1071년 소아시아의 만지케르트에서 벌어진 셀주크튀르크와의 전투에서 대패하면서 소아시아 지역 대부분을 상실하는 등 제국의 영토는 더욱 축소됐다. 성도(聖都) 예루살렘 역시 수니파 이슬람 세력의 수중으로 떨어졌다. 제국 내부적으로도 비잔티움의 황제와 제국 동부의 실세였던 유력 가문들 사이의 알력이 깊어진 탓에 외부 침략에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없었다. 치열한 제위 다툼 끝에 1081년 동부 유력 가문들의 후원을 받은 알렉시우스 콤네누스(재위 1081~1118)가 신임 황제가 됐으나 제국을 괴롭히고 있던 대내외적인 문제들을 해결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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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탈환을 위해 출발 준비를 하는 십자군. 필자 제공


 


이러한 사면초가의 상황에서 제위에 오른 알렉시우스 황제는 제국의 재건을 꿈꾸면서 공식적으로 서유럽에 지원을 요청했다. 교황은 1095년 3월 이탈리아의 피아첸차에서 열린 성직자 회의에서 비잔티움 제국의 사절단을 접견했다. 사절단에 들려 보낸 서한에서 알렉시우스 황제는 “이방인들이 콘스탄티노플 성벽에 도달하는 대부분 영토를 점령했노라”고 한탄하면서 “이교도들에게 맞서서 성스러운 교회를 수호할 수 있도록 지원군을 보내달라”고 간청했다. 사절단을 통해 비잔티움 황제의 청원을 경청한 교황은 소아시아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태의 중요성과 시급성을 인식하고 즉시 행동으로 나아갔다. 그는 이탈리아와 프랑스의 여러 지방을 직접 방문해 자신의 의향을 내비쳤다. 서유럽 수도원 운동의 중심지로서 한때 자신이 수도원장으로 있던 클뤼니에서는 대(大)수도원을 축성하는 극적인 장면까지 연출했다.

이러한 준비과정을 거친 후 마침내 그해 11월 말에 프랑스 클레르몽에서 개최된 공의회에서 이 문제를 전격적으로 이슈화했다. 그는 이탈리아와 부르고뉴, 프랑스 등지에서 온 주교 및 기사(귀족) 무리가 참석한 이 자리에서 성지탈환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교황은 청중을 마주한 연단 위의 옥좌에서 일어나 연설을 시작했다. 동방의 그리스도교 형제들이 이교도 이슬람 세력에 의해 고통당하고 있으며, 무엇보다도 지상에서 가장 성스러운 장소인 예루살렘마저 이교도들에게 훼손당하고 있다고 말했다. 결론은 하루속히 무기를 들고 가서 형제 그리스도인들을 보호하고 성지를 탈환하자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청중으로부터 교황조차 예상하지 못한 열띤 반응이 일어나 “이것은 신의 뜻이다(Deus Le Volt)”라는 거대한 함성이 클레르몽 성당 주변으로 울려 퍼졌다. 이날로부터 채 1년도 지나지 않아 황제 자신도 깜짝 놀랄 정도로 엄청난 규모의 서유럽인들이 지중해 동부로 몰려갔다. 바야흐로 십자군 원정이 시작된 것이었다.

오늘날 당시 그의 연설을 그대로 옮겨 적은 정확한 필사본은 존재하지 않는다. 현재 내용이 약간씩 다른 총 다섯 가지의 버전이 전해지고 있을 뿐이다. 이들 기록 모두 우르바누스 2세 본인이 실제로 얘기했다기보다는 후대 기록자들의 생각이 첨가됐다고 보는 게 정확할 것이다. 그런데도 당시 공의회에서 우르바누스 2세가 십자군 원정을 호소한 사실은 분명하다.

이처럼 서방에서 대규모 군사원정이 점화되려고 할 즈음에 팔레스타인 지역의 무슬림들은 서로 싸우는 데 정신이 팔려서 심각한 기류를 전혀 감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팔레스타인 지역을 놓고서 크게는 시아파인 파티마 왕조의 이집트인들과 수니파인 튀르크인들이 다투었고, 좁게는 수많은 작은 공국과 도시들로 분열돼 반목하고 있었다. 어떠한 대규모 공격에 대응하기가 매우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었다. 이때 서유럽에서는 성인들의 유골에 대한 예찬과 성지순례 행위가 유행하면서 서유럽인들의 마음속에 성지 예루살렘에 대한 신성성이 극대화돼 있었다. 이러한 심성적 기류에 복잡한 이해관계가 얽힌 다른 요인들이 결합하면서 서유럽 그리스도교 세계는 과연 누가 성지탈환이라는 화약고에 불을 붙일 것인가 하는 문제만 남겨놓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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