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사의 살아있는 현장, 이탈리아의 콘스탄티누스 개선문
밀비우스다리 전투 기념해 건설
로마 공회장의 개선문 중 으뜸
로마 통하는 상징적 관문으로
수많은 유럽 개선문의 표본돼
콘스탄티누스 개선문은 콘스탄티누스 1세의 312년 밀비우스 다리 전투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원로원이 315년 세웠다.
콘스탄티누스 1세의 밀비우스 다리 전투
3세기 로마제국은 235년부터 284년까지 49년 동안 무려 26명의 황제가 제위에 오른 혼돈의 시기다. 이 혼란을 종식한 인물은 발칸 반도 출신의 장군 디오클레티아누스(244~311)다. 그는 혼란에 빠진 제국을 안정적으로 다스리기 위해 로마제국을 크게 둘로 나눠 두 명의 정황제와 부황제를 두고 다스리는 4두 체제를 도입했다.
306년 로마제국에는 4명의 황제가 있었다. 갈레리우스와 세베루스, 그리고 막시미누스 다이아와 콘스탄티누스 1세였다. 하지만 이전 황제였던 막시미아누스의 아들 막센티우스가 반란을 일으켜 스스로를 황제로 선포했다. 막센티우스는 세베루스와 갈레리우스와 전쟁을 벌여 제압했다. 그와 콘스탄티누스 1세의 전쟁은 예정된 수순이었다.
312년 10월 28일 5만 명의 콘스탄티누스 1세 군대와 10만 명의 막센티우스 군대가 로마 북서쪽을 흐르는 테베레강의 밀비우스다리에서 전투를 벌였다. 기원전 206년 제2차 포에니 전쟁 중 처음 다리가 세워진 이래 밀비우스다리는 로마제국에서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거점이었다. 다리를 건너 남쪽으로 3㎞만 가면 로마의 중심에 다다르기 때문이다. 막센티우스 군은 밀비우스다리 전투에서 대패했다. 후퇴하는 병사들이 밀비우스다리 위로 몰렸고 막센티우스도 수많은 병사와 함께 강에 빠져 전사했다. 훗날 콘스탄티누스 대제라고 불리는 콘스탄티누스 1세는 전투 전날 보았던 십자가 환상 덕분에 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이를 계기로 313년 밀라노 칙령을 공포해 기독교를 로마 국교로 공인했으며 압류된 교회 재산을 돌려주면서 기독교에서는 성인으로 추앙받는 황제가 됐다.
작가 미상의 콘스탄티누스 1세의 꿈과 밀비우스 다리 전투를 표현한 그림
315년에 완공된 콘스탄티누스 개선문
원로원은 밀비우스다리 전투 승리를 기념해 콘스탄티누스 개선문을 3년의 공사 끝에 315년 세웠다. 구조는 셉티므 세베르 개선문을 참고했다. 높이 21m, 너비 25.9m, 두께 7.4m로 외장을 대리석으로 마감한 3개의 아치로 구성됐다. 아치와 함께 각각 4개의 코린트 양식(기원전 5~6세기 동안 그리스 코린트에서 발달한 건축양식)의 기둥이 사용됐다. 개선문을 장식한 부조들은 선대 황제들인 트라야누스와 하드리아누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시대 세워졌던 옛 기념물에서 장식 부분을 떼오거나 개조해 사용했다.
콘스탄티누스 1세를 황제로 만들어 개선문까지 짓게 한 배경이 된 밀비우스다리는 1849년 이탈리아 주세페 가리발디 장군에 의해 폭파되고 만다. 당시 사르데냐 왕국과 이탈리아 의용군이 오스트리아 제국과 이탈리아 보수주의 국가에 맞서 벌인 이탈리아 통일 전쟁 중 로마 공화국을 무너뜨리기 위해 급파된 프랑스군을 저지하기 위해서였다. 바로 다음 해인 1850년 교황 비오 9세에 의해 복원됐다.
콘스탄티누스 개선문(왼쪽)과 로마의 원형 경기장인 콜로세움의 모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