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메소포타미아 문명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 문명은 원초적, 자생적 문명이다. 기원전 4000년에서 기원전 3000년에 이르기까지 천 년의 기간은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수임(受任) 시기라고 볼 수 있다. 이 기간은 원시형의 문자와 세습 왕조(世襲王朝)가 나타나기 이전 단계라 할 것이다.
그 후 이 문명의 발생에 결정적 역할을 맡은 주역이 수메르 인이다. 이들의 번영기는 전기(3000?~2371 B.C.)와 부흥기(2113~1792 B.C.)로 나뉘며, 결국 이 기간 중에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두 가지 특성, 즉 지속성과 획일성이 형성된 것이다. 이 문명의 형태는 기원전 612년에 메디아(Media) 인이 아시리아(Assyria : 북부 메소포타미아)의 수도 니네베(Nineveh)와 고대 이란 인이 기원전 539년에 바빌론(Babylon)을 함락시킨 후에도 지속되었으며, 심지어 기원전 331년에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고대 이란의 이른바 페르시아 제국을 정복한 후에도 그 특성이 존속되었다.
메소포타미아는 이집트와는 달리 여러 인종 또는 어족(語族)의 침략을 끊임없이 받아 왔다. 그 가운데 이름이 알려진 인종이 수메르 인, 바빌론 인, 아시리아 인이며, 그 밖에도 구티 인(Gutians), 카사이트 인(Kassites), 칼데아 인(Chaldeans), 후르리 인(Hurrians) 및 엘람 인(Elamites)들이 있다. 이렇게 수많은 민족의 침입을 받아 온 메소포타미아 문명은 그 양상에 커다란 변화를 받아 때때로 중단된 것으로 보는 것이 당연하나, 침입자는 모두 이 문명의 기본 모형(模型)에 동화되었던 것이다.
이 말은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다는 뜻은 아니다. 여러 분야에서 수많은 수정이 있었으며, 그 영향도 중요하나,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획일성은 이 차이점을 극복하여 그대로 관철된 것이다. 이 획일성은 어떠한 변화와 개혁에도 저항하는 원천적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즉, 미래나 현재의 변화 발전보다 우주의 근원, 또는 시작의 명제(命題)에 집착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우주는 처음부터 이미 완성되어 있었다는 관념이다. 모든 중요한 사건은 태초에 이미 일어났으며, 그 후 계속해서 인류의 운명에 영향을 주고 있다는 생각에 사로잡히게 된 것이다.
이 관념에 따르면, 어떤 문제나 사건의 중요성은 그 끝에 있지 않고 시작에 있다는 것이다. 즉, 태초의 완벽성이다. 이 때문에 우주 창조의 신화가 메소포타미아 문명을 폭넓게 뒤덮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이 문명의 창조에 원동력이 된 수메르 인들의 뚜렷한 흔적이다. 물론, 후에 침입한 여러 인종이 저마다 수메르 인의 설형 문자를 배워 그들의 가르침을 교과서로 삼았기 때문에 수메르 문명의 원형(原型)에 동화되어 간 셈이다.
수메르 문화가 표준형이 된 결과, 그들의 서적과 종교는 그 뒤를 이은 다른 여러 종족이 메소포타미아 문명에 참여해도 그 표적은 영구히 남게 된 것이다. 수메르 인의 기원에 대하여 학자들의 견해는 일치되지 않으나, 그들이 메소포타미아의 원주민이 아닌 침입자이고, 그들의 언어는 인도·유럽 어족이나 셈 어족에도 속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이의가 없다. 그러나 수메르 인은 그들의 신화적 세계관에 따라 천지 창조의 순간부터 메소포타미아에 살고 있었다고 믿었다. 그들의 거주 지역을 수메르라고 불렀는데, 메소포타미아의 최남단으로 추정된다.
사르곤 1세(Sargon, 2350?~2295? B.C.)
기원전 2000년대에 수메르는 12개의 도시 국가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 가운데 우르(Ur), 라르사(Larsa), 라가시(Lagash), 이신(Isῑn), 니푸르(Nippur) 등이 유명하다. 이러한 도시 국가는 성(城)으로 둘러싸인 도성 구역(都城區域)과 그 주변 지역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도시 국가들은 지도권다툼 때문에 일시적으로 통합되기도 하였으나, 분리되어 있었던 기간이 더욱 길었다.
수메르 인은 그들 사이의 오랜 분쟁으로 힘이 약화되어 셈족인 아카드(Akkad) 인에게 정치력을 잃고, 기원전 2371년부터 기원전 2113년까지 이들의 통치를 받게 되었다. 아카드 인은 수메르의 북쪽과 서쪽에 살고 있던 유목민이었는데, 이들의 통치자 사르곤 1세(Sargon, 2350?~2295? B.C.)는 메소포타미아 전역을 통일하였고, 심지어 시리아와 소아시아 지역에까지 그 영역을 확장하였다. 그는 아카드를 수도로 삼고, 수메르 문명을 흡수, 보급하는 데 열을 올렸다. 또, 대왕은 서아시아 전역을 정복하여 그 통치자가 되었으므로 사계(四界)1)의 왕으로 자처하였다. 그 결과, 후대에 셈족의 이상적 통치자로 이름을 남겼다.
그의 손자인 나람 신(Naram Sin, 2270~2220 B.C. 경 재위)도 영역의 통일성을 유지하려 했으나, 이란 고원으로부터 온 반야만족인 구티 인의 침입을 받아 2150년경에 망하고, 수메르와 아카드는 약 100년간 그들의 지배를 받았다. 기원전 2113년부터 기원전 1792년까지의 기간에 수메르 인은 다시 일어나 옛날처럼 도시 국가를 건설하였다. 처음에는 라가시가 우세하였으나, 후에 우르의 제3왕조(2113~2006 B.C.)가 승리하였다.
한편, 셈계의 반유목민인 아무르 인〔Amur : 구약 성서의 아모리 인 (Amorites)〕이 메소포타미아로 침입하여 라르사, 바빌론, 이신을 점령하였고, 나중에 우르까지 함락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침략이 지나간 후에도 도시 국가 간의 분쟁은 약 250년간 계속되었다. 이 분쟁은 결국 바빌론의 통치자 함무라비(Hammurabi, 1780~1750 B.C.)에 의하여 종식되었고, 그의 통치 아래 수메르와 아카드는 다시 통일되었다.
함무라비 대왕은 공용어로 아카드 어의 방언(方言)인 바빌론 어를 채택하였으나, 수메르 어는 종교 의식에 계속 사용되었다. 바빌론은 메소포타미아에서 제일의 도시로 발전하였고, 수호신으로는 마르두크(Marduk)를 섬겼다. 그의 통치 아래에서 셈족과 수메르 인은 문화적으로 조화 있게 융합되었다. 그 후 계속하여 셈계 어족이 수메르와 아카드에서 지배적 지위에 진출하게 되어 수메르 인은 점차 동화되어 종족으로서의 존재는 사라지게 되었으나, 메소포타미아 문명은 그 모양과 내용에서 수메르적 색채를 계속 지니게 되었다.
수메르 인의 통치 시기에서 함무라비 대왕의 시기에 이르기까지 고대 메소포타미아 문명이 이룩한 공헌은 매우 두드러진다. 그 예는 도시 국가의 창조이다. 이 국가는 농업에 바탕을 둔 도시 문명이었고, 이념은 신이 왕을 통하여 다스리는 신성 국가(神聖國家) 개념의 확립이며, 경제 생활은 분업에 근거를 둔 복합체였다. 좀더 구체적으로 밝히면, 상인층의 형성과 화폐 경제의 발달, 법전의 제정, 관료 제도의 확립, 관개 시설 설치 기술과 농업 기술의 향상, 청동과 벽돌의 사용, 이차방정식과 같은 60진법에 의한 수학의 발달, 설형 문자의 발전, 여러 종류의 문헌 편찬, 학교 교육의 창안, 종교 제전의 발전 등이다.
홍수의 신, 니누르타(Ninurta)
고대 메소포타미아 문명은 신화적 믿음과 기능·기술의 업적을 조화시킨 데 바탕을 두고 있다. 현대 문명은 과학 기술이 주가 되고 믿음이 부수적 역할을 하는 데 비하여, 이 문명은 정반대였다. 도시 국가 사이의 전쟁은 각 도시가 섬기는 신의 전쟁으로 보았다. 또, 관개 기술의 발달도 홍수의 신인 니누르타(Ninurta)의 은총으로 본 것이다. 도시 국가 자체도 수메르 인은 신화적 천지 창조와 우주 질서의 개념에서 이해하였다. 즉, 신화적 관점에서는 도시 국가도 태초부터 완성된 형태로 존재한 것으로 보았고, 우주 질서의 관점에서는 지상의 모든 것은 하늘나라에 있는 원형(原型)의 복사판으로 생각하였다. 그 예로 티그리스·유프라테스 강도 하늘나라에 존재하고, 그것을 더 실제적인 것으로 여겼다. 역사는 만물이 그 근원으로 돌아가려는 점에 의의가 있다고 생각하였다. 따라서, 수메르 인은 도시 국가를 대우주의 일부분인 소우주로 여겨 우주의 진행 과정이 도시에서도 그대로 진행된다는 것이다.
지구라트(Ziggurat)
각 도시의 주신(主神)은 태초부터 그 도시를 할당받아 소유한 것으로 믿어, 그 중심부에 신전(神殿)을 거창하게 지어 놓고 지구라트(Ziggurat)라 불리는 높은 탑 모양의 신전도 세웠다. 구약 성서의 바벨탑은 바빌론의 지구라트를 말하며, 이것은 땅과 하늘을 연결하는 산을 상징한다는 견해에 학자들의 의견이 모아지고 있다. 신전은 도시 국가의 핵이며, 정신적 지주였다. 이 곳에 주신을 비롯하여 다른 여러 신을 승려가 모셨다. 신전에는 승려의 거실과 의식에 사용되는 제기, 제복(祭服), 악기 등의 보관소가 있었고, 성역 안에는 도서관, 상점, 광장 등도 있었다. 축제일에는 사람들이 이 광장에 모여 제물을 바치고 의식을 지냈다. 주신의 우상은 바윗돌이나 통나무를 조각하여 만들었다.
왕제(王制)는 도시 국가 내의 긴급 사태 때문에 발생한 것으로 보인다. 즉, 도시 국가 간의 전쟁, 야만 부족의 침입에 대한 공동 방어, 또는 홍수에 대한 공동 대처를 위하여 왕을 선출하게 된 것이 점차 제도로서 확립된 것이다. 그 결과, 신전과 더불어 왕은 부, 권력 및 영향력의 상징으로 발전하였다. 왕위는 신탁에 의한 것으로 믿어져, 왕 자신은 신은 아니지만 신을 대신한다고 보았기 때문에 일종의 승려 왕(Priest-King)이었다. 그러나 수메르 인의 도시 국가에서 왕(lugal)과 최고 승려(en)와의 관계는 명백하지 않고, 둘 다 신의 대표자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기원전 1300년경에 아시리아 인의 출현과 함께, 왕은 비록 신의 화신은 아니라 하더라도 최고 승려로서의 권위가 확립되었다.
메소포타미아의 신화, 마루둑
메소포타미아의 왕은 신의 절대 권한 가운데 일정한 부분을 넘겨받은 것으로 본다. 이것은 메소포타미아 인들의 우주관과 신관(神觀)을 보면 더욱 이해하기 쉽다. 우주의 만물은 모두 생명이 있는 것으로 보고, 생(生)과 사(死)의 구분이 없었다. 만물도 인간과 마찬가지로 오직 두 가지 요소, 의지와 본성을 가지고 있는데, 의지는 활동력, 본성은 그 운명을 의미하였다. 우주도 의지와 본성을 가진 인간과 유사한 것으로 보았다. 즉, 물활론적(物活論的), 범신론적(汎神論的) 우주관을 가지고 있었다.
각주
1 Four quarters of the earth. 구체적으로 동쪽은 엘람, 북쪽은 아시리아, 서쪽은 시리아와 팔레스타인, 남쪽으로는 수메르를 가리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