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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역사

십자군 전쟁은 성전(聖戰)이었을까?

작성자참으로|작성시간20.02.16|조회수549 목록 댓글 0


십자군 전쟁은 성전(聖戰)이었을까?

 

십자군 전쟁은 성전이었다?

 



십자군이라는 말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고귀한 목적이나 대의에 헌신하려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로 쓰이고 있다. 십자군 전쟁이 이슬람이라는 이교도를 물리치고 성지를 탈환한다는 목적을 띤 전쟁이었기에 위와 같은 의미로 인식된 것은  전혀 이상하지가 않게 느껴진다. 하지만 십자군 전쟁이 성전(聖戰)이었다는 것은 표면적으로만 그럴 뿐이다. 비록 목적달성은 하지 못했지만 도리어 유럽이 세력을 밖으로 확장하기 위해 일으킨 전쟁이었다.

 

십자군 전쟁의 배경 : 주변의 정세

 

1. 기독교와 이슬람

 

기독교도와 이슬람교도의 주된 전장은 서유럽이 아니라 비잔티움 제국의 영토 내였다. 그러나 11세기경부터 비잔티움 제국은 이슬람의 침입을 성공적으로 방어하여, 그 경계를 이슬람세계로까지 밀어낼 수 있었다.

 

십자군 원정은 기본적으로 기독교도와 이슬람세계의 투쟁이었으나, 실제로는 그 이상으로 기독교도들이 모든 비기독교도들에 대해서 벌인 정복전쟁과 같은 성격을 띠게 되었다. 예컨대 유대인 및 각종의 이단에 대한 투쟁이었다

 

2. 노르망디

 

노르망디는 프랑스의 서북부 일부 지방으로서 영주가 하급의 봉신들에게 강력한 통제권을 행사하는 특이한 봉건제도가 발달. 이들은 노르망디 지방을 넘어서 유럽 도처에서 영토와 재화를 획득하려고 추구하였다.

 

이 때 장자이외의 후손들이 남부 이탈리아를 정복, 1030-1040년대에 노르망디의 귀족들은 용병으로 지중해 지역에 진출, 비잔티움과 이탈리아 제도시의 싸움에 종군, 행운을 얻기도 하고, 잃기도 하였다.

 

 노르만의 귀족들은 십자군에 깊이 관여. 십자군 원정은 유럽 봉건귀족이 전리품을 추구하는 정치적 팽창의 한 양상이었다.

 

3. 비잔티움 제국

 

11세기에 거대한 관료제 국가로 변모하여 군사력이 약화된 상태에서  1071년 셀주크 투르크 족이 비잔티움 제국령 내로 침입하였다.1081년 알렉시우스 코메누스(Alexius Comenus)가 제국체제를 혁신, 발칸반도와 아나톨리아 지역으로 세력을 확장하였다.

 

알렉시우스는 서방의 교황에게 군사원조를 요청하였고, 예루살렘을 하나의 미끼로 이용하였다. 그러나 비잔티움 황제는 십자군 원정과 같은 형태의 군사적 행동을 원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 사실상 사후 귀결에 대한 깊은 사려가 없이 군사원조를 요청했던 것으로 추정한다비잔티움 제국은 스스로를 새로운 로마이면서 새로운 예루살렘으로 인식하여  오늘날과 다른 종교적 사고를 갖고 있었다

 

11세기 중엽 기독교 세계의 한 축인 비잔틴 제국은 거의 기력을 잃어버린 상태였다. 게다가 비잔틴 동쪽의 셀주크 투르크는 이슬람으로 개종한 후 급속히 팽창하여 1055년 바그다드를 점령하고 이슬람 세계의 실질적인 지배자가 되었다. 셀주크 투르크의 팽창에 위협을 느낀 비잔틴 제국은 먼저 공격을 감행했으나 도리어 패했을 뿐만 아니라 투르크 족이 소아시아 지역을 점령하는 것을 허용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위기 상황을 맞이하여 비잔틴의 알렉시우스 1세는 로마의 교황 우르바누스 2세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이 때 지어낸 말이 성지에서 기독교도에 대한 박해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요청을 받은 교황은 이를 기독교 유럽을 통일시키고, 그 속에서 교회와 교황의 권위를 세우는 기회로 이용하기로 결심했다. 외부의 적보다 내부를 단결시키기 좋은 것이 어디 있겠는가? 이 때 구실은 기독교도에 대한 박해를 막는다는 것이었으며, 명분은 성지 탈환이었다. 이렇게 구실과 명분을 마련한 우르바누스 2세는 109511월 프랑스의 클레르몽 종교 회의에서 십자군을 제창하였다. 더 나아가 그가 프랑스 출신이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몸소 프랑스 전역을 돌아다니면서 십자군을 선동했다. 그런데 십자군 제창은 예상치 못한 성공을 거두었다. 서유럽 전역에서 유명 무명의 기사들이 대거 몰려들었고, 일반 농민들도 적극 호응했던 것이다.

 

아마 농민들은 순수한 신앙심에서 십자군에 호응했을 것이다. 하지만 기사들은 그렇다고 볼 수 없다. 그들은 주로 상속받을 토지와 재산이 없는 봉건 귀족의 차남 이하의 기사들이었다. 이들에게 십자군은 새로운 기회였던 것이다. 싸우는 것 이외는 할 줄 아는 것이 없는 이들에게 십자군 전쟁은 이교도 이슬람과 마음껏 싸울 수 있는 기회였고, 막대한 전리품도 눈앞에서 어른거렸을 것이다. 더구나 성지를 탈환하면 땅도 생기지 않겠는가?



십자군 이동경로

  

1096년 가을 일차로 구성된 십자군을 필두로 하여 약 200년간 여덟 차례나 십자군 원정이 이루어졌다. 하지만 성지 탈환이라는 명목상의 목적이 달성된 것은 1차 십자군 원정 때뿐이었고, 나머지 원정은 십자군에 맞서는 이슬람과 일진일퇴만을 거듭한 것이었다.

 

이슬람 세계가 미처 대응하지 못하는 사이에 이루어진 1차 원정에서 십자군은 유럽을 떠난지 3년째 되는 1099년 여름, 예루살렘 입성에 성공했다. 이들은 6주간 계속된 전투에서 피비린내 나는 학살을 자행했다. 십자군에 참가했던 어느 프랑스 성직자는 예루살렘의 큰 거리나 광장에는 사람의 머리와 팔다리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십자군 병사나 기사들은 시체를 아랑곳하지 않고 전진했다. 신전이나 벽은 말할 것도 없고 기사들의 말고삐까지 피로 물들었다. 그러나 이제까지 오랫동안 성지 순례를 방해했던 사람들로 더럽혀졌던 이곳이 그들의 피로 씻겨 져야 한다는 신의 심판은 정당한 것일 뿐만 아니라 찬양할 만한 것이다라고 쓰고 있다. 십자군의 잔혹한 학살을 잘 드러내면서도 이 전쟁은 악에 대한 신의 심판으로 규정하면서 학살을 정당화하고 있다. 과연 십자군다운 말이다.

 

1차 십자군 원정으로 성지예루살렘뿐만 아니라 많은 영토를 빼앗긴 이슬람 세계는 전열을 정비하고 반격에 나서 1187년 예루살렘을 되찾았다. 이에 유럽은 여러 차례 십자군 운동을 일으키지만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지는 못했다. 더구나 이 나머지 원정은 가는 곳마다 약탈을 일삼는 등 탈선행위로 얼룩졌다.

 

그 가운데 가장 추악한 것은 4차 십자군이었다. 교황 이노켄티우스 3세의 요구로 소집된 이들은 베네치아 상인들에게 병력 수송과 식량 공급을 의뢰했지만, 그 비용을 감당할 길이 없었다. 그러자 베네치아 상인들은 얼마 전 기독교 국가인 헝가리에 의해 점령된 자라(Zara)시를 점령해 달라고 했다. 그들은 이를 통해 지중해 동부 지역의 교역권을 독점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십자군은 성지를 탈환하러 가기에 앞서 자라 시를 점령하고 엄청난 약탈을 자행했다. 그리고 여기에 그치지 않고, 때마침 제위 다툼을 벌이고 있던 비잔틴 제국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플까지 점령하여 라틴 제국을 세웠다. 물론 라틴 제국은 50년도 못가 주저앉고 다시금 비잔틴 제국이 회복되었지만, 4차 십자군은 십자군 원정의 가장 추악한 면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더 경악할 만한 일은 1212년에 조직된 소년 십자군의 경우였다. 신의 계시를 받았다는 프랑스의 양치기 소년을 따르는 수천 명의 소년들로 이루어진 이 십자군은 마르세이유에서 일곱 척의 배에 나누어 타고 원정을 떠났다. 그런데 이들은 수송한 선주는 이들을 몽땅 알렉산드리아에서 노예로 팔아버렸다.




 

이렇게 십자군 전쟁은 명분만 그럴싸했을 뿐 학살과 약탈에 더해 자신의 명분마저 뒤집은 추악한 전쟁의 전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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