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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역사

그리스와 페르시아 전쟁

작성자변강쇠|작성시간19.04.13|조회수2,763 목록 댓글 0


그리스와 페르시아 전쟁  

 



마라톤 전투를 끝으로 페르시아 다리우스 대왕의 제 1차 페르시아 전쟁은 끝나고 그 뒤를 이은 크세르크스 대왕은 그리스 정복이라는 아버지의 못다한 꿈을 이루기 위해서 전쟁준비에 박차를 가하였는데 이번에는 대규모의 병력과 물자를 동원하여 성이고 뭐고 엄청난 인해전술로 그리스를 파도처럼 휩쓸어 버리려는 생각을 하였다. 그는 원정공격루트로 헬레스폰트 해협에 함선으로 선교를 놓고 육군을 소아시아에서 그리스 반도 북서쪽 트라키아로 대규모로 안전하게 이동시키고 역시 복속된 속국 마케도니아 해안을 따라서 북쪽에서 해군을 반도 동쪽 해안을 따라 함께 아테네로 남하시키는 수륙합동작전을 펼치려고 하였다.

 

이같은 전략은 선대왕때 마도니우스 장군이 써먹다가 마치 바다의 신 포세이돈의 삼지창처럼 생긴 칼키디키 반도의 하나의 창날끝에 위치한 아토스 산 근처에서 심한 풍랑으로 함선을 모두 잃고 퇴각한 적이 있었다. 이같은 사실을 잘 알고 있었던 크세르세스 대왕은 아토스산 뒤편에 폭 100피트 길이 1마일의 운하(원정의 규모가 어느 정도인지 추측할 수 있다)를 파서 함선을 이동시키려고 계획하는 등 매우 주의깊고 세심한 신경을 썼다. , 세 번째 원정만큼은 지구의 지형을 바꿔서라도(어쩌면 삼지창을 훼손한 벌로 포세이돈의 노여움을 살지도 모르지만) 반드시 성공시키겠다는 그의 필생의 의지와 노력을 엿볼 수 있다. 또한 서쪽의 강력한 해상세력인 카르타고와 동맹을 맺어서 시실리 섬의 여러 코린트계 식민도시들을 위협하여 그리스의 또다른 부유한 상공업 폴리스인 코린트(스파르타의 물주)가 아테네와 연합하려는 것을 최대한 견제하려고 하였다.

 

마침내 마라톤 만의 패전후 10년뒤인 BC 480년에 사르디스에 집결해 있던 엄청난 군대(100만명이었다는 설도 있음)에게 원정을 떠나도록 명령을 내리고 약 1200척의 대규모 함대(주로 페니키아, 이집트의 함선으로 이루어진)를 펠로폰네소스 해협에 모이도록 한다. 객관적 수치로만 볼때 그리스의 운명은 이제 바람 앞에 촛불 같은 신세였다.

 



바람앞의 촛불신세인 아테네에게는 다행하게도 테미스토클레스라는 현명하고도 유능한 지도자가 존재하였다. 마라톤 전투의 영웅 밀티아데스의 찬란한 승리를 몹시 부러워했던 그는 초강대국 페르시아의 곧 있을지 모를 대규모 침공에 맞서서 조국 아테네를 구하고자하는 열망과 야심이 남달랐었다.

 

그는 어떤 문제에 직면해서 자신의 두뇌로 동시에 쏟아져 들어오는 외부의 복잡한 입력 상황들을 놀라울 정도로 순식간에 계산/분석하고 판단/결정하여 거의 실시간에 최적의 결과를 가져올 행동에 옮길 수 있는 경이적인 직관적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이것은 마치 방공 구축함의 이지스 체계가 반경 500km 이내의 200개의 목표물을 동시에 추적하고 이중 24개의 표적을 동시에 격파가 가능하게 만드는 레이더 시스템과 수퍼컴퓨터의 실시간 계산력에 비교될지도 모른다.

 

이와 같은 그의 능력은 사실 교육을 잘 받은데서 기인한다기보다 맥도널드의 설립자 레이 크락처럼 street-smart에서 오는것인지도 몰랐다. 그는 마라톤 전투의 행운이 계속 발생할 것이라고는 믿지 않았고 페르시아가 또다시 대규모 해군을 동원하여 그리스 반도 상륙작전을 감행해 온다면 페르시아군이 아티카에 상륙하기 전에 바다에서 이를 막아낼 작정이었다. 물론 페르시아 해군의 거의 1000여척에 달할지모를 압도적인 숫적 우세에 대항하여 탁트인 넓은 해상에서 정면대결을 벌인다는 것이 얼마나 무모한 생각인지 그는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스 반도 남동쪽에는 천연적으로 산재되어 있는 많은 섬들이 있었으며 이 섬들 뒤에 숨어서 페르시아의 함선들을 기습 공격하고 퇴각하는 게릴라 전술을 계속 구사하여 페르시아 함대를 혼란, 산개시키면 적의 침공을 단념하게까지는 못하더라도 최소한 페르시아의 예봉을 무디게(말들을 놀라게 해서 엄청난 배멀미로 맛이 가게 하면 기병대를 약화시킬수도 있을지 모른다)할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였다. 그리고 피라에우스의 천연 항구들을 요새화하여 적의 상륙을 최대한 저지하려고 하였다.

    


 

만약 마도니우스가 이전에 했던 것처럼 크세륵세스가 북쪽 침공루트를 이용, 대규모의 육군과 해군을 그리스 반도 북쪽에서 함께 남하시키면 잘난 스파르타군이 그리스의 산악 지형을 최대로 이용, 테르모필라이의 좁은 협로에서 적의 침공을 막아내지 못한다면 아테네 함락은 거의 확실해 보였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개미떼처럼 새까맣게 기어오르는 페르시아군의 인해전술을 아테네 성벽안에서 막아낼 방법(이 시대에는 핵폭탄이 없었다)은 도저히 찾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는 최악의 경우의 작전계획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만약 스파르타가 페르시아군의 남하를 저지하지 못하거나 배신을 때릴 경우에 모든 시민들을 아테네에서 살라미스 섬과 더 남쪽의 트로이젠으로 소개시키는 이른바 아테네 소개작전을 제 1단계로 펼치고 제 2단계로 스파르타와 다른 그리스 도시들을 설득하여 페르시아의 대규모 해군을 살라미스의 좁은 해역으로 유인시켜 해전(Operation Dried Sausage's Fury)을 벌일 생각이었다. 적의 숫자가 아무리 많더라도 문을 통해 한두명씩 낑겨서 공격해 올 수밖에 없는 적을 하나씩 망치로 내려치는 전략인 것이다. 만약 스파르타가 해전을 거부하면 아테네 시민들을 함선에 태우고 그리스 반도를 영원히 떠나 이탈리아 남부 어딘가로 건너가 새로운 시작을 하려는 제 3단계의 최후의 작전을 실행에 옮기려고 하였다. 물론 제 3단계 작전은 그를 제외한 극소수의 인물만이 알고있는 극비였을 것이다.

 

이와 같은 작전의 수행을 가능케하는 수단으로서 많은 함선의 건조가 필요했다. 아테네 해군은 당시 약 70척 정도를 보유하고 있었는데 테미스토클레스는 이를 200척까지 늘리려고 계획했다. 이에 필요한 재원으로서 원래 아테네 일반 시민들에게 나누어주기로 작정했던 새로이 발견된 은 광산에서 캐낸 은을 함선을 건조하는데 사용하려고 하였다. 오늘을 살아가기에 바쁜 상당수의 아테네 시민들 중에 이같은 정책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전혀 없었을 것이라고는 말하기 어려울(만약 동해상에서 엄청난 매장량의 유전이 발견되어 일본과 미국에게 팔아서 막대한 외화를 획득한다고 가정하면 국민에게 천만원씩 나누기 보다는 이지스 구축함 400척을 건조하자고 주장하면 욕먹을지도 모른다) 것이다. 그의 최대의 정치적 라이벌 아리스티데스는 해군확장 정책에 반대하였다.

    


 

북방의 야만족 침입으로부터 지금까지 그리스를 지켜온 것은 바로 팔랑크스 육군이지 볼품없는 배가 아니었다. 그가 보기에 검증되지 않은 해상 전략으로 아테네를 페르시아로부터 지켜낼수 있다는 주장은 너무나 진보적인 생각(그러면 아리스티데스는 보수적?)으로 위험스럽게까지 보였다. 물론 아리스티데스는 마라톤 전투의 승리에 고무(사실 페르시아군의 100% 위력이 발휘된 전투가 아니었다)되어 페르시아군을 육지에서 충분히 막아낼 수 있다고 생각하였을 것이다. 어쩌면 그는 의심쩍어 보이는 테미스토클레스의 진심(love you from the bottom of my heart)을 신뢰하지 못했는지도 모른다. 결국 도편추방제(ostracism)로 그가 정치적 힘을 잃자 테미스토클레스는 아테네 시민들을 설득하여 해군력 확장을 밀어붙일수 있게 된다.

 

그는 훨씬 우세한 수의 페르시아 해군에 대항하여 좀 더 크기가 크고 육중한 트라이림을 건조하려고 하였다. 당시의 해전은 서로 배를 가까이 근접하여 화살등을 쏘거나 적의 갑판위로 뛰어올라 백병전을 벌이는 형태가 주를 이루었는데 트라이림은 배의 앞에 뾰죽하고 튼튼한 충각을 달아서 적 함선의 측면이나 취약한 후면으로 전속력으로 돌진하여 구멍을 내서 침몰시키는 전술을 사용한다. 그리스인들은 한층 약아서 먼저 적함의 옆을 매우 가깝게 스쳐 지나가서 노를 모두 부러뜨리는 전술로 기동성을 잃게 만들고 엔진이 꺼진 적함과 서로 뒤얽히지 않고 안전하게 구멍내는 방법을 썼다고 한다.

 

이 같은 전술의 핵심은 바로 배의 속도와 기동성에 있었는데 노줄을 3층으로 만들어서 속도를 최대한 높이고 노예 대신에 실직한 아테네 자유민들을 노꾼으로 고용하여 봉급을 두둑하게 주고 노젓는 훈련(close pass, sharp turn, sprint, back off)을 강도높게 시켰다고 한다. 말하자면 생활터전을 잃은 다수의 아테네 시민들이 해군에 입대하여 배의 엔진(최대 10노트면 몇 마력짜리 엔진일까?)이 된 것이다. 아테네 입장에서는 전쟁준비 태세를 갖추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한 셈이다. 해군력 증강과 훈련, 적 함대를 일거에 괴멸시킬수도 있을 작전계획, 최악의 경우 모종의 작전 등. 이제 남은것은 스파르타를 위시한 다른 그리스 도시들과의 성공적인 동맹을 최대한 이끌어내 페르시아군과의 일전에 대비하는 것이었다.

 



스파르타와 코린트는 회의를 거듭하며 짱구를 굴렸다. 그러나 크세륵세스의 속셈이 아테네의 멸망뿐만이 아니라 펠로폰네소스 반도를 포함한 그리스의 완전 정복과 식민지화라는 것을 깨닫자 페르시아와의 전쟁을 결심한다. 마케도니아를 지나 페르시아군이 개떼처럼 밀려오자 그리스 연합군은 북쪽의 테살리아 근처에 약 1만명의 군대로 제 1방어선을 치려고 했다. 그러나 방어가 여의치 않자 남쪽으로 퇴각하여 해안을 낀 좁은 협로인 테르모필라이에서 7000명의 군대로 제 2방어선을 치고 페르시아군을 기다렸다. 사실 스파르타를 포함한 펠로폰네소스 동맹군은 펠로폰네소스 반도로 들어서는 좁은 길목인 코린트 지협(isthmus)에서 페르시아군을 막아내길 선호했다. 이것은 중부 그리스 도시들과 아테네가 페르시아군의 수중에 떨어짐을 의미하는 것이었으므로 아테네는 테르모필라이에서 방어선을 쳐야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스파르타군으로서는 함께 남하하는 페르시아 해군이 유보이아 섬 북쪽의 해협을 통과하여 육군에게 보급 물자를 공급하고 그리스군의 방어선 뒤편을 위협하는 사태를 막기위해서라도 아테네 해군이 필요했다. 마침내 스파르타의 팔랑크스와 페르시아의 백만대군은 좁은 협로에서 전투를 벌이기 시작했다. 페르시아군은 엄청난 양의 화살을 스파르타군에게 퍼부어 화살이 태양을 가려서 어두컴컴하게 만들 정도였다고 한다. 그리고 페르시아의 주력보 병인 불사의 군대가 스파르타의 밀집방진을 뚫기위해 계속 밀어 넣어졌다. 그러나 역시 스파르타군은 전투기계의 명성을 더럽히지 않았다.

 

그들은 레오니다스 왕의 지휘아래 페르시아의 파상공격을 이틀이나 막아냈다. 스파르타군의 팔랑크스 정면은 그리스 최강이라는 말은 사실이었던 것이다. 페르시아군은 이틀간의 파상공격에서 1만명이나 전사하는 손실을 입었으나 스파르타군의 손실은 미미 해 보였다. 페르시아군은 초조해졌고 다혈질에 성질이 급한 크세륵세스는 이성을 잃고 날뛰기 시작했다. 이때 페르시아에게는 천운으로 그리스에서 배신자가 나타난다. 그는 산허리를 돌아가서 테르모필라이를 우회하는 방어가 허술한 길을 페르시아군에게 가르쳐주고 막대한 반대급부를 요구한다.

    


 

페르시아군이 우회하여 스파르타군의 배후를 노리자 레오니다스 왕은 약 1000명의 군사를 남기고 나머지 군대를 후퇴하도록 명령한 뒤에 자신 포함 300명의 스파르타군이 최후까지 싸우다 장렬하게 전사한다. 이때 테베군은 전황이 자신들에게 불리하게 돌아가자 재빨리 항복하고 크세륵세스 대왕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약삭빠름을 보인다. 한편 스파르타인 유리비아데스 제독이 지휘하는(아테네인이 자신들의 해군제독이 되는 것을 꺼려한 동맹도시들 때문에 테미스토클레스가 임명) 그리스 연합함대(주로 아테네 해군으로 구성)는 아르테미시움에서 좁은 해협으로 낑겨 들어오려는 페르시아 해군을 효과적으로 막아내고 있었다.

 

사실 페르시아 함대는 여기까지 남하하면서 자신들을 쫓아다니는 폭풍우 때문에 미칠지경이었다. 이미 상당한 손실이 있었는데 아테네 해군의 맹렬한 저항을 받자 페르시아 함대는 공해상으로 철수한다. 크세륵세스는 함선 200척을 유보이아 섬 남단으로 돌아가서 그리스 해군에 대한 뒷치기 공격을 시도하는데 폭풍우가 이들을 삼켜버린다. 이것은 아마도 포세이돈의 삼지창을 훼손한데 따른 벌이거나 어쩌면 예언자 대니얼이 말한 대천사 게이브리얼이 인간들의 역사적인 전쟁에 개입하고 있다는 신호였는지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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