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29년 잔 다르크는 왜 오를레앙 성을 공격했을까?
갑옷으로 중무장 남장 처녀 벼랑 끝 프랑스의 구원투수로
프랑스 파리 피라미드 광장의 잔 다르크 동상. 필자 제공 |
1429년 봄, 지속되는 승리로 들떠 있던 오를레앙의 영국 포위군은 깜짝 놀랐다. 바로 자신들의 요새 앞에 웬 남장 처녀가 갑옷으로 중무장한 채 프랑스 왕실 깃발을 들고 서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바로 연속적 패전으로 위기에 처한 프랑스의 구원투수, 잔 다르크(Jeanne d’Arc)였다.
이날 벌어진 오를레앙 공성전은 일명 ‘백년전쟁(the Hundred Years’ War·1337~1453)’의 결정적 분기점이었다. 그동안 줄곧 수세에 몰렸던 프랑스가 이후로 승기를 잡아 종국에는 100여 년에 걸친 전쟁을 마무리하고 영국 세력을 유럽 대륙으로부터 몰아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전세 역전의 중심에 바로 오를레앙의 성녀(聖女), 잔 다르크가 있었다. 한낱 무명의 시골 처녀였던 그녀는 왜 그리고 어떻게 백년전쟁의 한복판에 서게 됐을까? 오를레앙 해방 작전에서 어떤 활약을 했을까? 이 글은 이에 대한 답을 찾아보려는 한 시도다.
고난의 시대에 나타난 잔 다르크
잔 다르크는 중세 말기의 유럽을 피로 물들인 백년전쟁의 후반기에 살았다. 그 명칭부터 긴 느낌을 주는 백년전쟁은 1337년부터 1453년까지 프랑스의 왕좌와 영토를 차지하기 위해 영국과 프랑스의 통치자들이 벌인 전쟁을 말한다. 이 전쟁은 중세 말에 벌어진 군사적 충돌 중 규모가 가장 크고 일시적 휴전으로 간혹 중단되기도 했으나 장기간 광범한 영역에서 수행됐다. 충돌의 주인공은 영국과 프랑스였으나 전쟁의 국면 변화에 따라 서유럽의 다수 국가가 연루됐다. 전쟁은 유럽 대륙의 정치지형도를 변화시켰음은 물론, 무엇보다도 전쟁 당사국인 영국과 프랑스 백성들에게 엄청난 고통과 희생을 초래했다. 바로 이러한 고난의 시대에 잔 다르크가 활동했다.
그렇다면 영국과 프랑스는 왜 이토록 긴 전쟁을 벌이게 됐을까?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영국 왕실이 프랑스 남부에 영지(가스코뉴 공국)를 갖고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11세기에 노르망디 공 윌리엄이 잉글랜드를 정복한 이후 영국 왕실은 결혼으로 맺은 복잡한 혈연관계 덕분에 프랑스 땅에 넓은 영지를 보유할 수 있었다. 그런데 중세 말기에 유럽 각국에서 왕권이 강화되기 시작하면서 ‘일정한 국경 안에서 단일한 왕이 지배하는 영토적 실체가 바로 왕국’이라는 인식이 높아졌다. 이에 따라 프랑스 땅에 있던 영국인들의 영지가 프랑스 왕실에는 눈엣가시 같은 존재로 부각됐다. 더구나 이 시기에 프랑스는 나름 유럽 대륙의 패권 국가를 꿈꾸고 있었기에 자국 영토 안에 버티고 있는 영국인들의 존재를 인정하기가 매우 힘들었다. 불만이 고조되면서 프랑스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영토를 회복해야겠다고 벼르게 됐다.
드디어 14세기 초경 기회가 찾아왔다. 주요 양모산업 지역이던 플랑드르 지방에서 문제가 불거졌다. 오래전부터 이곳에서는 모직물 산업이 발달해 왔는데, 문제는 원료인 양모(羊毛)를 대부분 영국에서 수입했다는 점이다. 그러다 보니 이곳 주민들은 형식상으로는 프랑스 국왕에게 속하나 실질적으로는 영국과 긴밀한 상업적 유대관계를 맺고 있었다. 양국 간 누적돼온 갈등에다 플랑드르 주민들의 어정쩡한 태도에 화가 난 프랑스가 1328년 기습적으로 플랑드르 지역을 점령했다. 이에 대항해 영국 왕 에드워드 3세가 양모 수출금지 조치를 발동하자 진퇴양난에 처한 플랑드르 주민들은 신민(臣民)의 의무보다는 경제적 이해를 중시한 채 에드워드 3세를 자신들의 영주로 인정하기에 이르렀다.
이처럼 갈등이 첨예하게 고조된 상황에서 터진 프랑스의 왕위계승 문제가 양국의 군사적 충돌에 불씨를 던졌다. 1328년 프랑스 카페 왕조의 샤를 4세가 후계자 없이 죽자 프랑스 귀족회의에서 발루아 왕조의 필리프 6세를 새로운 국왕으로 추대했다. 이에 대해 얼마 후 영국 왕 에드워드 3세가 강력히 반대하고 나섰다. 한발 더 나아가 그는 자신이 프랑스의 이전 왕 필리프 4세의 외손자이기에 합법적인 프랑스 왕위 계승자라고 주장했다. 갈등의 골이 깊어진 와중에 1337년 5월, 프랑스 왕 필리프 6세가 프랑스 내 영국 땅을 몰수하는 조치를 취하자 같은 해 가을 에드워드 3세가 도버해협을 건너 프랑스로 쳐들어왔다.
오를레앙 성을 공격하는 잔 다르크. 필자 제공 |
3단계로 나눌 수 있는 백년전쟁
백년전쟁은 크게 세 단계로 진행됐다. 우선 영국의 군사적 승리가 이어진 첫 단계(1337~1360)이다. 백년전쟁 전반기를 대표하는 크레시(1346) 및 푸아티에(1356) 전투에서 영국군은 대승을 거뒀다. 수적으로는 우세했으나 대부분 이탈리아 용병인 데다 믿었던 중장기병대마저 영국군의 신무기였던 장궁(長弓)의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무너졌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 농민반란까지 겹치면서 프랑스는 더 이상 전쟁을 지속하지 못하고 굴욕적인 브레타니 조약(1360)을 체결했다. 이에 따라 프랑스는 칼레 및 서남부의 대부분 영토를 영국에 내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애초부터 승자의 강요로 맺어진 조약인지라 그 효과는 길지 못했다. 양국 간의 불안한 평화가 조만간 깨어질 거란 조짐은 1364년 강력한 리더십을 갖춘 샤를 5세가 프랑스 국왕으로 등극하면서 짙어졌다. 즉위 후 그는 왕권을 강화해 국내 질서를 회복하고, 용병대장 출신의 유능한 인물을 군사령관으로 등용해 영국군에 필적하는 강력한 상비군을 육성하는 데 성공했다. 드디어 1372년 바다와 육지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시도된 프랑스군의 공격 앞에서 영국군은 제대로 된 대응을 할 수 없었다. 당시 영국은 흑사병의 여파로부터 아직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기에 대륙 원정군을 동원할 만한 여력이 없었다. 결과적으로 1380년 샤를 5세가 갑자기 죽었을 때, 프랑스 내 영국 왕실 영지는 보르도와 칼레 부근의 작은 영역으로 대폭 축소돼 있었다.
하지만 굴욕적 패배는 기억돼 언젠간 복수를 불러오는 법! 치열한 왕위계승 경쟁을 통해 권좌에 오른 영국의 헨리 5세는 즉위하자마자 프랑스와의 전쟁 준비를 선포했다. 야심만만한 성격에 탁월한 외교력까지 겸비한 헨리 5세는 독일 황제 및 당시 자국 왕실과 대립각을 세우고 있던 프랑스 부르고뉴 공작과 동맹을 맺었다. 국내외적으로 준비 작업을 끝낸 헨리 5세는 마침내 1414년 8월 대군을 이끌고 프랑스 원정을 감행했다. 1415년 10월 말 아쟁쿠르 전투에서 대승을 거둔 영국군은 이듬해에는 노르망디의 중심도시인 루앙마저 점령, 프랑스 중심부로 진격할 수 있는 교두보를 확보했다. 곧 영국군이 중북부 지역마저 장악하자 달리 방도가 없었던 프랑스는 1420년 5월 헨리 5세와 트루아 조약을 맺고, 그를 프랑스의 왕위를 이어받을 후계자로 인정하기에 이르렀다.
바로 여기에서 전쟁은 잔 다르크의 활약이 펼쳐지는 제3단계로 이어진다. 갑작스러운 영국의 국내 정세 변화가 프랑스인들의 저항심을 자극했다. 1422년 헨리 5세가 급서(急逝)하면서 불과 두 살도 안 된 왕세자가 헨리 6세로서 영국-프랑스 연합국의 왕위를 이어받았다. 왕권이 약화되면서 영국 정계에서 치열한 권력다툼이 다반사로 벌어졌다. 프랑스에 있는 자국 영지에 대한 통제력이 당연히 약화될 수밖에 없었다. 이 틈에 프랑스 남부의 영주들이 주도해 그곳에 피신해 있던 왕세자를 국왕으로 옹립하려고 모의했다. 이러한 정보를 입수한 영국군이 1428년 가을 프랑스 남부로 통하는 요충지인 오를레앙 성을 포위하고 공격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