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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역사

몽골 제국의 세계 정복 전쟁

작성자참으로|작성시간19.03.20|조회수1,079 목록 댓글 0


몽골 제국의 세계 정복 전쟁

    


 

몽골 울란바토르에 있는 칭기즈 칸 동상. 높이 40m로 현존하는 기마 동상 중 가장 높다.

 

칭기즈 칸은 1206년 몽골 고원을 통일한 직후 대외 원정을 시작했지만 영토를 확장하는 것이 목적은 아니었다. 1214년 금과 화친을 맺은 뒤 곧바로 철군했고, 호라즘 원정이 끝난 뒤에도 군대와 함께 몽골 초원으로 귀환했다. 그의 원정은 과거 흉노 이래 유목 국가들이 흔히 사용해왔던 전략, 즉 군사적 위협을 통한 화친의 체결과 그를 통한 물자의 안정적 확보를 노린 것이었다. 그러나 금 황실은 수도를 카이펑으로 옮겨 황허 이북을 포기했고, 호라즘은 국왕()의 도주와 피살로 나라가 멸망하고 말았다. 그 결과 칭기즈 칸은 북중국 일부와 중앙아시아를 지배하게 된 것이다.

    


 

1229년에 열린 오고타이의 대칸 즉위식. 14세기 초 그림이다. ©Wikipedia


반면 칭기즈 칸 사후 후계자들이 추진한 대외 원정은 단지 정치적 응징이나 군사적 위협이 아니라 정복과 영토적 지배가 목표였다. 오고타이(Ogedei, 窩闊台)가 즉위한 직후인 1231(당시 고종) 고려에 보낸 국서에 이 점이 잘 드러난다. 여기에는 몽골이 영원한 하늘(Tangri, 永天)의 가호를 받아 정복전을 수행하기 때문에 저항하는 사람과 국가는 멸망할 것이라는 위협적인 언사와 함께, 고려 국왕이 직접 찾아와 투항 의사를 표시하라는 요구가 들어 있었다. 후일 구유크나 몽케가 교황 인노켄티우스 4(Innocentius IV)와 프랑스 국왕 루이 9(Louis IX)에게 보낸 서한에서도 이와 동일한 위협과 요구가 발견된다.

    


 

오고타이 칸()과 구유크 칸() ©Wikipedia


칭기즈 칸의 사후 몽골의 세계정복전은 2대 대칸 오고타이가 즉위한 1229년부터 5대 쿠빌라이가 남송을 멸망시킨 1279년까지 반세기에 걸쳐서 부단히 추진되었다. 정복전의 양상은 한 국가를 멸망시키고 그에 인접한 다음 국가로 넘어가는 방식이 아니라, 여러 지역에 대한 동시다발적인 공략이었다는 점에서 특이했다. 오고타이는 금과 전쟁을 계속하는 한편, 바투(Batu, 拔都)와 구유크가 지휘하는 원정군을 서방으로 보내 우랄 산맥 이서의 불가르(Bulgar)와 킵차크(Kipchak)를 복속시키고 나아가 러시아와 유럽 각국을 경략케 했다. 동시에 서아시아로는 장군 초르마간을, 고려에는 사르탁(살리타)을 파견했다. 오고타이의 뒤를 이은 구유크(Guyuk, 貴由)는 직접 대군을 이끌고 서방 원정을 나섰지만 도중에 사망하고 말았다.

    


쿠빌라리칸(좌)과 몽케칸(우)


 

4대 대칸 몽케(Mongke, 夢哥)는 남송(南宋) 정복 전쟁을 계속하는 동시에 서아시아의 칼리프 정권과 '암살자(Assassin)'로 악명이 높았던 시아파(Shia) 세력 니자리파(Nizari)를 제거하기 위해 둘째 동생 훌라구(Hulagu, 旭烈兀)의 원정군을 파견했다. 훌라구는 1258년 아바스 왕조(Abbasid Caliphate)의 수도 바그다드(Bagdad)를 함락하고 시아파의 요새들을 파괴하는 데 성공했으나, 1260년 팔레스타인(Palestine)의 아인 잘루트(Ain Jalut)에서 이집트 맘루크 왕조의 맘루크(Mamluk) 군대에게 패하고 말았다(아인 잘루트 전투). 1259년 여름 몽케가 남송 원정 도중 쓰촨에서 급사하자 첫째 동생 쿠빌라이(Kublai, 忽必來)는 막내 아리크 부카(Ariq Boke, 阿里不哥)를 제압하고 대칸의 자리에 올랐다. 1273, 6년에 걸친 양양 공방전 끝에 양양(襄陽)과 번성(樊城)을 함락시킨 몽골군은 여문환 휘하의 남송 수군을 접수하고 양쯔강을 따라 내려가 마침내 1276년 수도 항저우(杭州)에 무혈입성했다.

    


훌라구()와 바그다드 공방전(가운데, ) ©Wikipedia


 


세계 정복 전쟁 이후 몽골 제국의 최대 영역(1279) ©Britanica


이로써 몽골의 세계 정복 전쟁은 끝났고 몽골은 역사상 가장 넓은 육상 제국이자 단일 제국이 되었다. 그 면적은 약 2400에 인구 11000만 명으로, 전체 육지 면적의 16%, 전 세계 인구의 4분의 1에 달했다. 인구 100만 명도 안 된 몽골인이 어떻게 이러한 성취를 이룰 수 있었을까? 무엇보다도 기동성이 뛰어난 기마 군대의 탁월함을 꼽을 수 있다. 평소의 목축과 수렵으로 말타기와 활 쏘기에 단련된 기마 군사들은 대규모 몰이사냥으로 길러진 조직적인 행동력 그리고 능숙한 작전 및 수행 능력이 겸비되어 있었다. 나아가 과거의 유목 군대와는 달리 엄격한 규율과 절대적인 충성으로 무장된 일사불란한 정예 군단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기마 군대만으로 강력한 성채를 장악할 수는 없었다. 정복민들의 기술과 인력과 재화를 최대한 활용하여 공성전과 수상전도 능숙하게 수행했다. 물론 이러한 군사적 강점 이외에도 칭기즈 칸이 세운 제국의 근간들, 즉 천호 조직, 친위병제, 법령 등은 중앙집권적 지배 체제를 확립하고 지배층의 내적인 결속을 가져왔다. 또한 그의 계승자들의 탁월한 리더십은 몽골인들이 수 세대에 걸쳐 추진한 세계 정복 전쟁을 성공으로 이끌게 한 원동력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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