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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역사

1492년 콜럼버스는 왜 서쪽으로 항해했을까?(2)

작성자파워맨|작성시간18.08.28|조회수1,102 목록 댓글 0


1492년 콜럼버스는 왜 서쪽으로 항해했을까?

세계 경제의 중심축 동양에서 서양으로 이동


두 달여 항해 끝 아메리카 도착

금은 등 다량의 물자 유럽 유입

산업혁명 인적·물적 기반 다져

아메리카는 수탈·전염병 공포

세계화 현상 원초적 토대 형성

 

 

기사사진과 설명


아메리카에 상륙한 콜럼버스. 필자 제공



결단의 동기와 그 결과

콜럼버스는 왜 뱃길을 통해 아시아에 가려고 했을까? 당시 유럽인들이 목숨을 담보하면서까지 대양 항해로 나아간 이유는 무엇일까? 한마디로, 포르투갈 왕자 엔히크처럼 ‘아시아에 이르는 뱃길’, 즉 인도 항로를 찾기 위함이었다. 그렇다면 왜 그토록 인도에 집착했을까?

다양한 이유가 있으나 가장 중요한 요인은 동방 물산, 무엇보다도 후추로 대표되는 향신료(香辛料)를 얻기 위함이었다. 왜 향신료일까? 당시 후추·계피·정향 등은 황금과 맞먹을 정도로 값비싼 물품이 됐기 때문이다. 원산지인 인도 남부로 가서 한 배 가득 싣고 올 수만 있다면, 곧바로 대박을 치는 ‘벤처 부자’가 될 수 있었다. 콜럼버스 역시 이러한 당대 유럽인의 열망을 표출한 인간 군상 중 한 명이었다.

그렇다면 왜 그는 동쪽이 아니라 서쪽으로 항해하고자 했을까? 동쪽 항로는 이미 포르투갈이 개척 완료 단계에 있었고, 서쪽으로 갈 경우 더 빨리 아시아에 도달할 수 있다는 계산을 얻었기 때문이다. 당시 유럽에는 아메리카 대륙은 물론 거대한 태평양도 알려지지 않은 상태였기에 그의 거리 추정에 문제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중세 중기 이래 유럽에서 동양 세계에 관한 관심은 점차 확대돼 왔다. 몽골제국이 개통한 실크로드를 통해 중국의 비단과 도자기, 그리고 인도 남부에서 채집된 향신료가 유럽까지 유통되면서 동양에 대한 기대감을 높여왔다. 1453년 오스만튀르크에 의한 콘스탄티노플 정복은 아시아에 대한 인식을 단순한 호기심에서 모험적인 실행으로 이끄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오스만제국이 소아시아를 장악하면서 동방 교역로에 빨간불이 켜졌던 것이다. 점령 초기에는 고율의 통행세를 매기더니 급기야 교역금지라는 철퇴가 내려졌다. 결과적으로 유럽으로 유입되는 향신료 물량이 대폭 감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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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형 범선.




이와 반대로 중세 말 이래 유럽 경제가 살아나면서 동방 물산에 대한 수요는 급증하기 시작했다. 당연히 그렇지 않아도 원래 고가(高價)였던 향신료 가격이 뜀박질했다. 절정기에는 무려 12번의 손바뀜을 거친 후 원산지 가격의 500배까지 폭등했다고 알려져 있다. 따라서 배로 아시아에 갈 수만 있다면, 부자가 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예나 지금이나 돈 앞에 초연한 사람이 어디에 있을까? 유럽 각지에서 모험가들이 이베리아반도로 몰려들었다. 그동안 지중해 교역의 혜택에서 비켜나 있던 포르투갈과 스페인이 새로운 흐름에 가장 적극적으로 대응했기 때문이다.

야심가들의 항해 의욕을 현실화할 수 있는 여건도 꾸준히 축적돼 왔다. 우선 대양 항해에 필요한 도구들―나침반, 아스트롤라베(천문관측의), 정밀한 해도 등―이 보편화됐고, 무엇보다도 조선술 발달로 대서양의 거친 파도와 거센 바람을 헤치고 항해할 수 있는 대형 범선의 건조가 가능해졌다. 일명 갤리언선(船)으로 통칭된 이 배는 지중해를 누비던 갤리선과 달리 여러 개의 대형 돛을 장착한 덕분에 어느 방향에서든지 바람의 힘을 이용할 수 있었다. 압권은 배 안에 장착된 고성능 대포였다. 수 세기 동안 인도양을 지배해온 이슬람 해군을 1509년 디우 전투에서 제압하는 데 기여한 일등공신도 바로 이들 화약 무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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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70년판 오르텔리우스의 세계지도.


 


그러나 아무리 여건이 무르익었다고 할지라도 예나 지금이나 이를 활용해 성과를 내는 것은 인간의 몫이었다. 바로 이때 의기투합한 두 인물이 이 글의 주인공 콜럼버스와 ‘상식을 벗어난’ 그의 탐험계획 후원자로 나선 이사벨 여왕이었다. 여왕은 왜 ‘떠돌이 모험가’였던 콜럼버스를 만나보기로 결심했을까? 디아스가 희망봉에 도달한 1488년 이후 포르투갈이 아시아로 가는 항로를 지배하리라는 점은 거의 기정사실화됐다. 전통적으로 포르투갈과 경쟁 관계에 있던 스페인이 당시 상황에서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은 정반대인 서쪽으로 항해해서 아시아를 찾아낼 정도로 대담한 인물을 후원하는 일이었다. 이베리아반도에서 이슬람 세력 축출이라는 숙원을 막 완수한 이사벨 여왕에게 콜럼버스의 계획은 나름의 설득력을 갖고 있었다. 카나리아 제도에서 서쪽으로 항해할 경우, 늦어도 한 달 이내에 아시아에 도달할 수 있다는 점을 그가 당대의 최신 해양 지식을 동원해 입증했기 때문이다.

드디어 콜럼버스는 1492년 8월 초 스페인 남부의 팔로스 항구를 떠나 서쪽으로 나아갔다. 바람만 잘 받으면 한 달 이내에 목적지에 당도할 수 있다고 믿은 선원들의 기대와 달리 항해는 고난의 연속이었다. 우선, 아무리 바닷길을 헤치고 나아가도 콜럼버스가 약속한 아시아 땅은 도대체 나타나질 않았다. 무려 두 달이 지났는데도 상황은 변함이 없었다. 아니, 더욱 악화돼 선상(船上) 반란이 일어날 지경이었다. 급기야 콜럼버스가 나서서 육지를 맨 먼저 발견하는 자에게 금화와 비단옷을 주겠다고 공언했다. 지성이면 감천인지 드디어 스페인을 떠난 지 두 달이 훌쩍 지난 10월 12일 새벽, 망을 보던 한 선원이 큰 소리로 “육지다! 신이시여! 육지다!”라고 외쳤다.

그날 먼동이 틀 무렵, 콜럼버스 일행은 울창한 야자나무가 백사장을 감싸고 있는 고요한 바닷가에 닻을 내렸다. 비단옷을 입은 중국인이 아니라 이후 ‘인디언’으로 불리는 반라(半裸)의 타이노족 원주민들이 이들을 맞이해줬다. 타이노족의 환대와 달리 콜럼버스 일행의 관심은 오로지 황금을 좇는 데 있었다. 금과 향신료 등 귀한 동양 물산을 찾아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힌 때문인지 그는 1차 항해에서의 귀환 이래 죽을 때까지 자신이 인도의 서쪽에 도착했다고 믿었다. 이로 인해 미지의 세계였던 그곳에 이름을 붙이는 영예는 콜럼버스보다 한 발짝 늦게 신대륙에 도착한 아메리고 베스푸치(1454~1512)에게 돌아갔다. 그의 이름을 따서 오늘날 이 대륙은 아메리카라고 불린다. 콜럼버스가 어렵사리 발견한 항로는 아시아로 가는 길이 아니라 그동안 유럽인들에게 알려지지 않았던 전혀 새로운 뱃길이었던 것이다.



사건의 역사적 영향

콜럼버스의 항해는 이후 역사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을까? 바야흐로 세계의 모양새가 드러나는 계기가 됐기에 이것이 초래한 결과는 심대했다. 우선 공간을 유럽으로 한정할 경우, 이베리아반도의 두 국가가 유럽 장거리 무역의 주도 세력으로 등장하면서 유럽 경제의 무게 중심이 지중해에서 대서양으로 옮겨졌다. 그 결과 장기간 지중해 교역망을 장악해온 이탈리아 도시국가의 영향력이 쇠퇴하고 대서양에 연한 도시들―예컨대, 리스본·암스테르담·런던 등―의 비중이 커졌다. 교역 물량이 엄청나게 늘어나고 더불어 품목도 다양해졌다. 특히 기존의 향신료 교역에다 새로 발견한 아메리카에서 유입된 다량의 금은(金銀) 덕분에 유럽은 번영을 누리기 시작했다. 향후 산업혁명에 필요한 인적·물적 기반을 다질 수 있었다.

하지만 이는 동전의 한 면에 불과했다. 동전의 다른 면에는 어둠의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졌다. 유럽인들의 번영이 저절로 이뤄진 것이 아니라 슬프게도 다른 대륙 사람들의 희생을 밑거름 삼아 달성된 성과라는 점이다. 콜럼버스의 상륙 이래 아메리카 대륙은 물적 수탈과 인적 압제로 큰 고통을 당했다. 무엇보다도 원주민들을 거의 멸절 수준으로 내몬 것은 유럽인들이 부지불식중 몸속에 지니고 들어온 전염 병균이었다. 유행성 감기와 특히 천연두에 대한 면역체계가 없던 원주민들은 속수무책으로 쓰러져 콜럼버스 도착 후 반세기도 안 돼 아메리카 인구는 가히 홀로코스트(대학살) 수준으로 떨어졌다. 비극은 또 다른 비극을 잉태했다. 급감한 원주민 노동력을 보충할 목적으로 아프리카 서부 해안지대에서 흑인들을 데려오는, 악명 높은 대서양 노예무역이 그 민낯을 드러냈다.

거시적 측면에서 볼 때, 1492년 콜럼버스의 항해는 진정한 세계사의 개막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이제 완벽하지는 않으나 세계는 그 윤곽을 드러냈고, 평등한 관계망은 아닐지라도 대륙 간 인적·물적 교류가 활발하게 이뤄지기 시작했다. 중국과 인도 등 동양으로 기울어져 있던 세계 경제의 축이 이제 서양 쪽으로 움직이는 중요한 계기가 됐다. 오늘날 ‘세계화’라고 불리는 현상의 원초적 토대가 콜럼버스의 항해를 통해 형성됐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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