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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역사

1492년 콜럼버스는 왜 서쪽으로 항해했을까?(1)

작성자파워맨|작성시간18.08.28|조회수1,219 목록 댓글 0


1492년 콜럼버스는 왜 서쪽으로 항해했을까?

동방항로 개척 나선 콜럼버스 “西로 가야 빠르다”



유럽인이 좋아한 동방 향신료

15세기 베네치아가 교역 독점하자

포르투갈, 대서양  남쪽 거쳐 인도로

 

해양 서적 독파한 콜럼버스

“중국은 5000㎞ 거리에 있다” 결론

스페인 이사벨 여왕의 지원 받아

배 세 척 끌고 역사적 항해 닻 올려

 

기사사진과 설명


콜럼버스의 초상화.


 

1491년 어느 날 이탈리아 북부지방 억양의 한 사나이가 스페인 남부 도시 그라나다 인근 군 지휘소에 나타났다. 그는 여러 힘든 관문을 극복하고 이사벨 여왕을 알현하기 위해 온 크리스토퍼 콜럼버스(Christopher Columbus·1451~1506)였다. 그날의 면담 직전에 그는 이미 포르투갈 궁정에서 거절당한 씁쓸한 경험을 갖고 있었다. 포르투갈 왕실이 국가적 사업으로 반세기 이전부터 야심 차게 추진해 오고 있는 인도 항로 개척에 찬물을 뿌리는 계획을 떠들고 다녔기 때문이다.

그는 동쪽이 아니라 서쪽으로 항해하면 아시아에 더 빨리 도달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렇다면 콜럼버스는 왜 서쪽으로 가고자 했을까? 이러한 콜럼버스를 이사벨 여왕은 왜 만나주었을까? 그리고 이러한 두 사람의 만남은 이후 유럽사 및 세계사에 어떠한 결과를 초래했을까? 이 글은 이에 대한 답을 구하려는 한 시도다.



콜럼버스와 그의 시대

콜럼버스가 활동한 유럽의 15세기는 커다란 변화의 시기였다. 유럽 대륙은 14세기 중엽 이래 지속된 흑사병의 여파에서 점차 벗어나면서 새로운 도약을 꿈꾸고 있었다. 이는 내부적으로는 이탈리아반도를 중심으로 시작된 르네상스로, 외부적으로는 이베리아반도의 포르투갈을 선두로 한 대양 항해로 표출됐다.

이처럼 15세기에 유럽인들이 역사의 물줄기를 지중해 서부 및 대서양 쪽으로 돌린 이유는 무엇일까? 1453년 이슬람 세력에 의한 콘스탄티노플 함락이라는 외적 충격이 가해지기 이전에 이미 근본적인 요인들이 대두해 왔다. 중세 말 유럽에서는 모로코의 지중해 연안에서 이뤄지고 있던 황금 교역의 중요성이 크게 높아졌다. 유럽인은 수 세기에 걸쳐서 무슬림 중간상인을 통해 아프리카의 황금을 거래해 왔다. 이들은 아프리카 서부의 니제르강 유역에서 채굴된 사금(砂金)을 낙타에 싣고 북아프리카 항구 도시로 운반했다. 그러면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던 이탈리아 상인들이 유럽산 모직물과 황금을 교환했다.

 

 





이 시기에 유럽에서는 채굴 가능한 은광의 고갈로 은(銀) 부족 현상이 매우 심각해졌다. 설상가상으로 향신료 수입 대금으로 다량의 은이 동방으로 유출됐다. 이제 통치자들은 은화의 대안으로 금화를 주조하기 시작했고, 원활한 유통망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다량의 금 공급이 절실했다. 이때 새로운 금 공급지로 부상한 곳이 바로 서부 아프리카 니제르강 주변의 말리였다.

그렇다면 왜 유럽인들은 동방의 향신료에 매료됐을까? 로마 시대 이래 유럽인들은 아시아의 향신료 입맛에 길들어 왔다. 서로마가 망하고 유럽이 혼돈에 빠지면서 향신료 교역은 한동안 쇠퇴했다. 이후 11세기경에 유럽이 점차 기력을 회복하면서 동방 향신료에 대한 수요가 되살아났다. 그러자 지리적으로 유리한 위치에 있던 이탈리아반도의 베네치아와 제노바가 수 세기에 걸쳐서 향신료 교역을 둘러싸고 치열한 경쟁을 벌였다.

13~14세기를 거치면서 점차 우위를 점하기 시작한 베네치아가 15세기에 이르러 동방 향신료 교역을 거의 독점했다. 교역로를 지키기 위해 베네치아는 무력도 불사했기에 다른 유럽 국가들은 지중해 무역에 감히 명함을 내밀 수 없었다. 한때 강성했던 몽골제국이 멸망한 터라 육로를 통한 교역도 불가능했다. 더구나 1453년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한 오스만제국은 그리스도교 유럽인들이 육로를 통해 아시아의 물산에 접근하는 것을 원천 봉쇄했다. 그나마 술탄으로부터 지중해 교역권을 허가받은 베네치아 상인의 활동 무대인 이집트 항구가 유일한 창구였다.

기사사진과 설명


각종 향신료.


 

 

이러한 상황에서 대서양 연안 국가 포르투갈이 맨 먼저 돌파구 탐색을 시도했다. 포르투갈의 선도 이면에는 ‘항해왕자’라는 별명을 가진 엔히크 왕자가 있었다. 그의 주도 아래 포르투갈은 지중해가 아닌 다른 곳에서 아시아 항로를 찾기 위해 대서양 남쪽을 탐험하기 시작했다. 1415년 이래 엔히크는 매년 아프리카로 탐험대를 보냈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 1460년 그가 세상을 떠났을 때 포르투갈 탐험대는 적도 인근까지 도달해 면직물과 대포를 팔고 황금과 노예를 사들일 수 있었다. 엔히크 사후에도 인도 항로 개척을 위한 포르투갈의 노력은 이어졌다. 드디어 당대 유럽인의 꿈이었던 ‘인도에 이르는 뱃길’을 찾아줄 한 인물이 나타났으니 그는 바로 바르톨로메우 디아스였다.

수천 년 동안 유럽의 선원들은 지중해와 북해 연안을 벗어나 망망대해로 항해하는 것을 극도로 꺼렸다. 영영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하거나 바다 끝 깊은 낭떠러지로 떨어질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이러한 편견을 무릅쓰고 디아스는 나침반과 해도(海圖)에 의지해 아프리카 해안을 따라 남쪽으로 6주 동안이나 배를 몰아 지도에도 없는 미지의 바다로 접어들었다. 이제 진정 목숨을 건 항해가 시작된 것이었다. 거친 바람, 성난 파도와 10여 일 이상 사투를 벌인 끝에 디아스와 세 척으로 편성된 그의 선단은 예기치 않게 아프리카 최남단에 도달할 수 있었다. 1488년 2월 초순 이곳에 상륙한 디아스는 포르투갈의 영토임을 표시하는 십자형 기념석을 세웠다. 이곳에는 ‘희망봉’이란 명칭이 붙여졌는데, 아마도 인도 항로 개척의 염원을 담았으리라 짐작된다.

그 때문일까? 디아스의 성과를 바탕으로 10년에 걸친 시도 끝에 마침내 1498년 바스코 다 가마(Vasco da Gama)가 인도 서남부의 캘리컷 항에 발을 들일 수 있었다. 이때 아프리카 동해안에서 인도양을 가로지르는 뱃길을 인도한 사람이 다 가마가 케냐의 밀린다 항구에서 고용한 아랍인 항해사였다는 사실은 분명 역사의 아이러니였다. 적국 백성의 도움으로 그토록 원하던 인도에 이르는 뱃길을 찾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후 포르투갈은 우월한 화약 무기를 앞세워 인도양의 이슬람 해군을 물리치고, 이어서 동남아시아 향신료 집산지였던 말라카를 점령했다. 그토록 염원한 동방 향신료 교역권을 장악한 것이었다.

이처럼 인도 항로 개척에 올인하고 있던 포르투갈을 경계의 눈으로 살핀 국가가 있었으니 바로 인접국 스페인이었다. 11세기 말부터 시작한 ‘국토회복운동’(이베리아반도를 지배하고 있던 이슬람 세력을 축출하는 과업)을 거의 마무리한 스페인이 본격적으로 동방항로 개척에 나섰고, 바로 이때 등장한 인물이 콜럼버스였다.

이탈리아 제노바 출신의 콜럼버스는 요즘 같으면 국제적 벤처사업가에 해당했다. 당대 최신의 해양 서적들을 독파한 그는 중국이 불과 5000㎞ 거리에 있다는 결론을 내리고, 대서양 서쪽으로 항해하면 더 빨리 아시아에 도달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곧 자신의 항해 프로젝트에 자금을 댈 투자자를 찾아 나섰다. 포르투갈의 주앙 2세 궁정을 거쳐서 마침내 그는 1491년 이사벨 여왕이 머물고 있던 그라나다 외곽에까지 나타난 것이었다. 처음에는 시큰둥한 반응을 보인 이사벨 여왕이 이듬해(1492)에 이슬람 세력의 마지막 보루 그라나다를 완전히 점령한 후 콜럼버스의 탐험 계획을 승인했다. 마침내 1492년 8월 3일, 콜럼버스는 여왕이 지원해준 세 척의 배를 이끌고 역사적인 항해에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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